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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일언(一言)
오설산(五洩山) 영묵(靈黙) 선사가 석두(石頭)에게 가서 말하였다.
“한마디 말[一言]이 서로 계합(契合)하면 곧 머무르고 한마디 말이 계합하지 않으며 떠나겠소.”
석두가 자리에 버티고 앉았다. 선사가 소매를 떨치고 떠나가니 석두가 불렀다.
“상좌여”
그러자 선사가 고개를 돌리니 석두가 말하였다.
“태어나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저 그런 친구이거늘, 고개를 돌리거나 머리를 돌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선사는 말 끝에 깨달았다.
불안원(불안원)이 송했다.
길에 있건 집에 있건 무엇이라 대꾸할꼬?
한가지 예만으로 선사(先師)에게 구하지 말라.
웅대(雄大)하여 우주의 왕자 같다 하여도
반쪽의 해골 없음을 면하지 못하리.
동산개(洞山价)가 염(拈)하였다.
“그 때 만일 오설(五洩) 선사가 아니었다면 알아듣기 매우 어려웠으리라. 비록 그러하나 여전히 길거리에 있도다.”
장경릉(長慶稜)이 말하였다.
“험하구나[險], 현각(玄覺]이 묻기를 ‘어떤 것이 여전히 길거리에 있는 것인고?’ 하니, 어떤 스님이 대답하기를 ‘그가 세 치 길거리에서 알아들었기 때문에 길에 있다고 했습니다.’하였다. 현각이 다시 징(徵)하되 ‘자기를 알아들었는가? 만일 자기를 알았다면 어찌하여 세 치란 말이 이뤄지며, 만일 세 치라면 어째서 깨달았다 하는가? 말해 보라. 동산의 뜻이 어디에 있는고?라고 했으니, 어지러이 지껄이지 말고 자세히 살펴야 좋으니라.”
취암지(翠嵓芝)가 염(拈)하였다.
“석두는 자리에 기대앉았고 오설은 떠났는데, 석두가 그를 불러 도리어 분주하게 되었구나.”
운봉열(雲峯悅)이 염하였다.
“석두 노인은 좌정시키지도 못했고 잡아 머물케 하지도 못했다. 그까짓 외곬[擔板漢]은 물러가거든 그만두었어야 할 것을, 다시 그를 불러 고개를 돌리게 하여 그가 어물어물 하다가 말하기를 ‘내가 여기서 깨달은 곳이 있소’ 하니, 나귀 해의 꿈에나 보리라.?
정자본(淨慈本)이 소참(小參) 때에 이 이야기에서 그 말 끝에 크게 깨닫고는, 즉시 주장자를 꺽어버리고 곁에서 20년 동안 시봉을 했다고 한 것과, 뒷날 동산(洞山)이 말하기를 ‘아직도 길거리에 있다’고 한 데까지를 들어 말하였다.
“여러 선사들이여, 알겠는가? 동산이 비록 부자(父子)의 정이 있으나 정의를 당해서는 사양치 않는도다. 말해 보라. 그를 긍정하는가? 그를 긍정하지 않는가? 만일 긍정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선사(先師)가 아니었다면 알아듣기가 매우 어렵다’했을까? 만일 긍정한다면 어째서 ‘아직도 길거리에 있다’고 말했을까? 말해 보라. 동산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가 아직도 길거리에 빠져 있는 곳인가? 그 속에서 만일 눈치를 챈다면 바야흐로 옛사람의 안목을 보겠지만 만일 눈치를 채지 못한다면 여전히 땅에 머리를 박은 사람일 것이니라.”
원오근(圓悟勤)이 이 이야기를 들어 말하였다.
“나라면 그 때 그를 부르지 않고, 제멋대로 외곬으로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했을 것이거늘, 자비심이 너무 깊어서 풀숲에 빠져 들어 그렇게 되었다. 여러분은 앉고 섬이 의젓하니,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단지 그저 그럴 뿐이다. 다시 무엇을 의심하는가?”
죽암규(竹庵珪)기 보설(普說)할 때 이 이야기를 들어 말하였다.
