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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달마 - 부처 본성론(本性論)④
그대의 본성 외에는 부처가 따로 없다
만일 그대가 곧 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는 이번 생을 헛되이 살 것이다. 그대는 불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이다. 스승의 도움 없이는 그대는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
이 말은 달마로부터 직접 나왔다. 이것은 스승의 말을 받아 적은 제자들의 능력을 넘어선 말이다. 단지 지식만 쌓은 사람들은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라고 말을 감히 할 수 없다. 달마조차도 스승의 도움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실 깨닫는 데에는 스승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 만약 그대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용기가 충분히 있다면 그대는 스승의 도움 없이도 깨닫게 될 것이다.
스승의 도움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는 단지 그대에게 확신을 줄뿐이다. 그것은 그대가 모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확신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은 그대의 삶이고 그대의 권리이다. 하지만 그대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을!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나는 깨달은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나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나를 홀로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그들의 도움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단지 나에게 확신을 줄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확신이 필요 없었다. 사실 확신 없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더욱 즐거운 일이었다. 그대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대가 어떤 것을 찾게 될지 안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으면서 하던 일을 계속해 보라.
마치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처럼 그대가 어떤 확신을 가질 때, 그대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 때, 그것은 더 이상 모험이 아니다. 내가 항상 말해온 새로운 인간형에게는 스승이 필요 없다. 그는 모험 정신으로 가득 찬 인간이기 때문이다. 삶의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 극심한 모험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백만 명 중 하나 정도이다. 이 말은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나는 인류 역사상 스승의 도움 없이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달마는 그 사실과 가능성을 인정했다. 비록 자신에게도 스승이 있었지만 말이다.
만약 인연의 결합으로 부처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스승이 필요 없다. 그런 사람은 어떤 가르침보다 훨씬 뛰어난 각성을 타고난 사람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런 축복을 받지 않은 한 열심히 공부하라. 그러면 스승의 지도 아래에서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달마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대의 본성을 아는 것이 공부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경전을 다 공부해도 그대는 자신을 알 수 없다. 그것은 과외지도를 통해서도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 밖에서 들어온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의 내면을 알 수 있겠는가?
스승과 대화를 통해서, 그대가 궁극에 이른 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통해서, 그대는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다. 그대가 하나의 씨앗이라면 스승은 그 씨앗을 꽃을 피운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위로 향한 열망을 갖게 만든다. 그대 자신을 꽃피우려는 의지를 심어 준다. 그것은 공부의 문제가 아니다. 과외지도의 문제 또한 아니다. 그것은 스승과의 깊은 사랑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달마의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달마가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그 말이 자기가 한 말이라고 해도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달마와 같은 사람이 이런 쓰레기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공부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흑과 백을 가릴 줄 모르는 미혹된 자들과 다르지 않다.
이 말들은 모두 제자가 덧붙인 주석이다. 그는 공부에 대해서 계속 강조한다. 그대는 많은 학식을 지닌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깊이 잠들어 있다. 거기에는 아무런 빛이 없다. 그들은 축복의 빛과 향기를 발산하지 못한다. 사실 그들의 공부가 그들을 심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주기는커녕 짐만 잔뜩 지워 주었다.
그들은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의 존재에 심각한 긴장을 불러왔다. 실제적으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정리할 수 없는 정보만 잔뜩 모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신봉한다. 그들을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존재에 아무런 성장도 가져오지 못한다. 그들의 말은 우리 안에 뿌리내릴 수 없다. 그대가 가진 모든 꽃들이 시장에서 사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그대의 내면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다.
한 어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그는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웠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드디어 그는 마누라와 바가지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시장에 가서 크고 아름다운 물고기 세 마리를 샀다. 그리고는 장사꾼에게 그 물고기들을 땅에 던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사꾼은 시키는 대로 물고기를 던졌다. 그러자 어부는 얼른 그것을 다시 잡아 올렸다. 장사꾼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어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어부는 말했다.
"아무것도 아닐세. 당신은 던졌고 나는 잡았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네, 그래서 내 손으로 이 물고기들을 잡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일세. 나는 정직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지."
그는 아내를 속일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을 어떻게 속이겠는가? 그것은 정직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거짓이다.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손으로 잡은 것이 아니라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산 것이다. 진리는 사고 팔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빛으로 자신의 본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부처의 다르마를 엉터리로 선언하는 사람들은 부처를 모독하고 다르마를 뒤집어엎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치 비를 마음대로 불러올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설법은 부처의 설법이 아니라 마귀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선생은 마귀의 왕이다. 그들 제자들은 마귀의 앞잡이들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미혹된 자들은 부지중에 생사의 바다에 깊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보지 않는 한 어떻게 자신들을 부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사람들을 속여서 마귀의 세계로 이끄는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이 본성을 보지 않는 한 그들이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설법한다 해도 그것은 마귀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라(摩羅)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부처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흑과 백을 구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단지 인식하는 것만 필요하다.
부처와 중생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자신의 본성이 부처임을 인식하는 것과 인식하지 않는 차이뿐이다. 인식하지 않는 자는 자신의 내면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그 사람이 바로 중생이다. 그래서 그대와 깨달은 사람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보물을 알고 그대는 그것을 모르는 차이이다. 그래서 달마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어떤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달마는 부처라는 말을 계속한다. 그래서 그대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아니다. 부처는 단순히 '깨달은 자'란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가장 유명한 깨달은 자이다. 그 말은 오직 석가모니 부처만이 '깨달은 자'가 아니란 뜻이다. 그 전에도 많은 부처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많은 부처가 나올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부처는 계속 나올 것이다 그리고 미래에는 새로운 부처들이 샘솟듯이 쏟아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다. 지금은 그대가 기다려야 할 시간이다. 어느 날엔가 그대는 그대 외부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내면으로 눈을 돌릴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개인적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고타마는 그의 성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춤을 조르바 부처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자 스리랑카 대사는 나에게 편지를 썼다.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이다. 그
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춤에다 부처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종교를 해치고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나는 그에게 답장을 썼다.
"아마 그대는 불교도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처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춤을 조르바 부처라고 붙일 권리가 있다.
그것은 그대의 부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니 그대는 그 문제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조르바 싯다르타'라고 부른다면 그때는 그대가 항의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는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수많은 부처 중의 한 명일뿐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모든 잠재성을 갖고 있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방해할 수 없으며 그대 역시 방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대는 단지 불교도일 뿐이다. 한 사람의 추종자이며 모방자인 것이다.
그대는 '부처'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다.
그대는 자신을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원한다면 다시 편지를 써라."
그 후 그는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그가 내 편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달마가 부처라는 말을 사용할 때마다 그것이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는 깨달음이나 해탈의 뜻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부처란 그런 뜻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의 이름도 아니다. 모든 사람의 잠재성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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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승이란, 나의 미처 생각 못한 부분들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지적하여 주는 깨달음의 안내자이지요~~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알수없는 미로의 길이니, 자성신에게 인도하여 주며~ 또한 앞을 밝혀주는 등불 네비게이션 역활을 하여 주네요~~
진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가 버립니다,,,
이를 알아 차리는 인자가 지혜로운 자, 현명한 자 일것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스승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스며들며 진리의 길로 인도 됩니다~
자성신을 알게 하고,느끼게 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모두가 부처요 신이다,,,, 남의 부처,하느님을 찾지 말고 자신 내면의 부처,하느님을 찾아서 자신이 신임을 밝혀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