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시간 만에 무의 땅 사내들은 머릿수에 맞게 여자들을 얻었다. 대장 사내는 가죽 주머니 여러 개를 촌장의 발치 앞에 두었다.
"가는 길이 험난하니, 두둑하게 채워주시오."
식량을 이미 뜯어냈으면서도 더 채워달라니.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굴면서 약탈이고 침략이고 말도 못하게 한단 말인가.
촌장은 공포보다 분함으로 몸을 떨었다.
하지만 케의 땅은 무력했다. 힘을 키울 일이 도저히 없이, 그저 농사나 지으면 될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이었기 때문이다.
대장 사내가 여자들이 먹을 것까지 고려하라 덧붙이자, 그런 안온한 환경에서 온순하게 타고난 케의 땅 촌장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는 무의 땅 사내 쪽에 서 있는 여자들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미안함과 슬픔, 자책에 잠겨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부디, 우리의 딸들을 생각하시오."
딸이 가는 마지막을 받아들이지 못해 악악 소리 지르던 사람들도 이대로 정신을 놓다가는 딸을 고생시킬까 집에 있던 좋은 것들을 허겁지겁 내왔다. 식량과 깨끗한 물과 귀한 옷가지들이 쌓였다.
무의 땅 사내들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것들을 잘 소분하여 나누어 담고 어깨에 짊어졌다. 그들은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처럼 급하게 행동했다.
이제 정말 길을 떠날 태세가 되자, 울다 지쳐 훌쩍이던 여자들은 케의 땅을 떠나야 함을 깨닫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눈물 한 방울 없이 굳은 표정으로 있던 여자들도 몸을 잘게 떨었고, 살란 역시 긴장하여 남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의 땅 사내들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굳이 여자들을 묶지 않았지만 앞과 뒤, 옆에서 대형을 맞추어 걸어갔으므로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걸음을 옮겨야 했다. 코뚜레 뚫린 소가 쟁기를 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억지로.
울음과 비탄의 소리, 그것이 언덕 하나를 넘을 때까지 그들의 뒤를 배웅하였다.
살란은 눈이 시릴 때까지 참아가며 눈물 하나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혹여 루의 땅에서 아버지가 돌아왔을까, 그녀를 보고 구하러 올까 두려워 일부러 제 바로 뒤에 붙은 사내의 그림자에 숨어 걸었다.
여러 생각이 올라오며 그녀를 혼잡하게 만들었다. 생각 뿐아니라 감정까지 같이 뒤엉키는 탓에 더 그렇게 느끼는 것일 터다.
이대로 가서 케의 땅에 언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녀는 어린 소녀가 아니었고 무의 땅 사내들이 머릿수에 맞춰 자신들을 데려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어떤 취급 내지는 대우를 받을지까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고른 사내의 소유가 될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돌아올 기회가 생길 그 때, 미래의 자신도 그걸 '돌아온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녀는 아버지가 어떠한 성정이었는가 떠올렸다. 지금, 여기에 주어진 것이 최선임을 신뢰하며 나의 최선을 다하여 살아낼 것. 그리고 그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자신은 어떤 환경과 상황이든 그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모든 열심을 다할 것이었다.
그러니 강제라고 하더라도 살란의 뿌리는 케의 땅에서 뽑힌 것이었고, 그녀는 새로운 곳에 심겨져 거기에서 뿌리를 내리려 할 터다.
아, 결국 지금이 자신의 '원줄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담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살란은 그저 울음 소리 뿐인 기억보다는, 풍요롭고 평화로운 케의 땅을 있는 그대로 담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결연한 다짐에 응원이라도 하듯 태양빛이 대지에 쏟아진다. 바람에 따라 황금빛 물결이 곡선을 그리고, 땅에서부터 솟아난 생명력이 줄기를 타고 위로 솟구쳤다. 추수를 기다리는 광활한 대지는 꽉 찬 알곡들의 춤으로 케의 땅의 풍요를 증명해냈다.
눈에 알알이 박히는 케의 땅, 내 고향.
침략 당해 딸들을 빼앗긴 무력한 땅, 그러한 의미가 없는 수식어는 지워버리고, 풍요와 생명의 땅, 찬란한 빛의 땅으로.
살란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주의깊게 시선 하나가 따라붙었다. 시선은 꽤 오랫동안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으나, 살란은 알아채지 못했다.
***
풍요의 언덕을 네 고개 쯤 지났을 때 무리는 발을 멈추었다. 맨 앞에 가던 여인 하나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탓이었다.
"잠깐 쉰다."
대장 사내가 무리를 대강 둘러보았다. 여자들은 확실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내들이 멘 짐들을 대강 내려놓았다. 그들은 큰 나무 아래 그것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데려온 여자를 유의깊게 보며 잠시간 서 있었다.
여자들은 주춤거리다가 그늘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많이 울고 긴장했다가, 침묵 가운데에서 걷기만 하다보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대장 사내는 고갯짓 한 번으로 사내들의 시선을 모으곤 조용히 명령했다.
"너희들은 뼈를 돌봐라."
뼈를 돌보라니? 살란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무의 땅 사내들이 흩어져 자신의 여자들에게로 붙었다.
아마도 무의 땅에서는 여자들을 '뼈'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살란은 주변을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그녀를 선택했던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작가의 말] 댓글이 3개나 달려서 깜짝 놀랐어요! 감사합니다. 짦은 만큼 다음 편은 빠르게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