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9권
趙甲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제36장 「一人 쿠데타」로 가는 길
『이 따위 놈의 선거는 이제 없어!』
1971년 4·27 大選을 치르면서 朴正熙는 선동과 金權이 휩쓰는 선거판에 회의를 느낀다. 1970년대에 한국이 직면할 격동과 격랑을 내다보면서 그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한국적 일대 변혁을 구상한다. 민주주의의 거추장스러운 장식물들을 제거하고 국력을 조직화하여 능률을 극대화함으로써 金日成의 도전을 꺾어 버리겠다는 그의 집념은 憲政을 중단시키고 「10월維新」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그의 고독한 결단에 의한 「一人 쿠데타」였다
1.『정치 연설은 이것이 마지막』
1971년 4월25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朴正熙 후보는 4월27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위한 마지막 연설을 했다. 朴대통령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요즈음, 우리나라 야당 사람들이 나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는 가운데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또 다시 朴대통령을 뽑아 주면 총통제를 만들어 앞으로 朴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을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권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거니와, 내가 이런 자리에 나와서 여러분에게, 「나를 한 번 더 뽑아 주시오」 하는 정치 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를 자신감 있게 피력했다.
『현재 우리나라는 全세계의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적이란 평을 듣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에 全세계 120여 개국 중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경제성장이 빨랐는가 하고 유엔과 세계은행에서 통계를 내어 보았더니, 가장 경제성장이 빠른 국가 중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이 세 번째에 들어갔습니다. 또 어느 나라의 수출성장이 제일 빨랐는가 하면 120여 개국 중에서 우리나라가 단연 1위였습니다』
朴대통령은 옛날 이야기를 했다.
『10년 전 5·16 혁명이 나기 며칠 전 대구 시내에 있는 몇몇 백화점에 들러서 내의와 양말을 사려고 주인한테, 「내의와 양말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내 앞에다 내놓은 물건은 전부가 일제 아니면 미제, 홍콩제뿐이었습니다. 「우리 국산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아주 쑥스러운 얼굴을 하면서 저쪽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국산 양말 몇 켤레를 갖고 와서, 「아이구, 손님 이거야 어떻게 신겠습니까. 그거 국산은 못 신습니다. 차라리 외제를 사시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서울 시내의 백화점이나 기타 모든 상점에 가 보면, 그때와는 격세지감이 있을 것입니다』
2. 바르르 떨리던 손
이날 연설에서 朴대통령이 『이번 선거를 끝으로 다시 입후보하지 않을 것이니 꼭 찍어 달라』고 호소하지 않으면 수도권에서 金大中 후보에게 너무 뒤져 위험하다고 건의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화당의 수도권 선거 책임자이던 康誠元(강성원)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며칠 전 朴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다시는 출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표가 안 나옵니다. 지금 서울에서 8 대 2로 우리가 열세인데 지지율을 40% 선까지 끌어올리려면 각하께서 그런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朴대통령은 담배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화가 나면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大選을 사실상 총괄적으로 지휘하고 있었던 李厚洛 정보부장은 전날 朴대통령이 부산유세를 끝내고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마중을 나갔다. 같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가는 도중에 李부장은 『내일 유세 때는 꼭 「이번이 마지막 출마다」는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지방 유세의 분위기가 좋았는데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기분이 나빠졌다. 李부장은 이날 장충단 공원 유세장으로 가는 朴대통령에게 다시 『각하, 어제 그 말씀 꼭 하십시오』라고 졸랐다. 그는 선거 추이를 분석한 결과를 보고하면서 『결코 낙관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말 없이 뚱하고 나갔다.
언론은 이날 朴후보가 불출마 약속을 했다고 보도했지만 그는 장충단 연설에서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한번 더 뽑아 주시오」하는 정치연설은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했을 뿐이다. 표를 구걸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대통령을 세 번만 하겠다고 못 박지 않았다. 언론은 朴대통령의 깊은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이날 연설을 「4選 불출마 선언」이라고 보도했다.
이날 연설을 분석하면 朴대통령이 마음속으로 헌정을 중단시키는 일대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朴대통령은 국민들을 속이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이야기이다. 이날 연설의 묘한 뉘앙스 차이를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세 분석에 강한 康誠元 의원만은 자신이 건의한 내용과 朴대통령이 말한 것의 차이에 유의했다. 그는 그 뒤에도 朴대통령의 연설을 유심히 분석하다가 1972년 10월1일 국군의 날 연설에서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란 단어가 나타나자 주위에 『이달 안으로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 말하고 다녔다.
장충단 공원 연설은 朴대통령에게 선거와 민주주의에 대한 근원적인 懷疑(회의)를 갖게 했음이 여러 증언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3.『그냥 실어다 날랐지』
1972년 6월 어느 날, 청와대 사정특보인 洪鍾哲(홍종철·前 문교부 장관)이 董勳(동훈) 비서관과 함께 朴正熙 대통령에게 전국 금융기관의 편중대출 상황 보고를 했다. 편중대출을 많이 받은 순서로 100大 기업과 개인을 표로 만들어 올렸다. 이를 훑어본 朴대통령은 『이 사람들이 나한테 말하던 내용과는 영 다른데, 이것 쓸모가 있겠군』이라고 하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朴대통령은 집무실 옆문을 열고 뜰로 나가 야외 식탁을 마련케 하고 두 보고자와 함께 점심을 하게 되었다.
洪특보가 『각하 요사이 시중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북한 요인이 서울을 다녀갔다던가 하는 소문인데…』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1년 전에 있었던 선거 이야기를 꺼냈다.
『董勳 비서관, 지난번에 내가 장충단에서 유세할 때 가보았겠지?』
『예, 굉장히 많이 모였더군요』
『이 사람이, 모였다고? 모이긴 무슨 모여, 그냥 실어다 날랐지, 하하』
(董勳 비서관은 「朴대통령이 대통령 선거 장충단 유세 때의 군중이 대부분 관권과 금력에 의해 동원된 것임을 알고 있구나, 역시 속는 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그 군중이 나는 참 무서웠어. 군중이 혼란을 일으키면 결국 무력을 동원해야 진정이 되어요. 내가 4·19 때 부산계엄사무소장이었는데 그런 꼴을 보았어요. 내가 정복을 입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서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하여 진정을 시켰어요.
만약 그 장충동에서 북괴가 모략전을 펴서 경찰관 복장을 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해놓으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고. 그걸 빌미로 하여 북괴가 군대를 들여보낼 수도 있지 않겠어. 그날 나는 연설할 때 그런 걱정으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연설을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와서 수행원에게 맨 처음 물은 말이 「휴전선에 이상이 없느냐」였어.
청와대로 돌아와서도 군중들이 다 해산했다는 보고를 받고 저녁을 먹었어. 작은 회사도 사장을 뽑을 때는 이런 저런 점을 살펴보고 신중하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는 대통령을 뽑는데 그런 식으로 군중을 잔뜩 흥분시키고 감정을 돋워 놓고, 그것이 식기도 전에 투표장으로 이끌고 가서 표를 던지게 한다면 엉뚱한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말이야.
董勳 비서관은 법을 배운 사람이고, 민주주의에 대해서 많이 알 터인데 어디 말해봐요, 이게 민주주의요? 가장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유권자를 만들어 놓기 시합하는 것이 민주주의냐 이 말이야』
朴대통령은 듣고만 있는 두 사람 앞에서 말을 이어갔다.
『그때 장충동에서 내 연설 자세히 들었겠지』
『예, 「이게 마지막 유세」라고 하시는 말씀 감명이 깊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한 말은 「이제 다시는 여러분들한테서 표를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였다고』
董勳 비서관은 「이 말은 言中有骨(언중유골)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朴대통령은 이때 갑자기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 치더니 이렇게 내뱉는 것이었다.
『이제 그 따위 놈의 선거는 없어!』
董勳 비서관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朴대통령은 이어서 인도네시아 헌법에 대해서 董勳 비서관에게 물었다. 자연히 인도네시아 이야기로 화제가 옮아갔다. 朴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서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대통령은 특히 1965년에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수카르노 대통령이 놀아나자 수하르토가 나서서 공산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이 살육당하는 과정을 설명해 나갔다.
朴대통령은 섬이 많고 문맹률이 높은 인도네시아가 그 현실에 맞는 헌법과 정치제도를 도입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식탁에서 일어서면서 두 사람에게 『오늘 한 이야기는 옮기면 안 돼』라고 일침을 놓았다.
4. 金鍾泌에게 『이것 안 되겠어』
1971년 4월28일.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이날 金鍾泌 공화당 부총재는 충남 서산 농장에 가 있었다.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는 朴대통령이 94만여 표 차이로 金大中 후보를 이기고 있었다. 金鍾泌에게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朴대통령이 현충사에서 충무공 탄신기념식에 참석한 뒤 온양관광호텔로 가니 그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호텔에 도착하니 안내자가,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 대통령이 방에서 쉬고 있으니 들어가라고 했다. 朴대통령은 서서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응, 어딨었어』
『저 서산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
朴대통령은 한참 침묵했다. 그 사이 金鍾泌은 陸英修 여사에게 가서 인사를 했다. 대통령은 소파 쪽으로 오더니 앉으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요새 골똘히 생각해 보는데, 이것 안 되겠어』
『뭐가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래도 빈곤을 추방하려고 열심히 일을 했어. 한 10년 열심히 하여 이제 굶지 않을 정도는 됐어. 수출도 잘 되고 말이야. 그런데 국민들이 내가 三選을 하겠다니까 언짢게 생각하는 것 같아. 그걸 모르겠어. 내가 영구집권한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지금은 정하지 않았지만 선거가 끝난 뒤에는 후계자를 정하겠다고 이야기했잖아. 그랬는데 金大中이가 뭔데 차이가 그것밖에 안 나나』
朴대통령은 자신을 압승시켜 주지 않은 국민들에게 매우 섭섭한 모양이었다. 좀처럼 이런 말을 하지 않는 朴正熙는 그야말로 작심한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사람(金大中)과 비교해서 국민들이 나를 대접하는 게 겨우 이 정도인가. 민주주의가 역시 약점이 있어. 우리나라 같은 경우 선거바람이 잘못 불면 엉뚱한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어. 그랬을 때 과연 이 나라가 일관성 있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할지 의심스러워. 그래서 내가 심각하게 걱정을 해』
朴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돈을 얼마나 썼나. 행정력은 얼마나 구사했나.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공화당이 각 지구당에 돈을 얼마나 내려보냈나 말이야. 그래도 요것밖에 차이가 안 나?』
이 대목에서 金鍾泌이 말했다.
『선거에 취약점이란 게 왜 없겠습니까. 이번에 각하 표가 의외로 적었던 것은 역시 저희 보좌하는 사람들의 잘못인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 침통해하시는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는 건 여러 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담에 내가 그만두기 전에 그런 면에서 취약점을 확실히 보완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해 놓는 게 내가 마지막에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요새 들어』
朴대통령은 이날 낮 온양호텔에서 있었던 다과회에선 선거에 대해 일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가뭄이 풀려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朴대통령의 불평을 들으면서 金鍾泌은 오히려 국민들이 현명한 선거를 했다고 생각했다.
『표차가 95만 표밖에 나지 않은 것은 국민들이 3選개헌에 대한 의아심을 풀지 않은데다가 표를 많이 주면 이 양반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1971년 5월8일.
