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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신계훈 목사 저)
성소제도와 구속(救贖)의 계획
4. 지성소 봉사와 조사심판
탁명환 비평 “구약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교의 조사심판 교리를 위한 예시인가,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한 예시인가 살펴보자. 이것은 조사심판을 위한 것임이 아니라 예수의 몸을 단번에 드린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고 있으며 (히 10 : 10~21) ∙∙∙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실 것을 나타낸다(히 9: 1~7, 9 : 11, 25, 26).
대속죄일과 지성소 봉사
변 증 성소의 구조에서도 드러나 있듯이 성소의 봉사는 엄격히, (1)성소 뜰에서의 봉사, (2) 첫째 칸인 성소에서의 봉사, (3)둘째 칸인 지성소에서의 봉사로 나누어져 있다. 또한 세 부분에서의 봉사 내용과 목적도 서로 크게 달라졌음을 이미 확인했다. 또한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도 뜰→성소→지성소로 봉사의 순서가 되어 있었다.
탁명환 씨의 비평처럼 1년에 한번씩 들어가는 지성소에서의 봉사를 단순히 “십자가 사건” 하나로 돌리려면, 성소 뜰에서의 봉사와 첫 칸인 성소의 봉사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간단히나마 십자가의 사건인지 아니면 십자가의 구속과 연관된 심판의 국면이 드러나 있는지 다음의 성경 말씀을 읽으며 생각해 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火祭)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레 23 : 27~29).
지금도 유대인들의 옛날 이름인 “욤키푸르”(Yom Kippur)로 부르며 아직도 지키고 있는 이 대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은 일곱 절기 가운데 가장 엄숙한 날로, 유대인들은 이 날을 전통적으로 심판의 날 (the Day of Judgement)로 불려지고 있다. 아침 저녁 드리는 정규적인 제사(출 29 : 38, 39)는 “날마다의 봉사”와 같았지만, 다음의 절기 의식은 특별히 대속죄일만을 위한 것이었다.
• 일년에 한번 이날 하루는 대제사장이 둘째 칸인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위에 차려 속죄소에
이르러 봉사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감(레 16 : 13, 14)
• 제사장과 가족의 죄를 위해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잡아 그 피를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려 속죄함
(레 16 : 3, 6, 14).
•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죄로 더러워진 지성소와 회막과 단 등 모든 것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힌 염소를 속죄제로 죽여 그 피를 속죄소에 뿌리고 열거한
시구에 발라 속죄함(레 16 : 8, 15,16). 이로써 모든 백성과 성소 전체가 죄와 그 더러움으로
부터 완전히 정결 하여짐.
• 대제사장은 네 번에 걸친 지성소 출입을 통하여 백성과 성소 전체를 위해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산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 염소를 광야에 놓”(레 16 : 20 ~ 22)게
특별한 의식을 행함.
속죄제로 먼저 죽임을 당한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힌 염소는 말할 것도 없이 인류를 대신하여 일찌기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표현에 상대적으로 맞서는 반대 표현인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힌 산 염소(live goat)는 누구를 예시하는가?
아사셀 염소와 사단
휘케마 비평 “죽임을 당한 염소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속하기 위해 피를 흘리게 된 사실을 그린 것인 반면, 광야로 보내어진 염소는 그리스도가 속죄사업에 의해 우리에게서 우리의 죄를 없애준 사실을 그린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제림교도들이 하는 식으로 둘째 염소가 사단을 나타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어둠의 왕자에게 전가시키는 일이 아닌가?
변 증 “아사셀을 위하여”(la ‘Aza’zel) 뽑힌 염소가 누구를 가리키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사셀”의 본 뜻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을, “도망가다”(escape)s誛慼는 뜻의 영어 축약형인 “스케입”(scape)과 “염소(goat)를 합성하여, “쫓겨가는 염소”(scapegoat)의 뜻으로 번역하고 있는 일반 사전의 뜻은 더욱 더 잘못된 것이다. 사단을 상징하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속죄의 염소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보자.
