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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 하디로 말미암은 원산 회개운동 *
1903년 원산 성령강림은 어떻게 일어나게 됐나
구한말 기독교 배경
구한말(1900~1910) 우리나라의 정국은 복잡다단하고 험악했으나, 기독교는 그 가운데 조용한 내적 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먼저 교회는 성서 번역작업을 계속하는 한편으로 찬송가 편찬, 예배의식 제정 등 기본사업에 열중했다. 1900년에는 3단계 작업과정을 거친 순수 한글신학성서를 완역 출간했으며, 1892년에는 아펜젤러가 악보없는 찬송가를 번역해 출간했다.
또 문서사업을 위해 1895년 대영성서공회는 한국 지부를 공식 개설했고, 이전 1890년에는 조선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 전신)이 창설되 '성교섭리' '인가귀도' '그리스도 문답' 게일의 '천로역정' 헐버트의 '사민필지' 등이 번역되 널리 읽혀졌다.
초창기 신학교육을 이끈 것은 감리교회였으며, 1896년부터는 '신학회'를 조직해 서울과 인천, 평양 등 사경회에서 신학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0년 하디(OR.A.Hardie) 최병현 등이 '신학월보'를 펴내기도 했다.
또 헐버트(H.B.Hulbert), 질레트(L Gillett) 등은 1903년 10월 28일 황성기독교 청년회를 창설했다. 이사로는 김필수 여병현이었다. 1904년 3월 12일 옥고를 치르고 있던 이상재 김정식 등 독립협회 관계자들이 석방되 연못골 교회(오늘날 연동교회)에 입교하는 동시에 청년회에 집단가입 했으며, 평신도 운동으로서 독립협회운동은 황성기독교 청년회로 맥이 이어져 기독교적인 인권과 민권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권민과 서민들에게만 보급되던 복음이 지식인과 상류층에 깊이 뿌리 박히기 시작했다.
* 1907년 원산 부흥운동 *
한국초대 선교사들은 대부분 ‘학생외지선교단’의 영향을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YMCA에서 파송받은 게일(J.S.Gale)은 직접 무디가 주재했던 마운트 허면 학생하령회에 참석한 사람이며, 그의 동생 하디(Hardie 1865~1949) 역시 그런 분위기 가운데 성장해 1890년 9월에 내한, 처음에는 선배 게일과 같이 부산에 있다가 서울을 거쳐 원산에 갔다. 그는 그곳에서 1898년부터 남감리교 선교사로 교적을 옮겨 의료사업에 종사했다.
그는 1899년 부터는 원산과 강원도 통천지방 개척선교사가 되어 3년간 전도했으나 사사건건 실패했고, 이런 실패와 좌절감이 새로운 신앙체험의 계기가 되어 1903년 하디는 원산 성령강림 운동의 제일인자가 된다.
제2의 인물도 캐나다 선교사로, 1901년 입국한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 립(A.F.Robb, 1872~1935)이다. 그는 원산을 포함한 함경북도 전역과 간도지방을 캐나다 선교구역으로 배정받고 원산에 정착, 창전예배당(후 광석동교회) 교우들과 함께 기도에 힘썼다. 제3의 인물 역시 캐나다 선교사인 펜워크(Malcolm C. Fenwick 1861~1935)로, 그 역시 ‘학생외지 선교자원단’ 운동의 영향으로 1889년 내한, 처음에는 독립선교사로 활동했으나 침례교 소속 선교사가 되어 1899년부터는 원산에 정착해 자립전도에 힘썼다.
제4의 인물도 캐나다 출신 여선교사인 매컬리(Louise H.McCully 또는 이부인 1864~1945)로 미혼인 그녀는 본디 중국 선교사로 갔으나 1900년 의화단의 난을 피해 한국에 입국, 한 해 전에 입국한 푸트(W.R.Foote) 그리어슨(Robert Grierson) 맥레(Duncan M.Macrae) 등 캐나다 선교회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3인과 합류했다.
원산에는 미국 남감리교 미국 침례교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속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의 크리스천 공동체가 형성됐는데, 1903년부터 시작된 기도모임은 매컬 리가 제일 먼저 선교사업을 위해 중국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매일 기도회를 가지는 것으로 진행됐다. 이 기도회가 발전해 원산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매년 정기 사경회(Annual Bible Conference)가 열렸으며, 1904년에는 미국 남감리회 소속의 하디가 인도자가 되어 자신의 선교사업 실패의 원인은 믿음이 약해 성령강림의 체험이 없는데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 이는 부흥운동의 불을 지핀다.
