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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
- 화쟁(和諍)과 무아(無我) 그리고 원효(元曉)- 박태원 교수
3. 무아(無我) 해석학/교학과 1인칭 주체·주관성 그리고 원효(元曉)
1) 무아(無我) 해석학의 두 가지 경향
붓다 후대의 무아(無我) 해석학은 두 가지 구별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하나는 1인칭 주체·주관성의 삭제로 해석될 수 있는 아비달마의 ‘환원론적 오온(五蘊) 다발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중관(中觀)·유식(唯識)을 필두로 목격되는 ‘1인칭 주체·주관성의 긍정’ 흐름이다. 아비달마는 오온(五蘊) 법설을, 자아(自我)를 무수한 요소들의 다발로 환원시켜 주재적(主宰的) 자아를 해체시키는 이론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1인칭 주체·주관성’이 긍정되기가 어렵다. 아비달마의 환원론적 다발이론이 ‘1인칭 주체·주관성’의 부정으로 기울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관(中觀)이나 유식(唯識)불교에서는 ‘1인칭 주체·주관성의 긍정’으로 기울고 있다. 이 점은 ‘자아(自我)와 무아(無我)의 문제’에 대한 분석철학이나 현상학에서의 논의에서 적절히 지적되고 있다. 관련 시선의 일부를 소개한다.
“일부 불교논사(佛敎論師)들이 자아 부정을 주관성 부정과 반드시 연결시켜 주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 논사(論師)들은 현상 의식의 특징을 고정적·지속적·무위적 주체의 존재에 의존하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그 현상적 특징을 보존하는 의식 유형을 제시한다. (···) 다르마끼르티는 의식의 주관적·자기반영적 특성을 수용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 관념인 무아론과 양립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자기의식이 우리 자신의 경험 흐름 위에 갖는 현상적으로 계속되는 1인칭 관점이어서 그렇다고 촉구한다. 하지만 의식의 중심이 되는 1인칭 관점이나 경험 차원은 자아(自我)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 흐름이라는 특성이지 경험 뒤에 서 있는 자아(自我)가 아니다.”1)
“아비달마의 철저한 환원론 견해에서는 인과적 상호관계에는 오직 찰나적 사태만 있을 뿐이다. 만약 어떤 정신적 사태도 한 찰나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개별적 일련의 심적 사태들이 인과상속 개념을 형성하는가? (···) 후기 발전을 제외하고 아비달마의 절처히 환원적이고 비인격적인 인과주의가 인간 경험의 1인칭 소여(所與)나 1인칭적 연속성을 수용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2)
“불교 환원론 구상은 인격을 비인격적 용어로, 즉 유동적 심신(心身)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의 측면에서 기술하는 것이다. 비인격적이고 비관점적 관점으로 옮겨 가면서 환원론자는 1인칭 관점을 잃는다. 이 경우, 어떻게 비관점적인 것으로부터 관점적인 것을 끌어오는지 불분명하다.』 (···) 인격의 동일성에 대한 환원론적 기술의 문제는 그들이 1인칭 관점의 중요성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중관학파 접근의 한 가지 유익하고 중요한 측면은 자아들과 인격들의 존재에 대한 1인칭, 형이상학적 쟁점들과 관련한 관심에서 1인칭적 체험된 최소자아에 대한 중관논사의 기술은 체험적, 실제적 관심의 측면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1인칭 관점의 구조와 연속성에 관한 문제이다.”3)
“창발적이고 연기적이며 공(空)한 자아 - ‘자기 전유 행위의 소용돌이’- 는 자신을 한정되고 영속하는 실체적 개체로 오인한다. 자아가 구축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 방식들을 망각하는, 즉 자기중심성과 자기망각을 향한 우리의 뿌리 깊은 경향은 우리를 개인적·전체적으로 ‘윤회하는 서사들’을 상호구성하도록 이끈다.”4)
