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 경향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 무스타파
무스타파
백진
남자의 걸음걸이가 옮겨질 때마다 양의 두터운 지방살이 출렁인다. 그의 등에는 몸통뿐인 양 한 마리가 업혀있다. 종교의식으로 도살된 할랄고기를 트럭에서 정육점으로 옮기는 중이다. 남자의 콧수염에 땀이 배어난다. 그녀는 새벽하늘로 높이 솟아오른 사원의 모스크지붕을 보다,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본 것이다. 오늘 들어오는 고기에는 닭고기와 소고기는 없는 듯하다. 그녀는 출렁거리는 양을 바라보며 신의 이름으로 도살된 순간에 양이 지었을 표정을 그려본다.
가파른 언덕을 오른 탓일까, 그녀의 얼굴에 땀이 송송 오른다. 손등으로 연신 이마와 볼을 훔친다. 입술 사이로 땀이 밀려들어 혀끝에 짠맛이 느껴진다. 그녀의 집은 이태원 꼭대기를 올라 다시 내려가야 한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에 언제나 이 언덕배기에 앉아 있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이렇게 초여름부터 푹푹 찌는 이상기온 날씨에는 이곳이 좁은 방안보다 한결 시원하다. 콧수염의 남자는 두 번째 양을 업고 들어간다. 그녀의 하루일과가 끝난 시각에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녀의 시계는 일곱 시간쯤 늦게 가고 있는 것이다.
정육점 옆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밤새 영업을 하는 카페다. 주변에 불이 다 꺼져도 저 카페는 언제나 환한 대낮같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온다. 언젠가 그녀는 카페 안을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좁은 공간은 연기로 자욱했다. 연기가 어디서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몽롱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좌석에는 동남아시아나 아랍지역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외국인노무자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연기로 인해 어떤 얼굴인지는 볼 수조차 없었다. 정육점 남자는 한 마리 양은 냉동칸에 걸어두고, 한 마리는 큰 도마 위에 덜렁 눕힌다. 늘어진 양의 뱃살은 두터워 보인다. 할랄고기를 정육점에 배달한 트럭은 이태원 큰길을 향해서 내려간다.
그녀는 휴대폰 뚜껑을 올린다. 그녀의 손은 마치 악어의 입안에서 움직이는 듯하다. 116을 누른다. 기계음인 여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낭랑하다. 국내시간은 1번, 세계주요도시시각은 2번을 누르세요. 그녀는 2번을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누른다. 표준시각안내서비스입니다. 아시아는 1번, 북미는 2번.... 중동은 5번을 누르세요. 그녀는 5번을 누른다. 이스라엘은 1번... 쿠웨이트는 6번, 요르단은 7번.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손가락 끝을 6번과 7번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그녀의 손가락이 7번에 멈춘다. 요르단은 일곱 시간 느린 지역입니다. 현재시각은 오후 9시 32분 20초입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듯하다. 이런 새벽에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폰으로 세계 어디에 있는 사람들이든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번호를 누르는 그녀의 손가락은 떨린다. 휴대폰을 귀에 바싹 갖다댄다. 그녀의 눈동자가 번득인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린다. 그녀는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목청을 돋군다. 무스타파, 무스타파! 벌떼들이 몰려오듯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릴 뿐이다. 갑자기 귀가 먹먹해진다. 그녀의 눈앞에 모래바람이 일듯 시야가 희부옇다. 카페에서 연기가 새어 나와 흩어진다. 그 사이로 카페불빛이 일렁거린다. 사원 모스크지붕은 구름 위로 서서히 움직이는 듯하다.
망고과수원이 나오려면 한참을 더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택시는 덜덜거리다 멈췄다. 택시를 탈 때부터 오래된 차라는 것이 미심쩍었지만, 차 뒤에 박혀진 포니라는 글씨에 정감이 갔다. 우리나라에서 단종된 차가 아직도 이곳에서 택시로 굴러다니다니, 달리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택시는 기듯이 시장통에 있는 정비소로 몸체를 들이밀었다. 그녀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두시간이나 남았지만 정비소에서 시간을 많이 지체하면 약속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무스타파는 분명 탄타의 망고과수원, 3시, 인솨알라 라고 말했었다. 그녀는 무스타파가 말끝에 인사알라라고 토를 단것이 미심쩍어 분명 3시 정각이라고 못을 박았었다. 기사는 당황하거나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이런 사고에 익숙한 듯했다. 두 명의 정비사들이 달려들어 택시앞머리를 뜯기 시작했다.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시장통 언저리를 두리번거렸다. 널브러진 상점들은 세공품과 가죽제품이 즐비했다. 그녀는 시야를 모두 훑어, 지나가는 사내들마다 유심히 살폈다. 훤히 꿰뚫어 보는 눈빛은 강렬했다. 그 순간에도 무스타파가 그녀의 옆을 스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한 차례 후끈한 모래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이 어느 사막에서 불어오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녀의 혓바닥에 모래가 박혔지만, 혀끝을 굴려 그대로 목으로 넘길 뿐, 이를 앙다물었다. 모래바람이 시야를 약간 흐릿하게 했음으로, 발걸음을 도로 쪽으로 옮겼다. 당나귀 수레바퀴와 승용차바퀴가 엇갈려 보였다. 다섯 사람을 수레에 태운 당나귀의 몸집은 남자 한 사람의 것도 못되었다. 당나귀의 지친 눈망울 옆으로, 벤츠차의 양쪽 헤드라이트가 태양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렸다. 그녀는 당나귀와 벤츠차가 나란히 도로를 다니는, 과거와 미래가 같이 공존하는 것처럼 그녀가 무스타파를 만나는 것이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가올지도 모를 아득한 먼 미래의 약속 같기도 했다.