1970년 12월 조선일보에, 고상현이라는 27세 파월장병 출신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작은 기사가 났다. 그는 서라벌 대학에 재학 중 입대하여 베트남전선에 나갔다. 근무 중 안면 및 전신 화상으로 양 손가락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특기인 악기를 다뤄 먹고 살아야 하는데 손가락을 쓰지 못하고 수술할 돈도 없다는 호소였다.
이 기사를 읽은 朴正熙 대통령이 그 해 12월4일 성형수술에 쓰라고 60만원을 주었다. 1971년 5월8일자 청와대 비서실이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고상현이란 사람은 60만원을 받아 수술을 받고 1만1240원이 남아 반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에 朴正熙 대통령이 메모 지시를 했다.
<앞으로 再起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支援할 터이니 本人의 希望이 무엇인지 알아보라. 잔금 1만1240원은 원호처를 통하여 본인에게 회송필(영수증 별첨)>
그해 6월2일 고상현씨 관련 보고서가 다시 대통령에게 올라간다.
<원호처로 하여금 각하의 뜻을 본인에게 전언케 하였던 바, 본인은 감격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자신의 노력으로 자립 자활하여, 각하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것이 본인의 의사입니다. 고상현 군이 성형수술을 한 명동병원 원장 장상숙씨는 수술비 수령액 50만5700원 중에서 40만원을 고상현군 자립을 위하여 기증하였습니다>
朴대통령은 이런 메모를 덧붙였다.
<장상숙 원장에게 치하서신 발송할 것(대통령 명의로)>
작은 데에도 치밀한 것이 朴대통령이었다.
5.『후계자를 추천해 봐』
1972년 5월 중순 어느 날. 8대 국회의원 선거 지원유세에 나선 朴대통령은 충남 온양에서 金世培 의원 지원 연설을 끝낸 뒤 헬리콥터를 타고 공주의 李炳主(이병주) 의원 지역으로 떠나면서 대전에서 출마했던 공화당 원내총무 출신의 JP 직계 金龍泰(김용태)를 동승시켰다. 공주에 도착한 일행은 점심시간이 되어 李의원 집에서 식사를 했다. 점심을 끝낸 다음 朴대통령은 주인인 李의원과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 朴鐘圭(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좀 쉬고 있으라 하고, 『나, 金龍泰 의원하고 이야기 좀 하겠어』라고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난 서울 유세 때 후계자를 키우겠다고 했는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러한 중대사는 전적으로 각하의 意中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신분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3選개헌 전에 金鍾泌을 후계자로 밀다가 혼이 났던 金龍泰로서는 사양하는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물어보니 대답하기 어렵겠지. 자네 생각나나? 6·25 때 대구 우리 집에서 맹세한 것, 「이 나라에서 빈곤만은 없애 보겠다」고 한 말. 이제 그 꿈이 이뤄지고 있네. 나도 3選개헌이 무리였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李承晩 박사도 개헌을 하지 않았던들 지금은 國父로서 존경을 받고 있었을 거야.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이룩해 놓은 國富와 국력을 북괴가 남침해서 하루아침에 불살라 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커! 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국력을 기르고 국방을 튼튼히 해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각하께서 下問하신 일은 저로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입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3選개헌을 반대하다가 내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 개헌을 하겠다고 하니 동의해 주지 않았나. 같이 걱정하는 뜻에서 묻는 것이야, 다른 뜻은 없어, 이 친구야!』
6.『종필이는 문제가 있어』
金龍泰는 朴대통령과는 광복 직후부터 인연이 있었고, 몇 안 되는 민간인 출신 5·16 혁명동지였다. 朴대통령은 공화당 초대 원내총무로 그를 임명하고 「두목」이란 애칭을 붙여 주었다. 그는 1968년 공화당內에서 金鍾泌 의장을 후계자로 옹립하려는 「국민복지회」란 단체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당에서 제명되었고, 1969년엔 공화당이 발의한 3選개헌案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해 7월 金의원이 태릉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데 金載圭(김재규) 육군보안사령관이 찾아왔다.
담담하게 지내는 사이였던 金사령관은 『벌써 金의원 집에 들러서 양복까지 가져왔으니 청와대로 같이 갑시다』라고 했다. 그는 金載圭의 차를 타고 가서 오랜만에 朴대통령을 만났다. 朴대통령은 약 40분 동안 3選개헌案에 가표를 던져 줄 것을 설득했다.
朴대통령은 金의원에게 공화당內의 개헌반대자들도 돌려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金龍泰는 오히려 대통령을 돌려놓으려 했다.
『내가 자네한테 설득을 당하고 있군. 金의원 어때? 지금까지 벌여 놓은 일들을 마무리하는 데까지만 시간을 얻을 수 없을까. 저질러 놓은 일들이나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 평생을 보내고 싶어. 우리 집사람도 자네와 꼭 같은 이야기만 하는데 사무실만 나오면 딴판이란 말일세』
朴대통령은 金의원과의 과거 인연을 꺼내 압박했다.
『자네와 나는 혁명에 목숨을 걸었던 사이가 아닌가. 나의 결심이 오판이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를 좀 도와주게!』
결국 金의원은 굴복했다. 그는 공화당에 남아 있는 개헌반대 의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달라고 건의했을 뿐이었다. 1969년 9월14일 새벽 2시에 공화당이 국회 제3별관에서 3選개헌案을 통과시킬 때 가표를 던진 의원들은 공화당 106명, 정우회 11명, 신민당에서 넘어온 3명, 그리고 金龍泰 의원 등 무소속 4명을 합쳐 총124명이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金의원은 아무리 朴대통령이 후계자를 추천하라고 해도 입을 뗄 수 없었다. 朴대통령은 담배를 연거푸 피우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金의원은 대통령의 침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속으로는 「내가 말한다고 해서 이 나라 역사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뗐다.
『각하, 저의 뜻과 함께 시중의 여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각하의 후계자가 되실 분은 金鍾泌 공화당 부총재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각하께서 3選개헌 전에 부총재로 임명해 놓으셨기 때문에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대답하는 데 그렇게도 시간을 끈단 말인가』
『섣불리 말씀드렸다가는 제 목이 온전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두목에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군』
『각하, 그렇습니다. 저는 겁쟁입니다』
『종필이… 글쎄, 다재다능은 하지만 신중하지 못해. 人和도 문제야. 吉在號(길재호)도 자기가 추천해 놓고는 요사이 犬猿之間(견원지간)이라고 해. 人和 없이는 막중한 일을 못해! 趙炳玉(조병옥) 같은 분도 군정 때 경무부장을 했다고 해서 對人관계가 나빠졌대요. 종필이는 정보부장을 하는 동안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진 게 흠이란 말이야』
이때 충북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기별이 들어왔다.
7. 金鍾泌 총리 등장
1971년 5월25일.
이날 치러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약진했다. 지역구에서 공화당은 86석, 신민당 63석, 국민당과 민중당이 1석씩. 전국구 의원들을 합치면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이었다. 공화당 창당을 주도해 왔던 金鍾泌계의 舊주류는 크게 약화되었다. 金成坤(김성곤)으로 대표되는 5·16 이전의 소위 舊정치인들과 그들과 손잡은 吉在號 같은 혁명주체들이 공화당의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이 新주류는 흔히 「4人체제」라고 불렸다. 당의장 白南檍, 재정위원장 金成坤, 사무총장 吉在號, 원내총무를 지낸 金振晩이 당을 끌고갔는데, 특히 金成坤의 지도력이 강했다.
이 4人 체제는 朴正熙를 위해 총대를 메고 3選개헌을 성공시켰고 1971년에 들어서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주도하면서 더욱 영향력이 커졌다. 朴대통령도 자신의 당선과 공화당의 승리를 위해서는 이들이 요구하는 人事·공천·청탁을 거절할 수 없는 처지였다. 朴대통령은 당연히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마땅하지만 권력자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할 수 없었다. 깔끔하고 소박한 朴대통령과 4人체제로 상징되는 舊정치인들은 생래적으로 맞지 않은 면이 있었다. 朴대통령은 돈과 이권이 오고 가는 與野 정치인들의 밤낮이 다른 모습에 대한 정보보고를 받을 때마다 이를 이용하고 허용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金成坤은 4년 후를 겨냥하여 내각제 개헌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폭넓은 인간관계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언론계와 야당에도 인맥을 구축해 놓았다. 「이 따위 놈의 선거는 그만해야 돼」라고 생각하고 있던 朴대통령에게는 이런 金成坤의 야망이 방해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고려를 반영한 대통령의 人事가 1971년 6월의 金鍾泌 국무총리 기용이었다. 내무장관은 吳致成(오치성). 吳장관은 취임하자마자 지사, 치안국 간부, 시장, 군수, 경찰서장에 대한 대폭적인 교체와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선거에 큰 역할을 하는 이런 요직의 인사 때는 공화당의 4人체제와 협의를 거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당시 요직에는 두 차례 선거를 위해서 공화당 실력자들이 천거한 인물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이들을 물갈이 한 것이다. 吳장관은 물론 朴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서 했다. 그는 내무부의 고위 공무원과 특히 경찰간부들이 어떻게 공화당, 특히 4人체제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조사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시정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지침을 미리 받았던 것이다.
金成坤, 吉在號는 이것이 吳장관의 독단이든지 金鍾泌 총리의 보복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공화당 主流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은 朴대통령이 자신들을 거세하려고 吳장관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도 느꼈을 것이다.
8. 尹대통령 사진도 걸어라!
1971년 7월29일.
朴대통령은 林大地(임대지) 총무비서관을 집무실로 불렀다.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사진 얘기를 꺼냈다.
『총리실이나 장관실에 가보면 집무실에 역대 전직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왜 청와대에는 없지?』
『尹潽善씨도 아직 살아 있는데 걸어 놔서 뭐 하겠습니까?』
『그런 정신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야. 밤낮 우리가 선거 때의 기분만 갖고 사나. 역대 대통령 사진을 모시는 것은 우리 나라 관습상 예의야. 총무비서는 역대 대통령 사진들을 액자에다가 정중히 넣어서 내 서재에 갖다 모시시오!』
朴대통령은 몹시 화가 나 있었고, 목소리 또한 높았다. 그날 총무비서관은 역대 대통령의 사진들을 구하느라 여러 곳을 뛰어다녀야 했고, 액자도 청와대 마크가 들어간 것으로 만들어 청와대 집무실에 걸어 놓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사진은 朴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그대로 걸려 있었다. 尹潽善 前 대통령이 명동시국선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도….
1971년 8월5일.
朴대통령은 을지연습종합강평 때 이런 요지의 유시를 했다.
<敵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를 한번 가상해 보자. 敵은 全휴전선에 걸쳐서 일제히 공격할 것이며, 동시에 그 시간을 전후해서 동·서해안으로 敵이 기습 상륙할 것이다. 또한 敵은 공수부대를 우리의 후방 깊숙이 대량으로 공중투하할 것이다.
만약에 앞으로 공산당이 우리 대한민국에 지하조직을 가지게 된다면, 이러한 조직이 敵의 기습에 호응해서 일제히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敵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군세력으로 공중공격을 해올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동이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움직이는 것은 역시 軍일 것이다.
다음에는 정부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한다든지 동원령을 하달한다든지 戰時 국가지도회의를 소집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충무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대응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들은 초기에 반드시 상당한 불안과 공포에 싸여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해야 할 것이다.