“아뢰야식(阿賴耶識)설이 전통적으로 대두된 이유는, 우리가 자아가 없는 마음의 단순한 정신 상태의 연속이라면 과연 우리의 정신생활에 연속성이 있을 수 있을지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단지 무상(無常)한 심적 상태의 연속이라면 경향성과 습관은 과연 어떻게 전달되는가? 또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고정되지 않은 형태 속에서 불교도들은 여러 생에 걸친 연속성을 전제하는 법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아상가는 이를 여전히 찰나적이고 보다 영구적·중립적 의식 형태로 있지만, 잠재적 기저의식 형태로 매 순간 새롭게 창조된다고 대답했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현행식(現行識)이라고 기술한 6식(六識)들과는 구별될 것이다. 잠재적 기저의식(문자 그대로, 불분명한)으로서 아뢰야식은 통상 눈에 띄지 않고 흘러간다. 그 현존이 주목받거나, 적어도 추리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혼절이나 숙면 같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이다. 중립적인 이 의식은 개인에게 축적된 모든 기본적 습관, 성향, 경향성 및 업(業)의 잠재력(習氣)의 저장고로 역할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의 연속성을 부여한다. 이에 따라 그것을 근본식(根本識)이라고 일컫는다.”5)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또한 앞서 언급한 다발이론을 넘어서는 인격에 관한 표현을 제공한다. 유가행파(瑜伽行派)의 관점으로는, 아뢰야식은 인격 관련의 핵심에 서 있다. 인격(the person)이 그(녀) 자신을 하나의 인격(a person)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토대에서이다. 왜냐하면 인격이 그(녀) 자신을 마음이나 신체와 동일시하든 상관없이, 이러한 동일시가 일어나는 것은 항상 아뢰야식의 배경에서이기 때문이다. (···) 유가행파는 제8아뢰야식을, 제7말나식이 자아(自我)로 오인하는 토대라고 이해한다. (···) 아뢰야식이 인격 관념과 긴밀한 연계가 있더라도, 그것은 (계기 초월적인) 지속하는 것도 아니며 경계지어지거나 주재자(agency) 감각이 부여된 것도 아니다.“6)
“유가행파에게 이 아뢰야식은 가장 근원적인 수준의 의식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아뢰야식은 필자가 처음에 말했던 알아차림의 이원론적 왜곡의 일부이다. (현상학적으로 말해서) 의식(意識)이 비이원(非二元)적 방식으로 자기를 의식하는 더 깊은 수준이 있다. 유가행파와 여타 관련 전통은 이러한 형태의 비이원적 알아차림을 확대된 명상 수행을 통해 체험 및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로써 모든 의식 형태로부터 제약받지 않고 알아차리는 명징성뿐인 아뢰야식이 이원성에 의해 창출된 의식적, 능동적, 정서적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지혜로 전환된다.7)
2) 원효철학에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과 화쟁(和諍)
원효는 아비달마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유형의 불교해석학/교학을 통섭적(通攝的)으로 탐구하여 관점의 개성을 확보한다. 대승교학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리는 그는, 무아(無我)에 대한 이해에서도 중관(中觀)이나 유식(有識)의 경향과 호흡을 같이 한다. 특히 유식학에서 확보한 마음에 관한 통찰을 축으로 삼아, ‘마음·이해·행위의 상호포섭적/통섭적(不二而不日) 향상’8) 을 통한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새로운 수립’에 관한 통찰의 체계를 마련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효(元曉) 특유의 ‘일심(一心) 철학’도 수립된다.