그녀는 한번도 무스타파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단지 그가 아랍인이라는 것과, 콧수염이 있고, 목덜미에 주먹만한 흑점이 있는, 훤칠한 키를 가졌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의 휴대폰은 통신위성처럼 어디든 통화가 가능했다. 처음 그는 요르단에 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오리라는 그녀의 기대는 착오였다. 약속 장소에서 죽치고 기다렸지만 무스타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무스타파를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무스타파를 찾기란 서울에서 김서방을 찾는 격, 거리에서 무스타파! 하고 부르면 그 중에 반은 고개를 돌렸다. 사실 무스타파가 아랍인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어느 민족인지조차 몰랐다. 그녀는 먼저 키가 크면 그 남자의 목덜미부터 살폈다. 간혹 목덜미에 흑점이 있는 남자를 만났지만 번번이 허사였다. 무스타파는 언제나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무스타파, 어디예요? 제가 찾아가겠어요. 그녀는 흥분했지만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다급한 것은 그녀였다. 미스터 송은 안녕하십니까? 무스타파는 미스터 송의 안부부터 물었다. 안녕 못해요. 그녀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그러나 무스타파의 저음은 높아지거나 내려가지 않았다. 인솨알라! 그녀는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미스터 송은 점점 죽어가고 있어요. 무스타파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크라. 그녀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듯 말했다. 내일이라고? 나한테는 내일도 길어요. 어서 만나요. 어디예요? 내가 찾아가겠어요. 무스타파는 어떤 동요도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지금 막 우두를 끝내고 예배를 드리려 모스크에 들어가는 중입니다. 아, 벌써 이맘이 나오는군요.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지만 가라앉히고 소리쳤다. 미스터 송은 죽어! 무스타파의 저음은 그때도 고르게 들렸다. 마리쉬, 그 한마디를 한 뒤 수화기에는 신호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곧장 그가 있다는 모스크를 뒤져 보았지만, 무스타파를 찾을 수는 없었다. 만약 무스타파가 그녀 옆을 스쳤을지라도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 갈라비아를 걸치고 터번을 두른 차림의 사내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얼굴이었다. 단지 목덜미의 흑점만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일주일 뒤에 다시 전화를 하였을 때, 그는 바그다드에 급한 볼일이 있어서 간다고 했다. 그녀가 뒤쫓듯이 바그다드로 갔을 때 그는 회의 중이라고 휴대폰을 받았다. 바그다드에서 약속을 했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도 그는 인솨알라, 부크라, 마리쉬만 할 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이 바란다면? 내일? 염려 말라? 그 세 마디는 가끔 물소리처럼 들리기도 했고, 화염 속을 치솟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언젠가는 그 세 마디가 실이 되어 무스타파의 두터운 입에서 뽑아져 나와, 마술처럼 큰 돌덩이가 되더니,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가느다란 실이 되어, 그녀의 귓구멍으로 빠져 나와 수화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일방적으로 지금 여기 어디니까, 이리로 오세요, 라고 말했다. 그런 약속은 수십 번이 넘었다. 그러나 번번이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저리가 날 정도였지만 그럴수록 무스타파를 더 찾아야 한다는 열망은 치솟고 있었다. 그녀는 무스타파를 찾기위해 몇 달째 아랍과 아프리카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는 날아다니는 듯 분주하게 다녔고, 그때마다 그녀는 그를 ●아갔다. 때문에 그녀의 얼굴은 구릿빛이 된지 오래였다. 며칠 전에도 무스타파는 카이로에 급한 일로 간다고 말했다. 그녀는 카이로를 향했다. 도착을 하자마자 그의 휴대폰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는 이번에는 탄타에 있는 망고과수원에서 선뜻 만나자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먼저 약속을 얻은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길 옆으로 망고를 가득 담은 바구니 행렬이 지나쳤다. 그녀는 약속시간을 한 시간 남겨서라도 택시가 굴러간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연신 기사에게 아직 멀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 마을이 모두 망고과수원인데 그녀가 찾는 곳은 좀 더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조바심을 했지만 기사는 태연했다. 긴장 탓일까, 갈증이 왔다. 창 밖으로 망고를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망고는 바구니에 차곡차곡 곡예하듯 아슬아슬 쌓여 있었다. 망고는 큰 오리알 모양으로, 망고 하나의 표면은 노란빛, 주홍빛, 보랏빛, 초록빛으로 수채화물감을 뿌린 듯했다. 과일 표면에 여러 가지 빛깔을 담은 것이 망고의 특별한 매력이 아닐까 싶었다. 여인네는 껍질째로 삼등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칼집을 냈다. 그리고 뒤로 젖혔다. 망고 향이 차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망고향이 코끝을 스치자 갈증이 더 올라왔다. 그녀는 순간 눈앞에 어른거리는 송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약 망고가 우리나라에서 열릴 수 있는 과일이었다면 무스타파를 찾으려고 나서지 않았으리.