초기에 우리 軍이 신속 과감한 행동으로 敵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고, 또한 정부가 침착하고 자신 있는 행동으로 사전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잘 처리해 나가게 될 때, 처음에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던 국민들도 점차 냉정을 되찾게 될 것이고,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신뢰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공포감은 오히려 敵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해서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 자진해서 적극 협력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초기 대응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은 우리가 충분히 버티고 나갈 수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朴正熙가 그리고 있는 전쟁의 모습은 입체적이다. 이런 그림을 항상 머리에 넣어 두고 金日成을 상대한 사람이 그였다.
9.『金成坤이한테 똑바로 전하쇼』
1971년 9~10월: 抗命파동.
공화당의 지휘부를 장악하고 있던 4인체제는 金鍾泌 총리와 吳致成 내무장관의 인사에 불만을 갖고 있다가 야당인 신민당이 金鶴烈(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申稙秀(신직수) 법무장관, 吳致成 내무장관에 대한 해임결의안을 내자 직계 공화당 의원들로 하여금 吳장관 해임에 찬성하도록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朴대통령은 공화당內의 이런 움직임을 보고받고는 白南檍(백남억) 공화당 의장에게 집안단속을 지시하는 한편 金成坤에게도 간접적으로 뜻을 전했다. 9월 말 같이 골프를 친 사람들과 술을 함께 하던 朴대통령은 건설기업인 趙奉九(조봉구)가 선약이 있다면서 미리 일어서자 이렇게 말했다.
『趙회장, 그 자리에 金成坤이도 나온다고 했죠? 金成坤이한테 똑바로 전하쇼. 吳致成이 같은 어린애 문제를 가지고 계속 덤빈다면 혼날 줄 알라고. 똑바로 전해야 돼요』
朴대통령이 이 정도로 반대한다면 李厚洛 정보부장이 움직여 간단하게 당내 반란을 저지할 수 있었다. 李厚洛은 걱정하는 金在淳(김재순) 공화당 원내총무에게 『부결될 것이니 걱정 말라』고만 하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朴대통령도 반란 지도부 인사인 金成坤, 吉在號를 직접 불러 말릴 수 있었을 터인데 간접적으로 뜻을 전할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金, 吉 두 사람은 나름대로의 논리를 만들어 자신들과 계파 의원들을 설득했다.
『우리가 吳장관 해임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각하를 돕는 일이다. 吳장관에 대해서는 각하도 이미 능력의 한계를 알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당도 살고 국회도 산다』
吉在號는 혁명동지이자 육사 8기 동기인 吳致成과는 거의 원수지간이었다. 그는 朴대통령이 자신들의 반란을 추인하여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지만 金成坤은 그 정도로 확신에 차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동안 자신이 朴대통령에게 충성한 것을 감안한다면 사태를 이렇게 방치하면서 자신을 부르지도 않고 간접적인 경고만 보내는 대통령이 못내 섭섭하기는 했으리라.
최근 金鍾泌은 기자에게 해임결의안 표결이 있기 직전에 金成坤 의원 집을 찾아가 대통령의 강력한 뜻을 전하면서 야당에 동조하지 않도록 말렸다고 회고했다. 金총리는, 5·16 혁명 뒤 군사정부가 金成坤 의원의 6·25 때 행적을 알고도 덮어 준 것까지 상기시키면서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金成坤이 돌아설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일을 저질러 놓고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대통령에게 당하는 것이 자신을 믿고 따랐던 의원들로부터 욕을 먹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朴대통령은 이런 일로 金의원에게 부탁하기가 싫고 金의원은 이런 일로 자존심을 굽히기 싫고, 배짱이 센 두 사람은 일종의 자존심 대결을 벌인 셈인데, 그런 승부는 동원 가능한 권력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10.『내 전투경험으로 본다면』
1971년 10월2일.
이날 새벽 白南檍 의장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吳장관 해임결의안이 공화당 의원들의 반란에 의해 통과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청와대로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각하, 확증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吳내무 해임안은 가결될 것 같습니다. 표결을 하루쯤 연기하면 어떨까 해서…』
『그래요? 원내총무 보고로는 부결될 거라던데. 내 전투경험으로 보면 지휘관은 일단 정한 대로 밀고나가야 합니다』
반란의 실무 지휘자 중 한 사람이던 康誠元도 이날 아침 불안해서 吉在號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사에 앞서서 지휘관의 의지를 再확인하고 싶었다.
『여보 康의원도 날 못 믿소? 吉在號가 언제 당신 속입디까? 이렇게 하는 것이 대통령을 돕는 일이란 것을 康의원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공화당 의원총회장으로 가면서 白南檍의장은 金成坤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지금 각하께 보고하고 나오는 길일세. 생각 고치지 않으면 다치겠네』
金成坤은 낮은 목소리로 『吉在號를 만났느냐』고 물었다. 金成坤은 金在淳 총무한테도 吉총장을 만나 설득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吉在號 총장은 약간 흥분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와서 어쩌자는 겁니까』
白南檍·金在淳이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해임안을 부결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白의장은 朴대통령의 지시를 다시 옮기면서 『각하께서 복안이 있다고 하셨으니 전원 부표를 던져 달라』고 말했으나 반응이 냉담했다. 金成坤도 뒤늦게 吉在號·金昌槿(김창근)을 따로 불러내 『白의장이 총재를 만난 모양이던데… 의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라고 했더니 吉총장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날 본회의에서 金鶴烈 부총리, 申稙秀 법무장관에 대한 신민당의 해임안은 부결되었으나 吳내무에 대한 해임안은 공화당 의원 20여 명의 이탈로 해서 가결되었다(可 107표, 否 90표, 무효 6표).
金正濂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뭐 통과라구? 몇 표래?』
그러고는 말 없이 외면해 버렸다. 金실장이 나간 뒤 朴대통령은 공화당 의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白의장이 『각하, 뵐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白의장, 철저히 조사하시오! 조사를 해가지고 吉在號고 누구고 다 처벌토록 하시오!』
白의장이 미처 대꾸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기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朴대통령이었다.
『金成坤도 빼지 말아!』
이날 밤 金成坤·吉在號·康誠元 등 공화당 의원 30여 명이 정보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수사관들에게 얻어맞고 갖은 모욕을 당했다. 반란의 두 지휘관 金成坤·吉在號는 자진탈당 형식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약 7년간 朴정권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면서 金鍾泌 견제, 3選개헌, 朴대통령 당선을 가능케 했던 4인체제는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무너져 버렸다. 이와 함께 포스트朴을 꿈꾸면서 내각제 개헌을 준비했던 여당內 세력도 제거되었다.
그 1년 뒤 朴대통령이 제2의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한 세력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또 다른 독자세력인 金鍾泌은 이미 국무총리로서 유신 쿠데타로 가는 길의 동행자가 되어 있었다. 朴대통령이 그를 국무총리로 기용한 데는 유신정변에서 결백을 주장할 수 없는, 일종의 공범자로 만들려고 한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 朴正熙 이후의 대권까지 생각했던 金成坤은 정계를 떠난 뒤 한 측근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속았어. 그리고 내가 朴대통령이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서도 오판을 했어』
「원래 그런 사람」이란 말은 朴대통령이 결코 부하들의 반대에 몰려서 할 수 없다는 듯이 吳장관을 자르는 식으로 장난을 칠 인물이 아닌데 그렇게 밀어붙이다가 당했다는 뜻이다. 「속았어」란 말은 자신에게 한 말인지, 누군가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렸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11. 吳源哲의 방위산업 전략
1971년 11월9~10일.
朴대통령은 경제기획원에서 방위산업 건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차관先에 대한 교섭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청와대로 오는 차 안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실망과 낙심을 토로했다.
金실장이 집무실에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상공부의 吳源哲 鑛工電(광공전) 차관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金실장은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吳차관보는 『오늘 경제기획원 보고 때 배석했었는데 나름대로 방위산업에 대한 생각이 있으니 한번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金실장은 『지금 곧 청와대로 오시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진지한 토론을 벌여 몇 가지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무기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軍공장은 경제성이 없다. 그렇다고 민영군수 공장도 병기수요가 따라 주지 않으면 낭비가 심하다. 모든 무기는 분해하면 부품이다. 부품을 정밀 가공하는 기술이 핵심이다. 현대무기는 선진국 수준의 중화학공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의 고도성장, 수출증대, 국제수지의 개선을 위해서도 필수적이지만 방위산업의 기반이다. 따라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무기의 부품별·뭉치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제작케 함으로써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킨다.
1970년대의 한국을 크게 변모시킬 중화학공업-방위산업 동시 건설 전략의 대강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金실장은 吳차관보의 손을 이끌고 朴대통령 집무실(서재)로 들어가 직접 대통령께 보고하도록 했다.
朴대통령은 여러 각도로 질문을 했는데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세 시간이 넘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朴대통령은 吳차관보의 건의에 대체로 동의했으나 무기의 본격적인 대량생산에 4~5년이 걸린다는 말에는 불만이었다. 그는 북한군의 동향이나 해외 미군 감축 방침을 고려할 때 2~3년 내에 생산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사람이 서재를 물러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朴대통령이 金실장을 찾았다.
『내가 들어보니 방위산업뿐 아니라 중화학공업 건설도 직접 챙겨야 하겠어. 吳차관보를 청와대에서 일하도록 하시오』
『그러시다면 제2경제수석실을 신설하여 吳차관보에게 그 일을 맡기고 차관대우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장 내일 발령을 내시오. 그리고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는 즉시 병기개발을 시작하라고 전하시오. 대통령 지시라고 하시오』
12.『육탄전에 쓸 지뢰도 부족하다』
다음날 朴대통령은 서재에서 吳차관보에게 임명장을 준 뒤 선 채로 세 가지 지시를 또박또박 내렸다.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현재 초비상 상태라고 판단된다.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장비 사단으로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개발 생산토록 하라. 60mm 박격포도 생산하라. 청와대에 설계실부터 만들어서 직접 감독하라. 나도 수시로 가 보겠다.
처음 나오는 병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우신 試製品(시제품)부터 만들라. 그러고 나서 개량해 가면 쓸 만한 병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우수한 人材를 동원하라. 북한군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는 李厚洛 부장을 만나 설명을 듣도록 하라』
이 순간 공군장교 출신인 吳수석은 朴대통령이 軍지휘관처럼 지시한다고 생각했다. 그 또한 차렷자세였다. 하마터면 거수경례를 할 뻔했다. 吳수석은 『예 알았습니다』라고 크게 말했다. 다시 군대에 입대한 기분이 들었다.
吳수석은 그 길로 청와대 옆 궁정동의 정보부장 사무실로 갔다. 李부장은 『지금 각하로부터 지시를 받았다』면서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 일선은 급박합니다. 북괴는 부대를 일선으로 이동시키고 있고, 탱크들도 휴전선에 바짝 붙여 놓았어요. 그런데 우리의 대비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정보부의 판단입니다. 우리의 M1 소총은 북한측 아카보 소총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그나마 자동장탄이 안 된단 말이에요. 하루속히 M-16으로 교체해야겠는데 현역만 바꾸는 데도 5~6년이 걸립니다』
李부장은 캐비닛을 열고 총 한 자루를 꺼내어 주면서 말했다.
