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524 (월) -
- 경허스님 이야기 ② - 불교이야기 (6-2)
지난번에는 “경허스님” 소개와 일화 세 가지를 전해 드렸는데 오늘은 스님의
일화(逸話) 몇 가지를 더 올리는데 실력이 없어서 그 의미를 해석하여
말씀드리기는 너무 어려움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 일화 - 4 ] 아직도 처자를 업고 있느냐
어느 날 경허스님과 젊은 제자스님이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혼자 물을 건너려는데 물살이 세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은 정색을 하며 화를 내었습니다.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내쫓기게 되는데 어찌 젊은 처자가
저에게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난처해진 처녀는 이번에는 경허스님에게 다시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경허스님은 선뜻 등을 내밀며,
“그거 어려울 것 없소이다. 업히시지요.”
그래서 경허스님은 처녀를 등에 업고 시내를 건너 내려주고는 계속해서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젊은 스님의 마음에는 갈수록 온갖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거 스님이 혹시 땡중이 아닐까?”
젊은 스님은 자기의 스승 경허스님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를 꾹 참고 십리 길을
더 갔습니다.
마침내 젊은 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하고 따지며 대들고 말았습니다.
젊은 제자의 화난 목소리를 듣던 경허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끼 이놈!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
[ 일화 - 5 ] 맞아도 쌉니다.
어느 날 한 양반이 논두렁길을 걷다가 미끄러져서 신고 있던 짚신이 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신을 건지려면 버선도 벗고 바지도 걷고 물속에 발을
담가야 하는데 이 양반이 조금 귀찮아하던 차에 마침 저쪽에서 스님 한분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놈아, 내 신발이 저기 빠졌는데 좀 건져다오.”
새파랗게 젊은 양반이 지나가던 늙은 경허스님한테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경허스님이 아주 공손하게 “네, 알겠습니다.” 하고는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논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양반의 신발을 건져 가지고는 논 한가운데다 던져버렸습니다.
그 양반이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화가 나서 경허스님의 멱살을 잡고는 길에서
마구 두들겨 팼습니다. 코피가 나고 얼굴이 막 터지도록 맞고 있는데 또 마침
길 가던 다른 사람이 보니까 젊은 사람이 해도 너무 한 것 같아서 스님을 두들겨
패고 있는 양반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맞고 있던 경허스님이 말리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 싱겁기는, 왜 남의 일에 참견하고 그러시오. 당신 갈 길이나 가시오.”
그러니 말리던 사람이 기가 차서 물었습니다.
“아니, 사람을 이렇게 무참히 패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보고 지나가오?”
그러자 경허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의 신발을 논 한가운데에다 던졌는데 이 정도 안 두들겨 맞고 어쩌겠소.”
그러니까 남의 신발을 논으로 던져버릴 때는 이미 두들겨 맞을 각오를 했다는
것이고 그러니까 두들겨 맞는 건 억울한 일이 아니고 당연하고 또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길 가던 사람이 관여하는 것은 싱거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
[ 일화 - 6 ] 독사가 배위에서 놀다.
경허스님이 천장암(天藏庵)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오후, 낮잠 자기를 즐기는 경허를 깨우러 갔던 한 수좌는 우뚝 서버린 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경허스님의 배 위에서 독사 한 마리가 똬리(“또아리”는
잘못된 말이고 “똬리”가 표준말임)를 튼 채 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좌는 경허스님을 깨워 위급한 상황을 알리려 했으나 입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참만에야 수좌는 겨우 입을 떼었습니다.
“스, 스님 크… 큰일 났습니다. 꼼짝도 하지 마시고 그대로 계십시오.”
“허허 대체 무슨 일로 그리 호들갑을 떠는고?”
“아이구, 스님, 지금 스님 배 위에서 시커먼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좌의 말에도 경허스님은 태연하기만 하였습니다.
“내 배위에서 지금 독사가 놀고 있단 말이냐?”
“예, 스님, 그러니 꼼짝 말고 그대로 계셔야 합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쫓아 드리겠습니다.“
“쫓을 것 없느니라.”