(1)허무주의(斷見/無見)와 초시간적 영원주의(常見/有見)에서 벗어난 ‘사실 그대로의 자아[眞我, 大我]’
대승 『열반경(涅槃經)』이 천명하는 ‘열반의 네 가지 능력(涅槃四德, 常·樂·我·淨)은 불교가 추구하는 가치를 긍정형 언어로 기술하려는 대승불교의 경향을 압축하고 있다. 특히 『열반경』의 상(常)·락(樂)·아(我)·정(淨)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이라는 부정형 언어를 선호하고 있는 아비달마 류(類)의 시선을 긍정형 언어로 대치하는 것이어서 아비달마의 불교 이해에 대한 대승의 비판적 태도를 압축하고 있다. 원효(元曉)는 『열반종요(涅槃宗要)』를 통해 대승불교의 관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특히 허무주의(斷見/無見)와 초시간 영원주의(常見/有見)에서 벗어난 ’사실 그대로의 자아‘에 대해 ‘참된 자기’(眞我)·‘모든 것을 얻는 크나큰 자기’(大我)·‘참된 사실 그대로의 자기(眞實我)·‘자유 자재한 자기’(自在我)·‘깨달음으로서의 자기’(菩提我) 등의 표현을 채택하면서 그 이유를 상론하고 있다. ‘참된 자기’(眞我)·‘모든 것을 얻는 크나큰 자기’(大我) 등은 오온(五蘊)을 ‘사실 그대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으로 보는 시선의 대승불교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열반(涅槃)이 지니는 ‘네 가지 능력’(四德)에 관한 원효의 해설은 그 논의가 치밀하고 풍부한데, 관련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열반문(涅槃門)의] 여섯 번째인 ‘[涅槃의] 네 가지 능력’(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나누어 구별하면 대략 네 가지 부문이 있다. 첫 번째는 ‘[4덕(四德)의] 특징을 드러내는 부문’[顯相門]이고, 두 번째는 ‘[4덕(四德)을] 세운 뜻에 관한 뜻에 부문’(立意門)이며, 세 번째는 ‘[4덕(四德) 각각의] 구별에 관한 부문’(差別門)이고, 네 번째는 ‘배타적 말다툼을 통하게 하는 부문’(和諍門)이다.
묻는다, ‘진리의 몸’(法身)이라면 곧 ‘[常·樂·我·淨의] 네 가지 능력(四德)’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답한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네 가지 능력’(四德)의 뜻에는 ‘[서로] 통하는 [측면]’(通)도 있고 ‘[각각] 구별되는 [측면]’(別)도 있다.
[각각] 구별되는 [측면]에서 말하면, ‘늘 [本然]에 머무름’(常)은 ‘진리 몸의 면모’(法身之義)이니, <저 ‘색깔이나 모양 있는 몸’(色身)은 ‘늘 변하는 [면모]’(無常)이다>라는 것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안락함(樂)은 ‘열반의 면모’(涅槃之義)이니, <저 ‘[근본무지에 따라] 태어나고 죽는 것’(生死)은 ‘바다처럼 큰 괴로움’(苦海)이다>라는 것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참된] 자기’(我)는 ‘부처의 면모’(佛義)이니, <중생은 ‘[참된] 자기가 아니다’(不自)>라는 것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청정함(淨)은 ‘진리의 면모’(法義)이니, <‘진리가 아닌 것’(非法)은 ‘오염되고 혼탁하다’(染濁)는 것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열반경』] 『哀嘆品(애탄품)』에서 <‘[참된] 자기’(我)는 바로 ‘부처의 면모’(佛義)이고, ‘늘 [본연에]에 머무름’(常)은 ‘진리 몸의 면모’(法身之義)이며, 안락(樂)은 ‘열반의 면모’(涅槃之義)이고, 청정함(淨)은 ‘진리의 면모’(法義)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선 [구별되는] ‘한 측면’(一邊)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4덕(四德)의 특징을] 배당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에 의거하여 [4덕의 구별을 서로] 통하게 하여 말하자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덕 각각이 법신(法身), 열반(涅槃), 반야(般若), 해탈(解脫)이라는] 세 가지 항목을 총괄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밝히는] 부문(三事總別門)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네 가지 능력(四德)은 [모두] ’진리 몸의 면모‘(法身義)이기도 하고 또 이 ‘네 가지 능력’이 [모두] ‘열반의 면모’(涅槃義)이기도 하니, 나머지[인 불의(佛義)와 법의(法義)에 대해서도 모두 이와 같다.[『열반경』] 『덕왕품(德王品)』에서 <‘부처 본연의 면모를 봄’(見佛性)으로써 열반(涅槃)을 얻으니, ‘늘 [本然에] 머무름’(常)·안락함(樂)·‘참된 자기’(我)·온전함(淨)[의 사덕을 [모두] ‘완전한 열반’(大涅槃)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9)
“‘[참된] 자기일 수 있는 능력의 두 가지 면모’(我德二義)라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견해의 측면’(我見邊)과 ‘자아가 없다는 견해의 측면’(無我見邊)에서 모두 벗어나는 것을 말하니, ‘자아가 있다는 것도 아니고 자아가 없다는 것도 아닌 것(非我非無我)이라야 ’크나큰 자기‘(大我)를 얻기 때문이다. 논서(『寶性論』)에서 <‘두 가지 이치’(二種法)에 의거하여 여래(如來)의 ‘진리 몸’(法身)에는 ‘[참된] 자기[의 능력을 얻는] 보살수행’(我波羅蜜,아바라밀)이 있다. 어떤 것들이 두 가지인가?
