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왕조 12대왕 투탕카멘과 그의 아내 안케세나멘, 황금옥좌의 부조

영원한 소년왕 투탕카멘의 미라

18왕조 최후의 왕 호렘헤브의 무덤 벽화

18왕조 최후의 왕 호렘헤브의 무덤 벽화
고대 이집트 8 영원한 소년왕 투탕카멘(18왕조 12대왕)에서 18왕조 최후의 왕 호렘헤브까지
유물을 앞에 놓고 도대체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중략> 그 다음 직감이든 뭐든 좋으니 이거다 싶은 게 있으면 그에 따라 이론을 세워간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거기서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 주면 되는 것이다........<중략> 조각을 하나하나 흙에서 찾아내는 데서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중략> 척척 들어맞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체의 구도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수정을 거듭하면서 고고학은 진보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와세다 대학 인문학부 교수 & 일본 고고학자 요시무라 사쿠지-
모래 하나마다 돌 한 개마다 항아리 한 조각마다 고대사는 다시 쓰여진다.
-자히 하와스, 전 이집트 고고학청장-
고고학은 확실한 학문이 아니다.
-고고학자 찰스 벤 시클링-
학창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지구과학2였다. 남들은 암기할게 많다고 투덜대는 지질분야와 고생물분야가 나는 어찌나 재밌던지!! 프로콤프소그나투스, 오비랍토르, 딜로포사우루스.......그래그래, 그럴 만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지나면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을 공룡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나에겐 여전히 근사한 과거의 생명체로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담당 선생님이 너무나 샤프한 과학 선생님이셔서 나의 지구과학2 사랑은 배가되었다. 나는 매 시간 질문을 퍼붓는, 한마디로 매우 성가신 학생이었는데 선생님은 항상 친절히 끈기 있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명쾌한 설명 후 항상 이렇게 끝맺으셨다.
“.......알겠지? 이것이 현재까지 정설이기는 하지만 정설이 꼭 사실이란 법은 없지. 항상 모든 것을 의심하도록.”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그때의 후렴구 같은 그 말씀을 결코 잊지 못한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리즈도 어느덧 8회째로 접어들고 있다. 연재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고대 이집트를 동경하고 사랑하게 된다. 동시에 이제 막 그 맛!!그 맛을 알아가는 입문자에 불과한지라 이집트 역사의 일부조차도 온전히 소개하지 못하는듯하여 독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하긴 애초 내 욕심이 과했다. 헤로도토스 이래 지금껏 수많은 석학들이 사라진 문명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얼마나 노력해왔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상당부분이 여전히 미궁(라비린토스) 그 자체여서 그들 역시 확신하지 못한다. 하물며 고고학자도 아니고 나 같은 애송이야........
따라서 오늘의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독자들에게 부탁하려한다. 여태껏 올린 연재가 100% 사실은 아닐 수도 있으니 곧이곧대로 믿진 말라고.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생전 흔적만 남겼을 뿐이며 학자들은 추론을 할 뿐이다. 그래서 얻어진 학설은 그럴싸하나 어디까지나 사실은 아니기 때문에 소수설이든 다수설이든 얼마든지 뒤집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일례로 고왕국 제 4왕조 2대왕 쿠푸의 피라미드가 노예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가설도 1990년 어느 날, 피라미드 근처 당대 일꾼들의 지하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증명이 되었다.
요컨대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할 투탕카멘이야-물론 요전에 한차례 소개했지만- 1922년 11월 하워드 카터가 발견할 때까지 그 옛날 그 자리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었으므로 투탕카멘 그 미라가 맞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매부리코의 그 미라가 그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20왕조 최후의 왕 람세스 11세(람세스 2세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이후 제 3 중간기(중간기는 상하 이집트가 분열되거나 외세의 지배를 받는 혼돈 시기를 뜻함. 이집트는 총 3차례의 중간기를 맞이하는데 고왕국 시대와 중왕국 시대 사이가 제 1 중간기, 중왕국 시대와 신왕국 시대 사이가 제 2 중간기, 신왕국 시대 이후 그리고 말기왕조 전이 제 3 중간기이다.) 무렵 왕묘가 도굴당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신관들은 미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동시켰는데, 이때 미라 따로 관 따로 분리해서 옮겼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미라와 관이 뒤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라에 정통한 신관들은 누가 투트모시스 3세고 누가 람세스 2세고 알 수 있었겠지만 잡일하는 인부들이야 미라 자체에 표시가 되지 않은 이상 누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오늘날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에 누워있는 람세스 2세의 미라가 실은 람세스 2세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정말 람세스 2세의 미라가 맞을 수도 있고........ 역시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래서 고고학은 불확실한 학문이다.