“예, 아니, 독사라니까요, 스님.”
“실컷 놀다 가게 내버려두어라. 나도 한숨 더 자야겠느니라.”
그리고는 또,
“이런 데에 마음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자기공부에 정진해 나아가야 하느니라.
이것이 바른 수행이요. 또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니라.“
그렇게 말한 경허스님은 다시 오수삼매(午睡三昧)에 들고 독사는 어느 사이엔가
유유히 긴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
[ 일화 - 7 ] 법문(法門)은 술김에나 하는 것
경허스님께서 역시 천장암(天藏암)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불법(佛法)의
도리를 물으면 종일 그대로 앉아 계시며 일체 말씀이 없으시다가, 누구든지 곡차를
갖다 올리면 그 곡차를 드시고 난 후에 법문을 종일이라도 하셨습니다.
그 손님들이 다 돌아간 뒤에 만공스님이 불평을 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만인에게 평등하셔야 할 분이신데 어째서 그렇게 편벽하십니까?”
경허스님의 대답은 간단명료하였습니다.
“이 사람아, 법문이라는 것은 술김에나 할 것이지 맑은 정신으로 할 것이 못돼.”
하고 한마디로 잘라 말씀하시고는,
“부처가 되려면 마음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한다. 내 마음을 찾으려면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 않으나 모두 꿈으로 알아야만 한다.
사람 죽은 것이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은 줄로 알고 죽으면 지옥에도 가고
짐승도 되고 귀신도 되어 한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니 세상만사를 모두 잊어버리게.
그리고 항상 내 마음을 궁구(窮究)하고 보고 듣되, 일체의 일을 생각하는 놈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 모양이 있는 것인가? 큰 가 작은가? 누른 가 푸른가?
밝은가 어두운가? 의심하여 참구(參究)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하며, 닭이 알을
품듯이 하며, 늙은 쥐가 쌀이 들어있는 궤짝을 쏠듯이 하여 항상 마음을 한 군데에
두어 궁구하여 잊어버리지 말라.
또한 의심하여 일을 하더라도 의심을 놓지 말고 지성으로 하여가면 마침내 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니 부디 신심을 내어 공부하라. 무릇 사람 되기 어렵고, 사람 되어도
사나이 되기 어렵고, 사나이 되어도 출가수행하기 어렵고, 승려가 되어도
부처님의 바른 법을 만나기 어려우니, 그런 일을 깊이 생각하라.“
만공은 이 법문에서 깊이 깨닫게 됩니다.
* 다음의 말씀들이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법도 입으로 말할 수 없지만 모든 법을 또 말로 전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께서는 팔만사천법문을 설(說)하고도 한 글자도 설한바 없다고 하셨다.“
“한 법도 설한 것이 없다면 경(經)을 비방하는 것이 되며, 한 법이라도 설한 것이 되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된다. 입을 열면 부처와 조사의 뜻에 어긋나고, 입을 열지 않으면
대중의 뜻에 어긋나니 어떻게 하면 불조의 뜻과 대중의 뜻에 어긋나지 않겠는가?“
“범부는 경계를 취하고 도를 닦는 사람은 마음을 취하나니, 마음과 경계를 함께 잊어야만
참된 법이다. 경계를 잊기는 오히려 쉬우나 마음을 잊기란 매우 어렵다.”
-------------------------------------------------------------------------------
[ 일화 - 8 ] 재(齋) 지낼 음식을 배고픈 이웃에게
역시 경허스님께서 천장암(天藏庵)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만연해서 백성들은 신음하고 있었고 조정의 부정부패와 관리들의 횡포는
전염병으로 지친 백성들을 두 번 죽이는 꼴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민란을 발생시켜 백성들의 아픔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어느 날 갈산 김씨 집안의 사십구재가 있었는데 주지인 태허스님(泰虛 =
경허스님의 속가 형님)이 장을 보아 법당에 떡과 과일을 푸짐하게 차려놓았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이 사십구재가 있다는 소문에 절로 모여
들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태허 스님이 촛불을 밝히고 향을 피워 막 재를
올리려고 할 때, 어디선가 경허스님이 나타나서 차려놓은 떡과 과일을 전부
바구니에 담아 법당 앞에 모여 사십구재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나눠 주었습니다.