그녀가 망고를 처음 본 것은 이태원 사원 언덕배기였다. 태평양, 오아시스, 파라다이스라는 이태원 나이트클럽은 같은 도로선상에 있었고 모두 지하에 위치했다. 나이트클럽의 대낮은 음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늪과 같았다. 그러나 저녁이면 화려한 조명과 술에서 풍기는 향으로 열꽃이 피어났다. 그녀는 하루에 한번 삼십 분씩 그곳에 출연했다. 가장 피크타임에 나가는 단연코 인기있는 재키였다. 그녀를 사람들은 재키라고 불렸다. 물론 재키가 그녀 이름은 아니었다. 이태원 무용수 중에 최상에 오른 여자에게 불러주는 대명사같은 이름이었다. 그녀가 재키가 되기 전에도 또 다른 재키가 있었고, 앞으로도 또 다른 재키가 나올 것이었다. 손님들은 재키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환호를 지르곤 했다.
태평양에는 바다가 그려진 배경에 야자수잎사귀가 천장을 닿는 무대가 있었다. 그녀는 머리에 화관을 쓰고, 꽃장식을 한 팬티와 브래지어를 두르고 무대에 등장했다. 음악이 흐르면 그 선율에 맞추어 율동을 했다. 그녀가 천장의 조명을 향해 손을 뻗칠 때면, 마치 잎사귀가 태양을 향한 것처럼 생동감이 있었다. 또한 춤사위는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자연스러웠다. 손님들은 그녀의 몸짓에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쳤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환호는 그녀를 향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을 향한 열정이라는 것을. 그들이 꿈꾸는 것은 정열이 살아 있는 열대숲속의 자신들이었다. 그녀는 꽃을 떼어 손님의 테이블에 던졌다. 손님들의 환호성이 들려오면 테이블로 천천히 다가갔다. 손님에 따라 지배인의 눈짓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러면 그녀는 꽃을 떼어 손님 입에 물려주었다.
꽃은 날마다 다르게 장식했다. 그녀는 나이트가 시작되기 전에는 늘 꽃시장에 나갔다. 주로 장미로 장식하지만, 일장이 많이 필요한 여름꽃들을 택했다. 꽃을 고르면서 꽃말까지 신경을 썼다. 손님들은 그녀의 춤사위만큼이나 정열적인 꽃을 선호했다. 꽃을 잘라 하나하나 떼어 철사를 둥글게 만들어 머리에 화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팬티와 브래지어에 꽃을 한 송이씩 매달았다. 그녀는 짙은 화장을 하는 것보다 꽃장식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서 꽃이 하나 남았을 때, 손님들의 반응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녀는 하나 남은 꽃을 달고 손님들 틈새를 쏘다녔다. 그날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남자에게 마지막 꽃잎을 떼어 입에 꽂아 주었다. 간혹, 어떤 손님은 그 꽃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손님의 눈빛은 향에 취해 몽롱해 있었다.
태평양을 나와 오아시스에서 일을 끝내면 마지막으로 파라다이스에 갔다. 그녀의 팬티와 브래지어 속에는 손님들이 넣어 준 지폐가 가득했다. 짓궂은 손님들이 동전을 넣어 줄 때는 싸늘한 금속의 느낌이 짜릿했다. 그것이 그녀의 개런티인 셈이었다. 수입이 가장 많은 곳은 단연 파라다이스였다.
