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사에 감사하며 살라
(삼상 7:12-17)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15.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16.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17.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 삶 자체를 감사하라 >
예전에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은 단역 배우일 때 얼굴이 못생겨 늘 시체역할이나 잠깐 스쳐가는 행인 역할만 했다. 어느 날 환자의 사망을 확인하는 의사 역이 주어졌다. 난생처음 대사가 있는 역을 받고 그는 맹렬히 연습했다. 드디어 방송 날 자기 출연 차례가 되어 무대로 나가 청진기를 환자 가슴에 대고 눈꺼풀을 열어본 후 심각한 표정으로 “운명했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너무 긴장해서 환자의 눈꺼풀을 여는 대신 자기 눈을 까뒤집고 “운명했습니다.”라고 했다. 그 방송사고로 시청자들을 웃기면서 오히려 뜨게 되었다.
살다보면 잘못 때문에 더 잘되고 실패가 성공의 보약이 되기도 한다. 실패해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 실패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실패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보고 감사하면 실패와 절망은 성공과 희망으로 바뀐다. 결국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다. 일상에서 감사거리를 잘 찾으라. 평범한 것에서 감사거리를 발견하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성도가 누리는 어떤 것도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병들었다가 나으면 감사하지만 병들지 않는 것이 더 감사한 일이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보다 평범한 삶 자체가 기적임을 깨닫고 감사할 때 행복도 얻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도 받는다. 요새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다. 기적이 일어나야만 감사하지 말고 하나님이 은밀히 지켜주시는 손길을 생각하며 삶 자체를 감사하라. 최고의 영안은 미래를 보는 ‘미래안’이나 천리 앞을 보는 ‘천리안’이나 깊은 아름다움을 보는 ‘심미안’이 아니라 감사거리를 잘 찾아내는 ‘감사안’이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다. 마침 그날 폭설이 내렸다. 아빠가 막아도 아이가 아들은 가겠다고 떼를 써서 할 수 없이 아빠가 허락해 주었다. 결국 아이는 혼자 길을 나섰고 쌓인 눈을 헤치며 간신히 친구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친구 집에 들어서자 멀리서 한 남자가 조용히 사라졌다. 그 남자는 은밀히 뒤따르며 지켜보던 아이의 아빠였다.
그 아빠의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건을 당하게 하면서도 늘 뒤에서 지켜보고 계신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감사할 일이 있을 때나 감사절에만 감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라. 지금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무수한 사고 가능성에도 지금까지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 지금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외적인 성장도 힘쓰고 영향력의 성장은 더욱 힘쓰라.
< 뚜렷한 비전을 가지라 >
저의 교회가 소속된 얼라이언스 한국 총회의 모 교단인 미국 기독교선교연맹(C&MA,미국성결교)은 세계적인 선교 교단이다. C&MA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아 한국에서는 잘 모르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많은 나라에서는 한국의 장로교처럼 메인 교단이다. 그렇다면 교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드러내도 되는데 귀국 초기에 한국에서는 생소한 미국 교단 교회로 교회를 개척하면 교회 부흥이 힘들다는 말을 듣고 목회할 때 교단 색채를 감추고 정체성과 비전을 뚜렷하게 세우지 못했다.
리더에게 뚜렷한 비전이 없으면 팔로워를 감동적으로 이끌기가 쉽지 않다. 교회 비전을 제시할 때 “탁월한 선교 유산을 가진 건전한 C&MA 교회들을 많이 세우자.”라고 하면 비전이 잘 체감되지만 “이단 소리 듣지 않도록 힘쓰고 기존 교단의 곁붙을 쬐며 지내자.”라고 하면 비전이 잘 체감되지 않는다. 개척자에게 물적 자산과 인적 자산이 없다면 비전 자산이라도 뚜렷해야 하는데 뚜렷한 비전 제시도 없이 그저 좋은 말씀만 전해 주려고 했기에 교회에 좋은 코어그룹과 헌신적인 일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비전이 뚜렷하면 큰 문제가 있어도 교인이 잘 흔들리지 않는데 비전이 희미하면 작은 문제에도 교인이 쉽게 흔들린다. 평소에 말씀 교육을 잘 받아도 시험에 들면 그때까지의 배움과 은혜는 잊고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가 많다. 그 감정을 무엇이 극복하게 만드는가? 거룩한 비전이다. 그런 거룩한 비전의 중요성을 목회 초창기에는 잘 인식하지 못했다. 이단 교주도 “내가 재림주다. 내게 와야 구원받는 14만 4천 명 안에 속한다.”라고 거짓 비전이라도 분명하게 제시하니까 미혹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선구자나 개척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뚜렷한 비전이다. 인물이 되는 꿈을 가진 후대에게 꼭 말해 주고 싶은 것은 뚜렷한 비전을 가지라는 말이다. 뚜렷한 비전이 없으면 인적 자산과 물적 자산을 선점한 기존 체계와 기득권층 사이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 결국 저는 한국 C&MA의 개척자임을 자부하면서 교단 비전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않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했기에 개척 초기에 비전에 헌신된 사람을 얻지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 왜 저희 교회에 좋은 코어그룹이 생기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하니 하나님도 답답하셨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게으르게 살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축복의 때를 기다리며 열심히 살았기에 문서 선교 사역은 커졌다. <월간새벽기도> 사역은 잘 지속되고 있고 현재까지 성경 전권 강해설교도 80% 이상을 완성시켰다. <온라인새벽기도> 식구 중에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저의 비전을 위해 기도해주는 핵심 멤버도 꽤 있다. 그처럼 문서 선교 사역의 열매는 꽤 맺었지만 큰일을 하려면 교회 성장도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뚜렷한 비전 제시가 필요하다.
