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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했다. 유니폼은 새로 바꿔 입었지만 얼굴 가득 퍼지는 환한 미소와 함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돼서 나오는 대답들은 그가 어떤 무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만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네덜란드-영국-독일-사우디아라비아를 돌아 미국에 안착하게 된 축구인생은 ‘이제야’ ‘비로소’ 축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색다른 삶으로 다가온 듯하다. 오랜 시간동안 치열한 경쟁과 성적의 압박감 속에서 몸과 마음이 자유롭지 못했던 생활이 축구인생의 마지막 무대인 미국 MLS에서 새롭게 꽃을 피우려고 한다.
유럽과 중동을 돌고돌아 밴쿠버에 닻을 내린 초롱이 이영표. 축구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새로운' 도전 앞에, 지금 그가 서 있다.(사진 : 홍순국) |
이영표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 후 한동안 은퇴와 선수 생활 지속 여부를 고민하다 미국 축구 무대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해 12월 MLS 밴쿠버 화이트캡스와 옵션 포함, 총 2년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던 것.
야구의 스프링캠프처럼 밴쿠버보다는 따뜻하고 쾌적한 미국 애리조나를 찾아 팀 전지훈련을 소화하고 있는 이영표를 애리조나 카사 그란데에서 만났다.
-미국, 그것도 애리조나에서 이영표 선수를 만날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어요. 이제야 실감이 나네요. 미국 MLS를 뛰게 되었다는 사실이…. 밴쿠버가 추워서 여기 애리조나로 전지훈련을 오게 된 거죠?
“그렇죠. 거긴 영상 4,5도를 나타내니까 훈련하기가 힘들어요. 이곳 날씨가 아주 좋네요.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여러 팀을 옮겨 다녀봐서 그런지 화이트캡스가 새로운 팀이지만 아주 낯설지가 않아요. ‘고수’들만 느낄 수 있는 기분이랄까?(웃음) 분위기가 좋아서 훈련하는 게 재미있네요.
-이영표 선수가 화이트캡스에 입단하면서 밴쿠버 한인 사회가 들썩거린다는 얘길 들었어요. 교민들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면서요?
“화이트캡스가 지난 시즌 처음으로 1군 무대에 올라섰고 리그 꼴찌로 시즌을 마무리했어요. 그런데도 평균 관중이 2만 명이 넘는대요. 그런데 밴쿠버에 워낙 한국 분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제가 입단한 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축구장을 찾을 거라고 구단측에선 기대를 하시더라고요. 팀 분위기가 아주 좋아요. 선수들도 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요. 어떤 방법으로 소식을 접했는지 모르지만, 절 반갑게 맞아주고 뭘 해도 색다르게 봐주니까 살짝 부담도 되고 기분도 좋고 그러네요. 그런데 너무 편해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어요.”
편안함이 오히려 두렵다는 이영표. 그는 천상 챌린저의 운명을 타고 났다. |
-어떤 부분 때문에 그렇죠?
“적응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워진 거예요. 새로운 무대에 대한 긴장감이나 두려움도 없어진 것 같고. 갑자기 열정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요. 제가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각국의 리그 경험이 많다 보니 그 차이점에 대해서도 명확한 판단이 서 있을 것 같아요.
“해외 진출 첫 무대였던 네덜란드는 당시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웠지만 가장 축구를 재미있게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이기는 경기가 많아서 그 재미에 푹 빠진 나머지 심판이 종료 휘슬을 부는 게 싫었어요. 모든 관중들이 날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죠. 가장 신나게 축구를 했던 시간이었어요.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르게 득점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기는 축구를 할 수 있는지를 터득하게 해준 무대였습니다. 독일 분데스리가도 짧게 경험했지만 매 경기마다 8만3000명이 가득 찬 경기장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행복감을 맛보게 해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은 2년 동안 네 차례의 우승을 경험했는데 그곳 축구팬들의 50%가 알 힐랄 팬이라 원정경기를 가도 마치 홈경기처럼 치렀던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어디를 가도 ‘우리 팬’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던 것이죠.”
-팀을 옮길 때마다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의 반복들이었는데요, 어느 상황이 가장 힘든 결정이었을까요?
“FC서울에서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으로 이적할 때가 가장 많이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첫 해외 진출팀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독일 도르트문트와 재계약을 한 상태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죠. 도르트문트에선 절 간절히 필요로 했었고, 샬케와 경쟁을 벌이면서 절 영입했기 때문에 제가 다른 리그로 이적하는 걸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이번에 미국으로 오는 것 또한 오랫동안 고민했던 부분이에요. 어느 팀으로 가느냐보단 은퇴냐 선수생활 지속이냐를 놓고 6개월가량 고민을 했으니까요. 사실 사우디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선수생활보다는 은퇴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어요.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서 그걸 좀 채우고 싶었는데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제 의견에 반대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계속 선수생활을 해가기로 했던 거죠.”