새벽녘 안개가 자욱이 내릴 때쯤 이태원의 불빛들은 하나하나 꺼져 갔다. 짙은 화장을 콜드크림으로 벗기고 나올 때면, 아무도 그녀가 재키라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서실에서 밤샘한 학생처럼 정갈하고 빛 바랜 모습이었다. 그녀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허리에 잦은 통증이 오는 것을 느꼈다. 메뚜기도 한철이 지났으니 얼마 안가서 젊고 늘씬하고 탱탱한 재키가 그녀를 밀칠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집으로 가기 전에 늘 언덕배기에 멈추어 하루 일과가 무난이 끝난 것에 숨을 내쉬었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 작은 공같은 것이 굴러 멈췄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 본 망고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새벽의 짙은 안개가 바닥에 깔렸을 뿐 아무도 없었다. 밤새 영업을 하는 카페가 한군데 불이 켜져 있을 뿐이었다. 그쪽에서 망고가 굴러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는 선뜻 그 쪽을 가지 못했다. 잠시 후, 그 카페에서 나온 송이 웃으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놀랐지만 반가움을 표시했다. 송은 그녀가 세 들어 사는 방 바로 옆방에 사는 사내였다. 그녀가 망고를 손안에 넣고 향을 맡으며 말했다. 향이 좋아요. 어느 나라에서 수입된 거죠? 송은 우리나라에서 난 망고라고 말했다. 그녀는 망고는 열대과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송이 그럼 망고가 열리는 곳을 데려가겠다고 말했다.
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에도 송은 반팔차림이었다. 그는 흰 장갑을 끼고 오른손에는 전지가위를 들고 연신 가지를 쳐내었다. 송이 관리하는 식물들은 모두 열대식물들이었다. 물론 망고나무도 있었다. 송은 온도를 열대식물들에 맞추기 때문에 겨울에도 이곳은 덥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식물원의 벽과 천장은 모두 유리였다. 송은 이곳이 유리궁전이라고 덧붙였다. 키 큰 거대한 상록활엽수부터 키 낮은 식물 등 많은 것들이 식물원을 꽉 메웠다. 그녀는 싱그럽게 뻗어 있는 야자수 잎을 만지작거렸다. 숨을 쉬는 듯한 호흡이 느껴졌다. 그녀도 매일 밤 나이트클럽에서 야자수 잎을 바라보았지만 그 잎은 플라스틱으로 된 잎이었다. 송은 친절하게 식물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까지 해주었다. 이것들은 월동을 어떻게 해요? 그녀가 묻자 송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것들은 일 년 내내 강한 햇빛을 필요로 하죠. 추위에 약해서 일찍 월동에 들어갑니다.
그녀는 야자나무 밑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백개가 넘는 알들이 박힌 대추야자가 크게 달려 있었다. 그때 송이 또 설명했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이 대추야자 때문이죠. 잎이나 줄기 열매 씨 모두 다양하게 쓰이죠. 그녀는 입안으로 들어온 뜨거운 공기가 목젖을 넘어 항문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두 팔을 활짝 벌려 둥글게 원을 그렸다. 마치 태평양 어느 섬에 와 있거나, 사막의 오아시스나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던 그 파라다이스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송의 입에서 저절로 재키라는 말이 튕겨져 나왔다. 재키는 정말 열대식물과 참 어울려요. 그녀는 두 팔을 옹크리고 멈췄다. 송이 그녀가 재키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눈앞에 온갖 식물들은 일순간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싱그러운 야자수 잎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몸은 진흙탕 늪 속으로 점점 빠지는 듯했다. 휘청거리며 현기증이 느껴졌다. 송이 그녀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어느 날, 우연히 태평양에서 그녀를 보았다고 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강렬한 힘이 엿보였다. 그는 열대식물꽃은 태양빛을 많이 받아서 더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식물원에 꽃들이 자신을 향해서 대화를 하는 느낌을 받았고. 아마 전생에 열대식물이었다면 분명 같은 종(種)이 식물원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같은 종은 군집생활을 하며 생명력을 키운다는 말도 덧붙였다. 송은 매일같이 그녀가 출연하는 세 군데를 찾아가서 그녀의 춤사위를 탐미했다. 매일 그녀를 보지 않으면 광합성작용을 못하는 잎처럼 시들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의 자취방을 알아내었고, 그 옆방으로 이사했다.
송이 그녀 손에 선인장꽃을 뜯어 주며 말했다. 주황색이 아주 선명하죠. 나는 추위를 많이 타요. 우리 집안의 내력이죠.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 바나나농장을 한 것도 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체질 때문이었어요. 아버지가 바나나농장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아버지의 모습은 건강하고 패기가 넘쳤죠.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바나나가 열릴 때, 우리 식구 모두는 들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몇해 후, 수입 농산물 개방이 되면서 바나나 값은 인건비도 못 낼 정도로 떨어졌고, 당도가 열대지방에서 직사광선을 받은 것보다 적은 탓에 헐값에 팔아야 했죠. 얼마 후 빚더미에 올라 않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는 빚독촉에 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아직도 바나나농장을 하던 그 빈 비닐하우스는 남아있죠. 내가 원예를 전공한 것은 아버지가 말했던 우리나라도 곧 열대지역으로 바뀐다는 믿음 때문이죠. 지구 온난화로 점점 달아오르는 이 땅은 열대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말 겁니다. 나도 이 식물원에서 수련을 쌓은 뒤, 폐허가 된 바나나농장에 다시 식물원을 짓고 열대식물을 키울 겁니다. 바로 저기 저 망고나무를 보세요. 우리나라에 없는 망고나무를 심을 겁니다.