“대중들아,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저 그런 놈이라’하니, 그런 놈이란 누구인가? 여러분가운데 열에 아홉은 잘못 알고 있다. 비록 그러하나 말해 보라. 오설이 깨달은 바는 어떤고? 산승은 말하노니, 그 놈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하노라. 화살은 푸른 물결 속의 붉은 해를 꿰뚫고 기륜(機輪)을 움직이지 않은 채 풀밭에 떨어진다. 배불리 밥을 먹고 옷을 입은 채 쓰러지니, 마주 보면서 도를 이야기하되 끝내 말이 없도다. 방망이 끝에 금강의 눈이 활짝 열리니, 밤길을 떠나서 새벽에 이르기를 허락하지 않느니라.”
說話
“한마디 말이 서로 계합하면 곧 머무르고[一言相契卽住]……”라 함은 마음을 써서 털썩 자리에 기대앉는 뜻이 그의 의근(意根)을 말뚝처럼 서있게 하지 않고 마치 붕새가 날듯 스스로가 변화하게 하려는 데 있다.
“태어나서부터 늙을 때까지[從生至死]……”라 함은 진(眞)을 여의고 설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자리 그대로가 곧 진이라는 뜻이다. “깨달았다[領旨]”함은 만일 딴 사람이었다면 아직도 길거리에 있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란 뜻이다.
불안(佛眼)의 송은 동산(洞山)이 염한 뜻까지를 이어서 송했으니. 위 두 구절은 그 양쪽 끝에 있지 않다는 뜻이요. 아래 두 구절은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오설(五洩)과 같지 못했을 것이란 뜻이다.
동산(洞山)의 염에서 “그 때[當時]……어려웠으리라[承當]”라고 한 것은 석두(石頭)의 말 끝에 깨달은 바 없음을 깨달았다는 뜻이요, “비록 그러하나[雖然如是]……”라고 함은 그래도 스승을 따라 깨달은 것이니, 이것은 동산의 가풍(家風)이 이와 같다는 뜻이며 역시 오설(五洩)이 깨달은 곳을 나타낸 것이다.
장경(長慶)의 법어에서 “험하구나[險]”라 함은 동산(洞山)의 뜻이 매우 험준하기 때문이니, 이는 동사의 말까지를 연이어 든 것이다. 현각(玄覺)의 마에 처음부터 “도처(途處)”까지는 세 치[三寸]의 도중에 젖어들지 않느 뜻을 보기를 요한 것이요, “그가 세 치 길거리에서 알아들었기 때문에[爲伊三寸途中]……”라 함은 통틀어 대답한 것이다. “현각이 다시 징하되[玄覺徵爲復]……”이라 함은 세 치의 일을 알 때에 자기를 알게 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니, 첫째는 오설의 뜻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동산의 뜻을 밝힌 것이다.
취암(翠巖)의 염은 세 치를 안다고 하지 말지니, 비록 자기를 알았다 하더라도 도리어 많은 일을 이룬다는 뜻이다.
운봉(雲峰)의 염은 깨달음이 있건 깨달음이 없건 모두가 무사(無事)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자(淨慈)의 소참(小參) 역시 동산(洞山)의 말에 인하여 오설의 깨달은 곳을 제 마음대로 나타낸 것이다.
“바야흐로 옛사람의[方見古人]……”라 한 데에서부터 끝까지는 오설이 세치의 뜻을 알았다는 말이니, 이러한 오설의 뜻을 알지 못하면 땅에 머리를 박은 첨지[沒地頭漢]1) 일 것이라는 뜻이다. 옛사람의 안목이란 오설의 안목이다.
원오(圓悟)의 거화는 그를 불러오는 것이 자비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요, “여러분은 앉고 섬이[只如諸人坐立]……”라고 함은 석두가 말하기를 “다만 그저 그런 첨지거늘[只是這漢]……”이라고 한 것이 유별난 것[特地] 같기 때문이요, 여기서 “다만 그저
그럴 뿐이다[只是這箇]……”라고 한 것은 곧 “법이 법의 지위에 머물렀다”는 도리가 되는 것이다.
죽암(竹庵)의 보설에서 처음부터 “열에[十箇]……잘못 알고 있다[錯認]”까지는 대체로 그것[這箇]을 잘못 알기 때문이요, “그 놈은[者漢]”에서부터 “필요가 없다[轉腦]”까지는 석두의 말을 거듭 든 것이다.
“화살은……꿰뚫고[箭穿]”에서부터 “물결[波心]”까지는1) 모름지기 화살로 붉은 해를 쏘아 꿰뚫어야 된다는 뜻이요, “……을 움직이지 않은 체[下動]”에서부터 “떨어진다[草]”까지는 기륜(機輪1))을 움직이지 않으니, 머리를 돌리거나 뇌를 굴리지 않게 되었으나 그것을 인식하여 집착하면, 이는 역시 군소리[落草]라는 뜻이다.