2009년에 미국 켄터키에서 열린 미국 C&MA 총회에서 비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 한인 목사들이 따로 모여 한인총회를 하면서 ‘2012년 한국총회’가 결정되었는데 그때부터 C&MA 비전을 보다 강하게 교인들에게 제시하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했다. 그 전까지는 주일에 처음 교회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교단 색채를 가급적 지우려고 했는데 그런 태도가 사실상 오산이었다. 물론 “나는 장로교단 교회만 찾는다.”라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는 교단보다 뚜렷한 비전을 찾는 사람이 더 많다.
C&MA가 복음주의적인 건전한 세계적인 교단인데 스스로를 너무 위축시킨 것이 문제였다. 개척자가 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좋은 개척자가 되기 힘들다. 그런데 2009년 이후 C&MA 비전을 뚜렷하게 제시하자 점차 그 비전에 공감하는 교인도 늘어났고 기도도 구체적이고 절실하게 되었다. 또한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성도들도 큰 거부감 없이 비전을 공유하는 것을 보면서 “왜 진작 C&MA 비전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왜 한국 성도들이 비교적 장로교회를 선호하는가? 한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에 속했다면 이단성도 없고 수준 낮은 목회자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교적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로교단도 200개가 넘는 교파가 있고 이단들도 장로교단 간판 뒤에 숨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요즘은 교인들도 잘 아는 편이다. 그래서 이단이 아니라면 교단과 상관없이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는 교회에 등록하는 성도가 의외로 많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아쉽다.
< 곁불 쬐는 삶을 버리라 >
인생을 지혜롭게 잘 살려면 뚜렷한 비전도 없이 곁불 쬐는 인생으로 살지 말라. 하나님이 어떤 곳에 보내셨으면 거기서 생명을 걸어야 작품 인생이 된다. 교회도 예수 믿고 인물을 만들어내는 작품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그렇게 되도록 힘쓰라. 살다 보면 시련도 있지만 그 시련도 하나님이 허락한 시련이다. 시련을 통해 비전과 사명의 중요성을 깨닫고 곁불 쬐는 인생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 된다.
나는 2009년에 비전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달으면서 이런 표어를 내세웠다. “예수 믿고 인물이 되라. 예수 믿고 인물을 만들라.” 그 표어에 응답하는 사람이 점차 늘면서 인물이 될 그릇들이 하나씩 계속 더해지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도 내가 이렇게 비전을 가지기를 기다리고 계셨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거룩한 비전만 준비되면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을 붙여주신다. 결국 개척자는 처음만 힘들지 나중에는 누구보다 복된 인생이 된다.
예전에 미국 C&MA 총재였던 게리 베네딕트 총재 일행이 우리 교회를 방문했다. 그때 그들과 교제하면서 거룩한 비전 성취를 위해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한국에서 C&MA의 모 교회 역할을 하고 인적인 자산과 물적인 자산을 통해 다른 교회들의 길라잡이와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큰 우산이 되어주려면 영향력이 더욱 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미국 C&MA에 속한 2천여 개 교회 중 대형 교회는 많지 않다. 세계 선교에 힘을 쏟아서 세계적으로는 잘 알려졌어도 미국 내에 힘 있는 대형 교회가 별로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마음속에 어떤 강렬한 소원이 생겨 기도했다. “하나님! 저희 교회와 저희 문서 선교 사역이 더욱 영향력 있는 교회와 사역이 되어 총회 소속 교회와 단체들에게 힘을 주고 조금 더 많이 선교하도록 역량을 키워주소서.”
