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흘(1898-1972)은 함흥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봄 서울로 갔는데,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갇혀 심문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구금 기간이 길지는 않았고, 단순가담자로 분류되어 사흘 만에 훈방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체험은 강용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초당』에 그 정황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 강용흘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12살가량의 다른 소년들 13명과 함께 조그만 감방에 갇혔다. 21살 이상은 없었다. “모두 중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귀가 찢어졌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이 찢어졌다.” 감방은 좁고 불결했다. “통풍장치가 전혀 없었는데, 창문도 없고 우리가 전부 앉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초당』(범우, 2015), p. 402. 이 소설의 원문은 영어로 씌었다.
한밤중에 심문이 시작됐다. 한밤중인 오전 1시에 호출된 강용흘은 ‘두 손을 앞으로 묶이고 수갑을 찬 채’ 심문관 앞으로 불려갔다. 끌고 가던 경관은 강용흘이 너무 천천히 걸어도 너무 빨리 걸어도 등허리를 구둣발로 마구 걷어찼다. 강용흘은 도대체 어떻게 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구둣발에 차여 심문실에 들어갔다. 그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았지만, 일부러 한국어만 아는 척했다. 일본어를 사용하면 행여 단순가담자 아닌 지식인으로 간주해 중벌에 처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인 심문관은 조선어를 할 줄 몰랐고, 조선인 통역을 중간에 세웠다. 심문관은 이름, 나이, 직업, 종교, 서울에 오게 된 경위, 만세를 부르게 된 경위 등을 캐물었다.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심문관은 묘하게 웃으면서 “좋다, 매 좀 맞아봐라” 하면서 강용흘을 발길질했다. 심문실로 끌고 가던 경관과 캐묻던 심문관이 각기 각목을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의 무자비한 매질이 시작됐다. 배고픔과 고통으로 강용흘은 기절해버렸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강용흘에게 물을 먹이더니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오전 1시에 시작한 심문과 고문은 이런 식으로 새벽 5시까지 계속됐다. 이게 첫 번째 심문이었다.
몽둥이 고문은 다음 심문 때에도 되풀이됐다. 먼저와 똑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똑같은 고통, 심문관의 방에 갈 때나 나올 때나 똑같은 공포’였다. 일요일 새벽에 시작된 심문은 수요일에야 끝났다. 재판관들은 강용흘을 부화뇌동하여 단순 가담한 자라고 규정했다. “독립운동 기간 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구경꾼인데, 마음이 약해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강용흘은 훈방 처분을 받게 된다.
(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6월 말까지 검사 처분에 부쳐진 3·1운동 피검자 수는 1만 6908명이었다.)
훈방 처분받은 단순가담자들조차 이처럼 가혹한 처분을 당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용흘의 『초당』은 이름 없는 3.1운동 참여자들의 수난과 상습적으로 고문을 일삼은 일본 경찰의 잔인성을 영어로 전 세계에 알려준 생생한 목격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