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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자연 환경 신유고 연방의 전체 면적은 10만 2173km2이며 국토의 절반이 산과 고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1년에 유고 연방이 분열되자 대부분의 해변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화국에 넘어갔기 때문에 유고 연방 공화국에는 겨우 150km에 이르는 몬테네그로 해변만 남게 되었다. 코토르(Kotor) 만은 피요르드(높은 절벽 사이에 깊숙이 들어간 협만)이며 몬테네그로의 두르미토르(Durmitor) 국립 공원은 구유고 연방 가운데 가장 큰 협곡이다. 울치니(Ulcinj)와 알바니아 사이의 지역은 아드리아 해 동부에서 가장 긴 해변이기도 하다. II. 역사 일리리아(Illyria)인이 처음으로 이 지역에 정착한 이래 그리스가 아드리아 해 연안에 무역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뫼시아 수페리오르(Moesia Superior:현재 세르비아 지역)의 로마 통치는 B.C.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다뉴브 강 유역의 신기두눔(Singidunum:베오그라드)까지 미쳤다. 395년에 로마 제국이 분할되자 현재의 세르비아 공화국 지역은 비잔틴 제국에 넘어갔고 크로아티아 공화국 지역은 서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원래 유고슬라비아(Jugoslavija)는 `남슬라브족의 나라'라는 뜻인데 6세기 중엽 슬라브 민족들(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의 여러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왔다. 이들 가운데 유고의 북부 지방(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역)에 정착한 남슬라브족은 프랑크 왕국(독일과 프랑스의 전신)의 지배하에 들어가 카톨릭 문화권에 속하게 되었고, 남동부 지방에 위치한 세르비아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동방 교회를 받아들였다. 879년에 세르비아인은 키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에 의해 정교로 개종하였으며, 969년에는 비잔틴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가를 건설하였다. 11세기에 비잔틴 제국이 다시 권위를 되찾기도 하였으나 독립 국가의 면모를 갖춘 세르비아 왕국이 1217년 다시 탄생하였다. 슈테판 두샨(Stefan Du午an:1346~1355)의 통치 시기에는 세르비아가 현재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북부 지역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수많은 프레스코 장식을 한 정교 사원들이 세르비아의 `황금 시대' 기간 동안에 세워졌다. 그러나 슈테판 두샨이 죽은 뒤 세르비아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 각국에서 민족주의 정신이 고취되고 터키세력이 약화되자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들을 범슬라브주의 민족 운동으로 통합해 대(大)세르비아 제국의 건설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인종과 종교적으로 반세르비아적이며 동방 정책을 추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고 말았다.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자 발칸 반도에서는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고, 이 때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후원하고 있었다. 1차 발칸 전쟁(1912)에서 세르비아, 그리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의 해방을 위해 터키에 대항하였으며, 2차 발칸 전쟁(1913) 때는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연합해 마케도니아 영토를 요구하는 불가리아와 싸웠다. 이 때 세르비아는 서구 열강들의 후원으로 알바니아로부터 코소보의 통제권을 얻게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 출신의 한 청년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했는데, 이 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와 프랑스는 세르비아를 후원하고 나섰다. 1차 세계 대전의 종결 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이보디나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와 연합했고, 세르비아 왕의 주도하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 후 1929년에 그 이름은 유고슬라비아로 바뀌게 되었다. 1921년의 비도브단(Vidovdan) 헌법은 세르비아에 의해 주도되는 중앙 정부 창설을 유도하였는데, 이에 대해 크로아티아인과 다른 소수 민족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면서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세르비아 