-많은 팬들은 이영표 선수가 프로야구의 박찬호, 김병현처럼 K리그로 복귀하길 바랬어요.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와서 FC서울 선수단에 합류해 훈련을 같이 했거든요. 그때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마음이 따뜻해지고 마구 편해지고…. 에인트호벤으로 진출하기 전에 3년동안 K리그를 경험했던 부분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정서와 말이 통하는 K리그에서 뛸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FC서울에서도 절 강하게 원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렇게 쉽게 가는 방법을 택한다면 내 축구인생의 마지막이 편함만을 추구하다 끝날 것 같았어요. 지금은 좀 더 고생할 시기이지, 편하게 생활하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 선 거죠.”
-‘이제야 말할 수 있다’식의 질문입니다. AS로마와 계약 직전에 파기한 진짜 이유가 뭔가요? 항간에는 이영표 선수가 자신의 진로를 놓고 기도 중에 신의 응답을 받고 ‘대박’ 계약을 거절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에요. 축구인생에서 중요한 건 ‘어디서’ 하느냐보다는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명성만 갖고 판단하고 싶지 않았고, 고심 끝에 계약서 사인 직전에 방향을 틀게 된 겁니다. 당시 토트넘의 구단주는 절 AS로마로 이적시키고 싶었어요. 돈 문제 때문이었죠. 그러나 마틴 욜 감독은 제가 가는 걸 반대했습니다. 만약 구단주가 아닌 감독이 제 이적을 찬성했더라면 전 고민없이 토트넘을 떠났을 거예요. 그러나 팀(감독)이 원했기 때문에 남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또다시 6개월 후에 AS로마로부터 오퍼가 들어왔어요. 제가 만약 이전에 거절했던 걸 후회했더라면 그때 덥석 오케이를 했었겠죠. 그러나 그때도 정중히 거절하는 걸로 결론 내렸어요. AS로마와 전 인연이 아니었던 겁니다.”
-K리그 복귀 대신 미국행을 택했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누구보다 아내가 다시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FC서울 훈련장이 있는 구리와 우리 집이 가까우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버리고 괜히 미국가서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고 은근히 부추기더라고요. 어쩌겠어요. 제가 이런 길을 택했는데. 아내한테 제일 미안했어요.”
-얼마 전에 안정환 선수가 은퇴 발표를 했어요. 내심 K리그에서 그를 볼 수 있기를 기대했던 팬들이 많았는데, 아쉬움이 커요.
“저도 그랬어요. 좀 더 뛸 수 있는데, 정환이 형답게 깔끔히 정리를 하시더라고요. 전 정환이 형을 안양공고 시절 아주대와 연습 경기를 하면서 처음 만나게 됐어요. 아주대와 건국대끼리 맞붙었을 때도 그 형 덕분에(?) 처절한 패배를 경험했었고요. 대표팀에서 만나 같이 축구를 하면서 그 형의 기술과 드리블이 너무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뒤에서 형이 뛰는 걸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플레이 자체가 ‘아트’였습니다. 아시아권에서 가장 공을 멋지게 차는 축구선수라고 생각했고, 제 마음 속 우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형을 더 이상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워요.”
-이영표 선수한테 ‘월드컵’이란 단어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요?
“전 2002년보다 2010년이 더 인상적이었어요. 2002년에 4강 신화를 이뤘을 때 유럽에서 만난 축구선수들은 한국팀의 성적을 운으로 보더라고요. 그래서 꼭 다시 한 번 그 비슷한 성적을 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남아공월드컵에서 이룬 한국의 16강 진출은 저한테 마지막 월드컵이자, 원정에서 이룬 최고의 성적이라 특별한 의미로 기억되고 있어요. 한국의 4강 신화를 운으로, 홈 어드밴티지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유럽 선수들에게 보란 듯이 해보이고 싶었거든요. 8강 진출이 무산된 게 너무 너무 아쉬웠지만 그래도 원정 16강 진출을 이뤘다는 면에서 어느 월드컵보다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혹시 축구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요?
“건국대 2학년 때 이상하게 축구를 하는데 한계점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계속 뛰다가는 제 축구 실력이 다 들통 날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당시 정종덕 감독님께 ‘감히’ 휴가를 달라고 부탁드렸었죠. 감독님께서 제 마음을 읽으셨는지, 쉽게 허락을 하시더라고요. 원래는 한 달 정도를 예상했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감독님께서 쉴 만큼 쉬었으면 빨리 나와서 게임이나 뛰라고 전화를 하시는 바람에 잠깐의 일탈이 끝나버렸어요. 만약 그때 감독님이 저한테 그 휴식을 주지 않으셨더라면 지금의 이영표가 없었을 지도 몰라요. 당시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이 심했고, 쉼 없이 지속해나갔다간 뻥 하고 터져버렸을 겁니다.”
-네덜란드와 프리미어리그를 동시에 뛰었던 박지성 선수와의 인연은 서로의 축구인생에 진한 스토리를 제공하며 각인돼 있을 것 같아요.