경허스님의 돌출행동은 태허스님이 화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재(齋)가 끝난 다음에 나누어 주어도 되는데 왜 사십구재를 지내기도 전에
공양물을 다 나누어주느냐?”
경허 스님의 답은 명쾌했습니다.
“이렇게 사십구재를 지내야 바르게 지내는 사십구재입니다.”
태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사람을 보내 사십구재를 지낼 공양물을 다시 사오게
하고, 재주(齋主)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러나 재주는 오히려 경허 스님의 법문에
깊은 감동을 받고 환희심(歡喜心)을 내어 말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아버님의 사십구재는 참으로 잘 지내었습니다.
그 보답으로 시주를 더하겠습니다.”
* 사십구재(四十九齋)의 근본정신은 영가(靈駕)를 천도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고
나아가 무명(無明)을 벗고 해탈하도록 하는 데에 있습니다.
----------------------------------------------------------------------------------------
[ 일화 - 9 ] 어머니를 위한 법문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천장암(天藏庵)에 모시고 있던 늙은 어머님이 생신을 맞은 날, 경허스님은 어머니를
위하여 특별법회를 열었습니다. 도를 깨우친 경허스님이 법문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천장암에는 많은 대중들이 운집하여 법당 안이 대중들로 가득 찼습니다.
한걸음에 달려온 사미승이 박(朴)씨 부인을 찾았습니다.
“보살님, 보살님, 큰스님이 보살님을 위해서 법문을 하신다고 합니다.
빨리 가시지요.“
그 사실을 전해들은 박씨 부인은 말로 다 할 수없이 흐뭇한 마음이었습니다.
경허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여든 신도들로 가득 찬 법당 안으로 들어간
어머니 박씨는 사미승이 마련해준 앞자리에 조심스레 앉았습니다.
나이 삼십이 넘어 늦은 나이에 도를 깨우친 경허스님의 법문은 과연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경허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법상에 앉아 있던 경허스님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주장자를 한 번
힘껏 내리쳤습니다. 경허스님을 지켜보던 신도들은 벌떡 일어선 경허스님이 무슨
말을 하는 가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경허스님은 설법 대신 고름을 풀어 가사장삼을 벗고 속옷을 벗었습니다.
이윽고 알몸뚱이의 경허스님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자, 보십시오. 어머니!!!” 여기저기서 탄성소리가 들리고 놀란 처녀와 아낙들이
서둘러 법당을 나갔습니다. 벌거숭이가 된 경허스님은 커다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아이구, 경허가 실성을 했구나! 세상에 세상에! 이런 망측한 짓을 내 앞에서
하다니! 아이구, 날 좀 내 방으로 데려다 줘. 아이구 아이구.“
경허스님은 벗었던 옷을 하나하나 주워 입고 주장자를 세 번 내려쳤습니다.
“이제 옷을 입었으니 고정하십시오, 어머니! 그리고 여러 대중들도 잘 들으시오.
어머님은 날 낳으셨고, 나는 어머니의 자식.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어머니의
젖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빨면서 자랐고 어머니는 나를 벌거벗겨 씻기고
갈아입히며 귀엽다고 만지고 예쁘다고 주무르셨소.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늙고 나는 장성했으되 어머니와 자식 사이는
변함이 없음에도, 어머니는 오늘 벌거벗은 내 몸을 보시고 망측하다 해괴하다
질겁하셨으니, 내 몸을 벌거벗겨 씻고 만지던 옛날 어머니 마음은 어디로 가고
망측하다, 해괴하다, 변해 버렸으니 바로 이것이 간사스러운 사람의 마음이요.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러할 진데 하물며 남남인 부부사이며, 친구사이며, 이웃사이는
일러 무엇하리요. 마음이 변하기 전에는 입안의 것도 나누어 먹다가, 마음 하나
변하면 원수가 되다니 마음! 마음! 마음! 이 마음을 닦지 아니하고 이 마음을
다스리지 아니하면 여러 대중들은 독사가 되고, 늑대가 되고, 마귀가 될 것이오!“
* 어머니와 자식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세상의 진리는 항상 영원함을
보여준 일화와 법어였습니다.
