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 산문 1
아랫누이 서처(徐妻)에게 고하는 제문
이덕무
우리 형제 4남매에 내가 너보다 6년이 위이니 나는 신유년(1741)에 태어나고, 너와 너의 동생은 정묘년(1747)ㆍ무진년(1748)에 태어났다. 공무(功懋)는 정축생(1757)으로 가장 늦게 태어나 어렸을 때 너의 태도를 볼 수 없었지만, 수더분한 태도로 놀던 그때 일이 눈에 삼삼하다.
업을 때에는 반드시 두 어깨에 메고, 이끌 때에는 반드시 두 손으로 잡아 주었다. 한 개의 떡이라도 절반으로 나누었고 한 알의 과일도 똑같이 갈랐다. 단연(丹鉛)과 분묵(粉墨)도 좌우로 나누어 두었으며, 꽃다운 화분도 골고루 나누어 분배하였다. 내가 경사(經史)를 읽은 적에는 옆에 앉아 따라 읽으며 재잘거리고, 삼강오륜을 같이 해설하며 담론하였다.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는 데다 어머니는 병까지 많으셨고 강가에 유리할 적에는 을해, 병자년(1755, 1756년)이라, 쑥으로 빚은 보리떡과 나물죽이 입과 목구멍을 찔렀다. 콩나물을 지진 막장이요 등불은 죽에 얼비치고, 비린내 나는 초라한 반찬은 하인이 배에서 주워 온 물고기라, 모여 앉아 자주 이를 먹으면서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아버지께서 멀리 계시다가 오랜만에 돌아오시곤 하면, 갑자기 언짢아하실까 염려되어 전에 굶주리던 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한없이 기뻐하며 다시 떠나실까 두려워 옷깃을 잡고 주위를 맴돌았다.
네 나이 18세에 서자(徐子)에게 시집갔는데, 서자는 훌륭한 인격에 풍채도 준수하였다. 딸이 영리하고 사위가 아름다워 부모님은 몹시 기뻐하셨으나 이듬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형과 아우 슬피 울부짖어 그 애통함을 심폐(心肺)에 새기며 평소에 비하여 더욱 서로 친절히 부호(扶護)하였다.
너의 동생은 상을 마치고 원씨(元氏)의 아내가 되었는데, 각각 아들 하나씩을 낳아 안고 옛날을 생각하며 슬퍼하였다. 그리우면 때를 어기지 않고 가서 보았는데, 가엾게도 요즘은 네가 굶주리고 헐벗어 화로에는 불을 피우지 못하고 소반에는 밥그릇이 오르지 못하였다.
너는 비록 태연한 척하였으나 얼굴에는 부황(浮黃)이 떠올랐다. 기침 소리는 폐후(肺喉)에 요란하였고 담(痰)은 견여(肩膂)에 집중되었다. 지난여름에 너를 데려와 약을 먹이다가, 너의 시아버지 돌아가시므로 네가 곡(哭)하며 돌아갔다.
겨울에 또 병세가 급하여 내가 가서 약을 달여 주었으며 집으로 데려왔는데, 자리에 누워 피를 토하고 쿨룩거리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거의 한 달이 되었으나 낫지 않았다.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시집으로 돌아갔는데, 살이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약으로도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늦봄에 다시 돌아왔으나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늙으신 아버지가 힘을 다해 간호하여 부엌살림은 군색하였으나 어육(魚肉)을 반드시 갖추었고, 그 어육을 먹이고자 하여 곁에서 돌보았다. 유인(孺人)은 죽을 쑤고 서모는 머리를 짚어 주고 등을 긁어 주며, 몸종이 말동무를 해 주어도 손을 저으며 귀찮아하였다. 너는 죽을 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네 동생이 와 마지막 이별을 하여 너의 얼굴에 눈물을 떨어뜨리니, 너는 말없이 눈물만 자주 글썽거렸다. 내 어찌 차마 이를 볼 수 있었으랴. 하늘도 너를 위하여 침침하게 흐렸었다. 서군(徐君)이 와서 볼 때에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물으니, 할 말이 없다 대답하고 서군에게 저녁밥만 권하였다.
