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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색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색채를 대할 때 「오색 영롱하다」라든가
「오색 찬란하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오색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적 청 황 흑 백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색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 여러 가지 배색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음양지리설과 더불어 음양오행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는데
, 음양오행설 중 오행설은 중국의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원시 우주관의 하나로,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음양설과 합해져서 한 대(漢代)에 와서는 당대의 민간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것은 비단 음양사상가 뿐 아니라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에 이르기까지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각 사상적 계파에 따라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오행설은 물리적 우주의 모든 존재를 다섯으로 구성하여 보려는 것이고,
이것은 색채까지도 다섯으로 규정짓고 우주의 모든 개념을 기본적인 적 청 황 흑 백과 연결시켰다.
백색계
백색에는 회백, 청백, 유백, 담백이 있다. 백색은 또한 색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이라 하여 백색 사용을 즐겨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색채를 논할 때 이 백색에 관한 고찰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 백색의복을 착용한 것은 상고시대부터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백색을 숭상하였다고 한다.
이 백색 의복에 대한 애착은 삼국시대로 이어졌다.
문헌에 따르면 신라인은 소색(素色)을 즐겨 착용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소색이란 백색이라기 보다 길쌈한 그대로의 색,
즉 자연색에 가까운 색이다. 백색 의복이 주로 서민층에서 애용된 것에 반해 왕과 귀족들은 다양한 착색 의복을 착용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왕도 평상복으로 백색을 착용하였다.
고려 중엽 충렬왕 원년에는 한 때 백색 착용을 금하기도 했는데,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충렬왕 원년에 태사국(太史局)에게 임금님께 아뢰기를 \"동방은 목(木)의 위치오니 푸른 색깔을 숭상하여야 하며,
흰 것은 금(金)의 색깔인데 지금 나라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흰 모시옷으로 웃옷을 많이 입으니 이것은
목이 금에 제어되는 현상입니다. 백색의복을 금하기를 청하나이다.
高麗忠烈王元年. 太史局言 東方之位. 色當尙靑. 而白者金之色也.
國人着衣服. 多 以白紵衣. 木制於金之象也. 請禁白色服. 終止.
또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도
도선이 가로되, 동방은 목에 속하니 푸른 것을 숭상하여야 할 터인데 흰 것을 숭상하니,
이것은 금이 목을 이기는 것으로 옳지 않다고 했다.
道銑曰. 東方屬木. 宣尙靑而尙白. 是金屬剋木. 不可也.
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백색 의복의 착용은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이르러서는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도 백색 의복을 금하는 영이 여러번 내려졌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태종 원년에 백색 옷을 입는 것을 금하는 영이 내려졌고,
같은 왕 11년에는 \'흰옷은 오랑캐의 조짐\'이라 하여 조신들에게 조회 때 채의(彩衣)를 입도록 권하였다.
세종 7년 11월에는 정부에서 일하는 자는 백색 옷을 입지 못하도록 하였다(有職事人員白色衣禁止).
또 연신근 11년에는 도성의 여자들이 백색치마를 입는 것을 금하였다.
숙종 17년에는 \'우리나라의 풍속은 백의착용이지만 청색의를 입으라\'고 영을 내렸으며,
영조 2년에는 우리나라는 동국(東國)이므로 마탕히 청색을 숭상해야 한다고 하며, 백색착용을 금하는 영이 내려졌다.
또 인조 26년에는 \'사대부들이 백모관(白毛冠)과 백모자(白帽子)를 쓰는 것을 좋아하고 백의를 착용한여
온통 흰 것을 입는데, 이것은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므로 길조가 아니다\'고 하여 금지하였다.
백의 금제조치가 이처럼 빈번하였던 것은 정부에서 비록 백의착용을 금하기는 하였으나
민간에서 쉽게 수용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허생 등의 네 장수가 왜적을 만났는데,
왜적이 모두 흰 옷을 입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으로 여겼다\'하여 우리 민족의 백의 착용은 자타가 공인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와같은 백의금제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민족의 오랜 전통민속인 백의에 대한 옹호였다.