송의 손은 정말 얼음장 같았다. 그녀는 온몸에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양말을 신으면 열이 나는 여자였다. 나는 추위를 잘 타는 냉체질이라 열이 많은 여자가 좋아요. 송은 굳은 고무나무 줄기처럼 그녀가 뻗어 가는 잎을 감도록 땅 아래를 힘껏 움켜잡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왜 재키가 되었지?
어릴 때, 어머니는 날 발레리나로 키우려고 무용학원으로 데리고 다녔어요. 어린 나는 유난히 손과 다리가 유연했어요. 어머니 앞에서 학원에서 배운 다섯 가지 포지션과 애티튜드 뒷방향의 자세까지 모두 해 보였죠. 어머니는 내가 자기를 닮았다고 넌 꼭 발레리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런 재능을 살려 보려는 어머니 희망은 너무 과욕이었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까지도 발레연습을 하였으니 궁색한 살림에 아버지는 감당을 못했어요. 그 문제로 어느 날 술에 만취가 된 아버지는 어머니와 심한 다툼이 있었고, 어머니는 그날 들어오지 않았고, 다음날 경찰서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엄마의 시신을 확인하라는 전갈이 왔어요. 싸늘한 어머니 시신은 뭉개져 있어서 형체도 알아볼 수조차 없었죠. 새엄마는 동생들에게 극진했지만, 내가 무용을 하는 것은 집안 사정상 안 된다고 아버지와 잦은 다툼을 하기 시작했죠. 무용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무용을 하지 않고는 사는 의미가 없었어요. 결국, 아버지와 동생들을 위해서 가출을 택했죠.
망고나무가 하늘을 반쯤 막아, 대낮은 서늘한 해질녘 같았다. 택시는 간신히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했기에 무스타파가 올 때까지 과수원 아래를 거닐 수 있었다. 과수원집 딸인 새햄은 다정하게 그녀를 대했다. 새햄은 무스타파가 곧 온다고 전화가 왔으니 약속한 시간에 꼭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번에는 무스타파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오히려 마음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새햄은 눈이 깊고 허리가 잘룩했다. 새햄은 다른 아랍여자처럼 차도르를 두르지 않았고 티셔츠에 긴치마차림이었다. 망고 아름답죠? 그녀가 새햄에게 물었다. 저는 망고를 보면 눈물이 나요. 새햄은 가라앉은 어조로 대답했다. 왜? 그녀는 반문했다. 망고가 탐스럽게 많이 열리면 우리 식구들은 웃고, 망고가 많이 안 열리면 우리 식구는 울거든요. 새햄은 그녀처럼 망고를 아름답게 바라보지 않았다. 새햄은 망고를 한 아름 그저 자신의 심장처럼 가슴속에 파묻어 놓은 듯했다. 깊은 눈동자에는 그런 처연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이 망고나무에서 열리는 망고로 살아가요. 망고로 먹을 식량도 사고 학교도 가고 결혼도 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기근이 들어서 망고나무 열매가 모두 말라서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저는 대학을 못 갔죠.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거든요. 새햄은 망고열매를 원망하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다음해부터 망고나무에는 더 많은 열매가 열렸고 동생들은 충분히 학업을 할 수 있었어요. 새햄은 지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엄마의 간곡한 부탁에도 무용을 단념하지 않았던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지금 공부하지 그래? 그녀의 말에 새햄은 차분해졌다. 아뇨. 난 공부하기 싫어졌어요. 나의 운명은 공부가 아니라는 것 그 해 망고가 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때, 그녀 앞으로 사내가 다가왔다. 콧수염에 훤칠한 키가 분명 무스타파였다. 새햄이 무스타파라고 인사를 시켰다.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흑점을 살폈다. 흑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흙갈색 살갗으로 번질거리는 땀이 맺혀 있었다. 언뜻 보면 무스타파와 흡사하여 착각할 수 있었다. 사내는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무스타파입니다. 물론 당신은 흑점이 있는 무스타파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방금 그 무스타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으로 들어오기가 힘들답니다. 팔레스타인에 남은 볼일이 있으니 마저 보고 모래 온다고 합니다. 그녀는 아찔했다. 그러다 정신을 가다듬고 팔레스타인을 쫓아 갈 양으로 가방끈을 가슴에 힘껏 앞으로 당겼다. 그때 사내가 말했다. 아, 참 저번에도 팔레스타인까지 오셨다가 못 만났다고 오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했습니다. 대신 새햄과 우리가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사내는 그녀를 과수원 안채로 안내했다. 그녀는 자리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저번에도 그녀는 요르단에서 무스타파가 팔레스타인에 있다고 하여 택시를 대절해서 팔레스타인 국경까지 갔었다.
