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붉은 노을 외2
산 아래
어스레한 그림자 드리우면
하던 일 서둘러 멈추고
성큼 대문 밖으로 나선다
바람 내음조차 익숙한 길목
때 묻은 소매 끝만 매만지다
그만, 하염없는 설움 복받쳐
까닭 없는 울음 솟는다
텅 빈 들녘
텅 빈 하늘
텅 빈 한숨
재 너머 노을에
들킨 속내 민망하여
발끝만 바라본다
땅속으로 기어드는
그림자 외면한 발걸음은
어느새 동구 밖 들녘으로 휘달리고
들깨밭 참새 마냥 눈치 없는 노을은
골붉게 물든 눈시울 머금고
서산마루로 그므는도다.
* 골붉다 _매우 붉은빛이다.
* 그므는도다 _‘사그라지다’의 방언 (평북)
아버지
더듬을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
무언가 밝히려는 촛불처럼
뚝뚝 흐르는 눈물 태워
슬픔을 이겨 보려 합니다
당신 가신 그곳 어디인지 모르지만
찾아가는 까마귀 있으면
날개엔 보고픈 그리움 달아주고
깃털엔 검게 타버린 마음 숨겨 보내련만
당신 계신 아득한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이 하나 없으니 서럽고도 서럽도다
어린 날 베고 잠든 당신의 팔베개는
당신이 쓰던 베개로 대신하고
초승달눈에 감추어 두었던 눈물은
이젠, 당신의 흔적 위를 잠윤(潛潤)합니다.
* 초승달눈 _초승에 뜨는 달 모양처럼 가느스름하게 생긴 눈.
* 잠윤하다 (潛潤하다) _흠뻑 젖다. 또는 흠뻑 적시다.
달(月)발길
비탈진 산자락 끝으로
늙은 노을
별 무리 속으로 사라지네
걸음마다 달빛은 따라오고
밤바람 살랑 귀밑머리 흔들면
뒤돌아선 허공으로 사라진 세월 서럽다
눈길이 스치면 될까
손길이 닿으면 될까
마음이 닳으면 될까
닿고, 닿고 애 닳은 울음
앞서 떠난 발길 하나는 돌아올 줄 모르네
아버지란 이름으로
들녘 가득 메운 바람 같은
빛바랜 세월은
은빛 물비늘처럼 너울거리고
둥근 달(月)발길은
스치지도 닿지도 닳지도 아니하여
툇마루 아래 주인 잃은 신발 속에 들어차 있네.
* 달(月)발길 _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사람의 발길(발자취)로 생각하며 지은이가 만든 표현.
[이경임 프로필]
SBS TV동물농장, 토요모닝와이드 PD/ KBS 희망릴레이, 사랑싣고 세계로 PD/ 한국방송작가협회 연수반수료/ 한국콘텐츠진흥청 창작발전소수료/ 경기콘텐츠랩 웹소설 아카테미수료.
수상: 스토리움 로그라인 백일장 장려상/ 경북콘텐츠진흥원 글로벌K-스토리 시나리오부문 우수상/ CJ 광고영상 공모전 2등 당선.
[심사평]
‘한국신춘문예 2024년 겨울호’ 시 부문 당선작으로 이경임 씨의 시 ‘골붉은 노을’ 외 2편을 선정한다.
늘 강조하듯이 좋은 시를 짓는 조건은 함축적, 서정적, 심미적이 되어야 하는 구성의 충족을 들 수 있다.
또 이 세상의 많은 시제 중에서도 특히 부모님을 대상으로 한 시들이 갖는 시의 결점은 시의 흐름이 부드럽지 못하고 지루한 느낌을 받는다는 독자들의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시가 갖는 특유의 함축성, 심미성 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경임 씨의 작품은 매우 뛰어난 작품들로 응모해 왔다.
오랜 시간 시 작업을 연마한 세월의 때가 작품 곳곳에 배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 ‘골붉은 노을’에서는 시제의 선택도 내용과 잘 어울리는 심미안적인 눈이 있으며, 시 내용 중 6연 - 들깨밭 참새 마냥 눈치 없는 노을은/ 골붉게 물든 눈시울 머금고/ 서산마루로 그므는도다/로 아름답게 잘 처리를 하고 있다.
시작(詩作)에서 잘 된 시들을 보면 마지막 연 처리가 잘 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시 ‘아버지’에서 2연 –당신 계신 그곳 어디인지 모르지만/ 찾아가는 까마귀 있으면/ 날개엔 보고픈 그리움 달아주고/ 깃털엔 검게 타버린 마음 숨겨 보내련만/과 4연 2행 – 초승달 눈에
감추어 두었던 눈물은/ 이젠, 당신의 흔적 위를 잠윤(潛潤) 합니다/라고 표현하며 시가 구성해야 할 흐름과 시어 선택이 잘 되어 있다.
역시 시 ‘달(月)발길’에서도 작가의 뛰어난 시작(詩作) 실력이 보이는 것이 첫 연의- 비탈진 산자락 끝으로/ 늙은 노을/ 별무리 속으로 사라지네/로 시작하여 마지막 연- 둥근 달(月)발길은/ 스치지도 닿지도 닳지도 아니하여/ 툇마루 아래 주인 잃은 신발 속에 들어차 있네/로 여운 있고 아름다운 시어 선택으로 끝맺음하고 있다.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 깊숙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정을 샘솟게 하는 우수작이다.
서정적으로 잘 지어진 시로 앞으로 한국 문단에서 빛이 보이는 시인이다.
쉬지 말고 천착하여 대성하길 기원해 본다.
-심사위원: 석정희, 신인숙, 윤미숙, 박태국, 엄원지.
[당선 소감]
초등학교 4학년 때 제가 써낸 시 ‘어머니’가 도내 어린이 시집을 통해 출판될 뻔했던 콩닥콩닥 뛰던 새싹은 그만 땅속에서 오랜 잉태를 하게 되었습니다.
땅속 어둠에서도 항상 시에 대한 갈망이 파릇파릇 봄나물처럼, 여름엔 시냇가 반짝반짝 물비늘처럼, 가을볕에 잘 익어 떡 벌어진 밤송이처럼, 반듯반듯 줄줄이 겨울 고드름처럼 늘 와닿아 있었습니다.
이번 한국신춘문예에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담아 보려고 마음과 시간의 결이 겹치고 겹쳐 수많은 퇴고의 밤을 보내며 눈시울 붉힌 날도 많았지만, 이번 당선 소식에 인고의 시간을 접고 이제 세상 밖으로 새싹이 고개를 내밀게 되어 더욱 뜻깊습니다.
시는 작가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 끝에 맺혀 완성되는 매우 따뜻함을 지닌 문학이라 생각하며 부족한 실력이지만, 이제 다시 출발선에 선 심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박한 삶의 느낌들을 적어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겠습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가족과 지인들에게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댓글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