“배불리 밥을 먹고[飽喫飯]……”라 함은 활용(活用)1)이 없다는 뜻이요, “마주 보면서[對面]……”라 함은 종일토록 말해도 일찍이 말한 적이 없다는 경지이니, 이들은 모두가 자못 오인한 병이다.
“방망이 끝에[棒下]……”라 함은 모름지기 머리를 돌리고 생각을 바꾸거나 화살로 해를 꿰뚫어야 된다는 뜻이요, “……을 허락하지 않느니라[不許]”함은 그것을 오인해 집착하는 것이 곧 밤길 다니기를 쉬지 않는다는 뜻이다.
1) 융통성 없는 바보를 말한다.
2) 한문과 우리나라 글의 어순 차이에서 오는 현상이다. 전문은 “화살은 푸른 물결속의 붉 은 해를 꿰뚫고[箭穿紅日碧波心]”이다.
3) 기개와 재치를 말한다.
4) 살아갈 계교를 말한다.
부배(浮盃) 화상에게 능행파(凌行婆)가 와서 절을 하고 물었다.
“힘을 다해 말해도 이르지 못하는 구절을 누구에게 분부하시겠습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나 부배(浮盃)에게는 그런 군말이 없느니라”
능행파가 말하였다.
“부배에 이르기 전에 의심했던 것이 잘못이 아니군요”
선사가 말하였다.
“따로 능한 것이 있거든 드러내도 무방하니라.”
능행파가 손을 모우고는 말하였다.
“아이고, 아이고, 중간에 또다시 원수의 고통을 만났도다.”
이에 선사가 말이 없으니, 능행파가 말하였다.
“말에 바르고 치우침도 모르고, 이치에 사(邪)와 잘못된 것도 모르니 남을 위하다가 재앙이 생겼도다.”
나중에 어떤 스님이 남번(南泉)에게 이 이야기를 들어 말하니, 남전이 말하였다.
“괴롭다. 부배가 그 노파에게 한바탕 꺾었구나.”
노파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웃으며 말하였다.
“왕노사(王老師)는 아직도 기개가 모자라는구나.”
그 때 유주증일(幽州潧一)이라는 선객이 있었는데, 노파에게 물었다.
“남전이 어째서 기개가 모자라는가?”
그러자 노파가 곡을 하면서 말하였다.
“슬프고 애통하구나”
증일이 어리둥절하거늘 노파가 말하였다.
“알겠는가?”
증일이 합장하고 섰거늘, 노파가 말하였다.
“죽음 직전에 놓인 선객이 삼대같고 좁쌀같이 많도다.”
나중에 증일이 조주(趙州)에게 이야기를 하니, 조주가 말하였다.
“내가 그 구린내 나는 노파를 봤더라면 한마디 물어서 입을 봉했을 것이니라.”
증일이 말하였다.
“화상은 그에게 어떻게 물으시겠습니까?”
조주가 문득 때렸다. 증일이 물었다.
“어째서 나를 때리십니까?”
조주가 말하였다.
“그따위 죽음 직전에 놓인 선객을 때리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리요?”
노파가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하였다.
“조주가 나의 방망이를 맞앚어야 할 것이다.”
조주가 또 그 말을 전해 듣고 곡을 하면서 말하였다.
“슬프고 애통하여라”
노파가 다시 이 말을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조주의 눈빛이 사천하를 비춰 꿰뚫는구나.”
조주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어떤 것이 조주의 눈인고?”
그러자 노파가 주먹을 세웠다.
조주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송을 지어 보냈다.
걸맞은 기개가 마주 보며 제시하니
마주 보는 걸맞은 기개는 재빠르니라
그대 능행파에게 알리노니
곡하는 소리가 무슨 득실(得失)이 있는고?
이에 노파는 게송으로 화답했다
곡하는 소릴 스님께서 아셨으니
이미 알았는데 무엇을 더 알겨 하오.
그개의 마갈타국의 법령이여1)
하마터면 눈앞의 기회를 잃을 뻔하였네.
1) ‘그 때’는 부처님 당시를 말하며 ‘마갈타국의 법령’은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 계시면서 설한 법을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을 뜻한다.
운문고(雲門杲)가 송했다.