볼펜 플리즈, 플리즈! 아이들은 그녀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와 때 묻은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걸어갈 때마다 먼지가 연기처럼 일어나는 건조한 땅이었다. 낮은 구릉에는 듬성듬성 풀 포기가 있었지만,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 백여 개의 천막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천막이라야 가운데 큰 나무를 꽂아 놓고 비닐을 씌워 놓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유랑생활을 운명적으로 하는 베드윈들과는 좀 다른 천막촌이었다. 아이들은 그녀를 줄곧 따라왔다. 그녀는 휑뎅그렁한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 가방에 있는 볼펜을 모두 주었다. 그녀가 가방에 있던 사탕을 꺼내 주었지만 거절했다. 그 난민들 속에서도 하르프와 영어를 가르치는 천막학교가 있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하르프를 배웠다. 소녀와 소년들의 눈은 총명해 보였고 배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나마 부모를 도와 벽돌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천막촌에서 공부할 수 있는 아이들은 선택받은 행운아들이라고 여선생님은 말했다. 그녀는 여선생에게 무스타파라는 사람에 대해서 물었다. 아, 목에 흑점이 있는 사람 말인가요? 여선생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언제쯤 오느냐고 물었다. 아마, 올 때가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 때 무스타파를 정말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풀고 천막학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그녀가 준 볼펜으로 땅바닥에 종이를 놓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파란색 잉크가 나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들이 처음에 볼펜을 애걸했을 때 구걸이라고 생각했다. 구걸하는 생각이었다면 그녀의 사탕을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나중에야 했다. 천막학교 구석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UN마크가 새겨진 구호품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선생은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총을 겨눈 이들의 손이 다시 빵을 내민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빵도 총도 모두 무섭다는 것을 알아요. 아이들은 잃어버린 땅에서 살고 싶은 것뿐이죠. 여선생의 눈에 피망울이 맺혔다. 그녀는 불현듯 어머니에 대한 생각이 솟아올랐다.
그녀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에 부산 피난민 시절, 난민촌에서 살았다고 했다. 난민촌 아이들은 슈산보이 노릇을 했어. 미군이 탄 짚프차에는 늘 아이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지. 미군들이 차에서 내리면 모두 합창을 하듯 구걸을 했어. 기브 미 껌, 초코렛! 나는 그 껌을 하나 얻으면 한 달간 씹었지. 그 맛은 참 신기했어. 어느 날, 미국잡지를 보았는데 발레리나를 보았어. 나는 미군차가 오면 달려가서 말했지. 날 입양해주세요. 나는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
그녀는 그곳을 나와 천막촌이 한눈에 보이는 언덕에 쭈그리고 앉았다. 무스타파가 온다면 그녀의 시야에 분명 잡힐 위치였다. 어머니는 늘 천슈즈를 손수 재봉틀로 지었다. 모래바람 사이로 간간이 재봉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녀가 간직한 어머니의 웃음은 언제나 그녀가 포지션을 춤출 때였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어머니의 얼굴을 더듬고 있었다.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 곳을 향해 사람들이 달려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무스타파가 온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곳에 갔을 때, 차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고, 남자들이 여러 개의 들것을 들고 달려왔다. 아이들은 난민촌에서 떨어진 곳에서 놀다가 지뢰를 밟아 무참하게 숨진 것이었다. 들것 주위로 가족들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녀는 들것에 실려 오는 소년 중의 한 명에게 눈길을 멈췄다. 유난히 눈이 휑뎅그렁한 소년, 눈망울에 물기가 유난히 많았던, 플리즈 볼펜을 가장 크게 외치며 그녀를 집요하게 따라왔던 바로 그 소년이었다. 소년의 얼굴과 옷은 피로 흥건했다. 손에는 그녀가 준 볼펜이 움켜져 있었다. 볼펜심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뱃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더니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하게 어른거리면서 그녀 앞에 뭔가 날아서 획 지나갔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었다. 어머니 시신은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앞주머니 속에서 입술을 내밀고 있었던 무용콩쿨 안내장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큰 날짐승 한 마리가 하늘을 높이 날다가 낮은 날갯짓을 하며 피냄새 주위를 맴돌았다.
카멜레온시티의 밤은 대낮처럼 들떠 있었다. 물담배를 피우는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연기가 자욱한 그곳은 마치 딴 세상사람들 같았다. 현실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시간층을 엿가락처럼 늘어뜨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을 바라보며 무스타파를 향해 이를 더 악물었다. 그녀가 다시 무스타파에게 전화를 했을 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버스가 막혔습니다. 어떤 자동차가 당나귀마차를 피하려다 사고를 냈습니다. 내가 탄 버스가 그 자동차 뒤에 서 있습니다. 그녀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상상했다. 어느 자동차가 당나귀마차를 피하려다 다른 자동차와 부딪쳤을 것이고, 자기 때문에 부딪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만 태연하게 가고 있을 당나귀마차주인과 당나귀의 나태스러운 눈빛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무스타파를. 올 필요 없어요. 그곳을 내가 나왔으니까. 무스타파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수화기는 먹통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희부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따진다고 해도 그는 자동차사고가 나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은 신의 뜻입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곳 사람들이 말끝에 인솨알라라고 토를 다는 것이 똥을 누고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개운하지 않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 말을 해야 개운한 모양이었다. 이들의 신은 언어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뿜어 대는 물담배 속에 있는지.