가.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의 의식을 통하여 백성과 성소를 정결하게 하고, “속죄하기를 마친 후”(레 16 : 20), 속죄의식과는 전혀 관계 없이 등장하고 있다.
나. 대속죄일의 모든 속죄 의식을 마친 대제사장이, 아사셀을 위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레 16 : 20)었는데, 성소제도에서 안수하는 것은 죄책(罪責)을 전가(轉嫁)시키는 기본 의미를 지녔다. 그것이 만약 속죄제물이라면, 죄가 전가된 후 대속의 죽음을 죽어 피를 흘려야만 속죄가 된다(레 17 : 1; 히 9 : 22). 그러나 이 염소는 그렇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산 염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 죽임을 당한 것은, “여호와를 위하여” 먼저 뽑힌 그리스도를 표상한 염소인데, “아사셀을 위하여”라는 표현 자체가 “여호와를 위하여”와 상반된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다. 또한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죄는 없”(히 4 : 15)으나 대속의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반면, “아사셀을 위한” 염소는 끝까지 죄를 지니고 끌려간다는 점에서, 죄의 장본인인 사단을 적절히 표상하고 있다(시 94 : 23, 7 : 16).
라. 대속죄일 행사가 끝나는 순간 죄책(罪責)이 부과된 직후, 타의(他意)에 의해 “무인지경 (無人之境)”의 광야로 끌려나가는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운명은(레 16 : 22)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는 전혀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동시에 황폐하게 된 땅 위에 악한 천사들과 함께 천년을 보내게 될 사단의 예정된 운명에 적절히 어울린다(계 20 : 1~3).
마. 아사셀을 위한 염소에게 죄를 전가시킨 후 사람을 시켜, “광야로 보낼지니”(레 16 : 21)라 명령되었다. 그런데, 이 곳의 “보낼지니”는 “쫓아보내”거나(expel) “제거하”(put away)는 등 강력한 표현으로 관계를 끊고 헤어지는 경우에도 쓰였다(신 21 : 14, 22 : 19, 22 ; 렘 3 : 8). 죄의 장본인인 사단은 영원히 내어 쫓겨 우주에서 제거될 것이다.
바. 대속죄일의 의미와 의식에 익숙한 고대 유대인들이나 초대 그리스도인 학자들도 “아사셀”을 사단적인 존재로 이해했다. 그리고, 감리고(Abingdon Bible Commentary), 장로교(S. M. Zwemer), 루터교(E. W. Hengstenberg), 성공회(J. R. Howden) 등 여러 교파의 학자들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조심할 것은 성소제도에 익숙지 아니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사단의 역할을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결국 죽게 될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죽이는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은 그것을 속죄제물이신 그리스도로 혼동할 여지를 없애기 위한 사려깊으신 하나님의 의중으로 사료(思料)된다.
대속죄일과 지성소 봉사
대속죄일의 특별 의식과 관계된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행적에도 보았듯이, 대속죄일에 수행되는 의식은 탁명환 씨의 비평처럼 단순한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어진 속죄를 구속(救贖)의 역사에서 종결시키는 구속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심판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소의 뜰과 연결되어 첫째 칸의 성소에서 수행된 매일의 봉사 에서는 제물의 피를 흘려 회개한 죄인에게 완전한 속죄, 곧 용서를 베풀어 온전히 의롭게 하였고, 제물에게 전가된 죄는 피와 제사장을 통하여 성소로 옮겨졌다.