『이것이 서독軍에서 채택한 총인데 구조가 아주 간단합니다. 참고로 해서 만들어 보시오. 지금 일선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탄약입니다. 심지어 탱크가 쳐들어올 때 결사대가 지뢰 한 개씩을 메고 뛰어드는 육탄전이라도 해야 할 판인데 그런 수의 지뢰도 없다는 보고요. 吳동지, 나라를 위해 死力을 다해 주시오!』
『예,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한번 다녀오시오. 모든 병기와 탄약을 자급자족하고 있다고 해요』
吳수석은 이날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분위기와 결심에 완전히 휩싸이게 되었다. 군복은 안 입었지만 다시 입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朴대통령, 전략참모본부장은 金正濂 실장, 나는 방위산업담당 참모가 된다>
13. 청계천 고물상까지 뒤져 국산兵器 개발
朴대통령으로부터 병기 시제품 긴급개발 지시를 받은 국방과학연구소는 한달 반 안에 소총과 박격포를 만들어야 했다. 총포담당 洪判基 소령(뒤에 대령 예편, 연구소 부소장 역임)은 申應均(신응균) 소장의 지시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해보겠습니다.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은 가능합니다. 작동도 할 수 있습니다. 기능상은 가능합니다. 다만 성능만은 보장하지 못합니다』
무기 제작에 들어가는 특수강을 구하기 위해서 연구원들은 시중 철물상과 청계천 고물상을 뒤졌다. 3.5인치 로켓포의 경우 도면이 없었다. 로켓 분야 담당이던 具尙會 박사(후에 연구소 부소장 역임)는 육군에서 쓰던 포를 빌려와 해체하고 부품의 치수를 정밀측정하여 逆설계를 했다. 그는 또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던 徐廷旭 박사(뒤에 과기처 장관 역임)가 옛날에 청계천에서 구했던 3.5인치 로켓포의 미군기술교범을 참고로 하여 부품 및 조립도를 만들었다.
1971년 12월17일.
청와대 대접견실에는 샹들리에 불빛이 찬란했다. 유사 이래 최초의 國産 병기가 전시되었다. 60mm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류. 새로 칠을 한 병기들은 무기가 아니라 예술품처럼 보였다. 朴대통령은 申應均 소장에게 치하의 말을 한 뒤 진열대 쪽으로 다가갔다. 침묵이 흘렀다. 그 순간 대통령을 따라 들어왔던 洪性澈 정무수석이 자신도 모르게 『와!』하고 소리를 냈다. 朴대통령은 그를 향해 뒤돌아보더니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가 만든 것이야. 금년도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우리도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 우리나라 공업도 이 정도로 발전된 거야. 그런데 언제 試射(시사)를 하는가』
14. 50만원씩의 격려금
1971년 12월26일.
일요일이지만 대연각호텔 화재 뒤처리가 있어 많은 비서관들이 출근했다. 낮에 朴대통령은 金正濂 비서실장과 金聖鎭(김성진) 대변인, 柳赫仁(유혁인) 비서관, 그리고 洪性澈, 金龍煥 비서실장 보좌관 등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전날과 마찬가지로 안보와 방화 문제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특근을 했으니 특근 수당을 줘야겠군』
대통령은 웃으면서 미리 준비해 놓았던 봉투를 꺼내어 참석자 모두에게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봉투에는 당시로는 거액인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식사를 끝낸 대통령은 오후 1시30분쯤 金聖鎭, 柳赫仁 등과 함께 뉴코리아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첫 홀을 돌고 두 번째 홀에 갔더니 지만 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골프를 끝내고 난 뒤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막걸리를 마셨다. 중간에 池弘昌 前 주치의가 참석했다. 화제는 주로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방글라데시 독립에 관한 것이었다.
『방글라데시는 홀로 서기가 힘들 거야. 상당한 난관을 겪게 될 게 분명해』
15. 有備無患
1972년 1월11일.
이날 연두 기자회견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작년까지 1, 2차 경제개발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결과 군사적인 측면을 제외한 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북괴를 앞서게 되었다』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한국이 처한 위기를 강조하기 위하여 서두에 북괴의 위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朴대통령은 남북한의 국력 격차를 가져온 지난 10년의 전략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북괴는 무력통일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다른 일을 제쳐놓고 모든 분야에서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전쟁준비를 위한 군사력 증강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는 평화통일을 목표로 했으므로 5·16 이후 지난 10년간 경제개발에 주력했습니다. 국력은 총체적으로 우리가 앞서지만 군사력 부문에서는 우리가 뒤지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며 여러 가지 비상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對北 우위를 점한 것은 金日成의 先군사건설 전략과 朴正熙의 先경제건설 전략의 대결에서 朴대통령이 이겼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군부 출신인 朴대통령이 군사비 지출을 억제하고 경제발전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은 駐韓미군의 우산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朴대통령은 충실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하여 자주국방력 건설을 추진하는 데 반해 金日成은 1960년대의 군사력 건설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건설을 위해 외자를 유치하였다가 실패하여 부도국가가 되어 버린다. 1976년부터는 연간 군사비 지출에서도 남한이 북한을 능가하게 된다.
이것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최고조에 달한 북한의 군사력 증강과 마주하게 된 1972년의 朴正熙는 자신을 한강 둑에 홀로 선 사람, 즉 「한강물이 넘치는지 않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이해 정초에는 「總力安保」, 「有備無患」을 신년휘호로 정하는 등 위기관리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이날 기자회견도 그런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북괴가 무력적화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위해서 모든 대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朴대통령은 국력을 동원하고 조직화하여 국가보위를 위한 총력안보체제를 다져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의 역할에 대한 그의 평소 소신을 피력했다. 이때 이미 朴대통령은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제도개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부담이 너무 큰 민주주의 제도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식품과 군살을 뺀 효율적 한국적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일대 개혁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그런 생각들이 스며 나왔다.
朴대통령은 『우리나라와 같이 개발의 도상에 있는 나라에서는 정치의 초점이 경제건설에 있다』고 했다.
『국민들이 먹고 입는 생활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의 경제건설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성장을 위해서도 절대적인 기본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제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다」고 하는 나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믿고 있습니다』
朴대통령은 전해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의 철학을 쉽게 정리했다.
『정부의 상당한 지원이 따라가는 이 사업은 농촌 어느 부락이나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조·자립·협동정신이 왕성한 그런 농촌, 그런 농민들에 대해서 정부가 우선적으로 지원해 나가겠습니다』
말하자면 잘 하는 마을만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의 중요한 성공비결이 이런 식으로 차등지원함으로써 전국 농촌마을들끼리 경쟁심을 일으킨 데 있었다.
전해 선거를 통해서 『이런 국민들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는 판단에 도달했던 朴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수십분 동안 담배꽁초나 휴지를 아무데서나 버리지 않는 바로 그것이 애국이라고 강조했다. 교사가 학생들을 타이르는 식이었다.
16. 『담배꽁초 버리지 않는 게 애국』
『옛날 중국의 당나라 詩人이 읊은 漢詩에 이런 게 있습니다.
盡日尋春 不見春(진일심춘 불견춘)인데,
歸來庭前看梅花(귀래정전간매화)라.
어떤 이른 봄날 야외에 봄 구경을 나갔습니다. 아직도 봄이 이르기 때문에 종일 돌아다녀 보아도 봄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 저녁에 자기 집에 돌아와서 마루턱에 앉아서 저 뜰 앞을 보니까, 담 밑에 매화나무가 한 포기 있는데, 거기에 매화가 활짝 피어 있더라, 바로 우리 집 뜰 앞 여기에 봄이 있구나, 이것을 모르고 하루 종일 들과 산을 헤매면서 봄 구경을 다녔구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애국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일상 생업을 통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그런 행위가 바로 애국입니다.
우리 수도의 신사 숙녀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그런 골목에서 휴지와 담배꽁초가 지저분하게 버려져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이것이 이리저리 날립니다. 우리 시민들이 저런 데에서도 간단한 애국을 할 수 있습니다. 담배꽁초를 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휴지는 어디까지나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자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애국이 되는가. 휴지를 마음대로 버리면 서울시장은 청소부를 많이 고용해야 하는데, 서울시장이 자기 개인 호주머니에서 월급을 주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쓰레기를 안 버리는 것은 국가 예산을 절약하는 일입니다.
옛날 독일의 니체라는 사람이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자기 집 앞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것이야말로 애국의 제1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못 하는 사람은, 뒤집으면 그것도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애국이라는 소리를 입에 내지도 말아야 합니다. 애국이란 것이 관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朴대통령은 보름 전에 일어났던 대연각 화재를 예로 들면서 안보도 미리미리 대비했을 때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만일 그렇게 해 가지고 전쟁이 안 나면 어떻게 할 테냐, 이러한 소리를 하더랍니다. 만일, 이렇게 해가지고 전쟁이 안 나면 그것은 만번 다행입니다. 우리가 대비를 해야 전쟁이 안 날 것 아닙니까. 왜 전쟁도 안 났는데 그렇게 소란을 피우며 준비를 했느냐, 그런 책임을 추궁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겠습니까』
17. 『金大中 구상은 잠꼬대』
이날 朴대통령은 『한 달 뒤에 중공을 방문하게 될 닉슨 대통령이 작년에 친서를 보내 「美中회담에서 한국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공개하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여하한 경우라도 우리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과, 대한민국 정부와 상의 없이 우리 이익에 위배되는 여하한 결정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태도라는 것을 확실히 천명해 둡니다』
朴대통령은 기자회견을 빌어 전해 金大中 후보가 주장했던 한반도 평화에 대한 「4대국 보장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소련·중공·일본이 그렇게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믿을 수도 없고 안심하고 살 수도 없습니다. 혹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북괴가 쳐들어오면 네 나라가 뜯어말릴 것 아닌가 할지도 모릅니다. 작년 연말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났을 때 유엔 안보리 이사회에서 두 나라 배후에 있는 美·蘇·中 3대 강국은 앉아서 입씨름만 했습니다.
아마 미국 측은, 「이것은 북괴가 먼저 전쟁도발을 한 것이다. 당장 원위치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소련과 중공은 金日成이 먼저 도발한 것을 뻔히 알지만 金日成이가 먼저 도발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이쪽에서는 「북괴가 먼저 했다」, 저쪽에서는 「남한에서 먼저 했다」, 이렇게 입싸움만 하고 있는 동안에 승부는 결정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韓美 방위조약이 북괴의 전쟁 도발을 막는 유일한 방파제가 되는 것이지 4대국 보장론 운운은 잠꼬대 같은 이야기입니다』
朴대통령은 전해의 남북적십자회담으로 통일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점에 경고를 보냈다. 그는 신라가 진흥왕 때부터 120년 동안 준비하여, 그것도 唐의 힘을 빌려 삼국통일을 했다가 그 唐을 내쫓는 전쟁을 통해서 통일한 완수한 史實을 설명한 뒤 이렇게 요약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내실을 키워야 하고,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어야 하며, 그때 우리가 기민하게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통일이 안 됩니다』
그는 광복이 왔을 때 우리의 내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 독립국가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점을 지적했다.
그는 자주국방에 대해서도 이렇게 요약했다.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 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 하고 이웃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집 식구들이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
18. 『金大中이 당선되었더라도 군대가 가만있지 않았을 것』
1972년 2월22일.
대통령은 청와대 출입을 그만두게 된 權肅正·宋英大·鄭準模·金潤煥 기자에게 저녁을 대접했다. 이 자리에는 金聖鎭 대변인이 배석했다.