송이 무스타파를 만난 것은 물담배 때문이었다. 송은 밤에 그 언덕배기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그녀가 일하는 동안 송은 식물원에서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다. 송과 그녀의 밤낮은 정반대였다. 마치 지구의 반대편에 살아가는 두 사람 같았다. 그녀는 언덕배기에서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고 잠을 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송은 서로의 몸이 열기와 냉기로 반대인 것처럼, 밤낮이 바뀌어 살아가는 것은 아주 조화로운 인연이라고 답했다.
언덕배기 카페로 송이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그녀를 기다리는 지루함이었을지도 몰랐다. 어느 날, 송은 정육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왁자지껄한 카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송은 외국인 노무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위험한 노무자일을 하고 있었지만 본국의 엘리트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한국에서 손가락이 잘린 이도 있었다. 그들은 술을 먹지는 않았다. 송이 그들의 틈새로 들어가 친구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만은 않았다. 그들은 사랑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종교라든가, 정치라든가, 이념이라든가, 전쟁이라든가 등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본국에 돌아가면 버스회사를 할 것이라는 둥, 학교를 세울 거라는 둥, 두고 온 여자와 백년해로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새벽을 넘기는 날이 되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물담배를 피웠다. 송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그 맛에 점점 취하게 되었다. 마약이나 담배와는 좀 다른 것이었다. 송은 맛과 멋의 그 중간의 그 무엇이라고 말했다.
송은 물담배를 피우면서 자신의 속내를 토해냈다. 자신은 망고과수원을 할 참이라고 말했다. 그때, 그 중에 손이 잘린 노무자가 아랍과 아프리카지역에서 그런 것을 전문으로 알선해주는 무스타파라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열대지방에 생산되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대부와 같다고 했다. 더구나 한국에 제일가는 건설회사에서 수주를 마치고 돈을 못받았을 때, 그가 사우디왕자를 소개시켜서 재판에서 이겨 돈을 받아 내었다고도 했다. 그들 모두는 이구동성으로 자신들도 그 무스타파를 만나서 의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진 것은 송이었다. 그럼 열대묘목을 수입하는 것도 잘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한결같이 물론이라고 말했다. 처음 무스타파의 말을 송에게 이야기해준 손이 잘린 한 명의 이름도 무스타파였다. 송은 이상하여 어떻게 이름이 같으냐고 했더니 한국에도 철수가 많다고 웃었다. 자신은 핫산 알 무스타파인데 그 무스타파의 처음 이름자는 모르겠다고 했다. 핫산 알 무스타파는 한국에서 철강을 자르는 기계 일을 하다가 손이 잘렸고, 아직도 그 보상을 받지 못했고, 본국의 아내와 아이들은 굶고 있었다.
송은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무스타파에게 빨려들었다. 송은 인터넷상에서 화상으로 비취어진 무스타파의 모습에 안정감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무스타파는 만능이었다. 송의 모든 물음에 정확하고도 광범위한 대답을 해주었다. 송은 무스타파에게서 망고과수원을 하기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첨부파일로 상세하게 받고 감탄했다. 송은 하늘은 착한자를 돕는다며 무스타파를 만난 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기회라고까지 말했다. 송은 식물원에 사표를 내었고, 제주도를 일주일에 두 번을 왔다갔다하며 준비작업을 했다. 송은 퇴직금과 이리저리 사채까지 끌어들여서 무스타파에게 돈을 먼저 보냈다. 묘목이 오기 전에 그는 제주도로 내려가 바나나농장을 하던 비닐하우스를 다시 짓고 있었다. 그러나 선적되었다던 묘목은 도착하지 않았고,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보채듯 자주 전화를 하는 송에게 무스타파는 언제나 내일 도착할거라고 말했다. 문제는 급하게 얻어 쓴 사채였다. 송의 생각에는 무스타파가 보낸 망고나무 묘목 중에서 반은 화원에 넘길 심산이었는데, 허사가 된 것이었다. 그녀의 방 보증금과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돈으로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런 상태로 송은 점점 마른 잎사귀처럼 말랐고 사채업자들로부터 고발까지 당했다.