예컨대 영조 14년에는 우참찬 이덕수가 상소문에서 \'동방 풍속이 백색을 숭상했던 일은 전사(前史)에서도
많은 기록이 있고, 수서(隨書), 송사(宋史) 그리고 황명동월(皇明 越)이 남긴 기록에도 있어 수천년 내려온 풍습을
지금 고친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눌제집(訥齊集)에도 \'단군조선, 기자조선, 고구려, 백제, 고려 등 모두가 백의를 입었으나,
모두 오랫동안 나라를 향유했다\'하여 백의 금제의 타당성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백의 숭상의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예를 들어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부터이며, 이러한 풍속은 우리민족이 옛날에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으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의 흰 빛을 신성하게 알아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민족의 풍속을 이루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 빛을 신성하게 알고 또 흰옷을 입기 좋아하니
애급과 바빌론의 풍속이 그것이다.
한편, 일본인 柳 宗悅은 조선의 백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중국이나 그리고 특히 일본에서 그토록 색채가 다양한 의복이 발달하고 있는데,
그 이웃나라인 조선에서는 통 이것ㅇ르 볼 수 없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은 아무런 색도 가지고 있지 않은
흰빛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가장 색을 적게 갖는 연한 옥색이 아닌가.
늙은이도 젊은이도, 남자도 여자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이 세상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이같이 기이한 현상은 아무데서도 볼 수가 없다.
역사가가 아닌 나는 이러한 의복제도가 어느 시대에 시작되었는지 단정할 근거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흰 옷은 언제나 상복(喪服)이었다.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백성은 흰옷을 입음으로써
영원히 상을 입고 있다. 그 민족이 맛본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은 그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오히려 어울리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빛깔이 풍부하지 못한 것은 생활에 즐거움을 잃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닌가.
시험삼아 조선 사람들이 백의의 통칙을 깨트리고 색으로 꾸며진 옷을 택하는 드문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오직 즐거움이 허락되어 있을 때만 사람들은 울긋불긋한 옷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柳 宗悅은 \'백색숭상은 여유가 없음에도 연유된 색채결핍의 문화\'라고 결론을 내렸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인은 언제나 우울하고 생활의 고통속에 젖어 있는 민족이라야 한다.
하지만 조선 민족의 생활풍속을 보면 어느 민족보다 해학에 뛰어난 감각을 가졌고, 행동에 있어서
여유를 가진 민족임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그러한 역사적 환경이라는 요인에 의하여 착용한 백의라고 한다면
그렇게 백의를 고집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柳가 주장한 것처럼 예술의 구성 요소가 형태와 빛깔과 선이라고 한다면,
단청의 백색 선이나 저고리의 흰 동정에서 보듯이 형태와 색의 명시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백색의 선을 사용할 줄 알았고, 구체적 표현을 삼가 하면서도 형태와 공간과 색을 그림의 여백으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 이것은 오히려 뛰어난 미적 감각과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거론되어지고 있는 우리 민족의 백색선호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북방민족 특유의 백색 숭상이 오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염료가 부족하고 귀하여 값이 비쌌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는 서민층에서 백색을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염색기술이 많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색채를 즐길만한 여유가 없었고, 색채결핍의 문화가 낳은 결과이다.
빈번한 복색의 금제로 인하여 색의를 입는 것을 꺼려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관습으로 인하여 관혼상제의 규율이 엄격했고, 백색상복의 착용기간이 길어져서 그대로 백의가 평상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명종 이후 국휼(國恤)이 잦으면서 백성들이 백의 착용이 관습화되었다.
세탁이 편해서 백의를 많이 입었다.
백의의 청결감을 좋아했었다.
현재 이러한 견해들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없으므로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으나
이 중에서도 염료의 가격이 비싸 일반 백성들은 염색한 의복을 착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과
복색금제가 잦고 엄격하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매우 유력하다.
