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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최초의 산악단체들을 밝힌다
각학교에 등산부를 설립하라는 일본 문부성의 지침 하달
1928년 배재고보. 세브란스 의전. 경신학교의 등산부 설립 보도 기사
1939년 연희전문학교 산악부의 졸업 앨법 사진
오늘을 있게 한 초기 등산단체들
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 이용대
한국근대등산의 태동기인 1920-30년대에 한반도에서 발족한 초기 산악단체들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1931년 10월에 창립한 조선 산악회(朝鮮山岳會)와 1933년부터 ‘물에 산에’라는 이름으로 등산 활동을 하다가 1937년 4월 학교의 공식승인을 받아 설립한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산악부가 있다. 또한 1937년 한국인들이 조직한 백령회(白嶺會)와 1938년에 설립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산악부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발족한 산악단체는 1931년 일본인들이 설립한 조선 산악회가 유일한 것처럼 알려져 왔으나 최근 눈에 뻔적 뜨일만한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초기 한국등산 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되었다.
1928년 일본 문부성의 방침에 따른 학교등산부 신설.
1928년 2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일본의 문부성이 그들의 식민지 한국의 학교에 새로운 스포츠인 등산을 권장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학생들의 체력향상을 목적으로 등산을 스포츠로 장려했으며, 특히 체육활동의 이론적 지도강습회를 동년 4월 10일부터 7월 14일까지 동경체육연구소에서 실시하는 한편 특히 여러 종목 중에서 수영, 등산, 운동장설계 등의 새로운 과목을 추가한다는 기사도 실려 있다. 이는 질 높은 등산 활동을 위해 지도교사를 상대로 강습회를 실시했음을 알게 해주는 기사다.
일본 문부성의 이런 방침이 각 학교로 하달된 후 등산부가 설립되었고, 동아일보에서는 관보형식으로 각 급 학교의 운동 부서를 소개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스포츠인 등산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보급되는 경로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28년 6월 6일-7일 양일에 걸쳐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된 중등학교 이상의 각 학교 등산부를 살펴보면 배재고보(培材高普). 경신학교(儆新學校). 세브란스의전(世富蘭偲醫傳.연세대 의대의 전신. 1957년 연희대학교와 통합)이 등산부를 두고 지도교사와 교수들이 학생들의 등산 활동을 지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배재고보는 야구부외에 7개 운동부를 두고 지도교사 김동혁이 등산부를 지도했으며, 경신학교는 9개의 운동부 중 김교문과 전영을 두 교사가 등산부를 지도했으며, 세브란스 의전은 야구부외 10개 운동부를 두고 등산부엔 문창호. 오한영. 김은식 등의 담당 지도교수들이 등산 활동을 지도했다.
현재의 연세대학교는 세브란스의대와 연희대학이 1957년에 통합한 학교로 1928년에 설립된 세브란스 의전 등산부의 설립년도를 계승한다면 등산부의 나이가 86주년이 되는 셈이다.
그동안 연세대학교 산악부는 산악부 창립년도를 1954년으로 알고 60년사 발간을 준비하던 중 새로운 사료를 발굴해냈다. 1954년 이전의 회사(會史)를 발굴하지 못한 것은 연세대산악회의 과문 탓 이다. 역사는 팩트의 기록이다. 이제라도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연세대학교산악회는 회사편찬을 위해 교내 박물관에서 1930년대 활동자료를 발굴하여 당시 산악단 학생들의 활동상황을 알 수 있게 했다.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연세대학. 배재고등학교. 경신고등학교 산악부 자체 경사일 뿐만 아니라 한국등산 사 정리의 단초(斷礎)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국 산악계 전체의 경사이기도 하다. 한국의 산마다에 서려있는 이들 학교산악부의 80여년 맥락이 오늘의 한국산악계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 산악부 활동기록들
1930년대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전 활동자료를 발굴한 연세대학교는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장려하기위하여 산악단(山岳團)을 위시하여 축구단. 럭비축구단. 정구단. 야구단. 농구단. 육상단. 씨름단. 배구단. 수영단. 빙상 경기단. 수상 하키단. 유도단. 유구단(柔球團)등 14개단을 운영하며 생도들의 체육활동을 장려하고 전조선(全朝鮮) 규모의 각종 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연희전문학교가 다른 스포츠종목과 함께 등산 활동을 전개한 배경엔 등산을 즐겨했던 연희 전문학교 언더우드 교장(Underwood.3대 교장))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을 개연성이 있다. 서울출생의 한국명 원한경(元漢慶.1890-1951)은 미국의 선교사이자 교육자로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이자 경신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24년 봄 지금의 백운암(현 백운산장)에 처음 들어온 이해문(현 이영구씨의 조부)씨가 생전에 증언한 말에 의하면 1925년 봄 원한경 박사 일행과 몇몇 서양인들이 가끔 인수봉을 등반했다는 목격담을 전했다고 한다. 이런 일은 김정태가 남긴<등산 50년>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기회에 언더우드 박사의 인수봉 등반기를 발굴해보는 것도 연세대산악인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다.
