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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글 발달 어떻게 볼 것인가?
‘훈민정음’ 또는 ‘언문’으로 불리던 지금의 ‘한글’이란 이름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우리말과 글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일제 강점기에 널리 퍼졌다. 이보다 앞서 한글을 주류 문자로 선언한 고종의 국문 칙령은 한글 반포 449년 만인 1895년에 발표
이러한 역설 이면에는 조선 시대 사대부나 지식인들의 한글에 대한 이중 의식이 깔려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거의 한문만으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이나 100% 한문으로 저술된 박지원의 문학이나 500권이 넘는 정약용의 저술을 보면 ‘이렇게까지 한글을 배척해 왔나?’라는 부정적 인식이 들기도 하고, 선조가 1593년에 발표한 국문 교서나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는 사대부가의 한글 편지를 보면 ‘어? 이렇게까지 한글이 폭넓게 사용됐나?’라는 인식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여기서는 한글 발달사를 다루는 것이므로 한글 발달의 근본 원인과 단계별 발달의 주요 측면 등 긍정적인 면을 다루기로 한다.
1) 1894년고종 31 11월 21일 칙령 1호 14조로 제정되었으나, 정식으로는 1895년고종 32 5월 8일 칙령 86호 9조로 반포되었다. 2. 조선 시대 한글 발전의 근본 요인은 무엇인가?
세종은 1446년 음력 9월 초순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여 새 문자의 탄생 동기와 원리 등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반포 과정에서 최만리 외 6인의 반대 상소가 있었으나 정작 반포 후에는 단 한 건의 반대 상소도 없었다. 세종의 새 문자 홍보 정책이 성공한 셈이다. 사대부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요인에 훈민정음 발전의 비밀이 들어 있고 이는 반포 직후에 세종이 직접 펴낸 책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대부 처지에서 보면 가장 충격적인 한글 표기 문헌은 신숙주가 대표 저술한 <동국정운>1448과 <홍무정운역훈>1455이었다. 한자음을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는 한자를 주요 소통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 중국이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최대의 관건이었고 수수께끼였다. 천하를 통일한 중국의 황제들이 운서 편찬을 핵심 정책으로 삼은 것은 발음을 통일하여 중앙 통치 체제의 통일 언어 정책을 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글자이자 단어 글자인 한자로는 발음을 제대로 적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낸 방법이 이른바 ‘반절법’이다. 반절법이란 한자의 음을 나타낼 때 다른 두 한자의 음을 반씩 따서 합치는 방법인데, 이를테면 ‘德덕’의 첫소리 ‘ㄷ’과 ‘紅홍’의 ‘
다음은 <용비어천가>1445와 <석보상절>1447, <월인천강지곡>1449과 같은 다양한 표기 양식으로 쓰인 한글 문헌이다. <용비어천가>는 국한문 혼용체로 쓰였고 왕조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후대 왕들의 민본주의 통치 수칙까지 담았다. 수양대군세조이 쓴 <석보상절>은 한자를 크게, 한글은 작게 병기하였고,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은 그 반대로 한글은 크게 한자는 작게 병기하여 불교에 친숙한 백성을 배려한 내용을 담았다. 문자 창제자로서 다양한 실험과 적용을 한 것이다. 1449년에는 최고위층인 하연 대감을 비판하는 한글 벽서가 등장했다. 이 벽서를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한문 상소를 올릴 수 없는 힘없는 피지배층이거나 하급 관리였음에 틀림없다. 그 밖에 한글은 반포 초기에 이미 왕실 여성의 공적 편지, 사사로운 연애편지 등에 쓰였음이 실록에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사용 양상을 보면 한글은 그야말로 다목적용으로 창제되었고, 그런 다목적성에 부응하여 다기능성을 지닌 매우 실용적인 문자로 군림하였고 바로 그것이 한글 발달의 핵심 바탕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글은 다양한 상황이나 목적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다기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실용성과 기능성이 있었기에 사대부들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설령 세종의 의도대로 하층민의 소통 도구나 표현 도구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런 기능으로서의 한글 사용은 낮게 평가하면 그만이지 반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 시대 사대부나 지식인들은 한글을 한자를 대체할 문자가 아닌 비주류 분야의 보완 문자 또는 상보적 문자로 묶어 둠으로써 한글이 나름대로 발달할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것이 한글이 더디게 발전한 요인이기도 하고 한글이 한자, 한문의 절대적 권력 앞에서 지속적으로 발달된 요인이기도 하다. 3. 한글 발달의 다양한 핵심 요인은 무엇인가?
조선 시대의 한글 사용 양상이 다양하고 복잡한 만큼 발달 요인도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공공언어에 한글을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한문 책을 한글 책으로 번역하는 언해 사업은 국가 시책으로 그 어떤 왕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연산군조차 한글 책을 불사르라고 하면서 언해된 책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2) 傳曰: “諺文行用者, 以棄毁制書律, 知而不告者, 以制書有違論斷。朝士家所藏諺文口訣書冊皆焚之, 如飜譯漢語諺文之類勿禁.”<조선왕조실록> 1504년 7월 22일 자.