첫 번째는 ‘[불교와는] 다른 가르침’(外道)들의 온갖 극단[적 견해]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이니 ‘허구의 자아에 대한 확산된 분별망상’(妄想我 戱論)에서 벗어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가르침을 들어서 혼자 깨달으려는 수행자’(聲聞)들(인 소승(小乘)의 온갖 극단[적 견해]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이니 ‘자아가 없다는 것에 대한 확산된 분별망상’(無我 戱論)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기 떄문에 『능가경』에서는 <‘[불교와는] 다른 가르침’(外道)의 허물[인 有我見]에서도 벗어나고 [성문(聲聞)의 허물인] ‘자아가 없다는 견해’(無我見)도 불살라 태워버리니, ‘자아에 관한 [잘못된] 견해’(我見)들이 맹렬한 것을 마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타오르는[세상을 무너뜨리는] 화재’(劫盡火,겁진화)가 [온 세상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하네.>라고 말한다.”10)
“[4덕문(四德門) 두 번째인 [열반의 능력(德)으로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네 가지를 세운 그 뜻을 밝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열반의] ‘온갖 능력’(萬德)은 아미 [모두가] 완전한 것인데 어찌하여 유독 [상락아정(常樂我淨)] 네 가지만을 세우는가? 네 가지를 세우는 이유로는 대략 네 가지 뜻이 있다. ‘네 가지 장애’(四障)를 없애기 때문이고, ‘네 가지 불만’(四患)을 뒤집어 [바로잡기] 때문이며, ‘네 가지 왜곡’(四倒)을 상대하기 때문이고, ‘네 가지 양상’(四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장애’(四障)를 없애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범부(凡夫)[의 두 부류인 천제(闡提,천제) 및 외도(外道)]와 성인(聖人)[의 두 부류인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네 부류 사람에게는 각각 하나의 장애가 있다.
첫 번째로 ‘좋은 능력이 끊어진 자’(闡提,천제)는 [부처님의] 진리(法)를 비방하며 ‘온전할 수 있는 능력’(淨德)을 가로막으니, ‘나고 죽는 것에 탐내는 것’(貪生死)을 ‘온전한 진리’(淨法)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부처님의 것과는]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자’(外道,외도)는 ‘[불변·독자의] 자아’(我)에 집착하여 ‘[참된] 자기일 수 있는 능력’(我德)을 가로막으니, ‘참된 자기’(眞我)를 깨닫지 못하여 허망한 [자아]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가르침을 들어서 혼자 깨달으려는 수행자’(聲聞,성문))는 괴로움(苦)을 두려워 하여 ‘안락할 수 있는 능력’(樂德)을 가로막으니, 저 괴로움(苦)이 바로 ‘크나큰 안락’(大樂)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연기(緣起)를 이해하여 혼자 깨달으려는 수행자’(緣覺,연각)는 ‘[늘 머무는 마음’(心)을 버려 ‘늘 머무는 능력’(常樂)을 가로막으니, ‘늘 머무는 이로움’(常利)을 버리고 ‘[모든 것은 변하여] 없어진다[는 견해]’(斷滅,단멸)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장애’(四障)를 없애려 하기 때문에 [대승의] 보살(菩薩)은 ‘네 가지 뛰어난 원인[이 되는 수행]’(四種勝因, 사종승인)을 닦아 익힌다. 이른바 [정법(淨法)을] ‘신뢰하는 마음’(信心)과 [진아(眞我)에 대한] 지혜(般若,반야)와 [대락(大樂)을 얻는] 선정(禪定,三昧)과 [상리(常利)를 위한] ‘크나큰 자비’(大悲)가 그것이니, [이 네가지 수행으로써] 차례대로 ‘온전함(淨)’과 ‘[참된] 자기’(我)와 ‘안락함(樂)’과 ‘늘 [본연에] 머무름(常)’[의 능력을] 증득한다.