“축구는 11명이 뛰잖아요. 그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선수랑 같이 뛴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인 거죠. 그게 설령 상대팀 선수로 만난다고 해도 그래요. 지성이는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선수예요. 개인의 이익이 아닌 팀을 위해 더 많은 걸 버릴 줄 아는 선수이다보니 맨유에서 롱런할 수 있는 겁니다. 일부 축구팬들은 지성이의 능력을 의심하는데 그런 생각 가지시면 절대 안 돼요. 능력과 실력이 없는 선수가 맨유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거든요.”
-이영표와 박지성 선수의 대표팀 복귀론이 나올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어요?
“선수가 은퇴를 결심하는 건 몇 년동안 많은 고심 끝에 결정한 부분이거든요. 흔히 대표팀이 위기라고 말하면서 저랑 지성이를 거론하시는데, 위기일수록 좋은 선수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전 대표팀이 위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대표팀의 시스템이 문제인 거죠. 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표팀 은퇴를 후회해 본 적도 없고, 대표팀이 부른다고 해서 다시 복귀할 생각도 없어요. 더 이상 저를 비롯해서 지성이 이름도 거론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서로 미안하고 불편해지는 일이에요.”
-이영표 선수가 아끼는 후배니까 사적인 질문을 해볼게요. 박지성 선수의 결혼설, 열애설이 자꾸 나오는 이유가 뭘까요?
“결혼을 안 했으니까 그렇죠(웃음). 지성이도 빨리 결혼해야죠. 그래야 기자분들도 마음 편히 쉬시죠(웃음). 이전에 지성이 아버님이 지성이한테 제 와이프같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와이프같은 여자는 단 한 명밖에 없는 터라 심히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하”
이영표가 전하는 로마 이적, 대표팀, 그리고 K리그까지. 어느새 그도 좀 더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가 되었다. |
이영표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미디어 담당자가 지켜보다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유를 물었더니, 약속된 인터뷰 시간이 지난 데다가 곧 저녁도 먹어야 하고 선수가 힘들어 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이영표가 오히려 ‘괜찮다’고 말하면서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화이트캡스팀은 대부분 나이 어린 선수들로 구성돼 있고 이영표처럼 프로필이 화려한 선수가 거의 없는 터라 팀에서 차지하는 이영표의 존재감은 크고 묵직했다. 그래서인지 훈련할 때도, 또 연습경기를 펼칠 때도 다른 선수들이 이영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감탄사를 연발하곤 했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선수들마다 ‘LEE’를 외치며 장난을 걸어왔다.
인터뷰 내내 이영표의 현란한 말솜씨에 푹 빠져 있던 기자에게 이영표가 이런 메시지를 전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분들은 많지만 재미있게 즐길 줄 아는 분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축구가 재미있는 이유는 항상 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우리를 흥분시키고 긴장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죠. 이겼을 때 기분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은 졌을 때 그 현실을 어떻게 승화시키느냐 하는 점이에요. 선수들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축구팬들도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 올림픽대표팀과 축구대표팀에 따뜻한 격려와 응원의 시선을 보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두 메이저리그 스타의 특별한 만남 - 이영표 & 추신수
처음엔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반색하며 관심을 나타냈다. 한쪽은 축구, 다른 한쪽은 야구 선수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활약하는 무대가 같은 미국이고 평소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터라 기자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자리가 이영표와 추신수의 저녁 회동이었다.
급작스럽게 잡힌 두 메이저리거의 만남. 비록 종목은 다르지만 타국에서 생활하는 운동선수라는 공통 분모 아래 그들만의 애환을 깊게 나눴다.(사진 : 홍순국) |
2월 25일 시작되는 애리조나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1월 초부터 개인 훈련을 소화하고 있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전지훈련으로 인해 난생 처음 애리조나를 찾은 이영표. 두 사람은 피닉스 인근 썬더버드에 위치한 스시집에서 만나 두 시간 가량 식사를 하며 축구와 야구에 대한 얘기는 물론 똑같이 경험한 4주간 기초군사훈련에 대한 ‘뒷담화’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이 자리에는 추신수 아내 하원미 씨도 함께 자리했다.
이영표-추신수와의 대화를 기사로 재구성해본다.
야구가 힘들까? 축구가 힘들까?
추신수(추): 이 문제의 대답은 간단해요. 야구가 쉽습니다. 야구는 축구에 비해 움직임이 크지 않아요. 공이 오지 않을 때는 하루 종일 외야에 서 있다가 퇴근할 때도 있어요. 그런 점에선 축구가 힘든 운동이죠.
이영표(이): 그런데 야구는 무승부로 점수가 나지 않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게임을 한다면서요?
추: 제가 마이너리그 때 23회까지 치른 적이 있었어요. 그 경기가 새벽 3시 반 정도에 끝났을 거예요. 당시 아내가 절 태우러 경기장에 왔다가 하도 안 나오니까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나봐요. 새벽 1시가 넘어도 경기가 끝나지 않자 덕아웃 쪽으로 내려와서는 ‘자기야, 빨리 끝내고 집에 좀 가자’고 하더라고요. 결국 새벽에 경기 끝내고 집에 가서 씻고 그러니까 해가 뜨는 거예요. 저녁을 아침으로 먹었어요.
이: 정말 대단하네요. 축구 경기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야구 선수가 연봉을 더 많이 받아야 할 것 같아요.
