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폐셜 (제 3 회) 98년 11월 7일(토)방송[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발해에는 외국으로 가는 5개의 길이 있었다 거란도 영주도 압록도 신라도 일본도가 그것이다.
상경에서 길림을 거치는 거란도, 영주를 거쳐 중원으로 가는 영주도, 압록강을 타고 산동반도로 들어가는 압록도, 동경에서 함경도를 거쳐 강원도로 내려가는 신라도, 그리고 동경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들어가는 일본도.
그러나, 여기에는 특이할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발해인들이 배를 띄운 시기가 한결같이 겨울이었다는 점이다.
발해인들은 왜 하필 겨울에 항해를 시작했을까.
해양연구소 이흥재 박사는 인공위성으로 동해를 관측해 동해의 자연조건과 계절의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그가 분석한 97년 1월 동해의 풍향도다.
시베리아쪽에서 시작된 북풍은 동해를 지나면서 북서풍으로 변하고 있다.
만약 발해인들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띄운다면 이 바람만 그대로 타고 가도 어렵지 않게 일본의 노도반도 지역인 후꾸라 항구에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바람의 세기였는데, 통상적으로 동해쪽에는 겨울내내 11월부터 3월정도까지는 강한 북풍 북서 계절풍이 불어가지고 파도가 많이 크게 일게 된다. 그러면 5m정도의 파고가 생길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발해인들은 과연 어떤 배를 타고 이 거친 바다에 나섰을까? 거센 파도를 타고 넘으려면 앞머리가 뾰족하고 높아야 하고 배의 방향을 바로잡으려면 발달된 키가 있어야 한다.
또한 강한 바람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돛대가 필요하다.
배 길이는 20미터,백명정도의 인원이 승선할 수 있는 기동성 강한 이런 목선이 아니었을까!
또한, 황해나 남해같은 경우는 육지를 바라보면서 항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해는 워낙 먼거리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치적인 목적이라든가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자국의 해역내까지는 밑으로 최대한 내려온다.
그것은 육지를 바라보면서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다시 먼바다로 떠서 동해를 직항해야 된다.
이러기 위해서는 천문항법이라는 고도의 발달된 항해술이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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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항해술을 갖춘 발해인은 동해를 건너 일본 서해안 각지역으로 도착하게 되는데,가장 대표적인 도착지가 바로 후꾸라 항이었다. 이 낯선 이국땅에 호기롭게 발을 들인 발해인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중대성첩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국가와 국가사이에 오고간 일종의 외교문서다.
문서를 보낸곳은 발해의 중대성.
당시 왕명을 맡고 있던 곳이다.
이문서는 841년 일본 태정관에 전해졌다.
중대성첩에는 당시 일본에 건너간 발해인들의 직책과 인원수를 자세하게 적고있다.
그들은 일국을 대표한는 105명의 공식사절단이었다.
발해의 사절중에는 천문생 한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항해에 필요한 사람이었다.
사신들에 관한 기록과 함께 중대성첩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항해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어 오래 때를 기다려 입국한다.
정당성 좌윤 하복연을 사신으로 보내 귀국과 교류하고자 한다.
하지만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 도착할 수 있는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만큼 동해를 건너다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발해 사신들에겐 목숨을 건 항해였다.
그렇지만 발해는 사신파견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어떤 목적 때문에 발해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던 것일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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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당나라 등주를 공격한 때는 732년.
대장군 장문휴는 수군정예 2만여명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성으로 진격했다.
파죽지세로 등주성을 함락한 발해군은 등주자사위준을 죽인다.
우세한 군사력과 속전속결의 전략이 거두어낸 승리였다. 아마 우리민족사에서 최초로 정규군대가 외국을 공격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이 발해가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는 이 사건이 아마 최초였고 그 후로는 없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된다.
이 사건과 발해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실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보자.
당시 동아시아 정세는 발해에게 무척 불리한 상황이였다.
발해에 복속돼 있던 흑수말갈족이 당나라와 손을 잡음으로써 발해는 서쪽의 당나라,북쪽의 흑수말갈, 그리고 남쪽에 당시 당나라와 제휴하고 있던 신라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는 형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삼각구도를 깨지 않는 이상 발해로서는 존립자체가 위태로운 절대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불리한 정세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발해가 선택한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으 로 하여금 배후에서 신라를 견제하게 해놓고, 그 다음으로 발해는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제휴를 깨기 위해 등주를 공격했던 것이다.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했을 때 당나라의 대응이라는 것은 참으로 소극적인 것이었다.
특이할만한 반격도 없었고 오히려 발해우대정책을 펼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발해가 당시 그 숨막히는 정치 외교전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뜻이 아닐까!