<연희전문학교 상황보고서>의 체육활동 상황기록을 살펴보면 산악부 초기에는 산악단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 발굴된 기록에 의하면 산악단이란 명칭은 1930년부터 1935년 까지 5년간 사용되었으며, 이후1936년부터 산악부(山岳部)로 개칭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산악단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1931년 7월. 13명의 대원이 제주도 한라산을 등산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고적명승지 역사탐구를 겸한 원지방(遠地方) 등산여행을 했고 귀로에는 여수에서 고적명승지를 답사하는 등산과 문화사적지탐방 형식의 등산을 했다.
1936년 8월에는 산악부원 7명이 남한산성을 등산했고, 1938년 7월 16일부터 8월 3일까지 한라산. 지리산. 금강산 등 삼신산(三神山)을 정복하고 귀경한다. 이때의 등산은 대원 6명을 2개 반으로 나누어 제1반은 윤홍기외 3인이 서울-목포-한라산- 여수- 구례- 지리산- 삼천포- 부산- 경주- 포항- 강릉- 양양- 고성- 금강산을 경유한 후 귀경하는 대장정의 등산을 한다. 또한 제2반 2명은 내장산- 지리산- 한라산- 금강산을 등반하고 합류한다(延禧 便覽 1938-39년). 삼신산(三神山)이란 중국전설에 나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중국산을 본떠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을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에 빗대어 일컫는 명칭이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졸업앨범에는 듈퍼지츠(Dulfersitz)방식으로 암벽에서 하강하는 모습의 사진도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가벼운 암벽등반도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로프를 메고 오르는 바위가 백운대가 아닌가 싶다.(이 부분은 현장 고증이 필요하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산악부는 1936년 7월 10일-31일 사이에 최영태외 6명이 태백산과 금강산을 등반했고, 1937년 7월 2개조로 나누어 한조는 오대산과 장백산을 등반했고, 다른 한조(임명소외 4명)는 태백산. 설악산. 오대산. 장백산. 한라산을 등반하면서 한편으로는 산간마을의 산촌위생실사(무의촌진료사업)를 병행했다. 1938년엔 이덕호. 장재현. 방현 등 7명이 함경북도의 ‘조선알프스’라 부르는 관모봉(冠帽峰.2541m)을 하기에 등반했다.
‘조선의 알프스’ 관모연봉(冠帽連峰)은 백두산 최고봉을 제외한다면 사실상의 제2위의 고산군이다. 관모연봉을 ‘조선알프스’라 명명한 사람은 1926년 관모주봉을 초등정한 일본인 사이토(齊藤龍本)다. 그는 초등기록을 <조선산악연보>에 발표한바 있으며, 관모연봉완전종주 초등을 기록한사람은 1931년 조선 산악회 창립 멤버인 이이야마(飯山達雄) 일행이다.
연희전문은 1915년에, 세브란스의전은 1885년에 설립한 학교로 초기에는 두 학교가 별도로 산악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세브란스의전 등산부활동 기록은 학교자료 외에도 다른 기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두 학교 모두 산악부 설립 초기에는 학술답사를 겸한 탐승형식의 등반이 성행했으니 이는 시대적상황의 반영이기도 했다. 근대 알피니즘의 발원지인 유럽에서도 산에 오르게 된 최초의 동기는 지적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과학자와 문사들이 지질과 빙하연구를 목적으로 학술탐사형식의 등산을 병행한 것이 근대등산의 시초였던 것과 같다.
1930년대는 한반도에서 문사들에 의한 고산탐사등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당시 등산의 대중계도에 동아. 조선일보 등 언론사에서 등산운동의 대중보급과 저변확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육당 최남선, 민세 안재홍, 노산 이은상. 호암 문일평 . 교육자 황욱 등 쟁쟁한 문사들이 백두산. 묘향산. 설악산의 구석구석을 탐사하면서 역사, 지리. 문화 등을 소개하는 탐사산행 기를 지면을 통해 보도하면서 대중계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육당의 <백두산 관참기>. 민세의 <백두산 등척기>. 노산의<묘향산 유기>와<설악행각>이 그런 예다. 한국근대등산운동의 태두격인 고 김정태(1916-1988)는 이 시기를 ‘기록적인 탐사등산 시대’라고 정의하면서 문사들이 한국근대등산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당시 학생들의 학술탐사적인 등산형식은 이런 시대정신과의 만남이었다.