『미국 닉슨의 중공 방문은 목적의 90% 이상이 再選을 위한 것이야. 닉슨의 중공 低자세 외교는 유쾌한 일이 아니야. 우리의 국방력은 거의 완성에 가까운 자주 능력을 갖추었어요. 미국을 언제까지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오. 지금과 같이 어려운 때일수록 국민은 단결해야 할 것 아닌가.
야당 인사라고 하여 책임 없는 발언을 해서는 안 돼(필자 注 : 金大中 후보의 예비군 폐지, 軍 복무 단축, 병력 감축 등 주장과 관련해서).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야당의 金大中 후보가 무책임한 발언을 많이 했는데, 이런 말은 국민의 판단력을 해롭게 하는 것이야.
설령 그런 말을 한 金씨가 당선되었다고 할지라도 모측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오. 내가 극력 막는다 해도 그들은 움직였을걸(필자 注: 군대를 가리키는 듯).
金이 청와대 출입 메달을 만들어 주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식에 어긋난 선거전을 했는데, 앞으로는 이런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생각이오. 다음 선거는 비상사태 아래서 치르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무책임한 발언은 법의 규제를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해요. 한마디로 말해서 과거와 같은 선거 양상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오』
대통령은 북괴가 준동하고, 국내에서는 金大中씨가 선동하는 소요가 일어날 것이니 비상사태라도 선포하지 않으면 선거를 못 치를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1972년 4월3일.
朴대통령은 전해 12월에 만들었던 국산 兵器(병기) 시제품의 試射會(시사회)를 참관했다. 이날 시사회는 26사단 지구에서 있었다. 對전차지뢰를 터뜨리는 것을 朴대통령은 쌍안경으로 보고 있었다. 고물탱크 밑에 파묻어 놓은 지뢰가 터지자 불기둥이 솟았다. 그 순간 내빈석에서 보니 무슨 검은 물체가 「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악」 하면서 몸을 움츠렸다. 그 물체는 내빈석을 넘어 멀리 날아가버렸다. 모두 「휴」 하고 안도하는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담당수석비서관 吳源哲의 발밑으로 「탁」 하면서 떨어지는 게 있었다. 쇳조각이었다. 吳수석이 대통령을 보니 쌍안경으로 폭발지점을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파편이 날아온 것을 모르는지 『지뢰란 대단한 것이구만. 砲身(포신)이 떨어져 나갔어』라고 했다.
劉載興 국방장관은 『중지!』라고 외쳤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순서대로 진행하세요』라고 말했다. 시사회가 끝난 뒤 대통령은 81mm 박격포 쪽으로 가서 포신 윗부분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吳수석이 보니 꼭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의 치하는 필요없다고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다치다
1972년 4월21일.
朴대통령은 좌측 흉부 쪽에 筋骨(근골) 타박상을 입었다. 목욕탕에서 타일에 미끄러지면서 다친 것이다.
발표는 「산책 중 돌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타박상을 입어 당분간 휴양하실 것」이라고 했다. 항간에는 간이 나빠졌다느니 별별 소문이 나돌았다.
1972년 5월16일.
지난번 다친 후 대통령은 이날 처음으로 외부 행사에 참석했다. 5·16 민족상 시상식에 참석한 뒤, 대통령은 기자단과 金正濂 비서실장과 金聖鎭, 沈瀜澤, 권숙정 비서관 등과 함께 오찬을 들면서 5·16 당시를 회고했다.
『그때 해병대를 데리고 한강을 도하하는데, 내가 권총을 빼들고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면서 한강 다리 난간에 파여 있는 홈을 세 개째 지났는데도 아무도 따라나서질 않는 거야. 그래서 총을 한 방 쏘면서 「돌격 앞으로」 하고 다시 외쳤더니 그때서야 다 따라오더군』
1972년 5월21일.
대통령은 고향에 계시는 백씨 東熙 옹을 문병하고 거의 밤 10시쯤 되어서 청와대로 돌아왔다. 申範植 서울신문 사장이 대통령을 수행하였다. 歸邸한 대통령은, 『東熙 형님이 병세가 악화되어 식사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셨다』고 하시면서 수심에 싸여 있었다.
20. [남북비밀 접촉 내막] 『청산가리도 가져갑니다』
1972년 3월28일.
중앙정보부 간부 鄭洪鎭(정홍진·대외직명은 남북적십자회담 사무국 운영부장)은 이날 판문점을 통해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는 3박4일간 머물면서 북한노동당 조직부장 金英柱(金日成의 동생. 日軍 통역 출신)를 만나 李厚洛 정보부장의 訪北에 합의하고 왔다.
3월31일 서울로 돌아온 鄭洪鎭은 李厚洛 부장과 함께 청와대로 가서 朴대통령을 만나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수고했다』면서 술잔을 많이 권했다. 鄭씨가 집에 돌아가니 아이들은 『제주도 출장을 가셨다면서 귤도 안 사오시고…』 하면서 섭섭해했다.
1972년 4월26일.
朴대통령은 李厚洛 정보부장의 평양行에 앞서 이날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대통령 훈령」을 하달했다. 이 훈령은 북한 측에 대해 우리가 밝힐 기본입장이었다.
朴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훈령 요지다. <조국통일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회담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어야 한다. 4반세기 동안 정치·경제·사회·기타 분야에서 상이한 제도하에 놓여 있는 남북의 실정을 직시하고 통일 문제는 제반 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남북한 적십자 회담을 촉진시켜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보도록 할 것이며, 경제·문화 등 非정치적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정치적 문제로 이행하고, 非현실적 일방적 통일방안의 선전과 상호비방 및 무력사용을 하지 않는다>
1972년 5월2일.
이날 오전 10시 李厚洛 부장은 평양으로 출발하기 앞서 인사차 청와대로 왔다. 朴대통령은 李부장과 만날 때 金鍾泌 총리, 崔圭夏 특별보좌관, 金正濂 비서실장만 배석시켰다. 朴대통령은 『미국 CIA 서울 책임자에게 잘 알려 주었지. 잘 갔다와』라고 말했다.
朴대통령은 敵地로 들어가는 李부장 일행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각서를 북측으로부터 받도록 하고 진행과정을 미국 CIA에 알려 주도록 했다. 남북한은 평양에서 서울로 연락이 가능하도록 평양-서울 간 임시전화선도 개통시켰다. 李厚落 부장은 웃저고리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미국 CIA와 협조는 잘 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여기 준비해 갑니다』라고 했다. 북한에서 유사시에 자결하기 위해서 청산가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李厚洛은 5월5일 오전 전화연락에서 『어제 밤에 金日成 수상과 만났다』고 알려 왔다.
21. 경직된 朴成哲에 놀란 대통령
1972년 5월31일.
5월29일에 도착한 북한 측 대표단이 이날 청와대로 와서 朴대통령을 만났다. 북한 측 인사는 朴成哲 제2부수상, 柳章植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겸 대외사업부장, 金德賢 노동당 정치위원회 직속 책임지도원이었다. 우리 쪽에선 金鍾泌 총리, 金正濂 실장, 崔圭夏 특보, 李厚洛 부장, 金致烈 차장, 鄭洪鎭 국장이 배석했다.
朴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으나 朴부수상 일행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朴대통령은 金日成의 안부를 물었다.
이윽고 朴成哲은 자세를 고치더니 웃옷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는 『朴대통령 각하』로부터 시작되는 金日成의 인사, 남북회담에 대한 기본 입장을 수첩에 적힌 대로 읽어 내려갔다. 그 이후 대화가 있었지만 朴成哲은 들으면서 메모만 할 뿐 반론도 동감도 없었다. 무슨 말로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훈령을 받지 못한 탓이었다. 메모만은 세 사람 전원이 한 자도 빼놓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적어 내려갔다.
朴대통령은 타이르듯 말했다.
『귀하들은 남북 간의 장벽을 한꺼번에 허물자고 하는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이 해야 합니다.
朴成哲 부수상도 시험 쳐본 적이 있지요. 시험을 볼 때도 쉬운 문제부터 풀고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풀지 않습니까. 남북 대화도 같은 식으로 풀도록 합시다』
공식 면담이 끝나자 만찬 전에 쌍방만 참석한 칵테일 파티가 있었다. 朴대통령이 朴成哲에게 『자, 술 한잔 합시다』라고 권해도 朴은 『저는 약을 먹고 있는 중이라서…』라면서 술잔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朴대통령은 예상은 하였지만 북한 권부의 실력자라는 朴成哲까지 이렇게 경직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대통령은 새삼 金日成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 실감하는 바가 있었다.
22. 李厚洛: 『영구집권으로 가야 할 이유』
1970년의 8·15 선언, 1971년 8월12일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의, 1972년 7·4 공동성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남북대화는 朴대통령이 주도권을 잡고서 진행하였다. 그는 8·15 선언을 통해서 『남북한이 선의의 체제경쟁을 하자』고 제의했다.
1967년부터 늘어난 對南무장침투, 1968년 1·21 청와대 기습사건, 이틀 뒤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그해 가을의 삼척·울진 공비 침투사건, 이듬해의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으로 이어지는 남북한의 긴장은 남한을 제2의 베트남화하려는 金日成의 모험주의를 잘 보여 주었다.
1960년대 말에 북한은 군사력 건설의 절정기에 달해 있었다. 미국은 베트남戰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존슨에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 대통령은 게릴라戰이나 제한전쟁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괌 독트린」을 선언했다. 미국은 또 키신저 외교를 통해서 중공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했다.
1970년대에 들면서 朴대통령은 북한의 위협, 美中 접근, 남한의 국력충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對北정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 되었다. 그것은 무력충돌을 막기 위한 남북대화 채널의 개척과 방위산업 건설을 핵심으로 하는 자주국방 정책으로 나타났다. 제2의 쿠데타라고도 볼 수 있는 유신조치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이 시기 朴대통령을 지배한 가장 중심적인 전략 목표는 『남한의 국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 가므로 이제는 전쟁만 막으면 된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무장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朴대통령의 對北제의에 金日成이 호응한 것은 남북대화에 따른 평화무드를 이용하여 남한에 적화기지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李厚洛 당시 정보부장은 月刊朝鮮 오효진 기자와의 인터뷰(1986년 12월호)에서 유신을 하기 위하여 남북회담을 한 것이 아니라, 1971년부터 남북회담을 하는 과정에서 유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내가 대통령에게 그랬어요.
「북한과 대화를 하려면 우리가 딱 한 가지 의견만 가지고 해야 하는데 이쪽에선 말이 많으니까 대화가 안 됩니다. 이 체제 갖곤 대화해 봤자 우리가 손햅니다. 대통령께서 영구집권은 안 하더라도 영구집권할 수 있다는 기분으로 해야 대화가 되는 거지 얼마 있다가 그만둔다는 체제 갖고서는 대화가 안 됩니다. 이런 마당에 그렇게 안 하신다면 북한한테 밤낮 밀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민 가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23. 『해놓고 나면 70년대를 잘 넘겼다고 할 거야』
李부장이 그런 건의를 하기 전에 이미 朴대통령은 체제변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李부장의 건의는 그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겠지만 결정적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신 쿠데타는 오로지 朴正熙 한 사람의 구상과 결심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육사 8기생들이 시작했던 5·16 혁명과는 다르다.