요새 미국 C&MA의 재정 상황이 힘들어지면서 해외 선교사 가정들을 많이 소환하고 있다. 힘 있는 교회들이 조금 더 있었다면 그런 아픔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 소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런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 저희 선교 사역이 후퇴하지 않게 하시고 한국에서 선교의 바람을 바르게 잘 일으키게 하소서. 개척자의 길이 힘들어도 개척자와 그 동역자의 가정을 복되게 하셔서 개척자의 길이 엄청난 축복의 길임을 알게 하소서.”
예전에 지방에서 목회를 잘하는 한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큰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오실 생각은 없나요?” 그가 말했다. “교회를 새로 개척하기도 힘들고 기존 교회에 부임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제가 말했다. “목사님처럼 실력 있고 훌륭한 목회자에게 교단에 자리가 없나요? 요새 목사님 교단에 후임자를 찾는 큰 교회들이 많잖아요?” 그가 말했다. “그런 자리는 대개 저희 교단의 성골과 진골 목사님들이 부임해요.”
“성골과 진골 목사라니 무슨 말인가요?”라고 묻자 그가 말했다. “목사나 사모 중 한 명의 부친이 교단 목사이면 진골이고 목사와 사모의 양쪽 부친이 모두 교단 목사이면 성골입니다.” 즉 부모가 교단에 오랫동안 몸담고 공헌한 목사의 아들 목회자가 큰 교회에 부임하는 1순위라는 뜻이다. ‘선대의 헌신’이 ‘후대의 축복’을 예비한 셈이다. 그러나 뜻 있는 성골 2세 목회자 중에는 성골 의식을 버리고 개척의 길로 당당히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왜 그렇게 하는가? 개척의 길이 더 복된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개척자에게는 계승된 축복 이상의 축복이 많다. 개척자는 고생만 하다 죽는 자리가 아니다. 초창기에는 고생해도 후세에 좋은 기억을 오래 남기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 행복한 자리다. 축복의 바람은 대개 그런 행복한 개척자를 통해서 불어온다. 그런 바람을 감지하고 그런 바람에 함께 이끌려 사는 것이 큰 복이다. 지금까지 그런 인식이 부족했다면 앞으로는 어정쩡한 스탠스를 버리고 예수 믿고 인물 되는 비전을 가지고 지금 하는 일에 힘쓰라.
< 범사에 감사하며 살라 >
어디서든지 곁불 쬐는 인생으로 살지 말고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자기 색채를 지혜롭고 뚜렷하게 나타내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상황과 처지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물 되는 비결이다. 감사한 사실은 지혜가 부족해서 곁불 쬐는 인생처럼 뚜렷한 비전이 없이 살았어도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셨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본문에 있는 에벤에셀의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본문 12절을 보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당시 돌을 세울 때는 특별한 사건을 후대가 오래 기억하거나 기념하게 하려고 세웠다. 사무엘이 돌을 세운 후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뜻의 에벤에셀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후대가 감사하는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왜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한가? 감사가 또 다른 감사거리를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에벤에셀의 감사 후에 어떤 감사거리가 따랐는가? 첫째,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은혜가 따랐다. 사무엘이 에벤에셀의 감사를 하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한 후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했고 하나님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아주셨다(13절). 하나님이 내 인생을 앞으로도 온전히 지켜주기를 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둘째, 회복과 평화의 은혜가 따랐다. 그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어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다(14절). 잃었던 것을 되찾고 또한 되찾은 것을 평화롭게 오래 간직하기를 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셋째, 리더십이 탁월해지는 은혜가 따랐다.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았던 사무엘은 사사로서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릴 정도로 리더십이 굳건해졌고 사사였지만 왕처럼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다(15-16절). 또한 순회 후에도 자기 고향이자 집이 있던 라마로 돌아와 거기서도 왕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렸고 거기에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성막이 있던 실로 대신 라마에서 제사 의식을 행함으로 영적인 권위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다(17절). 탁월한 리더가 되길 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면 이제까지 지켜주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앞으로도 복을 예비해 주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나타나나셔 내 인생과 가정과 교회를 지켜주시고 복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낙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라. 그런 굳건한 믿음을 가지면 앞날은 늘 희망이 넘치게 될 것이다.
2008년 초 교회에 떼로 몰려와 등록한 사람들이 7개월 만에 떼로 몰려나갔다. 그때 교회가 큰 어려움에 처했지만 그 후 어려움을 잘 극복해내고 숫자적인 성장은 잃었어도 다른 측면에서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러자 비전을 위해 예비된 일꾼도 하나님이 하나씩 붙여주셨다. 그런 반전의 은혜를 입은 것은 2가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째, 어려움 중에도 감사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교회에 등록한 한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 오늘 설교를 듣고 그런 어려움을 겪었는지 몰랐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이 너무 편해 보이고 기쁨이 넘쳐보여서 어려움을 겪지 않은 분 같았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편하고 기쁜 얼굴을 하지 않았다면 교회에 등록하기가 꺼려졌을 겁니다.” 하나님도 똑같은 마음이실 것이다. 시련을 당했다고 울상만 하고 지내면 하나님도 좋은 사람을 내 곁에 보내주시지 않는다.