자, 그러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첫 번째 주인공은 파라오 투탕카멘인데 일전에 어느 정도 소개했으므로 오늘은 간략히 보충하는 정도로 설명하겠다. 더불어 투탕카멘 하면 항상 같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인물,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의 애틋한 연애사도 공개하겠다. 그리고 19왕조로 넘어가기 전 최후의 파라오, 아이와 호렘헤브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사실 투탕카멘은 오늘날 그 유명세에 비해 생전에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긴 왕은 아니었다. 10세에 보위(寶位)에 올라 19살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 왕의 후견인인 재상 아이(아멘호테프 3세의 제 1정비 티예의 오빠로 아케나텐 시절엔 총리대신을 지냈고 투탕카멘 치세 최고의 실세가 되었다.)와 군의 우두머리 호렘헤브 장군 그리고 선왕 아케나텐 사후 예전보다 더욱 막강해진 아문 사제들의 눈치를 보느라, 또 선왕 대(代)의 이단사상을 혁파하고 원래대로 되돌리느라 친정(親政)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모든 정무가 재상 아이와 군권을 장악한 호렘헤브의 뜻대로 돌아갔다. 아문라 신관들의 세력도 점점 강해져서 이집트는 과거로 돌아갔다. 아문라교가 다시금 이집트 제 1의 국교가 되었고 아케트 아텐이 버려지고 테베가 옛 영광을 되찾았으며 보수화 회귀의 일환으로 투탕카텐이 투탕카멘으로 안케세파텐이 안케세나멘으로 개명했다.
이렇게 미약한 파라오여서 그랬을까? 투탕카멘의 장례가 치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이후 람세스 6세(제 20왕조) 때는 그의 무덤 위에 인부들의 숙소가 들어서면서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은 완전히 잊혀진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BC 3세기 헬리오폴리스의 신관이었던 마네토의 <이집트사>의 왕명표에도 세티 1세의 아비도스의 왕명표에도 어느 왕명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무명의 투탕카멘을 찾아내 유명인으로 만든 이가 바로 하워드 카터였다. 왕들의 계곡에 도굴당한 대다수의 왕묘와는 다르게 그의 무덤에선 수천 점의 진귀한 부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 세계의 언론과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고 소년왕의 황금 마스크가 공개되었을 때 전 세계는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투탕카멘, 그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이때부터 람세스 2세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는 파라오가 되었다.
투탕카멘의 아내는 이복누이 안케세나멘이었다. 그녀는 선왕 아케나텐의 셋째 딸이자 계비였다. 아케나텐이 죽은 후 과부가 된 아케세나멘은 어머니 네페르티티의 주선으로 투탕카멘과 결혼하게 된다. 부부관계가 좋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르나 예술작품 <황금옥좌>의 부조에서 아내 안케세나멘이 의자에 걸터앉은 투탕카멘에게 오일을 발라주는 모습을 보면 서로 사랑했던 것 같고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인간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는, 관 주변에 놓여 있는 작은 수레국화 꽃다발이었다. 우리의 꽃다발을, 남편을 잃은 어린 왕비가 두 개의 왕국을 대표했던 젊은 남편에게 바친 최후의 선물로 생각하고 싶다. 여기저기 황금빛 찬란한 제왕의 호화로움과 화려함 속에서, 아직도 아련히 색을 간직한 작은 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것은 3300년이라는 긴 세월조차 극히 짧은 시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불과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이 하나의 자연이 고대와 우리 현대 문명을 가깝게 만들었다.”