김정태가 펴낸 자전적인 등반기록<등산50년>에서는 1938년 세의전 산악부의 이덕호. 장재현. 방현(1945년 조선 산악회 발기인 대표19인 중 한사람) 등이 ‘조선의 알프스’라 부르는 함경북도 관모 연봉을 종주등반 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세의전의 하기(夏期) 관모연봉 종주등반 기록은 <등산 50년>에서 언급한 내용과 연전. 세전 산악단의 30년대 활동자료의 신문스크랩 기사와 일치한다.
관모연봉(冠帽連峰)은 지금은 갈수 없는 휴전선 이북의 산이지만 일제 때부터 개마고원 일대의 고산들은 ‘조선의 알프스’로 불렸던 한반도 제2의 높이를 자랑하는 거산들이다. 만년설이 없는 한반도에서는 백두산까지 연이어지는 동계등반대상지로 손꼽을 만한 등반 성을 지닌 곳이 관모연봉이다.
김정태의 회고록 <등산 50년>에서 관모봉(주봉2541m)등반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39년 3월 단독으로 적설기 관모산 등반에 나서 정상에 섰다. 이때 함께 동행하려했던 세의전 산악부의 방현(方炫)이 개인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해 단독 행을 결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모봉은 일제 때 제1급의 온천지로 이름 높은 주을온천을 발치에 두고 보로천. 어랑천. 등 2백 여리나 되는 계곡을 거느리며 한반도 제2의 높이를 자랑하는 거산으로 조선의 알프스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서남에서 동북으로 궤산봉(2277m). 남설령(2242m). 서관모. 영봉(2340m). 도정산(2201m) 등에 이르기까지 약 240km에 2300m 전후의 큰 봉우리 10여좌가 거창하게 우뚝 솟아 산세가 자못 웅장한데서 알프스라 이름 지은듯하다는 글을 남겼다. 관모연봉은 적설량. 강풍. 한랭한 기후조건 등으로 한반도에서 동계등반 대상지로서 등반성이 매우 뛰어난 곳으로 일본인들이 히말라야등반훈련 무대로 활용했던 곳으로 대부분의 초등은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한국인들로만 결성된 김정태 주도의 ‘백령 회(白嶺會)활동은 1937∼39년까지는 서울 주변의 인수봉, 선인 봉, 노적봉과 만장봉 등에서 일본인들과 경쟁적으로 초 등반 활동을 해왔으며, 그 후 등반무대를 한반도 북쪽의 금강산, 백두산으로 옮겨 본격적인 동계등반의 막을 연다. 이밖에도 일본학생 중심의 경성제국대학산악부와 경성중학 산악부가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인 중심의 등산 활동은 경신학교(1928년). 세브란스의전(1928년). 배재고보(1928년).양정중학(1937년). 보성전문학교(1938년. 양정중학 등산부출신의 김성근과 황태엽이 설립주도)산악부 등의 학생산악단체와 1934-35년경 금요회로 시작해 1937년 정식으로 설립한 백령회(1937년)등의 일반산악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동안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살펴볼 때 1928년에 시작된 세브란스의전. 배재고보. 경신학교 등산부가 가장 오래된 산악단체임이 분명하다. 이제라도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 한국산악운동의 뿌리를 조명해 주었으면 한다.
첫댓글 역사란_ 기록이 공개한 글이고 사진이고 그림입니다. 이와 같이 '참나산행'이란, 역사편찬입니다.
그러므로 '참나산행'에 글을 싣고 사진과 그림을 올리는 일이 역사를 편찬하는 과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참나산행'은 삶을 산같이 살며 사랑하다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민중역사서입니다.
주: '참나산행'은 名詞입니다. 일반적 명사이고 대명사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한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 물론 '참나산행' 속에는 山도 있고 山書도 있고 바다도 있고 海書도 있고 땅도 있고 地理書도 있고 사람도 있고 人文도 있고 하늘도 있고 天文도 있습니다.
귀한 자료이군요?
잘 감상합니다.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과거가 중요하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가 중요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시차적 순서만 다를 뿐 같은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