물리학적으로 볼 때 백색은 무채색, 즉 색깔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무채색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유채색이 색을 잃은 최종의 모습으로 볼 수 도 있고,
한편으로는 모든 색이 이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근원이 되는 색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후자는 서구적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고, 전자는 동양적 사고에 해당한다.
모든 색이 화려함을 잃은 종말의 모습이라고 해서 백색을 허무의 상징으로 볼 것인가.
오히려 한 때 지녔던 화려함에서 자유로와지는 무소유, 검소, 소박함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백색에는 이중성이 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자유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커다란 포용력이 그것이다.
어쩌면 이 두 가지 개념은 전혀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개념이다.
들어오고 나감에 있어서 아무런 막힘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무애(無 )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흑색계
흑색은 검은색, 검정색, 현색, 회색,담흑으로 회색까지도 그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음양오행설에서 흑색은 오행으로는 수행(水行)이며, 풍수로는 현무, 계절로는 겨울, 그리고 방위로는 북쪽이다.
또 감정면에선느 슬픔(哀)이고 행동면에서는 지(知)이다. 흑색은 대표적은 음색(陰色)이며,
어둠과 그림자가 결합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흑색의 사용은 고구려 유물인 강서군 매산리 구분의 인물복식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흑색과 회색을 즐겨하지 않았다. 흑색은 주로 상복에 쓰였고, 회색은 승복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말 조대비 대상(大喪)때는 왕과 왕비가 두건으로 신까지 흑색으로 하였다.
또한 흑색은 조선시대에 방어사명기에 쓰였는데, 이는 음양오행설에서 흑색이 북방을 가리키기 때문에
북장(北將)으로 하여금 북녘땅을 튼튼하게 지키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흑색은 단편적으로 그 쓰임새가 발견되는데, 전투복의 벙거지, 갓, 신부의 도투락 댕기,
제사복과 조선말 양반부인의 치장으로 저고리에 가는 흑색의 순을 두른 것 등을 찾을 수 있다.
회색은 승려의 덧 의복의 하나인 가사에 쓰였는데, 이것은 가사의 본래 뜻인 부정색(不正色)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부정색이란 적, 청, 황, 흑, 백 등 오행색을 파괴한 색 또는 이를 모두를 합한 색인데, 회색을 그것으로 본 것이다.
이 회색은 다소 탁한 회색으로 짐작되는데 그 이유는 혼합하는 색의 수와 비교하여 혼탁의 농도가 짙어지고
불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한때 회색에 대한 금제가 내려지기도 했다.
이때의 회색은 백색에 가까운 연한 회색으로 백색금제와 유사한 이유로 보인다
황색계
황색은 「누렇다」는 개념에서 정황, 현황,천황, 계황, 아황, 미색, 담황, 등황, 송화색, 치자색 등이 있으며
연한 다갈색도 이 황색 범위에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황색은 환하고 자극성 있는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스럽고 개방된 감정과 상응하며,
적극적인 감정으로부터 변화되어가는 자유로운 관계를 찾는 색이다.
황색의 주술적 의미, 즉 황색민속을 보면 설날, 출산일, 제삿날 등에 문앞에 황색토를 뿌려두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적색민속의 연장이라고 본다.
황색에 관한 음양오행설을 보면 황색은 오행 중 토행(土行)을 가리키며, 계절로는 장하(長夏, 음력 6월)이며
방위로는 중앙을 가리킨다. 감정면에서는 욕심(慾)이며 행동면에서는 믿음(信)을 의미한다.
음양오행설에서는 황색을 백색과 유사하게 보았는데, 「엷은 붉은 색은 노란색에 가깝고, 이 색이 더욱 엷어지면
흰색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로 백색과 황색을 혼동하여 색명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식구조에서 황색은 백색광 유채색인 중간상태로 보았다. 물론 백색과 황색은 정오색(正五色)으로 각각
특징적인 색채들이지만, 다만 시각적인 범주에서 황색은 색채를 적게 가진 색으로 본 것이다.