6월 3일에 폭우가 쏟아지며 캄캄해졌는데,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집안 식구들이 모두 밥을 굶었다. 네가 이를 알고 불쾌하여 찡그리더니, 이 때문에 병이 더욱 극심해졌다. 아이를 집에 돌려보냈는데 갑자기 네가 숨을 거두었다. 늙은 어버이 흐느껴 울며 부자 형제 이에 세 번 곡하였으니, 천하에 지극히 애통한 소리다. 너는 이제 영원히 잠들었으니 이를 듣는가 듣지 못하는가?
아버지가 예문(禮文)을 상고하고, 유모가 목욕을 시키고 수의를 입히며, 나와 서군은 염습하기에 손이 벌벌 떨렸고 이마에 땀이 줄줄 흘렀다. 너의 시집과 우리 집안의 모든 어진 이들이 부의를 내어 장례를 치렀는데, 급히 9일장으로 하여 너의 시댁 선영에 돌아갔다.
우리 4남매가 각각 한 가지씩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았는데, 너는 어머니의 헌칠한 키를 닮았고,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닮았으며, 네 동생은 말씨를 닮았고, 공무는 머리털을 닮아 각자 서로 비교해 보면 어머니를 잃은 그 슬픈 마을을 위로할 수 있더니, 헌칠한 키를 볼 수 없으니 그 슬픔을 참아 내기 어렵구나.
늘 너의 집에 가면 네가 반가이 맞으면서, 바느질 품 팔아 모아 두었던 돈으로 종을 시켜 술을 사다가 웃으면서 내 앞에 놓았다. 내가 그 술을 다른 그릇에 조금 따라 너에게 권하면, 너는 그 술을 받곤 하였고, 안주는 조금씩 나누어 아증(阿曾)을 먹였다. 이제는 백 번을 가더라도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슬픔을 더하는 것뿐이리라.
너의 동생이 금년 가을에 협현(峽縣)으로 옮기려 하였는데, 너의 병이 극심하여 더욱 시름에 잠겼었다. 매년 돌아가신 어머니 기일(忌日)에 둘이 와서 참예하였는데, 금년 기일에는 내가 더욱 비통하겠구나. 네가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도 너의 동생을 멀리 보냈으니, 명년 이날에는 둘 다 비겠구나.
공무는 5월에 기해(畿海)에서 장가를 들었는데, 사모관대(紗帽冠帶)로 예를 마쳤으나 병중에 슬픔을 머금었으니, 신부가 신행와도 대하기 어렵겠다. 일일이 상심이라 내가 죽어야 잊겠구나.
내 동생이 된 지 28년인데, 언제 하루라도 정의를 잃은 적이 있는가. 서군도 하는 말이 '나의 아내가 된 지 11년인데, 말이 적고 천성이 온자하며, 번거롭지 않고 단아하므로 편협한 마음과 조급한 행동을 참고 진정할 수 있으며, 동서끼리 서로 화목하여 틈이 없었다.' 한다.
이와 같은 여자의 품행이라 응당 그 후예가 길어야 하건만, 다섯 살 되는 아증(阿曾)이 너와 같이 앓아서 누렇게 파리하며 기침하는 것이 마치 너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잘 보살펴 길러서 너의 아픔을 위로하려 한다.
평시에는 남들과 말할 적에 형제가 몇이냐고 물으면 모모(某某) 넷이 동기(同氣)라고 하였는데, 이제부터는 남들이 물으면 넷이라 할 수 없구나. 네 몸이 마비되니 육골(肉骨)을 긁어내는 듯 아파 형은 아우의 죽음을 애처롭게 여기고 아우는 형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이치에 당연하여 그 자연한 순서를 어길 수 없구나.
너의 생사를 겪으니 나는 원통할 뿐이다. 너는 비록 편하겠으나, 내가 죽으면 누가 울어주랴. 컴컴한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 같은 너를 묻겠는가. 아, 슬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