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지기’ 연재에 들어가면서>
‘사제간의 정감어린 편지’ 를 카페에 올린 한솔 김용수입니다.
저는 6.25당시 초등6년생으로 전쟁와중 가정에 머물며 서당에 다니다가 원광중학교 1학년말 편입하여 2년 만에 졸업, 광주사범학교에 진학한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 되었습니다.
천성이 별 다른 특기가 없어 늘상 행사에 빠지는 것이 하나의 특기이기에 원만한 친구 사귐도 기억이 없는 채 무난히 교직천직을 퇴임하고 만 것입니다.
그 후 벌써 10여년을 헤아리기에 이르러 오늘이 있게 한 광주사범학교와 초임교사시절이 내 인생 전부를 정착시켰다고 생각한 나머지 카페에 월2회씩 연재코자 하와, 백년지기 여러분들의 각별한 양지를 부탁드려봅니다.
감사합니다. 한솔 컴짱
나의 사범하교 -초임교사 시절(1)
◊ 어느덧 이리원광중학교 1학년말 편입된지 2년의 세월이 흘러 진학문제가 대두되던 2월 중순이 되었다. 초조히 며칠이 지난 2월 21일 초저녁 갑자기 밖에서 “무길아! 무길아!”하는 형님이름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 아버지께서 나타나시었다. “이걸 어쩌면 좋겠느냐?” 하시며 털어놓은 내용은 대강 이러하였다.
지난주일 학동마을에 가서 오남하 사범학교학생을 찾아가서 입학원서를 사오라고 부탁했는데 지난 토요일에 사 왔길래 그 원서를 오늘 가지고 오다 송정리에서 국밥을 사먹고 보니 지갑이 날치기 당하여 없어졌다는 것이다.
“지갑은 가져가도 좋으나 입학원서만큼은 되돌려 달라”고 사정을 해도 다들 모르는 일이라고들 해서 할 수 빈손으로 기차를 타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시면서 차려준 식사를 할 생각도 않으시고 한숨만 내쉬고 계셨다. 나는 한순간 절망에 빠져버린 채 형님께 꾸중을 들어야 했다. 이런 일은 타합도 아니하고 네 혼자 마음대로 편지를 해서 이런 사태가 났다는 것이었다.
사실 10여일 전 나는 고민 끝에 이곳 형님 집에서는 도저히 더 진학할 여념이 없어 단념하고 아버님께 비밀히 편지를 올렸던 것이다 ‘광주사범학교 입학원서를 오남하 선배에게 부탁하여 사서 보내달라’고......
그도 그럴 것이 타합하는 가정분위기가 됐어야 말이지, 만날 노동에 시달리기만 하는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안 했던 것이다.
나는 실망에 찬 나머지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고 다음날 학교 갈 때까지 한말도 꺼내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 재수가 없었던건가 하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어떻게 하였는지도 모르게 그날 학교공부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 그러자 밥상을 막 열어보자 마자 일시에 “야아”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바로 그 상위는 입학원서가 단정히 놓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방에 들어오신 형수께서 말을 꺼내셨다.‘도령님의 재주는 일찍 알고 있었기에 우리 희문이를 업어 키울 때부터 내가 가르친다’고 말해 왔었다면서 2년 동안 너무 고생이 많았기에 합격되고 안 되고는 도령님 실력과 운에 맡기고 어떻든 입학원서는 꼭 사다 주자고 형님을 밤새껏 졸랐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벽기차를 타고 광주에 내려가 사범학교 입학원서를 사온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원망했던 지난날의 일들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새로운 희망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 사범학교는 교육대학의 전신으로서 일제 때 창설한 고등학교 3년 과정의 초등교사 양성기관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면서도 수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다른 고등학교보다 1달 먼저 입학시험을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명문대학에 진학할 사람들도 경험삼아 일부러 응시해보는 곳이기도 하여 실력 경시대회가 벌어지곤 하는 것이었다.
입학안내서에는 2월 25일 토요일이 접수 마감이었다. 학교에 가보니 불갑출신 강구중군도 광주사범학교 원서를 사왔다면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려 같이 원서를 쓰게 되었다. 생년월일란는 호적초본을 발급받아 쓰기로 빈칸으로 남겨둔 채 그날 늦게야 미완성된 앨범까지 찾아 집에 돌아오며 내일 함께 영광고향으로 내려가 호적초본을 떼어 접수도 함께 하자고 약속하였다.
2월 24일 고향으로 내려가 면사무소에 호적초본을 떼어 노랑메에서 구중군을 약속대로 기다리게 되었다. 오후 3시경까지 기다리다 소식이 없어 할 수 없이 지나가던 트럭을 사정해서 광주로 향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포장도로가 아니어서 광주까지는 3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이고 보면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광주는 처음 길이어서 길을 모르는 가운데 돌고개에 이르자 오른쪽으로 꺾더니 무진중학교 근처 주유소에서 정차하고 급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리라며 사범학교를 가려면 광고, 상고를 거쳐 가야하는데 6km는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약간의 사례비를 건네주고 땅거미가 져가는 어둠 속에 광고를 물어가며 뛰다시피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어느새 흠뻑 땀이 온몸에 흘러 내렸다. 얼마큼 걸었을까 오른편으로 교문이 나타나는데 광주고등학교 교패가 붙어 있었다. 이제는 제2목표 인 광주상고를 찾는 일이었다. 상고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철로를 건너 얼마를 건너니 역시 오른쪽으로 교문이 나타나는데 광주상업고등학교 라고 씌어 있었다. 또다시 물어가며 우회전하여 속도를 내어가는데 이제는 완전히 어둠이 짙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걸으니 교문 큰 기둥이 어둠 속에 서있는 것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획을 따라 글씨를 써봤다. “야 찾았다” 분명히 광주사범학교 교명임을 손가락 끝으로 확인하는 기쁨이었다.
200m 쯤 더듬거리며 걸어 들어가니 희미한 전등불이 유리창 밖으로 비쳤다. 나는 힘차게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며 안으로부터 소스라쳐 놀라 두어 사람이 나타나 묻는 것이었다.
나는 원서를 내기위해 늦게까지 헤매었던 이야기를 대강 들려주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오늘까지 접수된 원서를 정리하는 중이어서 쉽게 접수증을 발급 받게 되었다.
초읽기에 몰렸던 나는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오는데 벌써 온몸에 싸늘한 찬 기운이 감돌았다. 옷에 흠뻑 배었던 땀이 식어가자 오싹 소름이 끼치는데 경향방죽 둔덕에서 아이들의 원형점멸 쥐불놀이 군상들을 보고서야 오늘이 바로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밤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다음(2)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근디 한가지~光高와 상고 사이의 철로는 1968년에 광주역(구역)이 태봉산을 헐고 신역으로 이전하면서 철로가 놔졌답니다.
부족한 저의 글에 '청라언덕'님의 관심 주심 감사할 뿐입니다.
어둠 속에 본 광경인데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님의 댓글에 다음과 같이 답해봅니다.
※ 광주~송정리 철도 부설
1922년 여름 광주~송정리 사이에 철도가 놓이면서 지금의 대인동 동부소방서 일대에 광주역이 문을 열었다.
※ 광주신역 생기고 태봉산 헐리고
태봉산 신역이 건립될 즈음, 경양방죽 매립을 위해 산이 헐리었다. 태봉산의 흙으로 메워진 곳에 계림동 시청이 세워진 것.
신역 신축은 66년 10월에 착공돼 2년6개월만에 완공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결론> 광주-송정간의 기존 철도에 나중 태봉산을 헐어 신역만 건립한 것으로 사료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