그러나 대속죄일에 수행되는 연례 봉사 에서는, 상기한 경로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 범한 모든 죄를 인하여 ∙∙∙부정(不淨)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레 16 : 16), 그리고 속죄제물의 피가 묻혀진 성소의 각 기구와 지성소를 위하여, “그 피를 그 위에 일곱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비롯한 모든 것을 “정결(淨潔)케[레 16 : 19]하는 특별한 의식을 매일의 제사에 추가했다. 그리고 나서 사람과 성소를 부정케 한 모든 죄를 죄의 장본인인 아사셀에게 전가시켜, 죄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지운 후에 영원한 분리의 땅으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이와같이, 날마다의 봉사는 개인을 위한 봉사였으며, 대속죄일에 수행된 해마다의 봉사는 성소 자체와 백성의 정결을 위한 특별한 봉사였다. 전자는 죄를 전가( 戰嫁)함으로 이루어진 속죄의 절차였고, 후자는 죄 자체를 제거 (除去)함으로써 구속(救贖)을 끝내는 과정이었다. 또한 속죄제물로 드려졌던 여러 희생제물들의 시체를 진영 밖으로 옮겨 불태워 속죄의 제물마저 재가 됨으로써 범죄 직후 마련된 제사제도와 함께 시작된 구속의 계획이 모두 마쳐졌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속죄일에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네 번 지성소를 출입하는 데 그 마지막인 네번째에는, 지성소에 옮겨 놓아 온종일 향연을 올리던 향로를 다시 성소로 옮겨 온다.
이리하여 그 날 마지막으로 향연이 온 성막을 채우게 된다. 바로 이 장면이 하늘 지성소에서 진행 중인 대속죄일의 봉사가 끝나는 때 ,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주신 생생한 내용이다(계 15 : 5~8). 십계명이 보관된 언약궤가 든 성전, 곧 지성소가 보였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모습도 나타났으며,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계 15 : 8)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나타낸(계 8 : 3, 4) 향로가 밖으로 옮겨졌다. 마침내 은혜의 시기가 끝났으며, 그리스도의 자비로우신 중보도 마쳐진 것이다. 이제 “성전에는 능히 들어갈 자가 없”(계 16 : 8)게 되었고, 중보자가 없어진 세상에는 자비의 향로 대신 마지막 7재앙을 담은 금대접의 재앙이 부어지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하늘의 대속죄일 행사가 마쳐지는 참으로 생생하고 엄숙한 장면이다.
대속죄일에 수행된 지성소 봉사를 단순한 십자가 사건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십자가가 중심이 된 구속의 역사, 곧 세상의 역사가 마쳐지는 과정이다.
대속죄일과 재림 전 심판
그 뿐이 아니다. 지성소 봉사가 수행되는 대속죄일은 구속의 역사를 표상(表象)으로 드러낸 고대 이스라엘의 일곱 절기 (節期 ∙ feasts ) 가운데 여섯번째 절기이다. 주지된 대로, 레위기 23장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네 봄절기는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을 드러냈다.
• 유월절인 1월 14일[성력]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출 12 : 1 ~ 10), 예언된 표상를 시간과(단 9 : 25 ~ 27 ; 출 12 : 2 ~6) 구체적인 사항 까지(출 12 : 46) 성취시키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심(마 27 : 45, 46 ; 요 19 : 33 ~ 36).
• 무교절인 1월 15일 예수께서는 창조의 안식일처럼( 창 2 : 1), 구속의 기념일이 된 안식일 시작 때에, “다 이루었다”(요 19 : 30)는 말씀과 함께 무덤에서 안식하심(눅 23 : 54~56).
• 요제절인 1월 16일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안식일 이튿날”(레 23 : 11) 아침 처음 익은 보리단을 흔들어 제사함같이 첫날 아침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전 15 : 20)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
• 오순절인 3월 6일에는 정확히 이른비 성령이 임하심으로 교회가 탄생함(행 2 : 1~4).
길고 가문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성력 7월, 곧 티스리(Tishri)월이 되면 마지막 세 가을 절기가 잇달아 다가와 7일 동안 창조를 끝내신 하나님께서 성력 7월로 구속의 역사를 마치시는 표상을 확인하게 된다. 레위기 23장(23~44)에 기록된 가을의 세 절기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되어 구속을 마치는 내용임을 알게 된다. 우선 두 절기를 소개한다.
• 나팔절인 7월 1일에는 전국에 나팔을 불어 십 일 후에 다가올 대속죄일을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켰다. 7월 10일 대속죄일에 관한 마지막 기별이 사전에 예고될 것임을 표상한다.