『보성론(寶性論)』에서 게송으로 <’네 가지의 장애‘(四種障礙)가 있으니, ‘[부처님의] 진리를 비방하는 것’(謗法,방법)과 ‘[붋변의 독자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着我,착아)과 ‘세간의 괴로움을 두려워 하는 것’(畏怖世間苦,외포세간고)과 ‘모든 중생(의 이로움)을 버리는 것’(捨離諸衆生,사리제중생)이라네. ‘좋은 능력이 끊어진 자’(闡提,천제)와 ‘[부처님의 것과는]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자’(外道,외도)와 ‘가르침을 들어서 혼자 깨달으려는 수행자’(聲聞,성문)와 ‘연기(緣起)를 이해하여 혼자 깨달으려는 수행자’(獨覺,독각)[의 장애]이다. ‘[정법(淨法)에 대한] 신뢰 등의 네 가지‘(信等四種法,신등사종법)가 ’온전하게 되는 원인‘(淸淨因,청정인)임을 알아야 하리.>라고 말한 것과 같다.”11)
<중략>
[‘내가 설하고 저들이 듣는다’는 생각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여래(如來)가 연설하는 것을 ‘크나큰 자기’(大我)라고 부른다.> (···) [법아(法我)와 인아(人我)라는 ‘두 가지의 자기’(二種我,이종아)를] ‘[각각] 구별하는 측면’(別門,별문)으로 말한다면 ‘참된 사실 그대로인 자기’(眞實我: 法我)는 ‘열반으로서의 자기’(涅槃我,열반아)이고 [여덟 가지의] ‘자유자재한 자기’(自在我: 人我)는 ‘깨달음으로서의 자기’(菩提我,보리아)이지만, ‘실제에 의거하여 [서로] 통하게 논한다면(就實通論,취실통론) 차별(別,별)이나 다름(異,이)이 없다. 그러므로 경전(『열반경』)에서는 [진실아(眞實我)와 자재아(自在我)]를 총괄적으로 결론지어 <이와 같은 ‘크나큰 자기’(大我,대아)를 ‘크나큰 열반’(大涅槃,대열반)이라 부른다.>라고 말한다.12)
2) 청정한 말나식(末那識)
‘여섯 가지 의식’(六識)에 더하여 유식학이 설정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은,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토대로 삼고 여섯 감관의 대상세계를 직접 반연(攀緣)하여 자아(自我) 감각을 형성·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말나식의 자아 감각을 조건으로 삼아 ‘네 가지 근본 번뇌’가 발생한다. ‘말나식의 자아 관념과 상응하는 네 가지 번뇌’(末那四惑)는 ‘자아가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서 실재한다는 견해’(atmadrsti, 我見/我執),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음’(atmamlha, 我癡,아치),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되는 오만’(atmamana, 我慢,아만),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한 애착’(atmasneha, 我愛,아애)를 가리킨다. 말나식은 기본적으로 아뢰야식의 종자(種子)로부터 생겨나 다시 아뢰야식을 그 형성과 유지의 토대 조건으로 반연(攀緣)하는 성격을 지닌다.
아뢰야식은 삶의 영속성과 통합성의 근원이지만 그 범주나 위상이 독자적·자기충족적인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 내용의 형성·유지·변화는 말나식과의 상호관계·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나식의 자아 감각이 대상세계와 관계 맺으면서 발생하는 현상들의 흔적/관성/경향성은 아뢰야식 층위에 종자(種子)로서 축적된다. 그리고 그 축적된 흔적/관성/경향성의 종자(種子)들은 다시 말나식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아뢰야식은 ‘말나식의 자아 감각이 대상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과 내용’에 개입하여 ‘자아적 경험의 내용 형성’에 최심층 토대 조건이 된다. 또 제8 아뢰야식·제7 말나식·육식·대상세계의 이 모든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은 인과적 연속성을 지니지만 역동적이며 끊임없이 변화는 것이여서, 아뢰야식·말나식·육식·대상세계의 상호관계·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되는 ‘자아적 경험’은 그 어느 시·공간에서도 동일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하지는 못한다. 비록 ‘아뢰야식’ ‘말나식’ 등의 명칭을 사용하지만, 그 명칭에 해당하는 내용은 예외 없이 ‘변화·관계에 의한 역동적 형성 과정’이다.