황색은 중국에서는 군주의 복색(中之色君之服)이라 하여 일반인에게 엄격히 금지하였던 색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진덕여왕 이후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법흥왕 때 대사(大舍)에서 선저지(先沮知)까지
하품(下品)의 복색으로 채택되던 황색을 금지하였고, 왕족에게만 황색착용의 금지를 적용시키지 않았다.
고려시대에도 역시 왕복은 황색을 지켰으나 조선시대의 태조는 전대 고려의 군주가 사용하던 복색이라 하여
왕의 황색착용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태종대에 와서 사대주의의 영향으로 황색이 중국 황제의 복색이라 하여
왕 자신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황색착용을 엄하게 금하였다. 황색의 금제는 의복이 아닌 보자기( )에도
적용하였고, 태종 17년에는 황색을 염색하는 염재인 심황(深黃)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세종 원년에는 황색에 가깝다 하여 주홍색도 금하였고, 세종 25년에는 다할색(茶割色)을 잘못 보면 황색에 가까우니
중국의 조관사신(朝官使臣)이 보지 않더라도 착용을 금지하였다.
세종 때 황색이 유행은 대단하여 민가의 부녀자, 기생, 공사천인에까지 이르렀으며,
노상에서는 연회에서 황색을 착용하였다고 한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設)에서도 황색이 민간에 흔히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황색은 토황색이었을 것이며, 황색이 이처럼 널리 사용된 것은 염색과 세탁이 쉬웠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여러 차례의 금제에도 불구하고 황색이 사용되어오다가 차츰 황색에 가까운 토황색과 다갈색에 대해서는
금제가 완화되고, 정황색에 대해서만 엄격한 규제를 하였다.
왕복에서의 황색금제는 고종 때에 이르러 청국의 간섭을 벗어나면서 사라졌고 고종과 순종은 왕복에
황색을 다시 사용하였다.
청색계
청색이란 청, 녹, 벽 등 넓은 개념의 것을 이르는데 우리 나라에서의 청색 즉 「푸르다」라는 것의 범위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매우 넓다. 우리의 청색범위는 황록, 취(翠), 녹, 청, 벽까지 5단계로 되어
어느 나라보다도 가장 넓은 범위의 색상을 함축하고 있다.
청색계열에는 옥색, 청옥색, 갈매색, 남, 일람, 양람, 품람, 반물, 쪽빛, 청암색, 심청, 아청(鴉靑), 청현, 천정,
압두록색, 관록색, 두록색,유록색, 감청색, 포도청색, 청취색, 초록, 양초록, 쪽빛, 남송색 등이 있다.
이와같이 다양한 청색은 우리 나라에서 적색 다음의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에는 삼한시대에 변한인과 진한인이
청색 의복을 착용하였다는 기록을 남겨두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청색 사용이 상고시대부터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청색은 청청한 생명의 표현으로서 불행을 내쫓고 복을 끌어들이는(除禍招福)데 이용되었고
주술적인 면에서도 청색은 적색과 마찬가지로 사용되었으며, 생활 속의 습속으로 정착된 「청색민족」을 이루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청색민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장질부사가 유행할 때 옥상에 푸른 소나무 껍질을 세워두면 예방된다.
출산 시에는 문전에 소나무나 대나무의 푸른 껍질을 달아맨다.
가뭄이 심할 때 문 앞에 병을 걸고 소나무 가지를 꽂아두면 비가 온다.
신부복의 원색은 청홍색이다.
사주포는 청홍색으로 한다.
결혼 때 청홍실을 늘어놓는다.
성황당을 지날 때 소나무 가지를 놓으면 길하다.
여기서 보면 청색을 비롯하여 복숭아(挑), 대나무(竹), 쪽(藍)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청색의 유사성이 있는 색으로 주술력을 발휘하는 동일 기능을 가졌다.
