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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군조련도- 경상, 전라, 충청 삼도수군의 해상 기동훈련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임진왜란 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낸 이순신은 수군의 특성을 살려 청어를 잡아 쌀과 교환하는 방식으로도 군량미를 확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왜적과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
- 굶주린 병사들 먹이기 위해
- 청어 14만 마리 잡아 쌀로 바꿔
- 그만큼 경제성 지녔던 인기 어종
- 입 안 가득 기름진 행복의 맛
- 중국인들도 비싼 돈주고 사가
- 세금 매겨 나라 곳간 채울땐
- 징수 피하려 정어리로 속이기도
■청어의 별칭, 관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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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구룡포 해안가 덕장에서 해풍에 건조되고 있는 과메기. 국제신문 DB |
청어는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고 하여 '비유어(肥儒魚)' 혹은 이에 대한 사투리 '비웃'으로도 불리지만 이외 별칭도 여럿 있다. '관목어(貫目魚)', '등어', '구구대', '고십청어', '울산치', '갈청어', '푸주치', '눈검댕이', '과목숙구기' 등등. 한반도 삼면 바다에서 모두 났던 물고기였으므로 이렇게 이름이 다양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개 사투리로 해당 지역 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낯선 이름들이지만 게 중 '관목어'는 그나마 여러 문헌들을 통해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관목(貫目)'이란 '눈을 꿰다' 혹은 '눈이 이어지다'라는 뜻인데, 청어에 이런 별칭이 붙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나는 1918년 신문관에서 발행한 소담집(笑譚集)인 '소천소지(笑天笑地)'에 기록된 이야기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조선시대 동해안의 한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 과거 길에 배가 고팠던 선비는 바닷가 나뭇가지에 눈이 꿰인 채 건조 중인 청어를 발견하고서 이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맛이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선비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매년 겨울이면 청어의 눈을 꿴 뒤 말려서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청어는 눈을 꿰어 말렸는데, 바로 여기에서 관목이란 별칭이 생겼을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과메기'란 이름도 이 관목이란 별칭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청어가 많이 잡히는 구룡포에서는 '목'을 '메기'라고 발음하는데, 관목이 '관메기'로, 이어 'ㄴ'이 탈락하면서 '과메기'란 발음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했는지는 시간을 두고 좀 더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일리가 없지는 않다.
■청어, 나라를 살리다
때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왜적을 맞아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그도 골몰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군량미를 확보하는 일. 아무리 지략이 뛰어난 이순신도 굶주린 병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가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정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이순신은 자력으로 군량미를 확보해야만 했다. 병사들을 시켜 평야와 섬을 개간해 농사를 짓게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청어도 잡도록 했다. 식량으로 곧장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곡인 쌀과 교환하고자 한 것이다. 1595년(선조 28) 12월 4일자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휘하 장수가 청어 7000여 급(級)을 쌀과 바꾼 이야기가 등장한다. 1급은 20마리니까 이순신은 무려 14만 여 마리를 잡아 군량미를 확보한 셈이다.