金鍾泌 총리는 1972년의 7·4 공동성명 이전인 5월 말 토요일에 유신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朴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고 기억한다.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12시 조금 전에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오후에 무슨 예정이 있나』
『다른 예정은 없습니다. 운동이나 할까 하는데요』
『나하고 가지. 이따 올라와』
뉴코리아 골프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좀 획기적인 체제를 구상하고 있어. 우리나라는 선거를 잘못하면 어디를 갈지 몰라. 내가 보기에 1970년대가 순탄치 않아. 없는 국력을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관리해 나갈 수 있는 체제로 정비되어야 해. 그러지 않으면 도약이 어렵겠어. 이것은 많은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지만 해놓고 보면 1970년대를 잘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거야. 조금 더 있다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게. 그때는 임자도 검토 멤버에 들어와야 해』>
金鍾泌은 6월 이후엔 유신조치에 대한 윤곽을 알았다. 발표 날짜를 잡는 회의 때도 참여했다.
24.『자기 나라에 쓸모 없는 인간이…』
1972년 5월11일.
이날 청와대 비서실은 朴正熙 대통령에게 「國史교육강화발언건의」라는 제목의 보고를 했다. 그 요지는 「국사교육은 고등학교까지만 하고 각 기업체 채용시험은 물론 국가시행 考試에 있어서도 극소수(2%)의 시험만이 국사를 시험과목에 포함시키고 있는 실정이다」는 것이었다.
서울大 교양과정부의 필수과목 중에 세계문화사는 포함되어 있으나 國史 과목은 없다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보고서 옆 여백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세계문화사를 알기 전에 제 나라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하지 않는가. 慨嘆. 慨嘆.>
朴대통령은 1972년 2월7일 경북도청 연두순시 때도 국적 있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지난 날 우리 교육은 선량한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막연한 목표를 내세웠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한국사람이면서도 정신상태는 한국인인지 외국인인지 분간할 수 없고 국가이념조차 분명치 않는 인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훌륭한 한국인이 된 다음에야 선량한 민주시민도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세계인도 될 수 있다. 자기 나라에 쓸모 없는 인간이 세계를 위해 공헌했다는 기록은 동서고금을 통해 찾아볼 수 없다』
朴正熙는 역사서를 많이 읽었다. 그의 역사관은 그의 통치철학의 바탕이었다. 그는 「主史翼經」, 즉 역사적 경험을 중시하고 이론을 보조적으로 보려는 관점의 소유자였다. 요사이 한국의 지도층이 역사, 특히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무식하거나 왜곡되고 천박하며 편협한 관점을 가진 경우가 참으로 많다. 「한국號」의 방향이 잘못 가고 있다면 이런 역사文盲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1972년 5월18일.
이날 새마을 소득 증대 촉진대회에 참석한 朴正熙 대통령의 치사는 두 시간이 넘었다. 그는 메모를 가지고 즉석 연설을 하는 식으로 자신의 꿈과 열정과 불만들을 작심한 듯 토로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을 「잘 살기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배 부르게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도 물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잘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좀더 여유 있고, 품위 있고, 좀더 문화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야겠고, 그것도 나 혼자만 그렇게 잘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이웃사람은 지금 밥을 못 먹고 굶고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잘 입고 여유 있고 품위 있는 문화적인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朴대통령은 같은 맥락에서 도시민들이 농촌지역으로 놀러가서 농민들에게 방해되는 행락을 한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지난 주말에 서울 근교에 나가 보니 산 위에서 떠드는데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학생인지 하여튼 젊은 사람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잘 살아보기 위하여 농민들이 새벽부터 새까말 때까지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일하고 있고, 특히 도시의 처녀 같으면 한창 멋내고, 몸 가꾸고, 맵시 부릴 만한 나이의 학교 갓 나온 시골처녀들이 삽을 들고, 곡괭이 들고, 머리에 돌을 이고, 내 고장을 한번 살기 좋은 마을로 만들어 보려고 열의를 올리고 있는데, 그 옆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지 어디 족속인지 모르지만, 부락사람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그런 행동을 안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 짓들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시행락객들을 향해 대통령이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지 어디 족속인지 모르지만』이라고 거의 막말을 한다. 이 순간 朴대통령은 철권 통치자가 아니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도 특권, 사치에 대해서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유지했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완벽하게 권력을 조직적으로 행사한 그였지만 내면의 본성은 反骨(반골)이었다.
25.『선거 안 하는 방법 좀 짜내 보지』
1972년 6월8일.
대통령은 金비서실장과 비서관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할 일도 못 할 때가 많아. 깡패 소탕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경우지. 할 일이 있으면 너무 법에 집착하지 말고 과감히 일을 처리해 나가야지』
그러자 金正濂 실장이 입을 열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 주된 요인이 선거 때 마구 뿌려지는 정치 자금 때문입니다. 선거 때 생긴 경제 주름살을 펴려면 2년이 걸리는데, 겨우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보면 금방 또 2년 후에 닥쳐올 새 선거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는 잠시도 제대로 자랄 수 없습니다』
『선거 안 하는 방법 좀 짜내 보지, 허허. 유혁인 비서는 신문사에 있었으니 묘방이 있을 것 아닌가. 선배나 동료들에게 좋은 아이디어 있는지 물어 봐』
대통령은 이때 벌써 정보부를 시켜 유신 준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李承晩 대통령 때부터의 비서실 역사를 알고 있어요. 그 당시 전방 지휘관들은 후방에 나들이할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하면 경무대 비서관과 저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신경들을 많이 썼지. 요즘 우리 비서관들은 전에 없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비서관들이 돈을 갖다 줘도 받지 않는다는 인식이 외부 인사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 아니겠소. 사실이 어때?』
『…』
『내가 깨끗하다고 해서 지나치게 행정부에 간섭하면 그들이 일을 못 해. 이런 점을 유의해서 중요한 것만 체크하도록 해요. 屋上屋(옥상옥)이라는 말은 절대 듣지 말도록 하고. 건강은 40세부터 45세 사이에 조심해야 해. 김시진 장군은 마흔일곱이지? 알아서 하시고』
1972년 6월14일.
朴대통령은 아스팍 총회 대표들과 청와대 본관 옆뜰에서 가든파티를 열었다. 劉載興 국방장관이 옆에 있던 태국의 사라딘 대표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각하, 사라딘 대표는 「각하께서 10년은 더 집권하셔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이 말없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대통령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어서 자신에게 듣기 좋은 얘기는 낯간지러워했다. 사라딘 태국 대표가 태국 政情을 설명했다.
『우리는 국회의원들이 국가 예산 심의를 5개월씩이나 연기시키면서까지 자기 선거구의 사업에 쓸 예산을 과다하게 요구하는 통에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겠소. 다른 나라의 평에 구애받지 말고 現 체제를 당분간 그대로 밀고 나가야 할 것이오』(朴)
『언젠가는 의회를 다시 가져야 하겠지만 우선은 現 상태대로 밀고 나가렵니다』
『동남아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배우다가 병들었어요. 태국 현실에 대해 강대국들이 제시하는 의견에 태국 정부가 따를 필요는 없다고 총리에게 전하시오』(朴)
『비평만 하는 강대국이 우리에게 대하는 태도는 어떤 경우에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국회를 없앴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또 국회를 열게 되면 다른 트집을 잡아서 비난할 것입니다』
『타놈 총리의 결단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 한 얘기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朴)
26.『정권을 누구에게 넘겨 줄 것인가』
1972년 6월16일.
오후 6시경에 대통령은 金玄玉 내무·金甫炫 농림장관, 洪性澈 정무·정소영 경제1수석·朴振煥 특보 등과 함께 본관 대통령 집무실 앞 등나무 아래에서 식사를 했다.
밤 9시쯤에 식사가 끝나자, 대통령은 술이 센 비서관들과 『한잔 더 하자』고 해서 한 시간 가량 막걸리로 대작했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한때 나라를 병들게 했어. 국회와 언론계는 지금 정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적당한 수준이라고 봐. 서로가 더 규제하려고 하면 안 돼. 1975년에 정권을 누구에게 넘겨 줄 것인지가 문제인데, 자칫 잘못하면 그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까 봐 걱정이야. 나야 그때 그만두면 개인적으로는 편하고 명예로운 것이지. 장관들 중에는 아직 소신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 당에도 아직 문제가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어. 어이, ○○비서관 자네가 이 자리에서 장관들을 하나하나 평을 좀 해봐』
『…』
『임자가 장관들 얘기하는 것은 고자질이 아니야. 그건 비서관 임무에 속하는 것임을 알아야 해』
『김○○ 장관이 청운각에서 술을 먹다가 업자들한테 한참 공격을 받으니까 「내가 이거 하고 싶어 합니까. 대통령이 하라니까 할 수 없이 하지요」라고 말할 정도로 소신이 없습니다』
『金장관이 입장이 곤란하니까 내 이름을 좀 팔았겠지, 하하하!』
27. 현장감독 같은 대통령
1972년 6월20일.
이날 하곡수매에 관한 지방장관 회의에 참석한 朴대통령은 내무부 지방국장이 砂防(사방) 사업과 造林(조림) 사업에 대해 현장 슬라이드로 보고할 때 일문일답을 하는데 토목공사장의 현장감독 같은 날카로운 지적이 계속된다.
<朴 저 슬라이드 한 장 넘겨 보시오. 내가 조금 서라고 하면 서고, 불 좀 끄고, 가만있어, 넘기라면 넘기고. 이건 서울에서 춘천 가는 도중에 어디를 찍은 모양인데, 저런 상태를 우리가 두고 금수강산이니 무어니 하고 누구한테 큰 소리를 치고 자랑을 합니까? 그 다음 넘겨요. 저 곳은 업자가 공사하느라고 파갔는지 전국에 가면 도처에 저런 상태요.
국장 이것은 그 자리를 바로 손질해 놓은 것입니다.
朴 저 꼭대기는 다른 방법으로 해야지 만일 비가 와서 저곳이 와르르 무너지면 밑에까지 다 내려오지 않겠어요. 또 다음. 이곳은 뒤의 암석을 그대로 살렸는데…. 밑에는 자연석을 맞추어서 상당히 튼튼하게 됐는데, 다음. 암석이 떨어져서 내려오지 않을까? 저런 데는 좋은 나무를 심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카시아 같은 것을 심어서 자꾸 뻗어나가게 해서 덮고 사이 사이로 바위가 노출되도록 하면 튼튼해지지 않을까?(下略)>
朴대통령은 경제·국방뿐 아니라 造林, 造景, 토목공사 등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가 토목공사나 도시계획 및 造景 등에 대해서 스케치로 남긴 여러 도면들을 보면 사물을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朴대통령은 상황이나 사물의 핵심을 한눈에 잡아낼 수 있는 동물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다.
朴대통령은 헬리콥터로 전국을 돌아보면서 지도와 현장을 대조하는 것을 즐겼다. 장교 시절부터 「讀圖法(독도법)」에 능했던 朴대통령은 1970년대에 들어가면 전국의 큰 나무 한 그루까지 안다고 할 정도로 국토에 대해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가끔 하늘에서 내려다본 국토를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國政과 국토개발의 세부 사항에 대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파악능력에 있어서 朴대통령은 당대의 한국인들 중 단연 1위였다고 할 수 있다. 李承晩 대통령도 그렇지만 朴대통령의 경우에는 한국인들 중 가장 두뇌가 우수하고 비전과 열정이 가장 뜨거웠던 사람이 권력자가 된 경우이다. 대한민국의 기적적 발전의 결정적 요인은 두 천재형 지도자의 연속(30년) 등장이 아닐까.
