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긴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실 때 일어난 일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수가라는 동네에 당도하신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이라고 알려진 곳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물을 좀 달라고 하시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되묻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왜 유대인인 당신이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여인의 물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랍니다. 논리적으로는 부적절한 이 대답에는, 저자의 관심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역사적 갈등 관계를 넘어, 영생의 샘물이신 예수님을 만방에 알리는데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치부를 들춰내십니다. 그 영생의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여인에게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자가 남편이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생활이 문란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저자의 의도는, 복음서 전반을 흐르는 사상, 즉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자신의 치부를 들킨 여인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정말로 궁금해서 그런 것이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19~24절입니다.
19 여자가 말하기를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 위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나의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말씀을 들은 여인은 자기 동네로 가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 같다고 말하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몰려와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인지 요한의 창작인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이 본문이 기록된 목적은 이야기 가운데 분명히 드러난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이며,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드리는 사람이라면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두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원수처럼 지냈던 사마리아인에 대한 거부감부터 풀어야 하며,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일차적으로는 요한공동체 사람들에게, 다음으로는 요한복음서를 읽게 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선교의 목적으로 기록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4장 종반부에는, 고위 관리의 아들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7장에도 같은 내용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의 유사성으로 봐서 마태와 누가, 그리고 요한이 같은 자료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과 설정에서는 조금 차이가 납니다.
마태와 누가에는 로마군대의 백인대장이 자기 종이 죽었으니 고쳐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이 죽었으니 고쳐달라고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에는 예수님이 ‘멀리 오실 것 없이 말씀만 하셔도 내 종이 나을 것’이라고 백인대장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고 예수님이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왕의 신하가 ‘제발 오셔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 것으로 되어 있고 예수께서 고쳐주시긴 하셨지만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공관복음서들의 기록과 요한복음의 기록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세세한 표현이나 설정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요한복음의 저자가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사용한 자료와 같은 자료를 사용했지만 정작 공관복음서의 존재를 몰랐거나, 공관복음서가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책을 구해서 내용을 파악했을 가능성은 적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고 현대신학자들은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