손바닥 안의 여의주2)를 돌본 적 없으니
뉘라서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을 보호하리요.
부배는 노파의 선을 알지 못하여
지금껏 오점(汚點)을 씻지 못했네.[이는 처음부터 “재앙이 생겼도다”라고 한 곳까지를 송(頌)한 것이다.]
2) 자신의 본분사(本分事) 또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 이 본래면목을 돌보지 않았으니 미(迷)하였고, 그 때문에 다음 구절 ‘어머니가 낳아준 몸 어찌 보호하리요’하였다. ‘어머니가 낳아준 몸[孃生袴]’은 곧 자신이며 본분사이다.
또 송했다.
눈빛이 사천하를 비춰 꿰뚫고
노파의 주먹은 빈틈이 없어라.
맞는 기개, 마주 본 일 어떠하던가.
맹호의 척추를 뉘라서 탈 수 있으랴 [이는 “노파가 이 말을 전해 듣고”이하부터 “눈앞의 기회”라고 한 곳까지를 송한 것이다.]
지비자(知非子)가 송했다.
서쪽 이웃의 곡소리를 도우러 오니
동쪽 집의 사람들이 죽었다고 들리네.
슬프다. 부배에게 군말이 없다니
맞는 기개, 오히려 노파선(老婆禪)만 못하네.[이는 처음부터 ‘아이고, 아이고’한 곳까지를 송한 것이다.]
무진(無盡) 거사가 송했다.
구리 눈동자[銅睛] 무쇠 눈의 능행 노파가
부배의 무궁한 재주를 무찔러 버렸네.
그러나 조주를 속이지 못하고
모두가 얼빠진 납자 축에 빠져버렸네.
열재(悅齋) 거사가 송했다.
노파가 집도 없이 우는 소리에
조주는 천리 밖에서 동정을 보냈네
뒷사람들 울어대도 끝이 없거늘
공연히 꾀꼬리 소리를 내어 학의 울음 흉내내네.
說話
“부배에게는 그런 군말이 없다[浮孟無剩]”함은 힘을 다해도 이 를 수 없는 말을 전했다 하여도 역시 불질없는 말이 된다는 뜻이요, “부배에 이르기 전에[未到浮孟]……”라 함은 꺽어 주저앉히는 말이다. 뒤에도 마찬가지이니 부배가 몽청한 첨지가 아니라 주장하는 곳이 있다는 뜻이다. “남전이 말하였다. ‘괴롭다’[南泉云苦哉]……”라 함은 남전의 뜻에는 전해 줄 것이 있다는 내용이다.
“노파가 이 말을 전해 듣고[婆聞笑云]……모자라는구나[關在]”라 함도 역시 꺾어 주저앉히는 말이요, “증일이 합장하고 섰다[潧一合掌而立]”함은 중간(中間) 구절이다. “죽음 직전에 놓인 선객[倚死禪和]……”이라 함은 역시 꺾어 주저앉히는 망이요, “조주가 문득 때렸다[州便打]”함은 양쪽 끝에 머물지 않은 것이다.
“조주가……맞았어야 할 것이다.[趙州合喫]”에서부터 “방망이[棒]”까지는 역시 노파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요, “조주의 눈빛이[趙州眼光]……”는 3구(句)를 벗어난 경지이니, 뒤의 조주와 노파의 송이 제각기 자기의 뜻을 표현 한 것이다.
운문(雲門)의 송에서 “손바닥 안의 여의주[掌內摩尼]”라 함은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가 나타나고 한족(漢族)이 오면 한족이 나타나는 물건이니, 말함과 침묵함의 중간 구절이요, “어너미가 낳아 주신 몸[孃生袴]”이라 함은 부배의 말인데, 만일 노파의 처지에 의한다면 손바닥 안의 마니주도 돌아보지 않거늘 하물며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이겠는가 함이다.
또 송(頌)한 데에서 “전광석화(電光石火)”란 묘한 진리는 빠르고 빨라서 말고 침묵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요, “죽기 직전의 선객[倚死禪和]”이라 함은 증일이 설 자리이니, 거기에는 전광석화도 오히려 더디거늘 하물며 죽기 직전의 선객이겠는가?
또 송(頌)한 데에서 “눈빛이[眼光]……”라 함은 조주를 이름이요, “노파의[老婆]……”라 함은 노파의 경지이며, 뒤의 두 구절은 범의 머리와 범의 꼬리를 동시에 거둔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