청어가 쌀과 교환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은 그 만큼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어는 흔한데다가 맛까지 뛰어났으니 많은 조선인들이 청어를 좋아했다. 그 중에는 가히 마니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청어를 사랑한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청어가 드물게 잡혀 가격이 40~50문(文)까지 높게 뛰었을 때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찾았을 정도였다. 입 안 가득 기름진 행복을 가져다주는 청어의 맛 앞에 값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순조 때 좌의정을 지낸 바 있는 한용귀(韓用龜)는 대표적 청어 마니아였다. 그는 청어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매 끼니 밥상에 꼭 청어를 올리게 했다. 이를 두고 권두(權頭)란 사람이 1급에 3, 4문 밖에 되지 않는 미천한(?) 청어를 끼니마다 재상의 밥상에 올린다며 찬비(饌婢)를 꾸짖었다. 그러자 한용귀는 "권두가 나더러 청어를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고 하며 너스레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청어 마니아에는 조선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인도 조선인 못지않게 청어를 좋아했다. 19세기 들어 중국 선박이 해서(海西)에 가득 몰려다니면서 조선인이 잡은 청어를 높은 값으로 사가는 통에 신분이 존귀한 자들조차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수요가 있다 보니 청어는 경제성을 지닐 수 있었다. 이순신도 이를 알고 쌀과 바꾸어 군량미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청어는 자신도 모르게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되었지만 세운 공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청어가 병사들의 배를 채우지 않았던들 이순신의 저 눈부신 전공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청어는 나라의 곳간도 채웠다. 진상되어 궁궐의 찬물(饌物)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몸에 세금이 매겨져 나라 살림살이에도 쓰였다.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 따르면, 청어에 매겨진 세금은 경상도에서 기장현(機張縣)은 5분의 1, 동래부(東萊府)는 8분의 1, 통제영(統制營)은 3분의 1이었다가 점차 그 중간인 5분의 1로 바뀌었다고 한다. 많이 잡혔던 물고기였던 만큼 나라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청어에 세금이 매겨지자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청어를 숨기는 어민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19세기 초 우해(牛海), 즉 지금의 진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김려(金糲)에 따르면 청어를 '비의청어(飛衣鯖魚)'라고 속인 어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청어를 생김새가 비슷한 정어리로 속였던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청어는 가히 '나라를 살린 물고기'라고 할만하다.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라고 해 '비유어(肥儒魚)'라는 별칭이 붙었지만 여기에 더해 '구국어(救國魚)', '비국어(肥國魚)'라는 이름을 붙여주어도 되지 않을까. 청어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겨울바람이 만든 진미, 과메기
우리 선조들은 청어구이의 맛을 최고로 쳤지만 이외 방법으로도 청어의 맛을 즐겼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연기가 통하는 부엌 창에 청어를 매달아 두면 연청어(煙靑魚)가 된다"며 훈제청어를 소개했다. 바이칼 호수 근처에 사는 브리야트족이 요즘도 청어과 생선을 훈제한 오물(Omul)을 즐기듯이 19세기 우리 선조들도 훈제청어를 먹었던 것이다.
청어는 여느 물고기와 마찬가지로 젓갈을 담가서도 먹었다. 빙허각 이 씨는 '규합총서'에서 "청어를 발 위에 펴놓고 소금을 뿌려 층층이 놓은 뒤 돗자리로 덮어 하룻밤이 지나면 어즙(魚汁)이 모두 발 아래로 빠지는데, 이때 즉시 항아리 속에 청어와 소금을 층층이 넣어 담근다"고 청어젓 담그는 법을 소개했다. 미리 어즙을 빼는 것이 특이한 모습인데, 청어에 기름이 많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녀는 이렇게 청어젓을 담그면 "해가 묵어도 대가리가 떨어지지 않고 좋다"며 그 장점을 자랑하기도 했다.
훈제청어와 젓갈은 잊힌 지 오래지만 겨울 찬바람에 건조해 과메기를 만들어 먹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과메기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 말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배를 갈라 내장과 뼈를 제거한 뒤 말리는 것이다. 전자를 통과메기, 후자를 편과메기라고 부른다. 통과메기는 보름 이상 말려야 하지만 편과메기는 사나흘만 잘 말려도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청어는 기름이 많고 육질이 연한 물고기다. 기름은 예전에는 등불을 밝히는 데, 그리고 요즘에는 천연비누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기름에는 두뇌 발달을 돕고 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DHA와 오메가3가 많은데, 건조하면 그 양이 더욱 증가한다. 또 연한 육질도 쫄깃해져 식감도 좋아진다. 그러니 청어를 말린 과메기는 그야말로 남녀노소에게 모두 이로운 영양 덩어리이자 진미다.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보니 곧 봄이 올 태세다. 올 겨울 과메기를 못 드셨다면 겨울바람이 지나기 전 꼭 한번 맛보시길. 신선한 채소, 미역과 어우러지며 내뿜는 과메기의 부드러움과 쫄깃함에 몸과 입이 함께 즐거워질 것이다.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