시련을 당해도 죽도록 감사하라. 그래야 하나님이 새로운 기회도 주신다. 정말 복된 삶을 원하면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까지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의 감사를 잘하라. 위대한 인물은 대개 감사에 탁월한 사람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부자이고 최고의 성도다. 최고의 기도는 감사가 넘치는 기도이고 최고의 영성은 감사하는 영성이고 최고의 예언은 내 입에서 나오는 감사의 말이다. 그처럼 에벤에셀의 고백과 감사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예비하라.
둘째, 어려움 중에도 선교 후원에 힘썼기 때문이다. 교회가 어려워도 선교사에게 어떤 것이 필요하면 그 필요에 힘써 반응했고 선교사에게 긴급하게 재정이 필요하면 교회가 어려워도 교회보다 선교사의 필요에 먼저 반응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교회가 선교사의 필요를 채워주기 힘들 때는 <온라인새벽기도> 독자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지금은 선교 후원 재정을 모두 교단으로 보낸다. 교단에서 잘 심사해서 후원하도록 관리하는 것이 좋은 것 같고 교회가 자체적으로 많이 선교한다는 공로의식도 줄이기 위해서다.
< 사랑을 베풀며 살라 >
성령충만이 무엇인가? 성령을 헬라어로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한다. 그 말은 ‘옆에서 돕는 보혜사’란 뜻이다. 성령님이 옆에서 도와주듯이 성령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사람을 돕게 된다. 누군가를 돕는 삶을 체질화시키고 선교 사역의 필요에도 힘써 반응하는 성령 충만을 추구하라. 화려한 은사와 기적은 없어도 선교하는 것이 성령 충만의 핵심 표식이다. 돈을 벌 때도 좋은 비전과 좋은 사역에 기여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돈을 벌라.
사람은 누구에게나 내면에 천사의 씨앗과 악마의 씨앗이 동시에 있다. 어느 씨를 뿌리며 살지는 전적으로 자기 선택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천사의 씨앗을 뿌리면 남을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내가 얻는 것이 많다. 무엇보다 내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면 불행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사탄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또한 그 형상을 본 사람에게도 감격과 감사가 생기면서 세상에서 빛의 역사도 확대된다.
오래 전에 교회 차량이 꼭 필요했지만 어려운 경제 여건으로 아무도 헌금하지 못할 때 어렵게 사는 한 성도가 찾아와 말했다. “목사님! 저의 차를 팔면 8백만 원 정도 받는데 그 돈을 계약금으로 걸고 교회 차를 사세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교회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성도가 거의 마지막 남은 재산을 바치겠다니까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을 듣고 재정 집사들과 그 제안을 받아야 할지 상의했다. 한 집사가 말했다. “목사님! 하나님이 그런 귀한 마음을 주셨으니까 기쁘게 받읍시다.” 그때 제가 말했다. “집사님! 교회에 아무리 차가 필요해도 그 헌금은 받지 못하겠습니다. 필요하면 하나님이 다른 손길을 통해 주실 테니까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그 제안을 거절합시다.”
기쁘게 드리는 것을 사양하는 것이 감동적인 역사를 막는 것 같아도 어렵게 사는 성도의 마지막 희망의 씨앗은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받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 성도에게 말했다. “성도님! 성도님의 사랑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그 헌금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이미 다 받았으니 절대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 대화가 오고갈 때 성도의 은혜 받은 감동을 막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성령님이 더욱 감동적으로 운행함을 느꼈다. 사람이 욕심을 초월해 좋은 일을 위해 내 것을 바친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어디에 가든지 ‘나’라는 말을 ‘우리’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며 살라. 욕심을 포기하고 선한 역사를 위해 나를 바치려는 삶이 진짜 복된 삶이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한다. “요즘처럼 바쁘고 힘들고 문제가 많은 때에 어떻게 남까지 신경 쓰며 사나?” 그러나 남을 위해 사랑을 베풀면 신기하게도 내 문제가 풀리는 축복이 따른다.
늘 어려운 사람을 힘써 돕고 선교에도 힘쓰라. 적어도 한 사람 이상 선교사를 지정해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삶도 꿈꿔보라. 가끔 선교사들로부터 기도와 후원 요청 편지를 받는다. 또한 저희들의 자체적인 문서 선교를 위해 필요한 것들도 있다. 그런 필요에 반응하며 살려고 할 때 사랑과 믿음은 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이다. 늘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며 나눔과 사랑을 통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예비하라. - 주일설교(20.10.18) -
ⓒ 이한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