추: 축구는 90분 내내 뛰어 다녀야 하는 거잖아요. 어휴, 그걸 어떻게 감당하세요?
이: 그러니까 프로 선수죠. 제가 야구를 못하는 것처럼 추신수 선수도 축구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는 거예요.
가족 소개
추: 선배님은 딸을 두셨나요?
이: 네. 딸 둘입니다. 이름은 하엘이랑 나엘이고요.
추: 와, 이름이 정말 예쁘네요. 분명 남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고요.
이: 일곱 살된 ‘하엘’은 ‘한 분 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고요, 네 살된 나엘은 ‘나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란 의미예요. 추신수 선수는 벌써 아이들을 세 명 두셨다고요?
추: 2005년, 2009년, 2011년에 무빈이, 건우, 소희가 태어났어요. 와이프가 고생 많았죠. 지금도 고생하고 있고요. 막내가 너무 착해요. 집에 있다 보면 소희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우유 먹고 혼자 놀고 자다가 또 우유 먹고 그래요.
이: 얼마전 한국에 있을 때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어느 인터넷 매체에서 가족들이 호텔에서 식사하는 장면을 몰래 찍어 인터넷에 올렸더라고요. 아내가 굉장히 화를 냈어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는데 그 유치원에선 우리 아이들이 이영표의 딸이란 걸 전혀 모르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회사로 전화를 걸어 사진을 내려 달라고 했더니 나중엔 아이들 얼굴만 흐리게 처리해서 사진을 계속 올려놓고 있더라고요. 그땐 진짜 화가 났습니다. 예의도 없고, 말도 안 통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가족들이랑 편하게 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그걸 제주도까지 와서 파파라치마냥 사진을 찍어 올리는 이유가 뭘까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말이죠.
추: 전 이미 가족들이 다 노출된 상태라 그런 일은 없지만 기자 분들과는 항상 어려움이 뒤따르는 것 같아요. 이번에 애리조나에 한국의 프로야구 캠프가 많이 들어와서 훈련 중이에요. 그러다보니 이전과는 달리 한국에서 기자 분들이 많이 오셨고, 저한테도 여러 분들이 찾아오셨어요. 찾아주시는 건 고마운데, 오셔서 다양한 요구들을 하시더라고요.
런닝만 해야 되는 날에 오셔서 영상을 잡아야 하니까 캐치볼을 해달라고 부탁하시는 분도 계시고 롱토스만 하는 날인데 타격폼을 잡아달라고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팀 프로그램을 쫓아가야 하는 선수가 미디어의 요구대로 그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면 팀에서, 또 다른 선수들이 절 어떻게 보겠어요? 그걸 거절해 놓으면 걸 뒤돌아 서서 절 욕하시더라요. 한국 야구를 취재하는 문화와 이곳 취재 문화는 차이가 커요. 그런 점에서 안타까움이 많았죠. 아쉬움도 있었고요.
갑자기 선수협 얘기로
이: 야구선수들은 남다른 의식을 갖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선수협의회도 만들어진 것이고요.
추: 처음 출발은 좋았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어요. 한국에는 연봉 협상을 할 때 대리인 제도가 허락되지 않거든요. 한국에서 야구하는 선수들 얘기를 들어보면 구단과 연봉 협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대요. 그냥 계약서 꺼내서 사인하라고 강요한다고 하더라고요. 선수협이 선수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힘이 있는 조직이 되려면 더 많은 노력과 보완할 점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축구는 그런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어요. 선수들이 구단으로부터 일방적인 회유와 강요를 당해도 그저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요. 더욱이 그런 선수들이 선수협의 필요성을 생각하지 못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죠. 영국 프리미어리그에도 선수협의회가 존재하거든요. 선수들 모두 가입을 하게 돼 있고 구단과 선수와 분쟁이 생길 경우엔 선수협에서 변호사비를 내 주면서까지 선수의 권위를 보호해주려고 노력해요. 은퇴 후, 그 선수의 직업까지 알아봐주면서요.
추: 메이저리그는 선수들이 파업을 해서 야구를 안하게 되면 선수협에서 선수들의 연봉을 지급해줘요. 파업을 할 경우 구단들이 선수들에게 연봉을 더 주겠다며 파업에 가담하지 못하게 회유를 하거든요. 그러나 그 회유에 넘어가는 선수가 없어요. 파업을 해도 선수협으로부터 돈이 나오기 때문이죠.
운동선수의 애환
이: 추 선수 도루 잘 하시죠? 발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제가 야구는 잘 몰라도 기사를 통해 추 선수의 활약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추: 고등학교 때 100미터 달리기를 12초에 끊었어요. 당시 육상부와 시합해서 제가 이겼을 정도였죠.
이: 운동선수로, 그것도 얼굴이 알려진 선수로 사는 게 힘들죠?
추: 미국은 그렇지 않은데 한국은 아무래도 남의 시선을 신경 쓰게 만들더라고요. 특히 인터넷 댓글 때문에 상처 받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저도 그랬었고요.