하디 선교사의 1902년 선교보고를 살펴보면 자신의 신앙에 대한 좌절로 가득했다. 그러나 1903년 보고에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1904년 보고에는 확신에 가득찬다. 더 구체적으로, 1902년 보고가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차 있다면, 1903년 보고에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고 1904년 보고에는 성령의 임재로 이뤄진 내적 변화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차 있다. 실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좌절이 감사로 변하는 감격의 생활을 가능케 만든 요인은 1903년 ‘원산부흥운동‘에 기인한다. 이 운동은 원산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된 초기 한국 부흥운동의 출발점이다.
* 하디 *
캐나다에서 출생한 그는 토론토 대학 의과대학에 재학 중 열풍처럼 번지던 ‘대학생 선교 자원운동’을 접하고 선교사로 지원했다. 처음 그는 캐나다 대학 기독교청년회 자김 지원으로 1890년 내한한 후, 교파 소속 없이 서울과 부산, 원산 등지에서 의료활동을 벌인다.
1896년에 이르러 캐나다 대학생들이 보내주는 선교비가 중단되 캐나다로 돌아가야 할 위기에 처했으나 개성에 병원을 두고 있던 남감리회에서 그를 받아들임으로 이 때부터 남감리회 소속이 됐다. 초기에는 의료활동에 전념했으나, 1898년 원산으로 옮긴 후 병원보다는 교회를 돌아보면서 전도와 목회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태백산맥이 가로지르는 함경도와 강원도 산악 지역에서 전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눈에 띄는 선교결실도 맺지 못했다. 또 기대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실망만 더해갔다.
이런 가운데 1903년 8월 원산에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휴가차 원산에 들른 감리교 여선교사 화이트(M.C.White)의 제안으로 요한복음 14장을 중심으로 기도와 성령체험에 대한 토론으로 진행되는 성경공부 모임을 갖게되고, 처음 피동적인 자세로 임했던 하디가 바로 이 모임에서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어 첫 번째 명하신 것은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을 할애했던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실패했다는 사실과 실패한 원인을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괴롭고도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하다 하셨으니 이는 오늘날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하려 하심이라’ 지난 수년간 나는 한국인들에게 죄를 자백하게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여 주도록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이 때까지는 내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관련해 지속적이고도 빈틈없는 회개, 고통을 수반한 회개를 한 적은 없습니다”
하디는 성령체험을 한 다음 주일, 낮 예배시간에 원산교회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오만과 불신을 공개적으로 자복했다. 한국인 회중들에게는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 때부터 원산에서 모이는 집회마다 공개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나 선교사와 교인들 모두에게 성령충만한 영적 갱신의 역사가 일어난다. 하디의 변화는 다른 선교사들을 변화시켰고, 선교사들의 변화는 한국을 변화시켰다.
* 원산 성령강림 운동으로 말미암은 교인들의 갱신운동 *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수반한다. 그리고 선교사 사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선교사와 함께 생활하는 한국인 조사와 전도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1903년 여름 원산부흥운동을 목격했던 저다인(J.L.Gerdine)은 이렇게 보고한다.
“지난해 원산에서 일어난 일 중에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그 곳 교회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이에 관련되어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런 부흥회 모임은 주로 하디가 이끌었는데, 은혜가 넘치는 집회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원산시약소에서 로스 박사를 도와주고 있던 최종손, 로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고 있던 진천수, 그리고 우리 독신자 숙소를 돌보고 있는 강태수 등이 한 방을 쓰고 있는데 이들은 로스박사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와 같은 건물 안에 있습니다. 부흥회 첫 날 종손이가 은혜를 크게 받았습니다. 그는 간증하기를 지난 사오일간 죄책감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죄목을 써 가지고 나와서 읽으며 자복했는데 그동안 도둑질한 것들을 읽어가면서 악으로 가득찼던 자기 속을 털어놓았습니다. 회개를 한 후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으며 저는 그같이 완벽한 회개를 본 적이 없습니다.
