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조국 전쟁 제3기의 야간 작전 (上)
대조국 전쟁 제2기의 야간 공세 성공은 대조국 전쟁 제3기의 야간 공세들을 이끌었다. (어떤 주목할 만할 소련 자료는 제3기의 공세 중 40퍼센트가 야간에 실시되었다고 말한다.)
이 시기 소련군의 모든 병력들은 얇고 넓게 퍼져있는 독일군의 방어선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이름 높지만 점점 그 세가 약해지고 있던 독일의 기동 예비는 소련의 급격한 기갑 돌파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일련의 강력한 포위 기동전이 독일군이 야간 돌파에 전전긍긍한 위치로 몰아붙였다. 1941년에 소련군이 밤에 돌파를 계속 시도했던 때 부터 상황은 예정되어 있었다.
코르순-셉첸콥스키 작전과 같은 경우 소련군은 독일군 8개 사단을 내부 포위망에 가두고 7~8Km 지점에 외부 포위망을 형성했다. 두 포위망 사이로 소련군은 포화와 항공 전력을 집중시키며 포위망 내부를 조각내면서 포위망을 좁혀왔다. 포위 2주 후,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제한된 돌파구밖에 열지 못했다.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은 돌파 명령을 받았고 1944년 2월 16~17시 밤 사이에 돌파를 시도했다.
소련군이 산데롭카 마을을 포격함으로서 주목할 만할 야간 전투가 일어났다. 야간 폭격기들이 제4 기계화 군단과 함께 미우스 작전에 1943년에 참가 했어도 야간 폭격 지원은 규정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2월 16~17일 밤에 소련 폭격기들은 전선군 사령관 코네프 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야간 폭격을 감행했다. 코네프는 지체하지 않고 포위망 안의 독일군을 일소할 생각이었다. 느린 속도의 폭격기들이 산데롭카에 소이탄을 퍼부었고 목표물을 밝혔다. 산데롭카에 재앙이 계속 떨어지자 독일군은 산데롭카 남서쪽으로 포위망을 뚫으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근처의 리시얀카 마을로 방향을 돌렸다.
소련군은 봄의 해빙기에도 독일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다. 그때는 일반적으로 진흙길 때문에 공세 작전을 중지하는 때였다. 소련군은 베레즈네고나토예-스니기렙카 작전에서 우크라이나 최남단의 마지막 독일 점령지에 전력을 집중했다.
작전에서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1개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용해 1944년 3월 6일에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기병 부대와 기계화 부대를 합친 전선군 기동 집단 운용은 흔치 않았는데 이 조합이 기갑 운용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여겼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 조합은 계속되는 봄비와 진흙으로 덮인 길이 기병-기계화 집단을 운영하기 좋게 했다.
기병-기계화 집다은 2200시에 돌파구로 11Km를 진격했으며 다음 날의 공세를 촉진했다. 3주 후, 3월 27일에 전선군은 오데사 작전을 통해 독일군 주 방어선을 뚫기 위한 야간 공세를 개시했다. 이 경우 소련군이 야간에 공격한 이유는 돌격포가 충분하지 않았고 포병 밀집도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소련군은 4월 10일에 오데사를 탈환했다.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더 남쪽 케르치 반도에서 성공적인 진격을 하며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시기 소련군은 모든 지역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여전히 야간 공세를 선호했다. 안드레이 예레멘코 대장의 특별 흑해군(제51 독립 해안군)은 야간 공세를 개시했다. 4월 10~11일 밤, 수색 대대들이 최초 공격을 개시했고 선두 대대들을 따라 군단의 기동 부대가 진격했다. 다음 날 1100시, 이 예상 못한 야간 공세는 70Km를 진격했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지 3년째가 되던 1944년 6월 22일에 벨로루시에 주둔한 독일 중부 집단군을 상대로 거대한 공세가 쏟아졌다. 독일군은 소련군이 그 동안 성공을 거두었떤 남부에서 계속 공세를 할 것이라 예상했기에 4개 소련 전선군이 다양한 방향에서 다가와 비텝스크, 오르샤, 모길료프, 보브루이스크, 민스크를 포위당했을 때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 결과는 소련군의 재빠른 포위가 성공하는 것이었다. 비텝스크에서 소련군은 밤의 어둠을 틈타 비밀스럽게 재집결했다. 소련군은 공격을 지속하면서도 방어 진형을 구성했다. 막대한 숫적 우위를 가진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정찰를 방해했다. 500Km 정면에서 11개 야전군이 각각 증강된 진격 대대들을 운용해 정찰을 하고 공세를 시작해 벨로루시 전역을 시작했다.
비텝스크 지역에서 총공격 전의 아침에 정찰을 하는 것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걸 증명했다. 그러자 소련군은 야간 공격을 개시했고 각 대대마다 평균 5~6문의 포병 지원을 받았다. 쿠즈네초프는 이렇게 썼다.
"공격은 오전 4시에 시작되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아군과 적군이 직접 부딪쳤고
쌍방이 동시에 포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화기들은 직사로 놓여 이전에 정찰한 곳으로 직사 화력을 투사했고
남은 야포들은 박격포들과 야포들이 발견되는 대로 무력화시켰다.
공격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1개 대대가 적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지만
나머지 대대들은 적의 참호선 1~2개를 점령했으며 그날 새벽에는 전군의 진격로가 열렸다."