이: 저도 한때 인터넷 댓글 때문에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때론 억울했고, 답답했고, 열도 받았었죠. 그런데 그런 악의적인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키보드 두드릴 때만 저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즉 글 올리고 뒤돌아서면 전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 돼요.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제가 속앓이를 한다는 게 억울하더라고요. 운동선수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이에요. 그런데 정말 좋은 선수라면 그런 스트레스를 잘 이겨내야 해요. 똑같은 레벨에서 누가 더 강한 자인가를 판가름하는 여부는 멘탈이에요. 남의 시선, 말들에 내 인생을 저당 잡히지 말아요. 그러기엔 내 인생이 너무 아깝잖아요.
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게 잘 안 돼요.
이: 물론 그렇죠. 저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걸 이겨내야 운동을 재미있게 할 수 있어요. 돈 조금 받고 욕 많이 먹는 것보다 돈 많이 받고 욕 많이 먹는 게 낫지 않겠어요?(웃음) 뭐든지 높이 올라갈수록 힘들고 두려워져요. 떨어질 때를 미리 생각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런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요.
이: 혹시 야구에도 그런 게 있나요? 선수가 못해도 팀 성적이 좋으면 못한 게 무마가 되는 부분들이요.
추: 그럼요. 있죠. 그런데 잘하는 선수들하고 같이 있으면 제가 배우는 것도 많고, 제가 아웃이 되더라도 타점을 얻을 수가 있어요. 제가 아무리 안타치고 홈런을 때려도 ESPN에 안 나아요. 하지만 뉴욕 양키스에선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해도 뉴스 거리가 돼요. 양키스는 관중을 몰고 다녀요. 클리블랜드랑 경기할 때 5만 명이 넘어도. 평소 우리 팀 관중이 1만 명 정도인데요. 세 경기 연속 매진이 되는 거죠.
이: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에 있을 때가 그런 느낌이었어요. 작년에 알 힐랄은 전 경기 무패 우승을 거뒀거든요. 사우디 축구 3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대요. 알 힐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 선수가 12명이나 있었어요. 다른 팀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우승팀이었습니다.
추: 그런 팀에서 왜 나오셨어요? 팀에서 재계약을 원하지 않았나요?
이: 아니에요. 팀은 절대적으로 절 필요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다시 그 자리에 눌러 앉으면 진심으로 돈 때문에 있는 꼴이 돼요. 지금 밴쿠버 화이트캡스팀보다 엄청난 돈을 제시하며 잔류하기를 원했지만 제가 걷어차고 나왔어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거죠. 축구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경제적인 목표가 있었어요. 지난해까지 그걸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의 돈은 의미가 없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걸 하고 싶었어요. 그게 은퇴라고 해도 좋다고 믿었습니다. 만약 다른 팀으로 이적한다면 이젠 돈이 아닌 제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 팀이길 바랐어요. 그게 지금의 밴쿠버 화이트 캡스인 거죠.
이: MLB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받는 선수가 누구에요?
추: 아마 알렉스 로드리게스일 겁니다. 2007년 양키스와 10년간 2억7500만 달러(약 3110억원)에 계약했거든요. 올시즌 로드리게스의 연봉이 3200만 달러(약 362억원)예요.
이: 축구는 세계에서 돈을 제일 많이 받는 선수의 연봉이 180억 원 정도 돼요. 미국이 대단해 보여요. 땅도 크고, 모든 게 커요(웃음).
그래도 할 말 많은 군사훈련
추: 선배님은 군대, 어떻게 다녀오셨습니까?
이: 저도 2002년 월드컵 덕분에 4주 기초군사훈련만 받았죠. 추 선수는 이번에 다녀왔죠? 지난 연말에요.
추: 네. 훈련 기간 동안 소대장을 맡아서 군기 팍 들어서 생활했습니다(웃음).
이: 전 거기서 훈련하는 군인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매점 가서 매일같이 약과를 사서 나눠줬어요. 그래서 저한테 아주 잘해줬습니다(웃음). 우리 소대 애들이 잠을 안 자요. 제가 아닌 제 약과를 기다리느라.
추: 와, 전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우린 매점에 가지 못했어요. 한 번은 종교행사에 참석하려고 부대 내 절을 찾았어요. 그래도 이름이 있는 선수가 왔다고 만두를 따로 준비해 놓고선 먹으라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배가 고팠고 너무 먹고 싶었지만, 먹을 수가 없었어요. 다른 소대원들도 다 같이 먹는 거라면 맛있게 먹겠는데, 저 혼자 그걸 어떻게 먹겠어요. 부대로 가져가도 되느냐고 여쭤봤더니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끝까지 먹지 않고 버텼는데, 당시 롯데 김명성 선수가 저랑 같은 소대에 배치돼 종교행사에 같이 다녔거든요. 명성이가 4주 훈련 마치고 사회로 나와서 같이 식사를 할 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형님, 그때 그 만두 진짜 먹고 싶었습니다. 형님이 한 개만 드셨더라면 전 다른 소대원들 생각 안 하고 다 먹었을 겁니다”하고요. 배꼽 빠지게 웃었죠.