• 대속죄일인 7월 10일은 다른 절기들과 달리 두렵고 엄숙한 절기였다. 그 까닭은, “하나님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레 23 : 28, 29)는 엄숙한 명령을 받았다. 십자가의 속죄를 나타낸 유월절에서 시작된 구속의 역사는 마침내 대속죄일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여호와 앞에 속죄할” 엄숙한 문제를 놓고 백성들은 저마다 진정한 통회(痛悔)로 “스스로 괴롭게” 해야 했다.
대속죄일과 법궤와 번제단
십자가의 희생을 드러내는 희생제물이 제단에 드려진 것으로 구속의 과정이 모두 끝났다면, 이처럼 엄숙한 심판의 과정이 왜 다시 필요한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보좌가 그 위에 놓인 법궤 앞에 서게 된다. 그 속에 들어있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통치의 기초가 되는 공의(公義 )의 표준이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 (不法 ∙ lawlessness) 이라”(요일 3 : 4). “불법”의 헬라어인 “아노미아”(anomia)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에 불순종함을 의미한다.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 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 ∙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 : 9 ~ 12).
결국 죄는 율법과 상관된 문제로, 율법의 요구를 무시했거나 거기에 응하지 못한 행위 이다. 한마디로, 율법에 불순종하는 것이 죄며, “죄의 삯은 사망”(롬 6 : 23)이다. 사망은 생명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는데,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라”(레 17 : 11). 그것이 율법을 범하여 죄지었을 때마다 희생제물의 피를 흘리게 한 이유이다. 그것이 대속(代贖)이다. 범죄한 사람의 생명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은 죄가 없는 희샐제물의 피가 필요했다. 그래서 구약의 희생 제물은 흠(欠)이 없어야 했고(출 12 : 5), 신약의 참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셔야 했다(요일 3 : 5).
지성소의 법궤 속에 든 십계명이 요구하는 법의 공의(公義 ∙ Justice)를 지키기 위해 성소 뜰에서는 희생제물이 피를 흘렸고 뜰, 중앙(中央)에 있는 번제단 아래에 피가 부어졌다(레 4 : ), 그리고 그 위에서 제물은 불에 사루어졌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대답이다.
성소 뜰에서의 봉사, 곧 지상봉사를 십자가로 끝내신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 ∙ ∙더 크고 온전한 장막[성소]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히 9 : 11, 12)신 것이다. 확인한 대로,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는 첫째 칸[성소]과 둘째 칸[지성소]의 봉사로 이어지는데, 앞에서의 성소 도면에 나타났듯이, 지상 봉사의 중심은 성소 뜰의 번제단인 십자가였고, 하늘 봉사의 중심은 지성소의 법궤였다. 인간의 범죄로 공의(公義)가 손상된 십계명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십계명의 공의와 십자가의 구속(求贖)이 마침내 서로 만나는 날이 왔다. 그것이 바로 지성소의 법궤 앞과 위에 성소 뜰에서 죽임을 당한 희생제물의 피가 일곱번이나 뿌려지는 대속죄일 봉사의 내용인 것이다(레 16 : 15, 16). 십계명의 공의와 십자가의 사랑이 서로 입맞춘 것이다. 이리하여 범죄로 손상된 하나님의 공의[율법]도 만족되었고, 정부의 기초인 영원한 율법의 공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범죄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도 만족된 것이다. 바로 그것이 복음의 내용인 것이다(롬 3 : 23 ~ 26).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시 85 : 10, 11).
이렇게 법궤의 뚜껑에 십자가의 피가 뿌려질 때 그 곳은 합법적으로 죄를 용서하시는 속죄소(贖罪所)가 되고 구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시은좌(施恩座)가 되는 것이다(출 25 : 19~22). “의와 공의가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89 : 14). 법궤의 뚜껑인 정금판의 속죄소는 히브리어로, “카포레트”(kaporeth)라고 하는데 “덮다”, “가리우다” (cover), “속죄하다”는 뜻의 동사인 “카파르”(kaphar)에서 나왔다. 즉 속죄소는 법궤의 뚜껑 으로 율법도 보호하고 죄인도 구원하는 합법적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인 것이다.