출신의 왕이 개인 독재를 선언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1934년, 마케도니아의 민족주의자에게 알렉산더 왕이 암살당하자 섭정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독재 정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부패는 더욱 만연했고, 정부는 나치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는 독일로부터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와 테살로니키(Thessaloniki)를 약속받은 후 파시스트 협정인 삼국 동맹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대중들은 반대 시위를 펼쳤으며 국내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군부가 파시스트 옹호 정권을 전복시키고 피터 2세가 왕으로 임명되자 유고슬라비아는 삼국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즉각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침공을 명령했고,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에 분할되고 말았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이끄는 공산당은 무장 봉기를 선언하였으며, 거기에는 또한 군국주의자 레지스탕스 그룹인 체트니크(匘etnik)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티토의 빨치산보다 적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943년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을 위한 반파시스트 위원회(AVNOJ)'는 앞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유고슬라비아를 이끌어 나갈 초석을 마련해 주었다. 빨치산 대원들은 2차 세계 대전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 군대에 저항하느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세르비아의 작가인 코쵸비치(Ko匸ovi )는 이 때에 약 48만 7000명의 세르비아인, 20만 7000명의 크로아티아인, 8만 6000명의 무슬림, 6만 명의 유태인, 5만 명의 몬테네그로인, 6000명의 알바니아인이 전쟁에서 사망했다고 말한다. 1945년에 공산당은 국민 의회의 통제권을 장악했으며, 11월에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세르비아의 실제 국토 면적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가 연방의 일원으로 포함되자 크게 감소되었다. 티토의 슬로건인 `형제애와 단결(bratstva i jedinstva)' 아래서 각 민족들의 민족주의 경향은 수그러졌다. 티토는 1948년 소련의 스탈린과 절교한 후 그 보상으로써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20억 달러의 경제적·군사적인 원조를 받았다. 이러한 보조금과 미국, 서유럽의 후원은 유고의 개혁 노선을 실행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오늘날의 경제에도 기여하였다. 소련과의 단절 후 유고슬라비아는 연방 체제와 자주 관리 제도, 개인의 자유, 비동맹 외교 노선에 근거를 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 불리는 독자 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951년 시작된 지방 분권화는 국가의 기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나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았으며, 비동맹 운동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각 공화국 사이에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코소보는 연방 내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티토는 당 개혁론자들의 숙청과 크로아티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레닌주의로의 복귀'로 응수하였다. 재능 있는 지도부 인사들이 사라짐에 따라 유고슬라비아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체기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의 헌법 개정으로 연방 정부는 외교 정책, 국방, 무역, 경제 및 인권 문제에 대해 6개 공화국(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과 2개의 세르비아 자치주(코소보와 보이보디나)에 부여된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하였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하자 연방 대통령직은 6개 공화국과 2개의 자치주 그리고 국민 의회에 의해 4년마다 선출된 9명의 임원이 통치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유고슬라비아의 뿌리깊은 경제 문제와 공화국간의 반목을 