1972년 7월1일.
저녁 9시45분 당직 비서실로 내려온 대통령은 당직자와 한참 동안 얘기했다.
『송요찬씨가 신병 치료차 일본 갈 적에 모든 편의를 봐주었지. 본인이 희망해서 군의관과 간호원을 따라 보냈어. 그 뒤 송씨가 星友會(성우회)에 들러 이 사실을 장군들에게 전하면서 나의 은덕이 어떻다느니 하며 한참이나 칭찬을 했다고 하더군.
이때 동석했던 다른 장성들은 송씨가 간 다음에 「지난 날에는 대통령을 배신하더니 지금은 저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한다」고 빈정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
10년 전에 많은 사람들과 혁명을 같이 했는데 거의 모두가 도중에 흔들리거나 탈락해 버렸어.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洪鍾哲과 李錫濟인 것 같아. 혁명을 같이 한 그 사람들이 나와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내게 충고를 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자기들 말을 듣지 않자 의견이 다르다면서 한마디 말도 없이 내 곁을 떠나는 것처럼 섭섭한 일은 없어』
당직 비서관은 이렇게 말했다.
『한 번 뜻을 같이 했으면 윗분이 잘못된 길을 걸으시더라도 몇 번 되풀이해서 충고 말씀을 드리고, 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경우에는 윗분과 헤어질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윗분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동양적 사고방식에서 말하는 의리인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들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워. 우리 국민의 도덕률에 대해서 회의감마저 가지게 되더군. 나는 10년 정치에서 그러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그런 것이려니, 하고 체념하게 되었어』
대통령의 표정은 쓸쓸하게 보였다.
28.『국민이 반대하는 사건도 있어야 회담이 잘 되는 거야』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난 뒤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있던 어느 날. 북한 대표가 서울에 오기로 결정된 뒤, 대통령은 柳赫仁 비서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서북청년회 사람들은 때리는 것도 잘하잖아. 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에게 얘기해서 달걀 좀 던지라고 해요. 국민들이 반대하는 사건도 있어야 회담이 잘 되는 거야』
영락교회 신도들은 북한의 적십자회담 대표가 서울에 올 때 던지기 위해 달걀까지 준비를 했었는데, 이것을 정보부가 알고 사전에 막아 버려 실제로 달걀 던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29. 對軍 친서
다음 자료는 1972년 7·4 공동성명 직후 朴正熙 대통령이 軍 지휘관들에게 보낸 친서의 주요 부분이다. 朴대통령은 남북대화 무드 속에서 국군 지휘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를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북 무장대치상황에서 전개되는 오늘날의 대화 속에서 국군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示唆가 될 것 같다.
<(前略)이제 「대화 있는 대결」로 접어드는 이 시점에서 나는 국토방위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 軍지휘관 여러분에게 다음 몇 가지 사항을 특별히 강조하고자 합니다.
1. 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이제부터 시작되는 「대화 있는 대결」은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까지의 「대화 없는 대결」보다도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새로운 시련에 직면하는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확고한 자신을 가지고 민족적 자각을 바탕으로 더욱 굳게 단결해야 하겠습니다.
만의 일이라도 「대화」가 곧 「평화」나 「통일」을 가져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동요하거나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아니되겠습니다. 자신과 자각과 단결로써 결집된 국민의 힘이 정부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어야만 할 때인 것입니다.
2. 「남북공동성명」의 발표가 우리 대한민국의 유일 합법적 정통성과 국가 기본 정책 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더욱이 이 성명이 북한 공산집단을 합법정권으로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며 「유엔 감시下에 토착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라는 우리의 통일정책 기조가 바뀐 것도 아니고, 그들을 비방·중상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우리의 정책에 하등의 변경이 있는 것도 아님을 똑똑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3.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통일노력의 성과에 대하여 조급하게 서두르거나 환상적인 기대를 갖는 것은 삼가야 하겠습니다. 공동성명의 발표는 대화를 모색하는 첫 단계에 불과하며, 그 성과 여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과연 그들이 약속한 바를 성의 있게 행동으로 옮기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동태에 더욱 큰 경계를 견지하면서 각기 자기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여 내실을 강화함으로써 국력배양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국군의 감축이나 유엔군 철수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엔군의 한국 주둔은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을 돕기 위해서 아직도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무력행사의 포기를 말만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실증할 때까지는 유엔군 철수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5. 이런 때일수록 軍지휘관 여러분은 더욱 긴장하여 막하 장병과 더불어 對共경계를 철저히 할 것이며, 국방력 강화에 일각의 소홀도 있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우리의 허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우리의 방위태세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
30. 『代議제도란 미명下에 非능률 감수』
1972년 7월17일.
이날 朴대통령에게는 제헌절 경축사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금명간 憲政을 중단시킬 조치를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관례대로 헌법수호를 강조할 입장이 아니었다. 이날 그는 憲政의 낭비적 요소를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헌정 제도를 운영해오는 과정에서 과연 代議제도의 이름으로 非능률을 감수했던 일은 없는지, 자유만을 방종스럽게 주장한 나머지 사회기강의 확립마저 독재라고 모함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민주주의가 마치 분열과 파쟁을 뜻하는 것으로 본의 아니게 착각한 일은 없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민주제도를 형식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내실적 차원에서 짜임새 있고 능률적으로 운영해야 하고 이것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지나놓고 이 대목을 읽어 보면 새 헌정질서를 모색하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8월3일.
朴대통령은 기업은 私債(사채)를 신고하고, 빌린 모든 高利(고리) 私債의 상환조건을 「月利 1.35%에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의 새로운 조건으로 교체하라는 긴급명령을 내렸다. 이는 「8·3 조치」로 알려지게 된다. 이 조치로 해서 기업이 고리 사채의 부담에서 벗어나 체질이 건강해졌고 이듬해의 석유파동을 돌파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의 회생은 그러나 수많은 私債업자들의 희생을 딛고 이뤄졌다.
이 8·3 조치는 미리 정보가 새면 私債회수 사태로 번져 경제질서를 파국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었다. 준비작업은 朴대통령, 金正濂 비서실장, 南悳祐 재무장관, 金聖煥 한국은행 총재, 그리고 실무책임자인 金龍煥 비서실장 보좌관(뒤에 재무장관)만 알았다.
1972년 10월6일.
金聖鎭 청와대 대변인은 『朴正熙 대통령 내외는 일본국 히로히토 천황 내외의 초청으로 오는 11월13일부터 18일까지 6일간 일본을 공식방문한다』고 발표했다. 朴鐘圭 경호실장은 며칠 뒤 경호 선발대를 데리고 준비차 도쿄로 날아갔다. 그는 비상조치에 대한 낌새를 전혀 차리지 못했다. 유신선포를 안 것도 도쿄에서였다. 비상조치의 발표날짜를 10월17일로 정하는 회의 때 金鍾泌 총리는 대통령의 訪日 뒤에 하자고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최초의 국빈訪日은 성사되지 않았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前夜.
10월 유신선포의 실무작업은 李厚洛이 지휘하는 정보부 팀이 맡고 청와대의 참모들과 申稙秀 장관의 법무부 팀이 거들었다. 金正濂 비서실장, 崔圭夏, 洪性澈, 柳赫仁, 金聖鎭 같은 이들이었다. 崔특보는 외국의 憲政제도를 연구했다. 金正濂 실장에 따르면 朴대통령이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운영하던 제도였다. 인도네시아 軍은 헌법에 의하여 정치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정원 500명인 국회의원 중 100명은 대통령이 현역군인으로 임명한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소속된 여당과는 별도로 인도네시아 국민협의회(MPR)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헌법제정 및 국책사업을 확정한다. 대의원 정원의 절반은 국회의원이 겸임하며 나머지 절반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朴대통령이 유신선포 직전에 확정한 유신헌법의 핵심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국가기관의 頂上에 놓고 여기서 대통령을 間選(간선)한다는 것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법안을 검토할 때 朴대통령은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대통령 후보의 정견발표와 찬반토론이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한 것이어서, 이는 「선출이 아니라 추대가 아닌가」라고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심의과정에서 李厚洛의 중앙정보부 팀은 남북대화를 물고 들어가면서 강하게 나왔다. 그들은 북한 측에 대하여 한국의 국론이 단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다수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朴대통령은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도 이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김정렴 증언).
31. 하비브: 『막을 방법은 없지만…』
1972년 10월16일.
이날 오후 6시. 金鍾泌 국무총리는 필립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에게 다음날 朴대통령이 발표할 비상조치의 내용을 통보했다(같은 통보는 駐韓 일본대사에게도 이뤄졌다). 金총리는 이 내용을 앞으로 24시간 비밀에 부쳐줄 것을 요청했다. 하비브는 수 시간 뒤 美 국무성으로 긴급電文을 보냈다.
<이 비상조치는 朴대통령에게 적어도 12년을 더 현직에 머물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이 기간 중 반대와 불만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만약 이 조치가 시행된다면 한국은 완전한 권위주의 정부로 변모할 것이다. 朴정권이 북한과 대화하는 데 국내기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조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 오버도퍼 前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두 개의 한국」이란 책에는 하비브 대사가 대사관 측이 朴대통령의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얻지 못한 데 대하여 화가 났었다고 썼다. 그는 朴대통령이 비상조치의 발표일을 잡은 것도 미국을 바보로 만들기 딱 좋게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 3주 전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질서를 중단시켰지만 미국은 개입할 수 없었다. 마르코스와 朴正熙는 닉슨 대통령이 再選을 노리고 선거전에 돌입해 있는 시점을 잡았다. 닉슨은 베트남戰 휴전협상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닉슨은 선거전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데 마르코스나 朴대통령의 비상조치에 공개적으로 개입하여 말썽거리를 만들 여유가 없었다.
하비브는 電文에서 『가장 강경하고 즉각적인 조치만이 朴대통령의 예정된 비상조치를 막을 수 있지만 다음 몇 시간 안에 그런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의무는 아니다. 그렇지만 朴대통령은 이번 조치로써 그와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킨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번 조치에 대해서 논평할 때는 한국의 국내문제에 대해서 무관함을 명백히 하면서도 극히 우회적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고 건의했다.
美 국무부는 하비브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 대신 朴대통령에게는 다음과 같이 항의하도록 훈령했다.
<한국 정부가 이처럼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미국 정부와 의견 교환을 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 역대 한국 정부, 특히 現 정부에게 제공했던 지원과 희생을 생각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美 국무부는 또 하비브에게 지시했다.
<만약 귀하가 「미국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것은 국내문제이므로 결정권은 朴대통령에게 있다』고 답하라>
美 국무부는 비상조치에 즈음한 朴대통령의 성명서가 美中 화해와 이에서 비롯된 국제정세의 流動化를 비상조치의 한 이유로 지적하고 있는 데 대해서 크게 우려했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金東祚 駐美 한국대사에게 항의하여 이 대목을 빼도록 요청했다.