아뢰야식·말나식·육식·대상세계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은 결국 말나식 층위의 핵심인 ‘자아 감각’을 축으로 삼아 그 내용을 형성한다. 따라서 아뢰야식·말나식·육식·대상세계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은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경험 형성’ 과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되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경험’은 두 가지 선택지에 열려 있다. 인간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창발적으로 현출된 오온(五蘊)의 ‘의식능력’(意根)이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다. 아뢰야식이나 말나식 층위(層位)를 설정하는 유식학의 시도는 오온(五蘊)의 ‘의식능력’(意根)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의식능력’(意根)은 언어와 결합된 언어적 의식능력이다. 언어적 의식능력은, 모든 현상을 언어의 그릇에 담아 개념으로 분류하고 비교·평가·판단·분석·추리·성찰을 통해 처리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능력’이기도 하다. <‘의식능력’(意根)의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이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면서 형성된 자아 현상은 ‘오온(五蘊)’, 부합되지 않으면서 형성된 자아 현상은 ‘오취온(五取蘊)’이다. 이 <‘의식능력’(意根)의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 내용 여하에 따라 <아뢰야식식·말나식·육식·대상세계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을 통한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경험 형성’>은 두 가지로 그 내용이 나누어진다. 하나는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관점적 1이칭 주체/주관성의 경험’>이다. 전자는 ‘사실과 부합하는 이해’(如實智)를 구성·선택하여 발생시키는 자아 경험의 계열이고, 후자는 ‘사실을 왜곡하는 근본무지’(無明)를 구성·선택하여 발생시키는 자아 경험의 계열이다.
이렇게 보면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모두 <‘의식능력’(意根)의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에 따라 두 가지 계열의 내용으로 다시 형성된다.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내용>과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대승기신론』은 그 두 계열을 각각 ‘참 그대로인 마음 국면’(心眞如門)과 ‘[근본무지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 국면’(心生滅門)으로 구분한 후 양자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데, 원효는 그 관계를 불이(不二)·통섭(通攝)의 관점에서 해설한다.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모두 <‘의식능력’(意根)의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 내용 여하에 따라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내용>과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내용>의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다. 유식학에서는 아뢰야식의 그 두 가지 면모를 청정분(淸淨分)과 잡염분(雜染分)이라 한다. 현장(玄奘) 계통의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제8 아뢰야식이 이미 청정(淸淨)의 일면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별도로 제9 아마라식(阿摩羅識)을 건립하지 않는데 비해, 전제(眞濟)계통의 섭론종(攝論宗)에서는 제8 아뢰야식의 잡염분(雜染分)이 청정분(淸淨分)으로 바뀐 식(識)의 층위를 별도로 설정하여 제9 아마라식(阿摩羅識 : 아말라식·암마라식·無垢識·淸淨識·如來識)이라고 한다. 진제(眞濟)는 의타기성(依他起性) 및 아뢰야식의 잡염분(雜染分)을 소멸시키고 청정분(淸淨分)을 실현시킨 상태를 ‘제9 아마라식’이라는 별도의 층위로 구별하여 적극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신역(新譯) 법상유식(法相唯識)에서는 망(妄)이, 구역(舊譯) 섭론유식(攝論唯識)에서는 진(眞)이 특히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유식학의 궁극 목표는 아뢰야식이 지닌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내용>(雜染分)을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내용>(淸淨分)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아뢰야식 내용의 형성·유지·변화는 말나식과의 상호관계·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아뢰야식이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내용>(雜染分)과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내용>(淸淨分)의 두 가지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은, 말나식도 그러한 두 가지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가 된다. 