-1925년 2월 3일, 투탕카멘 발굴기, 하워드 카터-
이제는 하워드 카터의 연애사를 들려주겠다. 평생을 이집트 고고학에 바친 이 고고학자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다름 아닌 카터의 후원자 카나번경의 딸 애블린이었다. 발굴현장에서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다녔고 때때로 서로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이러한 행위는 세간의 관심과 의혹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암암리에 사귄다는 소문은 곧 즉시 그녀의 부모님의 귀에 들어갔고 그녀의 어머니는 완강히 반대했다. 평민인 카터는 귀족의 영애와 맺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카터와 애블린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고 둘 다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던데 참 짠하다.
투탕카멘에 대한 생애와 발굴비사 그리고 파라오의 저주는 고대 이집트 2편에서 심도 있게 다뤘으니 이제는 투탕카멘 이후의 왕 아이와 호렘헤브로 넘어가겠다. 사실 이들의 통치기간은 매우 짧고 뚜렷한 업적이랄 것도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금세 끝날 거 같다.
투탕카멘과 왕비 안케세나멘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투탕카멘 사후 재상 아이가 파라오가 된다. 아멘호테프 3세 이어 아케나텐 그리고 투탕카멘, 이렇게 3대째 최고 실세였으면 만족할 만도 할 텐데, 그의 권력욕은 고령이 되어서도 결코 식을 줄 몰랐고, 그래서 투탕카멘이 죽자마자 왕위계승권을 가진 제 1 왕녀이자 자신의 외손녀였던 안케세나멘과 결혼하여 파라오가 된다. 그의 재위기간은 4년이었다.
아이 다음으로 호렘헤브가 왕위를 잇는데, 그가 어떻게 파라오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군사권을 틀어쥔 호렘헤브가 쿠데타로 왕이 되었을 거라고 주장한다. 여하튼 파라오가 된 호렘헤브는 이단 아텐신앙을 박멸한다는 명분하에 아케나텐에서부터 아이까지 왕명표에서 삭제한다.
그도 고령이 다 되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통치기는 상당히 짧다. 호렘헤브를 끝으로 신왕국 최고의 황금시대 제 18왕조가 막을 내리고, 그의 부하장군의 아들이던 피람세스가 (후에 람세스 1세로 개명) 신왕국 제 19왕조 초대 파라오가 된다.
다음시간부터는 신왕국 제 19왕조 람세스 1세, 세티 1세, 람세스 2세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첫댓글 네페르티티가
그녀의 아름다움으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고,
남장을 했던 여성파라오였다는데
설도 있던데~^^ㅎ
그리고,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미라 유적발굴후
그간 지원을 아끼지않던
카나번경이 죽게되고
그의 딸 애블린이 현장에서
먼저 볼수있게 했다고하죠?
네 여러 야사나 설이 있는걸로 알아요 먼저 네페르티티는 공공연히 수렴청정을 했을겁니다. 마치 조선조 정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순조 대신 정사를 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처럼요. 남편 아케나텐 사후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궁소생의 투탕카멘 대신하여 국사를 봤을거라 학자들은 추측하죠
그리고 하워드 카터와 애블린과의 연애는 알려진 사실인데 그들이 어떻게 사귀었는지 알 방법은 없죠 전 다큐로 알았고 이후 이런 저런 책 찾은 후 그들의 연애를 확인하고 이번 글에 옮겨본거지요^^
수욜 중박에서
이집트강의 김문환교수꺼
재밌었는데,그날 안왔었나요?
애블린도 아버지처럼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서 늘 아버지와
발굴현장을 동행했었다고 하네요~^^
아...수욜에 집에 일이 있어서 ...
네 카나번도 그의 딸 애블린도 고고학에 관심 많으니 그간 하워드 카터를 후원했겠지요. 카나번이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했고 영국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살 정도로 대담한 남자였다합니다.
그러다 교통사고나서 이집트 아스완으로 요양갔고 필레신전에서 발굴하는 모습보고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제 2 이집트 유물국장 가스통 마스페로의 주선으로 카터를 만나 발굴하게 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