해결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1980년대 말 동유럽에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유고슬라비아도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자치권을 폐기해 버렸으며 연방군을 파견시켜 수십 명의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밀로셰비치(Millo午evi ) 대통령의 `대세르비아'에 대한 환상은 1990년 봄 비(非)공산 계열 공화국 정부를 탄생시켰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공화국 스스로 부(富)의 대부분을 보유할 수 있는 느슨한 형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91년 9월에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1992년 3월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에 12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파니치 수상과 전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셰비치와의 대결은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재당선으로 끝났다. 그러나 신 유고 연방이 결성됨으로써 사실상 유고 연방은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속해서 휴전 협정이 파기되면서 내전은 이슬람계,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세 민족이 혼재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번지게 되었다. 그후 계속 평화 협상이 추진되어 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다가 서방측은 내전의 궁극적인 책임이 구유고 연방의 세르비아계에 있다고 판단하여 1992년 5월 이래 신유고 연방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였고, 1995년 5월 이후에는 미군 주도하의 NATO군이 대대적인 세르비아계 거점 지역들을 공격하여 내전 당사자들로부터 평화 협정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휴전 협정과 평화 모색이 영구적으로 정착된다고 보기에는 많은 난점을 지니고 있다. III. 정치 국가 형태는 민주 공화국을 지향하고 있으며, 입법부는 인민 의원(135석), 공화국 의원(각 공화국 20석, 합계 40석)으로 구성된 의회(Skup午tina)가 담당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은 1992년 12월에 재당선된 밀로셰비치이며 수상직은 바소비치(S. Vasovic)가 맡고 있다. 한편 1996년 11월에 있었던 연방 의회 선거 결과를 보면, 세르비아에서는 세르비아 사회당(SPS), 유고 좌파 연합(JUL), 신민주당(NM) 등의 좌파 연합이 45.7%의 득표율을 확보함으로써 세르비아에 배정되어 있는 연방 의회 의석 118석 중 64석을 차지하였다. 몬테네그로에서는 밀로셰비치 현 대통령과 연합하고 있는 몬테네그로 사회 민주당(DPS)이 연방 의회 선거뿐만 아니라 공화국 의회 선거에서도 5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 지방 의회 선거에서는 야당이 상당히 선전하자 세르비아 정부가 이를 무효화했으며 이로 인해 베오그라드에서는 18일 동안 대규모 시위 사태가 벌어져 왔다. 결과적으로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이 국내외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정부의 지방 선거 무효화 선언에 항의, 시위를 주도해 온 야당에 일단 승리를 안겨 주게 되었다. IV. 경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농업 수준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화국과 비교할 때 낙후되어 있다. 1989년 2000%에 달하는 고인플레로 인해 자주 관리 제도는 효용성을 전혀 발휘할 수 없었고, 개혁가들은 결국 사유 재산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0년 초 정부는 베오그라드 조폐국의 화폐 발행 금지와 임금 동결로 인플레를 잡으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이에 더해 유고 내전의 발발과 UN(국제 연합)의 경제 제재 조치는 경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구유고 연방의 5개 공화국과의 무역은 단절되었으며, 한 달에 250%씩 뛰는 인플레, 기업 파산, 천문학적인 군사비 지출로 경제는 대재난을 맞이하였다. 1993년에 수입은 10분의 1로 감소하였고, 공업 생산량은 전년과 대비하여 40%가 떨어졌다. 또한 공장 노동자의 60%가 실업자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1995년 12월 보스니아 평화 협정의 조인으로 인한 평화 무드 조성과 사유화의 추진 및 외국인 투자 관련 규정의 개정 등을 계기로 최근 제조업을 중심으로 외국인 직접 투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유고 연방은 향후 점진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V. 문화와 생활상 1. 민족 1100만의 인구 가운데 세르비아인이 62.3%, 알바니아인이 16.6%, 몬테네그로인이 5%, 헝가리인이 3.3%, 슬라브계 무슬림이 3.1%를 차지하고 있다. 