율법과 복음과 조사심판
율법과 십자가는 각각 공의와 사랑을 요구함으로써 상반(相反)되는 원칙을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롬 7 : 7)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드러나듯이, 율법이 마음에 없으면 자신이 죄인인 것도 깨닫지 못하여(롬 7 : 9) 십자가가 베푸는 진정한 속죄를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사도 바울처럼 인간의 의(義)에 대하여 절망하고(빌 3 : 5 ~ 9) 십자가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엄청난 의를 스스로 이룰 길이 없어 결국 율법에 의하여 정죄(定罪)를 당하여(약 2 : 8)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 속한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나님의 법이 기록돼 있으며(히 8 : 10), 마지막 때의 성도는, 진정한 복음의 내용인(롬 3 : 19 ~ 26)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을 지키는 자들”(계 14 : 12)인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 : 31). 이처럼 지성소의 율법과 성소 뜰의 십자가가 조성하는 심령의 거룩한 긴장(緊張 ∙ tension)을 느끼는 사람은 뜰과 지성소 사이에 있는 첫째 칸[성소]의 의미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기도와 말씀에 동화(同化)됨으로써,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경험하게 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롬 12 : 1, 2)게 된다. 그것이 구원의 필수 요소인 성화(聖化)의 경험이다.
이렇게 율법의 의에 대한 심령의 부담을 십자가의 은혜로 날마다 해결해 가는 사람은 마침내 지성소에서 베풀어지는 대속죄일의 심판을 통하여 심령의 지성소의 정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됨으로 새 언약의 언약궤가 된 그의 마음에 십자가의 피가 넉넉히 뿌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속죄일의 심판은 결국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제공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그에게 참으로 유효(有效)했는지의 여부를 심판의 척도가 되는 율법을 통하여 확인하는 구속의 마지막 과정이다.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며”(레 23 : 29) 진정한 회개와 속죄를 경험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대속죄일에 베풀어지는 속죄소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그것이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아 참석은 했으나 혼인잔치가 시작되기 직전,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마 22 : 11, 12) 진상을 조사한 뒤 합당치 않음이 판명되어,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져진” 재림 전 심판인 조사심판의 이야기인 것이다. 문제가 된 혼인예복은 무엇인가?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러,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계 19 : 7, 8).
구원받은 백성의 유니폼인 이 혼인예복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義)의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극히 존중하여 진심으로 순종하는 한편, 인간의 의로는 신령한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 의(義)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율법의 의를 넉넉히 이루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의(義)로 받아들이는 믿음, 곧 “예수 믿음”을 지키는 백성들에게 입혀지는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 : 12). 그들이 바로 대속죄일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괴롭게” 하는 통회를 통하여 구속의 은혜를 경험함으로써, 재림 전 심판(Pre-advent Judgment), 혹은 조사심판(Investigative Judgment)을 은혜로 체험하는 마지막 날의 성도인 것이다. 이와같이 성소제도가 지니고 있는 심오한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지극히 피상적인 비평을 계속하게 되는 불행과 고통을 치르게 된다.
비평 박영관 “안식교의 조사심판은 구원이 오직 은혜로 얻어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안식교의 조사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칭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르미니안주의 사상에 기초하였고, 성경의 해석을 환상적 신비주의로 풀이한 결과로 생겼으며, 그리고 구약의 율법주의를 고수하려는 데서 발생하였던 것이다.”
변 증 성소 제도에 나타난 복음의 기본 원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이러한 오해와 왜곡된 비평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건전한 신학 풍토가 조성되어야 할 필요를 다소 느낀다.
대속죄일과 초막절
구속의 과정을 표상(表象)으로 드러낸 구약성경의 일곱 절기 가운데서 여섯번째인 7월 10일 대속죄일이 지나자마자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계속되는 마지막 일곱번째 절기인 초막절(草幕節)이 이르러온다. 그것은 대속죄일을 “스스로 괴롭게”(레 23 : 29) 하는 진정한 통회로써,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23 : 28)로 바르게 보냄으로써 심판을 통과하여, “그 백성 중에서 끊쳐”(23 : 28)짐을 면한 성도들이 마침내 누리는 경험이다. 대속죄일을 합당하게 보낸 결과로 다시 속죄할 것이 없는 대속죄(大贖罪)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정결(淨潔)을 경험한 것이다(레 23 : 16, 19, 27 ; 히 9 : 13, 14, 23).