32. CIA는 알았다
당시 미국 CIA 지부장은 존 리처드슨이었다. 그는 1969년에 부임하여 1973년까지 근무하면서 3選개헌, 대통령 선거, 남북회담, 유신선포를 경험했다. 부임할 때 그는 이미 56세였다. 대머리인 그는 허리가 구부정하여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미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전략정보국)에 몸담았던 베테랑 정보맨이었다. CIA 부장을 지낸 윌리엄 콜비, 리처드 헬름즈와는 친구 사이였다. 그는 그리스 정보기관을 조직, 훈련시켜 주고 자금을 대주는 일에 관여했다. 리처드슨은 1960년대 초반 사이공 주재 CIA 지부장을 지냈다.
그는 고딘디엠 대통령뿐 아니라 그의 동생으로서 정보기관장이던 고딘누와 친했고 反고딘디엠 장성 그룹과도 연락관을 두고 있었다. 당시 미국대사인 헨리 캐보트 롯지가 고딘디엠 제거 공작을 시작하자 리처드슨은 이에 반대하다가 롯지의 요구로 본국에 소환되었다.
미국이 불만에 찬 장성들을 지원하여 일으킨 고딘디엠 제거 쿠데타는 고딘디엠과 동생 고딘누의 피살을 불렀고 베트남의 지도력 不在를 초래하여 미국이 베트남戰에서 패배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리처드슨 지부장은 하비브 대사의 주장과는 달리 李厚洛 정보부장이 지휘하던 유신 준비작업을 미리 알았음이 확실하다. 朴대통령, 李厚洛, 그리고 한 軍 정보기관장이 청와대에서 만나 비상조치에 대한 협의를 한 며칠 뒤 리처드슨 지부장은 軍 정보기관장을 만나러 왔는데, 토의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물었다고 한다. 李厚洛 정보부장은 鄭洪鎭과 자신이 판문점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갈 때 리처드슨을 통하여 미리 美 CIA에 통보하여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1950년대 駐美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할 때부터 미국 정보기관과 친했고, 자신의 출세에 있어서 그쪽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던 李부장이 리처드슨 지부장을 바보로 만드는 보안작전을 쓴 것 같지는 않다.
金炯旭 前 정보부장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리처드슨 지부장과 자주 만났다. 리처드슨은 끈질기게 『朴대통령은 결국 총통제를 강행할 것으로 보는가』라고 물었다. 그 며칠 뒤 李厚洛 부장이 부하를 金炯旭에게 보내 『왜 총통제 이야기를 발설하고 다니느냐』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리처드슨은 李부장에게 金炯旭의 이름을 인용했던 것 같다(김형욱 회고록).
하비브가 유신조치에 대해서 하루 전까지도 몰랐다고 말한 것은 공식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33. 『호네누키노곤냐쿠다』
1972년 10월17일.
이날 아침 朴대통령은 崔圭夏·朴振煥 등 특별보좌관들을 서재로 불러 저녁에 발표될 비상조치 발표문을 읽고 있었다. 李厚洛 부장이 들어오더니 『미국대사관에서 발표문 중 「미국과 중공의 접근」이 이번 조치의 한 원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삭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라고 보고했다.
『내가 뭐 거짓말했나? 미국놈들이 안 그랬으면 내가 뭐 답답해서…』
金正濂 비서실장도 『각하, 그 대목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래, 빼줘!』
좀 있으니 일본대사관에서도 비슷한 주문이 들어왔다. 朴대통령은 『그것도 빼줘!』라고 말하더니 『호네누키노곤냐쿠다』(뼈가 없는 곤냐쿠다. 곤냐쿠는 구약나물의 지하뿌리를 반죽한 다음 끓는 석회유와 섞은 뒤 물에 넣어 익힌 식품)라고 중얼거렸다.
유신선포로 알려진 1972년 10월17일의 대통령 특별선언은 비상조치를 선포함으로써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열흘 이내에 새 헌법안을 공고하며, 그 한 달 이내에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날 朴정권은 전국 비상계엄도 선포했다. 며칠 뒤 새 헌법안도 계엄下에서 찬반토론이 금지된 가운데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이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나는 입사 2년짜리 기자로서 이 뉴스에 접했을 때 그야말로 느닷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요사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북한군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국회 해산이라니….
5·16 군사혁명은 尹潽善 대통령마저 『올 것이 왔구나』라고 할 정도였고 서울시민의 과반수가 혁명을 지지한 것으로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로 외부의 혼란이 무르익은 가운데서 일어났었다. 10월유신은 그런 가시적인 요인이 전혀 감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행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 이건 朴正熙의 독재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에 대한 이런 선입견이 그 후 7년간 朴정권을 따라다녔다.
이날 朴대통령이 읽은 특별선언문에도 왜 이런 엄청난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
진행 중이던 남북대화에 대비한 한국의 체제 정비 필요성, 파쟁을 일삼는 정당과 국회에 대한 불신,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만으로는 헌정중단의 당위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朴대통령의 다른 연설과 비교해서 이 연설은 내용상 힘이 없었다. 다만, 끝 부분의 한 줄이 그의 비장한 각오를 드러낼 정도였다.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34. 야당의원들 군부대로 연행해 고문
이날 정부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은 盧載鉉(노재현) 육군참모총장. 그 직후 朴대통령은 육군보안사령관 姜昌成 소장을 불렀다. 대통령은 『이 친구들을 잡아 넣고 철저히 조사해』라면서 명단을 건네주었다. 李世圭, 趙尹衡, 趙淵夏, 李鍾南, 姜根鎬, 崔炯佑, 朴鍾律, 金漢洙, 金祿永, 金敬仁, 羅碩昊, 金相賢, 洪英基, 尹吉重, 李基澤, 朴漢相, 金東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姜昌成은 『朴대통령이 한 사람씩 짚어가며 문제점과 비리를 이야기했다. 나는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다시 청와대로 들어가 尹吉重, 李基澤, 朴漢相, 金東英, 金相賢, 趙尹衡, 李世圭는 온건하니 제외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李世圭하고 趙尹衡은 절대로 안 돼』라고 잘랐다. 金相賢은 그대로 넘어갔다가 한 달 후 유신비판 발언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군부대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 야당의원들은 주로 金泳三·金大中의 측근이었거나 朴대통령과 직접 관련되는 문제를 국회에서 폭로한 이들이었다. 비리혐의라고 했지만 朴正熙의 私感(사감)이 많이 개재된 수사지시였다. 수사관들은 『金大中의 자금출처와 조직계보를 대라』는 식으로 다그쳤다.
이때 일본에 나가 있던 金大中은 국내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자기 수첩의 1972년 12월19일자 난에다가 이렇게 적었다.
<金相賢-너무 아파서 만원까지도 자백. 나의 정치 자금 캐는 것. 안방까지, 부의금 명단. 운전사 고문.
趙윤형 태도 의연: 나에게 격려. 玉斗-제일 强, 李泰九씨 全裸 고문>
35. 재떨이에 수북한 담배꽁초
1972년 10월21일.
朴대통령은 사이공에서 귀임한 하비브 駐韓 미국대사를 면담했다. 하비브 대사는 사이공에 가서, 베트남 휴전안을 가지고 와 베트남의 티우 정부를 설득하고 있던 키신저를 만나고 온 뒤였다. 하비브는 朴대통령에게 막바지에 접어든 베트남 휴전회담의 진전 상황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우려를 표명했다.
『휴전案에 침략자인 월맹군의 철수는 규정하지 않고 외국군의 철수만 규정한 것은 불공평하다. 월맹과 베트콩과 베트남을 묶는 연립정부案의 성격이 애매하다. 국제감시에 대한 규정도 불안전하다. 따라서 이 案은 공산당의 침략을 법적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되어 베트남 정부를 약화시키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티우 대통령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에 대해서는 강한 힘만이 그들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게 할 수 있다. 만약 이 案대로 휴전이 이뤄지면 베트남은 1년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2년 10월23일.
駐베트남 한국대사 柳陽洙(유양수)는 본국의 훈령으로 일시 귀국하여 일차로 朴대통령에게 베트남 휴전협상 건을 보고 올렸었다. 이날 새벽 金正濂 비서실장으로부터 柳대사에게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오전 9시 대통령 집무실에서 朴대통령은 하비브로부터 통보받은 휴전案을 柳대사에게 보여 주면서 자신의 걱정을 티우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지시했다. 柳대사는 朴대통령이 하비브로부터 받은 휴전案이 자신이 그 며칠 전에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첩보 내용과 너무 달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었다.
유신선포 7일째인 朴대통령은 무척 수척해 보였다. 그는 연신 담배를 피워 가면서 두 시간 반 동안이나 걱정과 다짐이 오고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민주주의도 좋고 자유도 다 좋지만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미국의 국론이 저렇게 분열되어 수습을 못 한다면 미국에 대한 자유세계의 신뢰는 떨어질 것이다. 우리는 결코 안보를 미국에만 의존해선 안 된다. 베트남을 보라! 자주국방을 하려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선 국력의 낭비를 막아야 한다. 효율의 극대화, 국력의 조직화가 유신선포를 한 이유이다』
朴대통령은 자기 말에 취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대통령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柳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올 때 보니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36. 「維新」이라고 作名
1972년 10월27일.
이날 朴대통령이 발표한 「헌법개정안 공고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은 유신선포를 만들어낸 자신의 정치 철학을 당당하게 밝힌다.
<남의 민주주의를 모방만 하기 위하여 귀중한 우리의 국력을 부질없이 소모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몸에 알맞게 옷을 맞추어서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국적 있는 민주주의적 정치 제도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서 신념을 갖고 운영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헌법 개정안은, 능률을 극대화하여 국력을 조직화하고 안정과 번영의 기조를 굳게 다져나감으로써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에게 가장 알맞게 토착화시킬 수 있는 올바른 규범임을 확신합니다>
朴대통령은 이날 담화문에서 유신체제라고 불리게 될 새 제도를 「능률적인 민주적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날 국무회의는 사실상의 쿠데타인 이번 조치를 「10월유신으로 개념화하여 모든 유신작업을 진행할 것」을 의결했다. 崔圭夏가 座長(좌장)으로 있던 특별보좌관 일동이 그렇게 건의했던 것이다. 이 作名(작명)에 주로 관계했던 분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했던 철학자 朴鍾鴻 林芳鉉 두 특보였다. 중국의 고전인 詩經에 나오는 「周雖舊邦(주수구방)이나 其命維新(기명유신)이라」는 문구(周나라는 오래된 나라이나 국정혁신으로 그 생명력이 새롭다)에서 「維新」, 또 공자가 편찬한 「書經」에 나오는 「咸與維新」(함여유신: 다 함께 참여하자)에서 「維新」을 따왔다.
維新이라 하면 한국인에게는 일본의 성공한 근대화 개혁인 「明治維新」이 너무 강하게 기억되어 아무리 중국의 고전을 들먹여도 일본적인 것, 무단적인 것, 따라서 非민주적인 것이 연상되었고, 이것이 일본 육사 출신 朴대통령의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維新은 한국인의 가슴속에 공통된 가치관으로서 뿌리 내리기에는 너무 고루하고 딱딱한 명사였다. 維新의 모토인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는 朴대통령의 뛰어난 작명이었지만.
육군보안사령관 출신인 金載圭 중장은 당시 제3군단장이었다.
『유신헌법案이 나왔을 때 나는 세 번이나 읽었지. 읽는데 분통이 터지더라고. 「더러운 놈의 나라, 이게 무슨 헌법이야, 독재하는 거지」라고 고함을 지르고 책을 내던졌더니 애 엄마가 놀라 깨더군』
이는 金載圭가 처형되기 하루 전 면회온 동생(恒圭)에게 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