이: 저는 혼자 먹었을 것 같아요. 그거 다 먹고 소대로 돌아와서 애들한테 자랑했을 겁니다. “형, 만두먹었다!”하고요. 추 선수는 의리가 있네요. 전 야간행군할 때 약과 30개씩 넣어서 갔어요. 애들 나눠주려고요.
추: 전 야간행군할 때 중대장께서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가방을 무겁다 생각하지 말고 ‘인생의 무게’라고 생각하라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도 힘들면 배려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절 보는 시선들 때문에 완전군장에다 깃발까지 들고 선두에 서서 걸어갔어요. 그런데 그게 ‘인생의 무게’가 아니라 ‘고통의 무게’더라고요(웃음)“
이: 제가 입대할 때만 해도 소위 ‘월드컵 효과’가 있어서 많은 배려를 받았어요. 목욕도 따뜻한 물로 하고. 식당에 가면 취사병들이 알아서 먹을 걸 챙겨줬어요. 너무 많이 챙겨줘서 배가 터질 정도로. 제가 있는 부대가 굉장히 신사적이었습니다. 조교들도 다 존댓말을 사용했고요. 훈련소에서 면회까지 했다니까요. 당시 설기현하고 송종국이 피자하고 통닭을 사가지고 면회를 왔더라고요. 그때 정말 그 후배들이 고맙고 반가웠어요.
부대에서 편하게 지냈는데도 ‘민간인’을 보니까 눈물나게 고맙더라고요. 제가 있던 부대에 훗날 송종국이랑 이천수가 입소했었어요. 제가 부대 자랑을 많이 하니까 어떻게 해서 그쪽으로 배치를 받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두 친구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한 바람에 그 다음 그 부대에 입소한 설기현이 죽을 맛이었다고 합니다. 월드컵 멤버들 중에서 제일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니까요. 한 마디로 FM대로 훈련을 한 거예요. 퇴소 후, 기현이가 뭐라고 한 줄 아세요? “군대 4주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웃음). 일반병이 이 얘기 들으시면 가소롭다고 뭐라 하시겠지만, 기현이 입장에선 진짜 힘들었을 거예요.“
서로에 대한 ‘느낌표’!
이: 가만 얘기를 들어보면 추 선수한테는 강직한 선비 정신이 있는 것 같아요. 은퇴 후에 국회나 KBO나 공무원 쪽을 생각해 보셔도 될 정도로 생활하는데 룰을 중시하시네요.
추: 선배님, 그런 말씀 마세요. 작년에 큰 일 한 번 겪고 나서 제 이미지도 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웃음).
이: 사람들은 이영표 선수의 이미지와 실제의 제 모습을 착각해요. 제가 모범생이고 반듯하게만 살 것 같다고 착각을 하세요. 실제의 전 군대에서 이런저런 ‘꼼수’를 부린 것처럼 살면서 반칙도 많이 했어요. 불법 유턴도 했었고요(웃음). 그런데 추 선수는 제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달리 굉장히 철저한 편이시네요.
추: 한국이란 타이틀을 달고 외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에 대해 더 엄격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다 한두 번씩 스트레스에 못 이겨 일탈을 하게 되는데, 그 일탈이 작년의 그 사건으로 나타났었죠.
이: 전 이해가 됐어요. 그 때 추 선수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추 선수가 그 이후 더 많은 고통을 겪으셨잖아요. 팬들의 비난들, 여론의 따가운 시선들, 팀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화가 나는 그 처절함 등등.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올시즌에는 모든 걸 잊고,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시길 바래요.
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잊혀지진 않는 것 같아요. 팬들도 마찬가지이고요. 올해 잘 해서 성적으로 팬들이 받은 상처를 씻겨드리고 싶어요. 믿었던 선수였기 때문에 배신감도 더 컸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와중에 이렇게 선배님을 만나게 돼서 큰 용기도 얻게 되고 자신감도 생기네요.
이: 오히려 제가 더 많은 걸 배우고 느끼고 돌아갑니다. 특히 두 분(추신수-하원미 부부)의 러브스토리와 마이너리그 때의 결혼 생활 얘기를 들으니까 따뜻한 감동이 생기는데요. 제 와이프가 ‘슈퍼맘 다이어리’란 프로그램을 봤었나 봐요. 하원미 씨의 내조와 미국에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 뒷바라지하는 데 대해 큰 감동을 받았더라고요. 오늘 두 분과 함께 식사하게 됐다고 하니까 대신 인사 좀 꼭 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아내가 3월 정도 돼야 아이들과 함께 밴쿠버로 들어와요. 지금은 한국에 있고요.
추: 선배님, 시애틀로 원정경기 오실 때, 제가 시애틀로 원정경기 갈 때 두 가족이 만나서 식사하시는 건 어때요? 전 선배님을 계속 보고 싶습니다(웃음).
이: 그렇게 된다면 제가 더 영광이죠. 메이저리그 타자와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요? 같은 메이저리그이지만 미국에서 축구와 야구는 레벨이 틀리잖아요. 오늘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추 선수를 진심으로 응원할게요. 앞으로 인터넷에서 해외야구 쪽을 자주 클릭할 것 같은데요?