회개한 종손이는 남을 구원하기 위해 열심이었는데 누구보다 한 방을 쓰고 있던 동료들에게 권면했습니다. 하루인가 이틀 만에 태수가 은혜를 받고 자기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도 역시 기쁜 마음으로 죄를 자복하고 구원받은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며칠 후 천수도 회개했습니다. 그는 소위 양반 출신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충격과 감격 속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중생의 체험들을 기록하기 바빴으며, 무엇보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인 하디는 중견 전도인 윤승근의 회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윤승근은 남감리회 개척 선교사 리드가 내한해서 처음 얻은 교인 중 한 사람으로 남감리회 소속 한국인 전도자 중 가장 뛰어난 실력자였다. 그도 회개반열에 합류한다.
“그도 성령의 견책을 달게받고 사경회 같은 모임에서 몇 차례 자기 죄를 자복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 선교사들이나 한국인들 모두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은총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편안하게 자복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번은 선교사 밑에서 매서인으로 일하면서 조금씩 돈을 빼돌린 것이 7달러에 달했다고 자복했습니다. 그는 이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했습니다”
벽제 출신으로 굴곡많은 삶을 살아온 윤승근은 선교사 돈 뿐 아니라 과거 예수를 믿기 전에 횡령한 것도 생각났고, 생각 나는대로 돈을 갚기 시작한다. 그는 옛날 인천 주전소에서 근무할 때 횡령한 돈도 생각났고, 쓸 것을 쓰지 않고 돈 20원을 모아 이미 폐쇄된 인천 주전소 대신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탁지부로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돈을 내놓는다. 탁지부는 “희한한 일이다”며 영수증을 써준다.
윤승근이 갚아낸 돈에는 ‘양심전’(良心錢)이란 이름이 붙는다. 윤승근과 같이 부흥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회개한 교인들은 과거 횡령하거나 훔친 돈을 돌려주는 보상행위가 잇따랏고,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받을 대상이 없어 돌려줄 수 없는 경우, 그런 돈은 교회에 헌금했다. 이렇게 제단에 바쳐진 돈을 ‘양심전’이라 했고, 양심전은 신앙을 통해 양심을 회복한 기독교인들이 보여주 구체적 ‘회개의 열매’였다.
‘양심전’ 주인공 윤승근은 1904년 초, 강원도 김화 땅 새술막(학사리)에서 전도하다가 폐결핵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몸을 아끼지 않고 강원도 산간지방을 돌며 전도에만 몰두했던 결과였다.
“그는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법을 알았고, 어디 가서든 그것을 떳떳하게 밝혔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표내서는 안되며 그렇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는 실로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말년에 너무 과로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했음에도 기쁨과 행복에 넘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죽음도 그를 겁주지 못했습니다. 그의 삶을 돌이켜 볼 때, 그리고 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그로 인해 그가 얻은 믿음의 승리를 생각하면, 우리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를 통해 우리 교회에 가장 추악한 죄인이라도 부르셔서 당신의 능력으로 채워 새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예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으로 성령을 체험한 한국인들에겐 이같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다. 신분과 출신지, 나이와 환경이 달랐지만 성령을 체험한 그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은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두번째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시인(자복)했고, 세번째는 자복 후 평안과 기쁨을 누렸고 네번째는 회개 후 변화된 삶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중생의 체험이다. 이 체험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원산부흥운동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 체험을 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서양종교’ ‘선교사들의 종교’로 치부하던 기독교를 ‘한국인의 종교’로 승화시킨 계기를 마련했다.
* 절정 - 성령충만 평양대부흥, 윤리적 바탕까지 *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된 신앙운동으로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같은해 1월 6일부터 10여 일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사경회 기간 중 절정에 이르렀던 이 운동은 1903년 선교사들의 기도회 모임이 도화선이 됐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다시 개최된 교파별 연합기도회에서는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 럽(A.F.Robb)이 성령을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전계은, 정춘수 등의 한국인들이 큰 은혜를 입어 원산지역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선교사 중심의 기도회로 원산에서 시작된 성령의 역사는 1905년 8월 평양에서 다시 일기 시작했다.