그녀가 무스타파를 찾으려고 이곳까지 온 것은 힘든 결정이었다. 그녀는 서울을 떠나기 전, 송을 면회했다. 초췌한 송의 얼굴은 푸르스름한 빛이 역력했다. 정수리에는 새치가 소복 올라와 있었다. 쇠창살을 잡은 손등에는 팔뚝으로 이어지는 검푸른 힘줄이 줄기처럼 뻗어 있었다. 줄기가 쇠창살을 감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쇠창살에 손을 옮겼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 송의 힘줄을 따라갔다. 송의 몸은 차디찼다. 그나마 남은 온기는 점점 사라질지도 몰랐다. 시멘트 바닥은 여름인데도 아침마다 올라오는 냉기로 온몸에 한기가 들어. 송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송은 무스타파를 믿었던 자신을 후회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망고과수원을 할 수 있을 것을 믿고 있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그는 우리나라가 점점 열대야로 변하는 것처럼, 사막에 비가 오는 이상현상이 생긴다고 흥분했다. 그녀는 간수의 손에 밀려 안으로 들어가는 송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분명 점점 차가워지는 냉기다.
어둠이 깔린 망고숲은 고요했다. 그녀는 내일이면 무스타파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설레임까지 생기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새햄 가족이 둘러앉은 집 뜰에는 양고기 냄새가 났다. 누린 냄새에 질색을 했던 그녀의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더운 열기에 견뎌야 하는 아랍인들은 두터운 지방질을 가지기 위해 지방질이 두터운 양고기를 먹었다. 열대지방의 체질식이었다. 그녀는 대낮의 열기와 밤의 냉기를 이겨내야 하는 사막의 언어도 체질식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접시 쪽으로 바싹 몸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식욕은 어느새 두터운 지방질을 흡수하고 있었다. 남자친구 있어? 그녀의 물음에 새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압둘라라고 해요. 정비공이거든요. 그녀가 언제 결혼을 하냐고 물었다. 압둘라가 내년이면 지참금을 다 마련해요. 그 때 결혼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내년에 망고가 많이 열려야 결혼비용을 쓰거든요. 내년에 우리 집 망고나무에 열매가 많이 열리겠죠? 새햄의 두 눈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그녀는 대답했다. 인솨알라.
아침 잠을 깨운 것은 무스타파한테서 온 전화벨소리였다. 지금 수단으로 급하게 가는 길입니다. 그녀의 눈앞에 당나귀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호마로! 당나귀는 우리나라 개처럼 주인을 위해 평생을 살다, 고기까지 받치고 욕의 대명사로 전략된 동물이었다. 그녀는 수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야! 호마로! 무스타파! 무스타파님! 그러나 수화기에서는 무스타파의 고른 호흡과 저음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미스터 송은 안녕하시죠?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그녀의 몸을 꽤 뚫고 지나갔다.
아침햇살이 그녀의 볼을 간지럽힌다. 깜박 잠이 든 사이에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다가온 것이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한 사내가 카페 앞에 나뒹굴던 캔통을 발로 찬다. 그의 발끝에 체인 캔통이 언덕 아래로 굴러간다. 사내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온다. 호마로! 그녀의 눈빛이 점점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다. 그녀의 눈에 사내의 잘려진 손가락이 들어온다. 반으로 뭉툭해진 손가락이다. 철강을 자르는 기계 일을 하다 손이 잘린 핫산 알 무스타파다. 아직도 그는 보상을 받지 못하고 본국에서 굶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인가. 그가 그녀의 옆을 스치듯 지나간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눈앞을 솟구쳐 번득이는 것을 따라 눈길을 돌린다. 순간 아찔한 생각에 몸이 옆으로 기운다. 콧수염이 있고, 목덜미에 주먹만한 흑점이 있는, 훤칠한 키를 가진 무스타파가 굴러가는 캔통을 따라서 쫓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중심을 잃고 있다.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무스타파! 하고 튀어나오려던 말이 목젖을 짓누른다. 잠결인가, 그녀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그를 바라본다. 그는 벌써 이태원 큰길 쪽으로 내려가 보이지 않는다.
양고기의 몸통은 이제 가슴만 덩그렇게 도마 위에 올려져 있다. 콧수염의 남자는 양고기를 부위별로 잘라 냉동칸에 진열한다. 그녀는 문을 비식 열고 들어간다. 양의 두꺼운 비계덩어리가 먹음직스럽다. 그녀는 콧수염의 남자에게 가슴살을 두 근 달라고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인다. 그녀는 이제 재키가 아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몇 달 사이, 젊고 싱싱한 재키가 들어왔다. 대신 그녀는 두 팔을 벌리고 태양빛을 받아 광합성작용을 하는 식물처럼 몸을 뻗을 수 있다. 스트립걸이 된 뒤로는 마음껏 춤사위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나신은 삼라만상을 모두 드러낸 산, 바위, 강, 꽃일 뿐이다. 손님들의 뜨거운 눈빛과 야자수잎사귀가 천장을 닿는 무대의 조명빛을 견디려면 두터운 지방살이 최고다. 콧수염의 남자가 양고기를 담은 봉지를 내민다. 그녀는 남자에게 피식 웃는다. 오늘 아침은 양고기 캐밥을 해 먹을 것이다. 벌써 혀끝에 군침이 감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