추: 전 지금까지 야구만 알고 살아서 축구를 잘 몰랐어요. 그런데 선배님 만나기 전에 해외축구에 들어가서 기사를 다 보게 되더라고요. 저도 선배님 기사 열심히 읽어가면서 진하게 응원하겠습니다. 종종 문자도 드리고 연락드릴게요. 시즌 시작 전에 선배님을 만나게 된 게 저한테는 엄청난 행운인 것 같아요. 많은 걸 배웠고 깨달았고 느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가까운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벼운 대화가 오가다 결국엔 종교 얘기가 나오고 말았다. 각각 기독교와 불교를 믿는 선수들이라 언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입담에선 이영표를 당할 수가 없었다.
커피까지 다 마시고 이젠 헤어질 시간. 이영표는 1시간 30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숙소에 도착하는 먼 거리였다. 팀에 속해 있다 보니 차가 없어 기자가 픽업을 담당했는데 이영표를 태우고 출발한지 3분 정도 지나자 추신수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자기가 직접 이영표 선수를 모셔다 드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영표는 부담된다며 정중히 사양했고, 나중에 시애틀에서 회동하자고 얘기했다. 결국 기자와 이영표의 데이트가 시작됐다. 그 순간 추신수한테 이런 문자가 왔다.
“제가 이영표 선배님을 모셔다 드리며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어요. 정말 아쉬워요….”
이영표 미투데이 Q&A ‘미투데이’를 통해 올라온 질문들 중 몇 가지를 골라서 이영표 선수에게 대신 물었다. dkstkdgur777 조광래 전 국가대표 감독이 경질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사람들의 ‘기다림’이 저랑은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흔히 우리들은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그건 제대로 기다린 게 아니에요. 감동이 있는 기다림은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을 기다리는 겁니다. 조광래 감독님이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신지 불과 1년 반 밖에 되지 않았잖아요. 삿뽀로에서 한일전을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거의 완벽한 경기 내용을 보여주셨어요. 일본과 레바논한테 지고 나니까 사람들은 그 분을 기다려주지 않더라고요. 전 아시안컵을 치르면서 감독님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시고 노력하시는지를 가까이서 봤어요. 그래서 감독님의 경질 소식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 대표팀을 맡으신 최강희 감독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감독님한테도 시련이 찾아올 수 있잖아요. 그럴 때 팬들이 기다림을 갖지 못하면 한국 축구는 감독만 경질하다가 시간 보내고 말 겁니다. 지금 한국 축구는 기다림이 필요해요. 감동을 주는 기다림이요.” 오돌 FC서울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실 때 셔틀런 180개 이상을 기록했다고 들었습니다. 젊지 않은 나이에 그 정도의 체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그건 체력이 좋은 게 아니라 전 계속 운동 중이었고, 다른 선수들은 시즌 마치고 휴가를 보낸 후 복귀했기 때문에 체력적인 면에서 저랑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어요. 전 운동이 습관화 돼 있어요. 몸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항상 몸을 뛸 수 있는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해요. 그게 설령 휴가 기간이라고 해도요. 일주일에 삼사일은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배드민턴도 치면서 컨디션 유지를 하거든요. 시즌 마쳤다고 해서 그냥 푹 쉬어 버리면 다시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동안 전 혼자 부대끼며 체력을 끌어올리려고 발버둥 치게 됩니다. 즉, 그런 ‘짓’을 안 하려고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는 거죠.” jeehoon1994 등번호 12번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제가 99년 처음으로 올림픽대표팀에 들어가 달았던 번호가 12번이었어요. 그 당시 좋은 번호들은 모두 다른 선수들 차지였었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번호가 12번이었죠. 한 마디로 버림받았던 번호를 등에 달고 뛴 셈인데 전 오히려 애착이 가더라고요. 다들 싫어해서 그랬는지 이상하게 그 번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후로 줄곧 대표팀에서의 등번호가 12번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풀백으로 뛰는 후배들이 12번을 달더라고요. 이전에는 버림받았지만 지금은 후배들이 선호하는 번호로 바뀌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요.” 1211jasmin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뛰었을 때의 등번호는요? “처음 네덜란드에 갔을 때 받은 번호가 29번이었어요. 시즌 중반에 간 데다 제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탓에 주는 대로 달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주전으로 발돋움하니까 3번을 다시 주었고, 그 후론 네덜란드, 영국, 독일에서 줄곧 3번을 달고 뛰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선 12번을 달았는데, 왜 그런지 아세요? 그쪽 사람들한테는 제가 한국대표팀에서 뛸 때의 이미지가 강했던 거예요. 제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가서 보니까 12번을 단 유니폼을 주더라고요. 밴쿠버 화이트캡스에서도 지금 12번을 달고 있습니다.” vldzm78 축구 생활 중 가장 의미있는 골은? “아무래도 네덜란드 PSV 시절 라이벌 아약스랑 맞붙었을 때 제가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2-0 승리로 이끌었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당시 PSV에는 반 봄멜, 비즐리, 마테아 케즈만, 알렉스, 고메즈 등이 아약스에는 쉬나이더, 반더바르트, 이브라이모비치 등 최고의 선수들이 포진돼 있던 상황이었어요. 