속죄(贖罪)는 구속(救贖)의 내용이며, 구속은 종되었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해방(解放)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곱 안식년이 일곱번 지난 후 이르러 오는 완전한 자유와 해방과 회복의 표상인 희년(禧年 ∙ Jubilee Year)이 대속죄일의 행사가 끝난 직후에야 시작되는 논리적인 이유요 순서이다.
“7월 10일은 대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50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自由)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 : 9, 10).
엄숙한 대속죄일이 지나자마자, 희년이 해당하는 해에 전국에는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희년의 나팔이 울려퍼진다. 빚에 팔려 기업의 땅은 남에게 넘어가고 가족들은 종으로 팔려 뿔뿔이 헤어져 고달프고 슬프게 살던 괴로운 종살이는 끝났다. 범죄한 이후의 인간의 처지 이다. 희년과 함께 모든 땅은 본래의 주인에게 다시 돌아오고(레 25 : 23 ~ 28) 팔려간 종들은 해방되어 감격스러운 이산가족의 재회가 이루어진다. 진행되고 있는 하늘의 대속죄일 행사인 조사심판이 끝난 후 울려퍼지게 될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살전 4 : 16), 곧 재림의 나팔은 바로 이것을 상징한 희년의 나팔소리인 것이다. 죄에 얽매어 종살이하고 죽음에 갇혔던 성도들이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풀려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 : 17).
공중으로 끌어올린 후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대속죄일 직후에 이르러 오는 초막절 행사의 의미요 내용이다.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꿉 땅에서 인도 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레 23 : 40 ~ 43).
초막절, 혹은 장막절은 출애굽이 끝난 후 약속의 땅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면서 감사에 넘치고, 기쁨에 넘치는 연중 마지막 절기이다. 대속죄일 행사를 통하여 완전한 구속을 경험한 백성들은 전국에 울려퍼진 희년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오래만에 재회(再會)한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이르러 초막을 짓고, 방금 수확한 새 과실을 먹으며 광야에서 마셨던 반석의 물과 광야 길을 인도한 불기둥을 기념하는 성대한 의식을 거행했다. 출애굽과 광야생활은 끝나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이른 것이다. 출애굽, 곧 구속의 모든 과정이 이제야 끝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속죄일의 조사심판을 끝내고 희년의 나팔소리인 재림의 나팔소리를 들으며 승천하여,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히 12 : 22)인 것이다. 초막절은 본래 예루살렘에서 지키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옛 언약에서는 땅의 예루살렘이었으나(슥 14 : 16, 17) 새 언약에서 그것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인 것이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계 7 : 9) 찬양하고 경배하는 모습이다.
손에 잡은 종려가지, 마시는 생명수의 샘, 먹도록 허락된 하늘의 새 과실인 생명과,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계 7 : 15)시는 것 등 모두 초막절의 정취이다. 그들은 영적 출애굽과 광야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하늘에서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된 구속의 게획은 마지막이요 완성을 나타내는 일곱번째 절기인 초막절에 이르러 그 모든 여정이 끝나 복락원 (復樂園)의 새 아침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아름답고 감격스럽게 짜여진 구속의 역사, 곧 천로역정(天路歷程)이 성경을 꿰뚥고 있는 성소제도에 수 놓여진 놀라운 구속의 위대한 청사진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간적인 성소제도가 시간적인 일곱 절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아름다운 입체적(立體的)인 진리임을 깨닫게 되면서, 지성소의 봉사가 시작되는 대속죄일이 왜 초막절 직전인 여섯번째 자리에 와야만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무시하고, 지성소의 봉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한 예시”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신 것만을 나타내는 막연한 사건으로 국한시키면서, 그 이상의 놀라운 진리를 구체적으로 밝혀 소개하는 안식일교회를 이단으로 비평하는 인사들에 대해, 성경을 비평의 목적을 가지고 연구하지 말고 엄숙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진지한 마음 가짐으로 깊이 있게 연구할 것을 간청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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