둘째는 한문으로 대체할 수 없는 한글 문학의 힘이다. 18세기의 대문호 박지원은 한글 문학을 철저히 거부하였지만 이때 이미 한글 문학의 힘은 걷잡을 수 없는 대세였다. 박지원보다 100년 앞서 태어난 김만중은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남겼으며, 이보다 앞서 이황은 한글 시조를 남겼고, 정철은 <사미인곡>과 같은 한글 가사로 이름을 날렸다. 이러한 사대부들의 한글 문학은 하층민의 한글 사용을 부채질하였고 한글 문학은 남녀와 계층을 넘나드는 표현과 소통의 매개체가 되었다. 이런 한글 사용 양상을 집약해 준 책이 <청구영언>이다. 이 책은 1728년영조 4에 김천택이 고려 말기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시조 998수와 가사 17편을 모아 엮은 책인데 양반 사대부 작품부터 하층민의 작품까지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허균의 <홍길동전>과 같은 한글 소설은 한글 소설을 통째로 외워 번화가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돈을 받는 ‘전기수’까지 등장하게 할 정도로 한글이 하층민까지 널리 퍼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한글 문학 가운데에서도 백미는 한글 편지다. 언간은 문학성과 정보 소통이라는 실용성을 함께 갖추고 있어 한글 사용 확대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양반 사대부들도 부인이나 딸과 소통할 때는 한글로 많이 썼다. 지금도 계속 발굴되고 있는 사대부가의 한글 편지는 한문 편지 못지않게 많이 쓰였음을 보여 준다. 최근 공개된 ‘서증양자흥시처최씨書贈養子興時妻崔氏’라는 글은 1609년 송영구 선생에 의해 목판으로 제작 인쇄까지 된, 며느리에게 보내는 한글 편지 형식의 글이다.
셋째는 실용 분야의 힘이다. 김봉좌2010, 홍윤표2013 등에 따르면, 한글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쓰였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 왕실의 유교 의례인 ‘오례五禮’ 가운데 길례吉禮, 흉례凶禮, 가례嘉禮에 많이 쓰였고, 왕실과 사가에서 유교 의례를 거행하기 위한 여러 절차들인 발기件記, 단자單子, 도식圖式, 치부置簿, 의주儀註, 홀기笏記, 책문冊文, 제문祭文, 악장樂章, 일기日記, 등록謄錄, 의궤儀軌, 예서禮書 등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이상규2011에서도 여산 군수에게 올린 진정서를 비롯하여 논을 담보로 돈을 빌린 수표와 같은 각종 계약서 등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한 주요한 문서에 한글이 많이 쓰였음을 밝혔다.
또한 여성 실학자라 할 수 있는 안동 장씨가 펴낸 <음식디미방>, 빙허각 이씨가 펴낸 <규합총서> 등은 실용서의 모범을 보여 주어 남성 실학자들이 못 다한 지식의 소통까지 일궈 냈다. 이 밖에도 서울시 노원구의 한글 영비각, 경기도 포천의 한글 영비, 문경새재의 ‘산불됴심’ 비석 등의 특별한 곳에서도 한글은 매우 요긴한 구실을 하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1890년고종 27에 최초의 한글 전용 교과서인 〈사민필지〉헐버트가 나온다. 넷째는 종교의 힘이다. 세종과 세조는 한글 보급을 위한 본격적인 한글 책자로 불경 언해를 택했고 실제로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러한 불교 문헌은 한글 사용의 주요 흐름이 되었다. 선조 때는 유교 경전인 사서가 언해되었다. 기독교는 조선 후기에 들어왔지만 다른 종교보다 더 적극적으로 한글 번역을 활용함으로써 한글이 널리 퍼지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동학 또한 한글 경전을 간행하는 등 종교 확산에 한글은 주요 도구로 활용되었다. 4. 한글의 미래
결국 한글 발전의 양상과 요인은 한글 반포 목적이 그러했듯이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 한글이 어떤 구실을 했고 어떤 힘을 발휘해 왔느냐가 한글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될 것이다.
한글의 미래는 한글의 역사에 담겨 있고 연속적인 변혁의 힘에 달려 있다. 지난 10월 8일 ‘불교와 한글’이라는 학술 대회에서는 석보상절 글꼴을 현대화한 석보체가 집중 조명되었다. 이를 주도한 안상수 소장은 “우리 전통 한글꼴을 현대화하는 것은 과거 선조들의 귀중한 유물을 갈고닦는 것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우리 유산을 다시금 불러일으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로써 의미가 깊다.”라고 평가하였다. 미래의 한글 발달의 답은 이미 한글의 역사성에 담겨 있으므로, 한글에 담겨 있는 역사적 혼을 어떻게 살려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글은 우리말과 문화라는 특수성을 배경으로 그것을 잘 드러냄과 동시에 과학성, 예술성 등을 바탕으로 하는 보편성도 뛰어난 문자이다. 전 세계의 많은 소수 언어의 말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문자가 없어서 사라져 가는 경우도 있지만 표기할 문자가 있음에도 제대로 표기하지 못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볼리비아는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다. 스페인 문자가 공용 문자이지만 스페인어로 적을 수 없는 종족 말이 많다고 한다. 스페인 문자를 표준 소통 문자로 존중해 주되, 사라져 가는 말을 적은 제2의 생태 문자로 한글을 활용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이는 한글 민족주의도 우월주의 아니다. 한글의 보편성과 생태성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글_김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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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립국어원 쉼표, 마침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