청색이 벽사법에 사용되는 이유는 청색이 생명을 표시하고 발전, 창조, 신생, 번식, 무성함을 의미하며
양기가 강하여 귀신을 쫓는데 유요하다는 원시종교적 관념 때문일 것이다.
이 청색민족은 비록 미신이라고 하지만 민중의 생활 속에 청색이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복색에서 청색의 사용을 보면 고려시대까지는 궁중복이나 색대에서 청색은 하위의 색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궁중복색에 청색계열이 많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는 동방이므로 응양오행설에 따라 청색을 숭상해야 하는 색으로 여겼기 때문인데,
조종(朝宗)에서는 청색의복을 길복(吉服)이라 하여 권장하였다. 즉 중종 33년에는 초록으로 계복(戒服)을 고쳤다.
숙종 17년에는 영을 내려 청의를 입으라 하였고, 영조 2년에는 공경사민(公卿士民)에게 명하여
길복은 모두 청색으로 숭상하도록 하였다. 쪽에 의한 청색 염색은 조선시대에 와서 매우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음양오행설에서의 청색은 방위상으로 보아 동방이며, 동방은 태양아 솟아오르고 날이 밝아오는
광명을 주는 까닭에 시종 양기가 왕성한 것으로 인정된다. 청색은 계절로는 봄이고, 오행으로는
목행(木行)이고, 풍수로는 청룡이다. 감정면에서는 기쁨(喜)이며, 행동면에서는 인(仁)이다.
이와 같이 청색은 푸른 하늘(天空)과 물과 무성한 식물 등 생명을 상징하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적색계
적색이란 「붉다」는 개념에 포함되는 적(赤) 홍(紅) 주색(朱色)의 총칭이다.
염색한 적색계통의 색은 염색에 사용한 염재, 염색 회수, 염색 방법 등에 따라 색명이 다르다.
예를 들어 한 번 염색하면 전, 두 번 염색하면 정(禎) 또는 천적, 세 번 하면 훈 또는 강(絳),
네 번 하면 주(朱)가 된다. 또 훈에 흑(黑)을 염색하면 감(紺)이 된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류선(星湖僿設類選) 5권에는 홍람(紅藍)으로 물들인 것을 진홍이라 하였고,
상섭통고(常燮通考)에는 홍화에 의하여 염색된 연지색을 대홍이라 하며, 염색한 농담에 따라 각각 연홍,
비홍, 은홍, 수홍이라 하였다.
고대에 있어서 색의 표현은 주술적, 약물적 의미에서 사용된 경우가 많은데, 적색은 그 대표적인 예다.
고대 인류가 적색을 좋아한 것은 적색이 태양과 혈액을 상징하여 태양이 주는 빛과 불이
곧 그들 생활의 유일한 근본이었고, 종교에 가까운 신비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적색은 사회 권력과 정신력을 표현하는 동시에 상층계급을 가리키는 색이라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적색은 주술적 의미와 약물적 의미로 사용되어 생활 습속으로 정착하였다.
이것은 적색민족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민간에 남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부적은 반드시 주색(朱色)으로 한다.
손톱은 붉게 물들이면 여러 병이 낫는다.
주사를 가지고 다니면 악귀가 침범하지 않는다.
부모의 혼사 때 사용하던 청실홍실을 두르면 어린애 병이 없다.
위병에는 적색 색소를 밥에 넣어 먹으면 낫는다.
아들을 낳았을 때 금줄에 붉은 고추를 단다.
장을 담고 붉은 고추를 띄운다.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방역된다.
환자가 팥밥을 먹으면 속히 낫는다.
팥을 우물에 넣으면 악귀를 막을 수 있다.
상가에는 팥죽을 쑨다.
이사하면 팥죽이나 팥밥을 해 먹는다.
이불의 색은 잇색과 쪽색이 기본색이다.
신부의 얼굴에 연지를 찍는다.
두창이 유행할 때 마을 입구에 장등을 세우고, 적색 두루마기를 걸어 놓는다.
감기에 팥을 먹는다.
