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삼성을 둘러 싼 문제를 보고 있노라면 루디(Ludi)의 문장이 참 기가 막힌 명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월급 받으려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보답 받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만큼,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쓸모없다. 후자는 근시안적이고, 전자는 멍텅구리다.”
월급 받으려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삼성맨 = 멍텅구리
스스로 보답받기 위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 = 삼성 자본주 = 근시안적
한국에서 SKY-간판 단 사람들 삼성 들어가려고 무진장 애 쓰지 않나요?
아마도 삼성의 일이 좋은 일이기는 한가 봅니다. 멍텅구리 같은 짓이라는 것도 모르고요.
왜 멍텅구리 같으냐 하면, 바로 자신의 일로
부도덕한 자본주를 점점 더 살찌우는 줄도 모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김용철은 멍텅구리 군단에 그냥 머물기에는 너무 똑똑했나 봅니다.
너무 똑똑했던 것이 아니라 보통으로만 생각할 줄 알면 더 이상 그런 일 못하겠지요?
사회적 유기체의 삼지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 자본주와 자본경영이 분리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는 자본을 제공하고 그에 대해서 일정한 사례를 받을 권한이 있습니다.
자본경영은 경제의 원리에 따라 생산과 유통을 담당하고, 노동자와 직원을 관리를 합니다.
즉 한 기업의 경제부문(상품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모든 것)과
법치부문(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 관한 모든 것)을 자본경영주나 경영단이 담당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정신부문에 의해서 조절되어야 합니다.
생산과 유통에 의해서 생긴 수익은 그것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 작게 보아서는 노동자와 직원,
크게 보면 사회구성원에 의해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를 위한 일정수준의 이자를 지불한 후에 사회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와 경영자가 일치할 경우에는
그 자본주가 철저하게 자유로운 정신의 힘으로 기업을 이끌어야만 합니다.
한 인간이 정말로 자유로운 정신의 힘으로 기업을 이끌게 되면
자신을 위해서 지나친 부를 축적해야겠다는 내적 욕구가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자본주의의 한계는 바로 자본주가, 노동자와 사회구성원에 의해서 만들어진 잉여분을
모두 자신 개인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욕구를 실천하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다른 문제는 경제부문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해야할 법치부문(정부)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부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떡값”은 약과지요. 얼마나 많은 법들이 경제부문의 영향에 의해서 생깁니까?
얼마나 많은 제도적 장치가 “가진 자”들의 입김으로 생깁니까?
사회적 유기체의 삼지성에 따르면 법치부문과 경제부문은 대등한 부분으로
각자가 독립적인 우호관계에서 존재해야만 합니다.
이 양 부문이 독립적인 정신부문에 의해서 정신적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자본주의에서는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정신부문(주로 교육, 문화)이 자본주의에서는 완전히 경제부문의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경제적 생산가치가 있는 교육이 집중적으로 육성 되도록 하는 제도가 생깁니다.
(특목고, 영어교육, 과학영재 등등)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최소의 비용, 최대의 수익”이라는 기치를 걸고 있기 때문에,
경제부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쟁이 중시되고, 착취가 성행하기 마련입니다.
자본주가 자유로운 정신부문을 “최소의 비용, 최대의 수익”이라는 논리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기능하는 인간을 길러내기 마련이고(너도 나도 좋은 대학 가려는 경쟁),
장기적으로 보아서 사회가 이기적인 인간들의 집단체가 됩니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약간 다릅니다.
사회주의에서는 정신부문과 경제부문이 완전히 법치제도(당)의 영향권 아래에 있습니다.
법치제도에서는 인간이 권리에서 평등하다는 원칙을 따릅니다.
그런데 이 평등의 원칙이 경제부문을 지배하게 되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의 개별적인 능력이 무시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일에 대한 동기를 잃게 됩니다.
이는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동독에서 자란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실제로 일터에서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을 하는 풍조가 없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하나 마나 똑 같은 월급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개인의 능력과 전혀 상관이 없이 성분이 좋은 사람(노동자나 농민의 자식)은 좋은 자리에 갔고,
인텔리겐챠의 자식은 성분을 낫게 하려고 노동하는 자리에 보냈던 것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다 보니 사회전체가 비생산적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독일 통일 후에 생긴 문제는 물론 통일자체에서 오는 문제도 많았지만,
자유경쟁이라는 것을 배우지 않은 동독인들의 무기력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법치부문이 정신부문인 교육도 지배하게 되니 자유로운 정신을 지닌 인간을 교육하기 보다는
당에 맞는 인간을 길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연구를 할 만큼 똑똑하더라도 부모가 인텔리겐차(예: 교사)면
대학교육으로의 진로가 당에 의해서 막혔습니다.
성분이 좋은 당원의 자식들은 원하기만 하면(정신적 일도 원해야 하니까요.)
대학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회주의가 100년도 넘기지 못하고 자본주의보다 일찍 스러진 이유는
바로 개인 안에 끊임없이 빛나려는 정신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 유기체의 삼지성에 따르면, 모든 활동에서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어야 하고,
개인이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개인이 삶에 필요한 것은 법치부문이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이때의 법치부문은 작은 경제단위가 될 수도 있고, 크게는 국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활동(상품의 생산과 유통)에서 나오는 수익은 그 전체가 자본주의 몫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관리는 법치부문(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 예: 경영자)이 합니다.
그리고 법치부문이 경제부문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정신의 자극에 따라 일하기 때문에
공평한 분배를 목적으로 합니다.
즉 경제활동은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하되,
수입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본경영자와 합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경제활동에 의한 수익이 사회구성원의 역할에 의한 것인 만큼,
한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직접적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예: 장애인, 병자, 노인 등)을
함께 짊어지고 나가는 것 역시 법치부문의 의무입니다.
사회적 유기체의 삼지성이 거의 백 년 전에 이 세상에 실체적 이념으로 내려섰지만,
아직도 인지학계의 소수 공동체에서만 실천 될 뿐입니다.
이 사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신의 유기체의 삼지성조차도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데에 있어서 “제대로 분리도 못하면서 제대로 혼합도 못한다.”고
하는 것이 정말 적당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정신을 전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독립적인 정신부문이
과연 어떤 형태를 지닐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사회적 유기체의 삼지성이라는 것이 헛된 망상이나 이상에 불과하다고 치부합니다.
사회주의는 이미 스러졌으니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의 상황만 보아도 오늘날의 현실이,
정신의 진정한 인식이 없으면 인간사회가 어디로 치달을 수 있는지 너무나 극명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