-------------------------------------------------------------------------------
[ 일화 - 10 ] 곡차와 파전은 어떻게 마시고 먹는가?
경허스님이 충남 청양(靑陽) 칠갑산(七甲山)에 있는 장곡사(長谷寺)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곡차와 파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안주를 마련하여 술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술자리가 거나하게 익을 무렵, 제자인 만공스님은 오랜만에 만난
스승 경허스님에게 법담을 던졌습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마시지 않습니다. 파전도 굳이 먹으려 하지
않고, 또 생기면 굳이 안 먹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습니까?”
경허 스님은 곡차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 키고 나서 껄껄 웃으며 답했습니다.
“자네는 벌써 그런 무애(無碍)의 경지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렇지 못하여 술이 마시고 싶으면 제일 좋은 밀 씨를 구하여 밭을 갈아 씨를
뿌려 김매고 가꾸어, 밀을 베어 떨어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고 걸러, 이렇게
마실 것이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 씨를 구해 밭을 일구고 파를 심고 거름을
주어 알뜰히 잘 가꾸어서 이처럼 파전을 부쳐 가지고 먹을 것이네.”
만공 스님은 훗날 이때의 심정을,
“스승 경허스님의 말씀을 듣고 등에서 땀이 흐르고 등골이 오싹해 지며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너무 얕고 스승의 경지는 하늘같이 높아서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라고 토로했습니다.
-------------------------------------------------------------------------------
* 장곡사(長谷寺) :
두 개의 대웅전(상대웅전, 하대웅전)이 있어서 독특한 이 사찰은 통일신라시대에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 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있어서
한번 쯤 가 볼만 합니다.
# 신라의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澄)과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은
서로 다른 스님이십니다.
- 국보 제58호 :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부석조대좌
(長谷寺 鐵造藥師如來坐像附石造臺座)
- 국보 제300호 : 장곡사 미륵불괘불탱 (長谷寺 彌勒佛掛佛幀)
# “幀”은 “그림족자”라는 뜻인데 “영정(影幀)” 등 평소에는 “정”으로
읽지만 불화(佛畵=탱화-幀畵)를 말할 때에는 “탱”이라고 읽습니다.
- 보물 : 상대웅전, 하대웅전 등 4점
* 국보 제58호
* 국보 제300호
==========================================================================================
마지막으로 다음의 네 가지 말씀을 덧붙여 소개해 드립니다.
[ 경허스님 말씀 중에서 ]
불 여 중 생 오 불 식 (佛 與 衆 生 吾 不 識)
연 래 의 작 취 광 승 (年 來 宣 作 醉 狂 僧)
유 시 무 사 한 조 망 (有 時 無 事 閑 眺 望)
원 산 운 외 벽 층 층 (遠 山 雲 外 碧 層 層)
부처니 중생이니 내 모르니
평생을 그저 취한 듯 미친 듯 보내려네.
때로는 일없이 한가로이 바라보니
먼 산은 구름 밖에 층층이 푸르네.
[ 진묵대사(震黙大師)의 말씀 중에서 ]
천 금 지 석 산 위 침 (天 衾 地 席 山 爲 枕)
월 촉 운 병 해 작 준 (月 燭 雲 屛 海 作 樽)
대 취 거 연 잉 기 무 (大 醉 居 然 仍 起 舞)
각 혐 장 수 괘 곤 륜 (却 嫌 長 袖 掛 崑 崙)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아 산을 베개하며
달로 촛불 삼고 구름으로 병풍 삼으며 바다를 술동이 삼아
실컷 술에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고자 하니
도리어 긴 장삼자락이 곤륜산에 걸릴까 저어하노라.
[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말씀 중에서 ]
답 설 야 중 거 (踏 雪 野 中 去)
불 수 호 란 행 (不 須 胡 亂 行)
금 일 아 행 적 (今 日 我 行 蹟)
수 작 후 인 정 (遂 作 後 人 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나의 이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지니
* 이 말씀은 또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님께서 즐겨 읊으셔서
“백범일지(白凡逸志)”에도 올라와 있지요.
