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8.오후8:30 月. 어둠
경허 스님도 잘 모르시는 미끄러운 비밀.
일요일 아침, 충청남도 서산지방에 27cm가량의 적설량이 보였다는 뉴스를 듣고 사실 걱정이 되기는 좀 되었던 터라 서해안고속도로로 차를 몰아 달려가면서도 내심 신경이 쓰였다. 물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고속도로는 말짱했고, 차분했고, 한가했으나 하늘색은 한 해의 12월을 가리키고 있었고,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면서 도로 너머의 들판에는 눈이 점점 많이 쌓여있었다. 지난 주 일요일 아침에는 비가 내렸고, 지지난 주 일요일 아침에는 쾌청한 날씨였다. 늦가을인 11월말에서 초겨울인 12월초로 접어드는 날씨의 변화가 지난 3주간 일요일 아침 날씨의 표정으로 절기의 이동을 알려주고 있는 듯했다.
영동고속도로 인천방향으로 달려가다 둔대JC를 돌아 나와 서해안고속도로에 들어서면 경부고속도로나 영동고속도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갯내 풍기는 서해안고속도로의 고적孤寂함이 마치 빠른 배를 타고 살같이 바다 위를 달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리고 서해안고속도로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휴게소가 화성휴게소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일요일 아침 서산을 향해 갈 때면 대개 화성휴게소에 잠깐 들려서 쉬었다 갔다. 집에서 서산 고북면까지 두 시간의 행로行路 중 딱 가운데 걸려있는 화성휴게소에서 얼마만큼 지체하느냐에 따라 이동시간이 두 시간 십 분이 걸리기도 하고, 혹은 두 시간 이십 분이 소비되기도 했다. 거기에다 화성휴게소의 소문나지 않은 자랑거리가 또 한 가지가 있었다. 이곳 주유소에서 자동차 기름을 채우면 내가 알고 있는 수도권 주변의 휘발유가격보다 언제나 다소간 저렴했기 때문에 내 배까지 불러오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잠시 빠질 수 있었다. L당 10원이 저렴하다면 50L를 넣어도 불과 500원을 아끼는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약간의 저렴함이 유쾌한 하루의 아침을 열어주는 것 같은 느낌을 팡팡 전해주었다. 본래 휘발유라는 것이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전량全量 수입을 해오는 귀한 해외자원이라서 그러한가?
차를 몰아 서산 부근쯤을 달리고 있는데, 오늘 아침 절에 오는 누군가가 절에서 사용할 뽁뽁이와 쫄대를 구해왔으면 한다는 글이 스마트폰에 올라왔다고 아내가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해미IC로 진입한 뒤에 일단 해미 읍내로 들어가서 건자재상이나 철물점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서해안고속도로와는 달리 해미 읍내 도로에는 눈이 쌓여있었고, 뒤쪽 이면도로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아마 도로사정이 고북면 일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이때가 아침 8시20분경이었으니 가게 문을 열기에는 조금 이르다면 이른 시간이었다. 두어 개의 건자재상점을 지나쳤으나 굳게 닫혀있는 상점들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1970년대 초반이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고문古文과 한문漢文과목을 담당하고 있었던 우리 담임선생님은 선생님 댁으로 우리들을 자주 초대를 해서 한 반 친구들과 함께 방문을 했던 적이 몇 차례 있었다. 선생님 댁 넓은 마당 한 켠에 있는 깊은 화단에는 과꽃과 패랭이꽃이 많이 피어있었는데, 패랭이꽃과 석죽화石竹花가 같은 꽃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평소 화초를 사랑하시는 선생님께 댁에 갈 적마다 많은 꽃 이야기를 들었지만 대부분은 잊어버리고 아직 기억에 생생한 것은 과꽃과 패랭이꽃뿐이다. 그리고 그 무렵 일본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7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 상점들은 아침6시가 되기 전에 가게 문을 여는데 비해 일본상점들은 아침 9시가 훨씬 넘어서야 문을 열더라는 말을 해주셨다. “사회가 발전하고 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면 개인의 여가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지. 저개발국가의 돈만 버는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휴식과 여가라는 개념이 하루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법이거든. 아마 우리나라도 10년쯤 지나면 도시의 상점들이 아침에는 차츰 늦게 문을 열고, 밤에는 조금씩 빨리 문을 닫게 될 거야. 환하게 불을 켠 채 자정까지 가게 문을 열어놓고 아침6시가 되기도 전에 문을 여는 그런 삶은 누구라도 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선생님의 말씀대로 10여년이 흘러가자 우리 주변의 가게들도 아침에 늦게 문을 열기 시작을 했다. 그러니 아침8시20분은 우리나라 어디라도 가게 문을 열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눈에 덮여있는 해미 읍내를 슬슬 돌아다니는 일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눈 속에 다소곳이 잠겨있는 해미 읍성도 평소와는 다르게 조신한 표정이었다. 마트도 들려보고, 철물점도 들려보고, 시장의 지물포에도 들려보았으나 그 흔한 뽁뽁이가 오늘 아침에는 파업이라도 하는 중인지 구경을 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다 마트에서 알려준 뒤쪽 사거리길 한 모퉁이에 있는 건자재상점에서 두루마리 뭉치로 되어있는 뽁뽁이를 발견하고 겨우 구입을 할 수가 있었다. 이제 차머리를 고북면으로 돌려 네 개의 바퀴를 힘차게 굴려 달려갔다. 제1주차장에 자동차를 대고 나서 화장실을 들어가는데, 며칠 동안 눈이 온 만큼 쌓여있는 두께가 내 발목을 넘어서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천장암 홈 페이지에 올라온 사진을 통해서 보면 스님들께서 울력을 하여 산기슭 길의 눈을 깨끗하게 쓸었다고는 하지만 길바닥에 얼어붙어있는 얼음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짐이 있어서 차를 제1주차장에 주차를 시켜놓고 천장암까지 걸어 올라가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냥 올라가보는 수밖에.