1907년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를 통한 대부흥운동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이러한 부흥회의 열기는 삼남지방 목포까지 전해져 회개와 부흥의 운동이 확산됐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어났다. 특히 길선주 장로의 집회 인도 때는 회개와 부흥의 성령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첫날부터 성령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한 평양사경회는 집회가 계속되면서 더욱 부흥운동의 열기는 학생들과 여성들에게 전파되면서 더욱 가속화 됐다. 당시 기독교계통 학생 2,500명이 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이들에 의한 집단적인 전도운동이 전개됐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회개와 기도 운동의 초석’ ‘한국교회 최초의 성령운동’ ‘외국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성도들의 연합’ ‘성경 중심의 부흥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회개운동과 기도운동 그리고 성령운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대부흥 기간에 이 세가지 운동은 당시의 모든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일어났다. 이것은 교회연합 활동에도 매우 깊은 의미를 시사한다. 원산에서 시작돼 서울을 거쳐 평양에 이른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하나되는 성령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 평양 대부흥운동 *
1903년 8월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한반도 전체로 번져갔으며, 공개적으로 자복하는 선례를 보여줌으로 대중적 회개운동을 이끌어 냈던 하디 선교사는 자신이 담당했던 원산과 강원도 북부 지역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서도 ‘부흥강사’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04년 1월에 열린 원산 장로교 감리교 연합사경회에서 원산 교인들 사이에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전계은 정춘수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꼬꾸라져 뒹굴며 엉엉 울면서 기도한 것이 이 때의 일이다. 2월에는 개성 남부교회에서 10일 동안 집회를 인도했는데, 개성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3월에는 서울 종교교회 9월 말에는 서울 정동교회에서 집회가 있었고, 교인들과 이화 배재 학생들이 성령을 체험한다.
인천 집회를 끝으로 하디가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들어간 1905년 11월 이후에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의 불길은 모닥불 같이 이어졌다. 1906년 서울에서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인도한 부흥회가 두 주간 동안 열렸고, 개성에서도 연합 부흥회가 열렸다. 그러다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되는 평양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 사경회가 8월에 1주일 동안 열렸으며,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하디가 인도했다.
1906년 늦여름 시작된 기도회는 가을까지 계속 이어졌고 11월에 시작되는 연합사경회로 연결됐다. 예정된 2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이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계속 사경회를 이어갔다. 이어지는 사경회의 목적은 ‘성령의 임재하심’이었다. 1,500여 명이 모여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연장 사경회의 처음 한 주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기다렸던 사건은 두 번째 주간 월요일 저녁인 1월 14일 일어난다. 당시 부흥회를 인도했던 장로교 리(G.Lee) 선교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월요일 저녁 우리는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는 상태로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하나님께 비는 마음뿐이었다. 예배당에 도착해서 우리 모두는 무언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짧은 설교가 있었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통성기도로 들어갔다. 통성기도는 이 때 집회의 특징이었다. 기도가 끝나고 몇 사람이 나와 간증한 후 인도자가 찬송을 인도한 후,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가고 새벽까지 남아 기도하며 자기 죄를 회개할 사람은 남아 있으라고 광고했다. 대부분이 돌아갔으나 5, 6백 명 정도가 남았다.
우리는 그들을 ㄱ 자로 꺾어진 교회 중앙으로 모았다. 그리곤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기도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런 형태로 진행됐다. 기도를 마친 후 회개할 사람이 있느냐고 하자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이 모인 사람들 위에 임하였다. 한 사람씩 일어나더니 자기 죄를 자백하고는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루에 몸을 뒹굴며 주먹으로 마루 바닥을 때리면서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우리집 요리사도 자복하면서 뒹굴었다. 그는 나를 보더니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내게 소망이 있습니까? 과연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하면서 내게 달려와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집회는 이튿날 아침 10시가 되서야 끝이 난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사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시작이다.