쐐기 기동을 사용하여 2개 소련 전선군은 비텝스크를 포위했다. 작전이 서쪽으로 진행되는 동안 제39군의 병력들은 6월 25~26일 밤에 몰래 침투해 비텝스크에서 드비나 강 서안으로 가는 유일한 다리를 점령했다. 제43군 병력들이 합류하여 소련군은 아침까지 독일군을 일소했다. 이 포위전에서 독일군 20,000명이 전사하고 10,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남쪽에서는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6월 27일에 보브루이스크를 완전히 포위했다. 500대의 지상공격기가 공격을 퍼부운 후 지상군이 몰려와 독일군의 탈출 시도를 절망적으로 변하게 했다. 다음날 포위망 안쪽의 탈출 시도는 실패하진 않았지만 소련군이 보브루이스크 동쪽의 베레지나 강을 건너 도시에 0400시에 진입할 기회를 주었다. 남쪽과 서쪽의 공세는 보브루이스크를 점령했고 독일군에게 조종을 울렸다.
벨로루시에서 절망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독일군은 제43군의 1개 소총병 사단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어떤 소련 전차 군단은 독일군의 대전차 방어를 뚫을 수 없었다. 제43군 사령관 아파나시 벨로보로도프 상장은 새 전선군 사령관 홉하네스 바그라먄 대장과 스타브카 대리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의 재가를 받아 밤에 대규모의 전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공격한다는 계획을 승인받았다. 공격의 결과로 독일 전차 80대가 파괴되었고 1,2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16문의 포를 노획했다.
벨로루시 전역의 결과로 독일 중부 집단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최소 25개 사단, 350,000명이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후속한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에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상대로 한 추이코프의 제8 근위군의 야간 작전이 있었다. 코벨 서쪽 30Km 지점에서 1944년 7월 8일, 제8 근위군 소속 제88 소총병 사단은 다른 사단들과 독일군의 방어를 최초로 돌파했다.
10분간의 준비 포격 이후 제88 소총병 사단은 4Km 이상 진격해 제2 제대 연대도 투입시켰다. 사단 본대는 공격을 계속했고 독일군의 반격으로 멈출 때 까지 계속 진격했다. 그날 밤 추이코프는 제88 소총병 사단에 제39 소총병 군단의 제2 제대 사단(제28 근위 소총병 사단에서 차출된 사단이었다.)과 합세해 버그 서안의 목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2000시에 합세하여 15분간의 준비 포격 이후, 공격 병력은 0530시까지 5Km 종심을 파고 들었다. 7월 20일, 제8 근위군은 루블린으로 후퇴하는 독일군을 추격했다.
- John Erickson, "Soviet Combined-Arms: Theory and Practice," photocopy of typescript (Edinburgh, Scotland: University of Edinburgh, September 1979), p. 51. 소련 저자들은 그들의 야간 작전 횟수를 수치화하려고 시도한 적은 없지만 전 독일 육군 참모본부 소속 장성이었던 미델도르프의 글에서 알 수 있다. 미델도르프는 이렇게 썼다. "소련군은 1943년 말 부터 그들의 풍부한 야간 작전 경험에서 정확한 결론을 얻었다. 소련군은 공세를 밤에 주로 실시했고 깊은 종심 침투 임무를 부여했다. 소련군은 작전 목표 달성을 위해 대규모 전차 부대를 운용했고 이는 자주 성공을 가져왔다." Z. Shutov, "Night Operations," Soviet Military Review, September 1981, p. 36와 Panov, "Great Patriotic War," p. 68.를 보라.
- N. Kobrin, "Encirclement Operations," Soviet Military Review, August 1981, p. 38. 독일군은 이 포위망을 체르카시 포위망이라 불렀는데 사실 체르카시는 포위망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 Werth, Russia at War, pp. 778-81. 소련 자료는 이 돌파 기도가 실패했다고 주장하며 포위망에서 55,00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18,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다. 독일 자료는 20,000명을 손실했지만 35,000명 이상이 무사히 탈출했다고 주장한다.
- Alexandrov, "Night Attack," p. 49.
- Shutov, "Night Operations," p. 36.
- 수색 부대(위력 수색 부대도 포함하는)는 적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고 독일군의 소련군의 공세 의도를 아는 데 혼란을 일으켰다. 독일군은 이 국면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준비 포격을 피하기 위해 방어 종심 깊숙히 후퇴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위력 수색도 자주 성공의 열쇠가 되었다.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서 소련군의 위력 수색은 독일군이 제1 방어선에서 후퇴하는 걸 찾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A. Popov, "Reconnaissance in Strength," Soviet Military Review, March 1979, pp. 39-41.를 보라.
- Kuznetsov, "Night Actions," p. 4.
- S. Shishkin, "The Vitebsk Operation," Military Review 25 (July 1945):96-97, translated from a Russian article in Krasnaya Zvezda [Red Star], 25 October 1944.
- P. Boldyrev, "The Bobruisk Operation," Military Review 24 (March 1945): 105-8, translated and digested from a Russian article in Krasnaya Zvezda [Red Star], 28 September 1944.
- 키예프에서 비슷한 공격이 있었다는 걸 알지 못했지만, 벨로보로도프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그의 혁신적이고 성공적인 전술을 지지해 준 상관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A. P. Beloborodov, "About Some Military Leaders" (Interview), Soviet Military Review, July 1981, pp. 49-51.
- Sukhinin, "Combat Action," p.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