말나식의 ‘자아 감각’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의식능력’(意根)의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에 따라 말나식의 ‘자아 감각’이 ‘자아 관념과 상응하는 네 가지 번뇌’(末那四惑, 말나식의 汚染分)가 되기도 하고,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자아적 현상’(말나식의 淸淨分)이 되기도 한다. 말나식이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자아적 현상’이 될 때, 아뢰야식은 말나식의 <‘사실 그대로’로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 현상’>의 경향성이 집적되는 범주가 된다. 이 국면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청정분(淸淨分)이 구현된다>라고도 하고 <제9 아마라식(阿摩羅識)이 된다‘>라고도 한다. 이때 ‘아뢰야식의 청정분’이나 ‘제9 아마라식’은 말나식의 청정분인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자아적 현상’의 경향성이 집적된 층이므로 이를 역시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 현상’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유식학(唯識學)의 실제적 목표는 말나식의 청정분(淸淨分)을 구현하는 일이다. 아뢰야식 층위의 식(識) 현상은 잠재적·심층적현상이라 지각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식학의 목표를 이루는 관건은 말나식을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자아적 현상‘(말나식의 淸淨分)으로 바꾸는 것이다. 원효(元曉)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유가사지론」은 말한다. <묻는다. 만일 그 말나식이 언제나 ‘[자아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思量)을 특성으로 하면서 서로 이어가며 변화해 간다면, 세존이 말씀하신 ’세간을 넘어선 [경지의] 말나식‘(出世末那)과 같은 것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답한다. ’명칭은 방편으로 시설된 것‘(名假施設)이지 반드시 대상(義) 그대로인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말나식]을 치유하여 [자아에 관련된 번뇌에] ’빠져드는 것’(轉倒)에서 멀리 떠나 [말나식이 자아를] ‘사실 그대로 생각하고 헤아리게’(正思量)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말나식이 [제6]의식으로 하여금 분별하면서 바뀌어가게 하니, 이런 까닭에 의식의 의지처(所依)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13)
이 [「유가사지론」에서의] 질문의 뜻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만약 위와 같이 말나식의 특성을 설명한다면, 이 말나식(意)은 항상 [‘나에 대한 무지’(我癡)·‘나에 대한 애착’(我愛)·<‘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我我所執)>·‘비교를 통한 자기규정’(我慢), 이]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하면서 언제나 ‘[자아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思量)을 특성으로 하니, 그렇다면 ‘세간(世間)을 넘어선 [경지의] 말나식’(出世末那)은 성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자아(我)를 생각하고 헤아리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유가사지론」에서의] 대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세간에서 [통용되는 방편으로 세운 명칭과 [그] 의미’(世間施設名義)에 의거하여 <[말나식은] 언제나 [자아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을 특성으로 삼는다>라고 말하였지만, 그 실제의 의미에 의거한다면 언제나 ‘자아라는 대상’(我塵)을 [사실과 다르게]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명칭은 방편으로 시설된 것이지 모두가 다 반드시 실제의 대상과 같지는 않다.>[라고 한 것이다]. [「유가사지론」의 대답 가운데 두 번째인] 뒤의 대답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또한 이 말나식에 [자아와 관련된 번뇌에] 빠져듦(轉倒)이 있을 때에는 ‘자아라는 대상’(我塵)을 [사실과 다르게] 생각하고 헤아리지만, [자아와 관련된 번뇌에] 빠져듦(轉倒)에서 떠날 때에는 ‘[불변·독자의] 자아가 없음’(無我)을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항상 [제6] 의식과 대상(境)을 함께(共) 하면서 변해가니, 따라서 <의식의 ‘인식의 근거를 함께하지 않는 의지처’>(意識不共所依)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말나식은] 언제나 ‘생각하고 헤아리지는 것’(思量)을 특징으로 삼지만, [그렇다고] ‘세간을 넘어선 [경지의] 말나식’(出世末那)을 건립하는 것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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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는 1인칭의 삭제인가, 새로운 1인칭의 등장인가?]