집회 때마다 통성기도에 이은 공개적 자복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1월 20일에는 고등성경학원에서 모이던 여성들에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2월 10일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감리교 연합사경회에서도 역시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봄이 되면서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된다. 북으로는 신천과 의주, 남으로는 재령과 서울, 그리고 광주 대구까지 그 열기가 확산됐다. 이 불길은 선교사와 한국인들을 변화시켰다. 평양에서 있으면서 부흥운동 현장을 지켜본 감리교 무어(J.Z.Moore)가 제출한 1907년 선교보고에서 변화의 실상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은 이번 부흥운동으로 한국인들이 다른 식으로는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 체험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옛 복음이 이제 값없이 주시는 은총,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으로 생생하게 체험되고 있으며, 말 그대로 게으르고 무능하고 무익했던 무리가 변해 엄청난 능력을 지닌 복음전도자들이 됐습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야 말로 한국 백성들의 영적 기갈을 해소시켜줄 수 있음이 증명됐습니다”
* 한국교회와 사회 윤리 근간의 밑거름이 된 회개와 부흥운동 *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어른들의 부흥운동은 평양 숭실학교, 광성학교, 숭의여학교 등 학생들에게 확산됐다.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으로 운영되던 숭실대학교에서는 봄 학기가 시작되자 마자 2주간 사경회가 열렸다. 학생들은 매일 수업이 끝나고 오후 4시부터 집회에 참석했는데, 어른 집회와 마찬가지로 학생 집회에서도 통성기도와 회개 자복이 일어났다. 숭실대학 학장으로 있던 베어드(W.M.Baird)의 부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학생들은 자기 이마 혹은 손으로 마루바닥을 쳤으며, 말 그대로 고뇌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가 그들을 찢어 놓는 듯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티고 앉아 있기가 어려웠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울면서 자기 죄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놓은 자백들은 충격적이었다. 마치 지옥이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살인, 간음 등 온갖 더럽고 추한 행위들에서 시작해 방화, 술주정, 도둑질, 강탈, 거짓말은 물론이고 시기와 질투, 멸시와 미움 등 별의별 죄들을 낱낱이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사람들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끄집어낼 수 없는 고백들이었다”
이 부흥운동 기간 중 집회 때마다 죄의 자복이 터져나왔으며, 1907년 4월 1일부터 시작된 평양 연합사경회도 마찬가지였다. 40년 전 제네럴셔먼호 사건 때(1866)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쳤던 박춘권이 그 사실을 자복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덕분에 미궁에 빠졌던 사건들도 많이 해결됐다. 경찰들은 사경회 장소에 몰래 들어와 자복하는 교인들의 신상을 파악해 두었다가 집회 후 범인 검거에 열을 올렸다. 또 그런 목적으로 예배당 안에 들어왔다가 회개하고 교인이 되는 경찰들도 있었다.
이렇게 죄를 자복한 교인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한다. 깊이 있는 ‘죄의식’(罪意識)은 회개를 불러 일으켰고, 진실한 회개는 변화된 행동으로 입증됐다. 교인들은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기준과 원리를 세우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있던 무어 선교사는 부흥운동의 중요한 열매의 하나로 새로운 윤리의식 형성을 꼽고 있다.
“(부흥사경회의) 하루 일정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전에는 한 시간 기도회를 하고 두 시간 동안 성경을 공부한다. 오후에는 한 시간 공부를 하고 나서 교인 생활에 활력소를 줄 수 있는 주제를 갖고 한 시간 동안 토론회를 갖은 후 다시 한 시간 동안 거리로 나가 축호전도를 한다. 저녁에는 전도 집회를 연다. 오후 토론회는 조혼(早婚) 교육 순결 흡연 등의 주제를 놓고 공개토론으로 진행된다. 토론에 참가하는 토착 교인들의 열정과 예리함은 놀랄 만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교인들이 토론을 통해 문제된 것에 대해 도덕적 입장(moral stand)를 정립한다는 점이다”
부흥운동을 겪은 한국 교인들은 회개와 자복을 한 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새로운 ‘윤리의식’(倫理意識)을 갖게 됐다. 부흥운동 기간 중 고백된 죄목을 보면 살인과 간음, 절도, 거짓말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죄로 분류되는 보편적인 것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는 흡연, 축첩(蓄妾), 노비(奴婢), 제사(祭祀), 주술(呪術) 같이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죄목’에 들지 않았던 행위들도 포함돼 있다. 주로 유교나 불교, 민간신앙에 근거를 두고 이어져 내려온 생활 습관들이 이제 기독교 신앙 원리에 비춰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되기 시작한다.
이런 행위들이 ‘죄목’으로 나열됐다는 것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유교 및 전통 종교 윤리를 대체할 새로운 윤리가 형성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윤리의 종교적 근거로 기독교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기독교적 윤리’가 일반 사회에서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 초기 부흥운동은 한국 교인들의 회개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한국의 근대 사회 윤리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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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글은 이덕주 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와 전택부 장로(YMCA명예총무)의 2004.10.6.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 한국부흥운동100주년 심포지엄 발제와 안준배 목사(분당마을교회)의 연구논문 '한국기독교 연합운동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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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일보, 김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