이 외의 소수 민족으로는 크로아티아인, 집시, 슬로바키아인, 마케도니아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우크라이나인 등이 있다. 몬테네그로인은 공식적으로는 세르비아인으로 간주되고 있다. 1991년 기준으로 17만 명에 이르는 집시들이 유고에 살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10만 명이 코소보에 거주하고 있다. 또한 50만 명에 이르는 전쟁 피난민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6만 명은 몬테네그로에 머물고 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인구 가운데서 4분의 1이 헝가리인이며 코소보 자치주의 인구 가운데 90%가 알바니아인이다. 현재 유고 전역에는 약 200만 명의 알바니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알바니아 국가의 총인구를 320만 명이라 볼 때 매우 큰 수의 이민족 집단이라 할 수 있다. 2. 종교와 주요 도시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은 대부분 정교를 신봉하고 있다. 유고의 가장 큰 도시는 수도인 베오그라드(150만 명)이며 그 외에 노비사드(Novi Sad:25만 명), 니쉬(Ni午:23만 명), 프리쉬티나(Pri午stina:21만 명), 수보티카(Subotica:16만 명) 등이 있다. 3. 언어 세르비아어가 신유고 연방의 공용어지만 코소보에서는 인종 구성상의 특징으로 알바니아어가 주로 쓰인다.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거의 같은 언어지만 세르비아어는 키릴 문자로 표기하고 크로아티아어는 라틴 문자로 쓴다. 한편 평범한 유고인들은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가장 배우고 싶어한다. 4. 춤 세르비아의 활기가 넘치는 춤은 이웃 불가리아의 춤과 비슷하다. 한편 콜로(Kolo)라는 원무(圓舞)는 사(絲) 또는 수(繡)를 의미하며 세르비아의 대표적인 춤에 해당한다. 콜로는 원형이 되어 좌우로 발을 엇가르며 몸을 뒤 아래로, 특유의 굴신으로 섬세한 변화를 주며 추는 춤이다. 이 춤은 여러 형태로 변화하여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등 유고 전역에 보급되어 있다. 또한 세르비아 동부 지역에서는 서로 허리띠를 잡고 추는 남성들의 쇼프스코와 명랑한 발라키아가 있으며 그 밖에도 장화의 방울을 울리며 추는 분제프카 등이 있다. 5. 음악 세르비아의 민속 음악 연주자들은 주로 카라바(caraba:작은 백파이프), 가줴(gadje:큰 백파이프), 프룰라(frula:작은 플루트), 두둑(duduk:큰 플루트)과 바이올린을 사용한다. 가줴는 스코틀랜드의 양 가죽 백파이프와는 달리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다. 코소보 자치주의 알바니아인들의 음악에는 5세기 동안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염소 가죽으로 만든 북 소리에 가락을 실어 주는 조르나(zorna:플루트)의 흐느끼는 듯한 소리를 들으면 터키 지배의 영향을 쉽게 알 수 있다. 6. 음식 신유고 연방에서 가장 저렴한 아침식사는 치즈(sir) 또는 고기(meso)로 만든 파이 즉 부렉(burek)이다. 음식 가격은 해변가보다 내륙 지방이 싼 편이며 고기 요리의 가격은 터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일수록 더 저렴하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특식은 알라스카 쵸르바(alaska 匸orba:매운 민물 고기 스튜)이며 세르비아에는 체바프취치( evap匸i i:다진 고기를 양념하여 동글납작하게 만든 요리), 플례스카비차(pljeskavica:양념을 넣은 큰 햄버거 스테이크), 라즈니치(raznji i:돼지고기나 송아지고기 등을 간 양파나 고추로 양념하고 꼬챙이에 끼워 구운 요리) 등이 있으며 다른 대중 음식으로는 무사카(musaka:다진 고기와 가지, 토마토가 나옴), 사르마(sarma:다진 고기와 쌀을 채운 양배추), 카파마(kapama:스튜 요리를 한 양고기와 양파, 시금치가 요구르트와 함께 나옴), 푼예나 티크비카(punjena tikvica:다진 고기와 쌀을 채운 양배추 요리) 등이 있다. 7. 축제 베오그라드에서는 영화 축제(2월), 국제 연극 축제(9월 중순), 고전 음악 축제(10월), 재즈 축제(11월)가 열리며, 노비사드에서는 농업 품평회가 5월 중순에 열리고, 부드바(Budva)에서는 7~8월 사이에 여름 축제가 개최된다. 8. 관광지 베오그라드는 신유고 연방의 수도이며 `흰 성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축제가 많이 열려 연극인, 영화인, 그리고 음악가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볼 만한 곳은 테라지예 광장(Trg Terazije), 국립 박물관(Narodni Muzej), 프레스코화 갤러리(Gallerija freska), 인민 혁명 및 유고슬라비아 국민 박물관(Muzej Revolucije naroda i narodnosti Jugoslavije), 티토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티토 기념 센터, 빨간 벽돌 건물의 성 마르코 교회(Crkva svetog Marko), 세르비아 대성당(Saborna Crkva), 국립 극장(Narodno pozori午te), 알라바(Alava) 산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