[ 불경(佛經)의 하나인 “금강경(金剛經)” 중에서 ]
일 체 유 위 법 (一 切 有 爲 法)
여 몽 환 포 영 (如 夢 幻 泡 影)
여 로 역 여 전 (如 露 亦 如 電)
응 작 여 시 관 (應 作 如 是 觀)
이 세상 모든 것은
꿈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 불교에서는 “금강경(金剛經)”을 매우 높은 경지에 있는 경전의 하나로 보고 있어서
많이 읽히고 있고 또 해설하는 책도 여러 종류가 나와 있는데 스님들뿐만 아니라
도올 김용옥 등의 철학자나 이시우박사와 같은 천문학자까지도 해설서를
내어 놓았습니다.
* 불교경전은 그 내용이야 크게 다를 바가 없겠지만 종류로는 약 삼천종이 있다고 하는데
따라서 불교의 각 종파에 따라 “소의경전”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 소의경전(所依經典) : 개인이나 종파에서 신행(信行), 교의(敎義)상 근본 경전으로 삼아
의지하는 경전을 말합니다.
# 주요 종파의 소의경전
- 조계종(曹溪宗) : 금강경(金剛經) + 전등법어(傳燈法語)
- 천태종(天台宗) : 법화삼부경(法華三部經)
- 태고종(太古宗) : 금강경(金剛經) + 화엄경(華嚴經)
===============================================================================
너무 지루한 이야기만 드린 것 같아서 다음을 첨부합니다.
[ 청양고추 ]
충남 청양((靑陽)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여러분은 즐겨 드시는 “청양고추의 유래"를
아시는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비교적 매운맛을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마치 “매운맛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매운맛의 음식과 또 음식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매운맛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꼭 알맞은 맛으로 “청양고추“가 아주 인기가 있어서
요즘은 오히려 ”맵지 않은 고추 주세요.”라고 따로 주문해야할 정도입니다.
-------------------------------------------------------------------
믿거나 말거나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습니다.
--------------------------------------------------------------------
“청양고추”는 “어느 분들은 ”청량고추“라고도 합니다.
이는 아마도 발음상의 문제이든가 아니면 그 고추를 먹으면 상쾌해 진다는 의미로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뭐 그런 뜻으로 보입니다.
아래의 이야기는 제가 직접 확인한 내용은 아님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청양고추“는 매운 맛을 내는 캅사이신 성분이 다른 고추에 비하여 월등히 많이 함유되어
있고, 미네랄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며 또 향기가 강하고 과피(果皮)가 두꺼워서
오래 저장해도 맛이 변하지 않는 장점이 있으나, 온도가 낮고 got빛이 적으면 수확이
줄어드는 단점도 있다고 합니다. 청양고추를 오래 보관하려면 씻지 않은 상태에서 신문지로
싸서 보관하면 좋다고 합니다.
청양고추의 원산지와 명칭 유래에 대한 주장과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전국적으로
청양고추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각지에서 그와 관련된 상표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원산지와 명칭 유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지역에 따라 지적재산권(知的財産權) 등록을 추진하고 있어서 지역 간 신경전이
치열합니다.