이상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액막이와 약물요법에 적색 또는 유사개념으로 봉숭아 염색, 적색염료,
고추, 잇꽃, 팥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적색은 길한 색이라 하여 건축물이나 생활주변 여러 곳을 칠하여 복을 구하였다고 하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주로 잡귀의 접근을 막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특히 고금을 통하여 팥이 사용된 것은 팥의 색채가 원시신앙관적으로 평가되어 확대 사용되었다고 보아진다.
우리나라의 정기적인 연중행사에 축제귀를 목적으로 병, 상가, 제화에 팥이 사용되었다.
부적도 벽귀를 목적으로 하는만큼 양생기(養生記)가 강한 적색이어야 효력을 발생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주사나 홍색 비단주머니(錦囊)의 소유만으로 방역이 되고 위병에 붉은 염료를 먹는 것 등은
적색사용의 의미가 극단으로 흐른 현상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적색 사용은 초기에는 공리적이고 현실적인 효용에서 비롯하였으나 후에 와서는 원래의 의도가 망각되고
원시신앙의 잔재만이 대중생활의 기본관념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적색은 식별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호적에 붉은 줄을 긋거나, 죄인을 붉은 글씨로 표시하는 것,
관위에 따른 복제에서 상층계급의 색으로 적색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적색은 생활 속에서 붉은 색 신앙관을 고정시겼고, 우리의 의식구조와 생활을 지배하는 색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가장 많이 사용해온 색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왕의 복색은 홍색이 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백관의 홍색과는 차이가 있는 심홍, 대홍이었다.
원래 우리 고유의 왕의 복색은 황색이었으나 명 황제의 복색이 황색이어서 친왕례를 쫓아 황색은 금제되고
대신 홍색 즉 적색계열이 주류를 이루어 사용되게 되었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의하면 태종 2년에 명나라 건문황제(建文皇帝)로부터 훈회상( 繪裳), 훈회폐슬( 繪蔽膝) 등의 면복(冕服)과 복식품(服飾品)의 사여(賜與)에 의하여 왕실에서 많은 홍색계통의 복식품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 10년에는 세자의 관복을 명나라에 청하여 받아 왕세자가 칠량원유관(七梁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훈상( 裳), 홍단말(紅緞襪), 홍당강사포(紅緞絳紗布) 등을 착용하게 되었는데, 이후부터는 왕과 왕세자는 강사포(絳砂布), 홍상(紅裳), 적라의(赤羅衣), 적라상(赤羅裳) 등 적색 의복을 많이 착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홍색 염색을 하기 위해서는 홍염장(紅染匠)이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종 2년에 반포(頒布)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에 각각 10명의 홍염장을 두도록 해놓았다.
한편 홍색이 왕실의 복식에 많이 사용되면서 금제(禁制)도 나오게 되었다. 즉 세종 28년에는 위로 1품부터 아래로 유음자제(有蔭子弟)와 부녀에 이르기까지 속옷(裏衣) 외에는 홍색 상의의 착용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의상에 홍색이 들어가는 것을 모두 금지하였다.
그것은 대홍이 어복(御服)의 빛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홍으로 물들인 것은 값이 비싼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투어 사치하므로 사용을 금한\' 것이다. 연산군 3년에는 신하가 대홍의(大紅衣)를 입을 수 없다고 하면서 염색의 농담으로 군신의 복식을 구별하였으며, 같은 왕 4년에는 당하관의 대홍의 착용을 금하였고, 다시 같은 왕 10년에 이르러서는 조관(朝官)들에게 홍색에 가까운 옷을 입지 말라고 하였다.
음양오행설에 의거한 적색은 불의 색채라 하여 오행 중 화행(火行)이고, 온화한 곳이며, 만물이 무성하여 양생기가 왕성한 곳으로 남쪽을 의미하며 계절로는 여름을 의미하며, 풍수로는 주작, 인체에서는 심장을 뜻한다. 또 적색은 감정면에서 노여움을, 행동면에서는 예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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