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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정치판은 아사리판 이라지만
서양사와 중국사의 책도 두루 일독하였다. 통일군주인 진시황제의 사후 중국은 극심한 내홍과 내전(內戰)에 내몰리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유방(劉邦)은 숙적인 항우(項羽)를 치고 중국 역사 상 처음으로 하층민 출신에서 한고조(漢高祖)로 불리우는 제왕이 된다. 유방은 지금의 강소성에 해당하는 패현(沛縣)이 고향으로 그의 출신성분은 한마디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따르면 유방이 황제가 되기 전의 행각은 그야말로 건달의 전형이었다고 한다. 매일 집안에 파묻혀 놀고먹기를 즐겼으며 호언장담을 하기가 일쑤인가 하면 술과 여자를 매우 밝혔다고 한다. 이런 ‘한심한’ 자가 후일에 제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가 타인에게 ‘일단은’ 겸손했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의 재사(才士)들을 두루 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비록 건달 출신이었으되 용인술(用人術)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그에겐 기라성같은 많은 참모와 지략가들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한신(韓信)은 압권의 걸물(傑物)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유방은 비로소 천하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한신은 유방의 토사구팽(兎死狗烹) 술수에 의해 제거되는데 그 연유가 예사롭지 않다. 유방의 배려에 의래 일정지역을 다스리는 제왕으로 그 직위와 신분이 격상된 한신은 그러나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감시의 눈길을 늦추지 않고 있는 유방의 경계를 도외시했다. 대단한 세력을 가진 한신이 혹여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노심초사한 유방으로서는 한신을 그냥 놔둘 수가 없었다. 한신은 비록 군사(軍師)적으론 그 재능이 출중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유방의 한참 아래였던 셈이다. 한신은 유방의 예리한 경계의 그물을 간과한 채 외려 자신의 위엄과 세력을 드날리는 일을 좋아하는 경거망동을 벌이는데 결국 이것이 그의 빠른 죽음을 재촉하는 단초가 된다. 최근 이명박 대선후보의 유세단 문화예술팀 고문인 탤런트 백 모씨가 이회창 전 총재에게 “이회창 씨 하는 짓거리는 뒈지게 두드려 맞아야 할 짓거리”라고 비난한 사단이 있었다. 이 발언이 파문이 일자 그는 자신의 발언이 농담이었다고 해명했고 한나라당에서도 유감의 사과 표명을 했다. 하지만 이같이 앞 뒤를 재지 않은 말(言)로 인한 파장을 보자면 새삼스럽게 ‘겸손’(謙遜)의 의미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듯 ‘겸손’이란 삼척동자도 아는 말이다. 이는 곧 ‘남을 존중하되 그러나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일컫는다. 삼사일언(三思一言)은 저잣거리의 필부들도 다 아는 상식이다. 아무리 정치판은 아사리판 이라지만 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은 반드시 가려서 해야겠다. 그 옛날 한신이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알고 겸손하며 자중자애 했더라면 그토록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새삼 떠올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