유래에 대한 주장을 살펴보면, 우선 충청남도는 1968년 우리나라 유수(有數)의
한 종묘(種苗)회사에서 청양농업기술센터를 찾아와 종자선발을 위해 청양고추를 요구했고,
청양농업기술센터는 30여 종의 고추를 제공하면서 신품종으로 선발되면 청양고추로
명명할 것을 약속받았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지역에서는 1980년, 위의 종묘회사에서 경상북도를
방문하여 당시 맵기로 유명한 “땡초”라는 고추를 채취하고 이를 개량하여 오늘날 단맛이
가미된 청양고추가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종묘회사의 홈페이지에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에,
소과종(小果種-작은 과일이 열리는 식물-여기서는 고추의 크기를 말함)이
대과종(大果種-큰 열매의 종류)보다 가격이 높고 특히 국내 최대 주산지인 경상북도
북부 지방의 청송, 영양지역에서 소과종이 주로 재배되어 이 지역에 적합한 품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육성목적에 비교적 근접한 품종을 육성하여 청송(靑松)의 <청(靑)>과
영양(英陽)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여 품종등록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이 회사는 1998년 다른 회사로 인수되었는데 그 이후 이 자료를 삭제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어느 분의 주장에 의하면 “국립종자연구소“에 기록되어 있는 ”청양고추“의
개발자이며 이 이름을 붙인 사람의 말씀이 남아 있는데 위 종묘회사의 말대로
<청송 + 영양>에서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밖의 주장으로는, 경상북도 청송군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에서 이 품종의 고추 재배를
많이 했고 그때부터 유명세를 타다 보니 두 지역의 앞 글자를 딴 “청양“이 나왔다는 주장이
있고, 한편으로는 비싸고 고귀한 고추라는 뜻을 가진 “천냥 고추”에서 변화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각 지역의 분분한 주장 속에서, 충청남도와 청양군은 청양고추를 향토지적재산으로
내세우고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고, 2000년부터 매년 8월말에서 9월초 사이에 “고추”와
그곳의 또 다른 특산물인 “구기자”를 합하여 “청양고추/구기자축제”를 개최하는 동시에
2001년에는 청양고추와 관련된 상표권 등록을 마쳤다고 합니다.
또한 2003년 이후에는 “청양고추” 관련 상표명에 대한 “지적재산” 등록을 추진하고
있는데, 충청남도의 지적재산 등록이 인정되면 다른 지역에서는 상표 사용이 제약받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생산량은 전에는 경상남도 밀양과 진주, 그리고 최근에는 경상북도 예천지방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어서 이들 지역에서 전국 생산량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
이상 “청양고추의 유래”에 대하여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는데 참고로 다음을 덧붙입니다.
* 청양군(靑陽郡) :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청양은 충청남도에서는 약간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예전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칠갑산(七甲山) 노래”와 “장곡사” 등으로
널리 알려졌고 또 그곳의 특산물로는 지금도 구기자, 밤 등이 유명하지만 원래 고추가
유명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청양고추”가 그 지역의 특산물이
되었습니다.
- 청양군 청양읍에는 “고추박물관”이 있습니다.
* 영양군(英陽郡) :
경북 내륙의 대표적인 오지(奧地)인 이곳은 지금은 인구수로는 섬으로 구성된 옹진군이나
울릉군 보다 약간 많기는 하지만 인구밀도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군(郡) 전체의 인구가 채 2만 명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부터 이곳은 고추와 사과와 산나물이 유명했습니다.
* 청송군(靑松郡) :
요즘은 교도소로 유명해져서 군민들의 원성(怨聲)이 높은데 원래 영양군과 더불어 경북의
대표적 오지이고 그렇지만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데 역시 인구밀도가 매우 낮고 여기도
예부터 고추와 사과와 버섯과 약초가 유명했습니다.
* 양양군(襄陽郡) :
뜬금없이 강원도 양양군이 “고추분쟁”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곳은 잘 아시다시피
송이버섯, 연어, 감, 버섯 등이 예부터 유명했습니다.
==============================================================================
너무 장황하게 말씀드려서 불편하게 해드리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일화들이 참으로 재미있고,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데, 단계적으로 차원이 달라지는 것도 같습니다. 처자 업는 얘기가 맘에는 제일 와 닿는 군요. 감사합니다.
네~~~ 이 이야기가 가장 불교적인 이야기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버리는 것, 소유하지 않는 것 등이 요즘 많은 사람들의 話頭인데 꼭 알맞는 이야기지요. 그나저나 저는 불교이야기를 자주 올리기는 해도 제자신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니 한편으로는 좀 부끄럽습니다. 생각할수록 어려워집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랬군요. 어쩐지 제맘에 남더라구요 ㅎㅎ
우리나라나 중국의 불교에서는 선(禪)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훌륭한 스님들의 이런 계통의 무언가 한번 더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어서 자주 올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 위주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