2003년 1월, PSV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만 해도 선수들이 절 동료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히딩크 감독님께서 절 데려가셨지만, 실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무시당한 셈이었죠. 그런데 홈경기로 펼쳐진 ‘숙적’ 아약스전에서 데뷔골과 동시에 어시스트를 기록하자 선수들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한 게임으로 인해 에인트호벤에서의 제 생활이 편해지게 된 거죠. 특히 전 PSV와 6개월 임대 계약을 맺고 간 상황이었어요. 즉 6개월 후, 재계약하지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 골이 터진 거예요. (박)지성이는 PSV와 3년 반 계약을 맺었고, 전 6개월 임대 신세였기 때문에 그 당시 저랑 지성이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골이 터지면서 재계약에 청신호가 켜진 거죠. 당시 팬 투표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과연 PSV가 임대 신분인 이영표와 재계약을 해야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뜨거운 설전이 벌어졌는데, 그 골로 인해 90% 이상의 팬들이 재계약에 찬성표를 던졌어요. 제 인생을 뒤바꿔 놓은 결정적인 골이라고 할 수 있죠.” 6112903 토트넘에서 가레스 베일을 제치고 선발로 뛰셨는데요, 당시 이영표 선수가 뛰는 포지션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다면서요? “왼쪽 풀백 자리에 웨일즈, 카메룬, 아일랜드, 스위스, 스웨덴, 그리고 한국까지 6명의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이 자리 하나를 놓고 살벌하게 경쟁을 벌였어요. 당시 가레스 베일은 웨일즈에서 데려올 때 거액의 몸값을 주고 데려왔기 때문에 많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죠. 그때 서로 돌아가면서 뛰었는데 선수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치열한 경쟁심이 발동됐어요. 제가 제일 많이 출전했지만 라이벌 관계로 인해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ywhite998 항상 K리그의 발전을 얘기하셨던 분이 K리그를 버리고 미국 MLS를 택한 이유가 뭔가요? “생각하기에 따라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K리그에 가면 한국 축구가 발전할 거란 얘기도 맞지 않는 것 같고요. 솔직히 후배들과 경쟁하는 부분이 편치 않았습니다. 제가 다 아는 후배들인데, 지금까지 주전 자리 꿰차려고 많은 걸 포기하고 축구만 해왔던 후배들인데, 한때 은퇴를 고민했던 선배가 갑자기 나타나 주전 자리를 내달라고 한다면, 그 후배들 입장에선 선배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까요? FC서울에는 저로 인해 국가대표팀에서 매번 뒤로 물러났던 김동진이 존재합니다. 제가 FC서울에 입단하게 되면 동진이는 또다시 저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어요. 다른 선수들은 또 어떻고요. 전 은퇴를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이고, 경기를 뛰어도, 안 뛰어도 상관없는 선수예요. 그런데 FC서울 후배들은 지금보다 더 축구를 잘 해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입장인 거고요. 만약 제가 그 후배들을 모르고, 어떤 인연으로도 연결되지 않은 관계라면 고민조차 안했겠지만, 제 입장에선 후배들한테 부담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어요.” alstjdcks31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나요? “고등학교 시절이요. 안양공고에서 축구할 때는 삶 자체가 축구였어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온통 축구로 물들어 있었죠. 말 그대로 하루에 밥만 먹고 축구 했어요. 운동이 전부였고, 운동에 빠져 있느라 다른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운동말고도 고민할 게 너무 많아요. 가끔은 그렇게 축구에만 빠져 지냈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이전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그때 운동하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금이 좋아요. 제 축구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vhcjdcjs7 이영표 선수 혹은 박지성 선수가 대한축구협회를 이끌어 나가 것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전 그런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고요, 만약 지성이라면 자연스럽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성이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게 맞을 수도 있어요.” cloud0520 종종 트위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요, 최근에는 10년 전 ‘군대가라 슛’에 대해 이동국 선수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올려놓기도 하셨어요. 사생활이 노출돼 있는 트위터에 의견을 올리는 남다른 이유가 있나요? “전 트위터가 소통의 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제 트위터는 소통보다는 저의 일방적인 글만 올라가죠. 답변도 하지 않습니다. 몇 달에 한 두 번 글 남기는 게 전부예요. 좋은 점은 왜곡된 부분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매개체라는 사실이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있고요.” dbcjfsp 현재 선수로서의 경력을 계속 쌓아 가고 계신데, 혹시 미국에서 은퇴할 생각이신가요?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은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 축구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부담없이 즐기면서 하고 싶어요. 지금까지의 축구인생은 항상 도전과 목표를 갖고 부대끼며 살아야 했어요.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요. 공부를 하면서 축구를 하려고 해요. 그래서 요즘은 경기보다도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시간들이 중요해요. MLS는 운동방법이나 시스템이 유럽과는 또 다르더라고요. 정말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고 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