천장사라는 밤색 이정표를 보면서 산길을 향해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아주었다. 아직 경사가 심하지 않은 지점이지만 법련화 보살님 댁을 힘차게 지나치고 구부러진 커브를 돌아나가 경사진 비탈길을 곧잘 올라서 달려갔다. 눈에 미끄러진 뒷바퀴가 살짝 헛돌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씩씩하게 언덕을 올라채서 저 끝에서 한 번 커브를 돈 뒤에 줄기차게 마저 올라간다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야흐로 힘을 내서 가속페달을 바닥에 닿도록 밟아가며 힘을 쓰고 있는데, 아뿔사! 위쪽에서 차 한 대가 슬슬 내려오고 있었다. 눈 쌓인 좁은 산길에서 차 두 대가 비켜가려면 일단 정지를 한 뒤에 차를 조심스레 길 가장자리에 붙이는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려오던 차를 보내고 나서 아무리 가속페달을 밟아보아도 바퀴가 제자리에서 헛돌 뿐 차가 앞으로 진행하지를 못했다. 더욱이 지금 차가 서있는 장소는 나무 그늘에 햇빛이 가려 음지가 되어있어서 길바닥에 얼음과 눈이 많이 남아 있는 지점이었다. 결국에는 햇살이 비쳐들어 눈이 녹아있는 곳까지 뒤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부터 박차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을 듯해서 그렇게 서너 차례 시도를 해보았으나 저 끝의 작은 언덕을 차오르지 못하고 도중에서 멈춰 선 채 헛바퀴를 돌려대고 말았다. 어찌하는 수없이 차를 길섶의 움푹 들어간 곳에 주차를 시키고 나서 짐과 배낭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얼음이 깔려있는 비탈길을 걸어 오르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최첨단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를 사용하고도 얼음이 얼어있는 비탈길을 올라가지 못한 데는 경허 스님께서도 잘 모르시는 미끄러운 비밀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마찰력摩擦力은 정지停止 마찰력과 운동運動 마찰력으로 나뉜다. 정지 마찰력은 바닥면과 물체 사이에 미끄러짐이 없을 때 외력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마찰력을 말하며, 운동 마찰력은 물체가 바닥면에서 미끄러질 때 미끄러지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마찰력을 말한다. 한편 공이나 바퀴같이 구르는 물체의 운동은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구르지 않고 미끄러지기만 하는 운동, 미끄러지지 않고 구르기만 하는 운동, 미끄러지면서 구르는 운동이 있다. 그리고 구동바퀴와 구동하지 않는 바퀴는 마찰력이 서로 달라진다. 후륜구동의 경우 뒷바퀴는 진행방향으로 마찰력이 작용하고, 앞바퀴는 단지 정지 마찰력에 의하여 회전함으로써 굴러가는 역할만 하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마찰력이 작용을 한다. 정리하면 구동바퀴는 회전함으로써 마찰력이 발생하므로 정지 마찰력이 회전방향과 반대로 형성되고, 비구동바퀴는 마찰력에 의하여 회전하기 때문에 회전방향과 마찰력의 방향이 동일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경허 스님께서도 잘 모르시는 미끄러운 비밀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눈이 얼어붙은 비탈길로 차를 몰아 잘 올라갈 수 있느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동안거 결제와 백일기도 불공입재에 참석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산비탈길과 돌계단을 오른 덕분에 법당에서 들려오는 반야심경 치는 소리에 가일층 힘을 내어 불공佛供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릴 수 있게 되었다. 가만 생각하면 27cm의 적설량을 보였다는 한겨울의 연암산 천장암에서 등과 이마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불공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연암산 산신령님과 천장암 부처님의 가피와 배려가 아니었다면 어찌 상상이나 해볼 수 있는 일이었을까!
(- 경허 스님도 잘 모르시는 미끄러운 비밀. -)
첫댓글 _()_
같이 있었던듯 저도 진땀이 나네요~~
고생하셨습니다. _()_
먼훗날 그날 그때를 생각하시면 천장사가 더욱정겨워질겁니다,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