이것으로써 발해 사신들이 목숨을 걸고 동해를 건넜던 한가지 이유는 밝혀졌다.
그런데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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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신들이 한번 일본에 오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대체로 6개월 이상이 걸린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오랜 시간동안 일본에서 무엇을 했을까?
발해사신들은 후꾸라 항구에서 여독을 푼후 수도인 나라로 이동한다.
궁궐로 안내된 그들은 일본왕을 알현하고 국서를 전달하는데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발해무왕 대무예는 주변의 여러나라를 정복하여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도다.
예로부터의 법도에 따라 이웃나라와 교류를 돈독히 하고자 하노라.
국서와 함께 사신들은 고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일본왕에게 선물한다.
사신들이 가져온 물건은 호랑이 가죽 담비 가죽과 같은 가죽류와 ,산삼 꿀 등이었다.
일본왕실 역시 발해사신들에게 선물을 내리는데 면,비단,황금,수은,우산등 종류는 물론 그 수량도 무척 많았다고 한다.
발해사회라는 것은 왕과 중앙의 관료들이 있지만은 지방에는 독자적인 세력들이 상당히 많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런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중앙의 관료체제밖에 있으면서도 상당히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발해 중앙정부 에서는 이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관료로 일부는 편입시켰지만 그대로 두면서 일본에 사신보낼때도 같이 참여시키는 이런 여러 가지의 역할을했던 것 같다.
이런 수령들은 일본에 갔을때는 교역에 참가하기도 하고 아마 다른 일도 했을것으로 생각되지만은 대체적으로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책들 기록에 의하면 871년 발해사신들은 첫날의 관무역에서 일본화폐로 40만냥을 얻었다고 한다.
13상경성화동개진 발해의 수도에서 당시 일본의 화폐 화동개진이 출토됐는데 이는 발해사신들이 무역을 했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발해 사신들이 물건을 팔고 받았던 40만냥의 돈은 어느정도의 가치일까?일본책 화동개진의 가치가 가장 높을때는 700엔,가장낮을때는 33엔이었다.
대략 150엔으로 잡아도 40만냥은 요즘 돈으로 6억6천만원!
물건을 팔아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사신들은 이듬해 5월, 다시 귀국길에 오른다.
사신들이 한번 다녀갈때만다 심각한 무역역조를 감수해야 했지만 일본으로서는 발해가 필요했다.
이미 발해는 일본을 능가하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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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13대 경왕에 이르러 고금의 문물과 제도를 완비하여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다.
해동성국.
바다 동쪽에 있는 융성한 나라.
명실공히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가 발해를 이렇게 부른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발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융성한 국가가 아니었을까?
상경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해자의 길이와 길고 반듯하게 뚫린 도로들이다.
상경성의 성벽은 안에다 돌을 쌓고 겉에다 흙을 바르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완성된 성의 둘레는 총 16킬로미터,조선시대 한성과 비슷한 크기다.
성내부로 들어가면 잘 정돈된 도시계획을 볼 수 있다.
중앙으로 시원하게 뚫린 주작대로는 폭이 무려110미터.
상경성엔 모두 81개의 주거지가 있었다.
한 구역당 크기는 가로 500미터 세로 300미터.
이 크기로 보았을 때 당시 상경성 안에는 대략 2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경성 내에는 내부에 또하나의 성이 있었는데 궁전과 관청이 있는 황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전 주춧돌의 크기만으로도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황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궁전이 있었다.
1궁전 2궁전은 왕이 국사를 보던 곳이고 4궁전에는 침전이 있었다.
그리고 궁전 동쪽편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두 개의 섬과 호수 정자가 있는 이 인공정원은 통일신라의 안압지와도 그 형태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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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수도의 면모뿐만이 아니라 발해의 국력을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바로 땅,영토이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나라이다.
과연 발해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발해의 유적은 연해주 일대를 포함해서 최북단으로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지역에까지 이른다.
발해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 장소를 파악하고 외국의 기록들을 꼼꼼이 분석,종합한 결과 한규철 교수는 발해의 영토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이땅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 이북지역.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 우리의 역사무대였던 만주와 연해주 지역이다.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가 터를 잡았고,다시 이 드넓은 영토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왕조가 있었다.
그 왕조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역사무대는 지금의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우리 역사상 만주를 최후로 지배했고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그 왕조의 이름은, 바로 발해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삼국시대 이후의 시기를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시기 통일신라의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
그래서 최근들어 이 시기를 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발해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고 끌어안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 중심의 역사관에서 만주와 연해주로 역사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것,
그것이 우리가 1300년전의 발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