- 화쟁(和諍)과 무아(無我) 그리고 원효(元曉)- 박태원 교수
3. 무아(無我) 해석학/교학과 1인칭 주체·주관성 그리고 원효(元曉)
(3) ‘하나처럼 통하는/통하게 하는 마음’(一心)
‘일심(一心)’은 원효사상의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개념이다. 원효는 이 일심(一心)의 경전적 근거[經證]로 『입능가경(入楞伽經)』의 “적멸자명위일심(寂滅者名爲一心), 일심자명위여래장(一審者名爲如來藏).”이라는 구절을 자주 거론한다. 예컨대 『대승기신론소』에서는 ‘참 그대로인 마음 측면’(心眞如門,심진여문)과 <[근본무지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 측면>(心生滅門,심생멸문)의 해설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처음[인 ‘총괄적 해석’(總釋,총석)]에서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이라는 도리’(一心法)에 의거하여 두가지 측면이 있다.>(依一心法, 有二種門)라고 한 것은,『능가경』에서 <‘불변·독자의 본질/실체가 없고 [불변·독자의ㅣ 본질/실체로 보는 분별의]동요가 없음’(寂滅,적멸)을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이라고 부르며,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을 ‘여래의 면모가 간직된 창고’(如來藏,여래장)라고 부른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기 [『기신론』]에서 말하는 <참 그대로인 마음 측면>(心眞如門,심진여문)이라는 것은 곧 저 『능가경』에서 말하는 <참 그대로인 마음 측면>(心眞如門)이라는 것은 곧 저 『능가경』의 <‘불변·독자의 본질/실체가 없고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로 보는 분별의] 동요가 없음’(寂滅)1) 을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一心)이라고 부른다.>(寂滅者名爲一心)[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고, <[근본무지에 따라] 생멸하는 마음 측면>(心生滅門)이라는 것은 『능가경』에서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을 ‘여래의 면모가 간직된 창고’라고 부른다>(一心者名爲如來藏)[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2)
일심(一心)을 경증(經證)하는 경우 이외에도 원효의 저술에서는 『입능가경』의 이 구절이 자주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보리류지가 ‘일심(一心)’으로 번역한 산스크리트 원 단어는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삼매(三昧)’의 정의인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지시하는 것이다. ‘심일경성(心一境性)의 의미를 ‘대상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마음 상태’로 보아 선정(禪定) 수행을 ‘대상에 대한 마음집중’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 과연 그런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필자는 정학(定學) 내지 선정(禪定) 수행의 핵심을 ‘대상집중’으로 파악하는 시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3) 그러나 한역(漢譯) 『입능가경』의 ‘일심(一心)의거하여 펼치는 원효의 일심철학이 산스크리트본 『입능가경』의 해당 내용 맥락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원효 일심철학(一心哲學)에 대한 평가도 크게 엇갈리게 된다. (···)
모든 번역은 일종의 해석학적 선택이고 그로 인한 의미의 변이는 새로운 통찰과 이론의 계기이다. 사유와 통찰의 발전과 풍요는 이런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을 통한 해석학적 선택’을 단순한 오류 현상으로 치부하여 그 의미를 평가 절하하는 인도 원전 지상주의들은 일종의 해석학적 폐문(閉門)에 갇히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인도 불전(佛典)의 한역(漢譯) 과정에서 발생한 해석학적 선택과, 언어의 치환에 수반하는 의미의 변이 및 해석학적 개방성은 인문학적 창발성과 발전 및 풍요의 강력한 계기가 된다.
원효의 일심(一心)철학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원효가 만약 산스크리트어를 익혀 원전(原典)으로 사유했다면, 원효 일심철학의 창발적 개성과 새로운 통찰은 제한되었을 것이다. 번역 및 번역어에서 비롯한 해석학적 개방성으로 인해 원효의 일심철학은, 번역 오류로 인한 무지나 오해가 아니라, 마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의 체계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새로운 마음 통찰은 붓다의 통찰을 새롭게 읽으며 붓다 언어의 의미에 접근하는 새롭고 유익한 길을 열고 있다. 원효의 사유와 대화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원효가 채택하는 ‘일심(一心)’이라는 기호는 ‘모든 현상을 산출해 내는 실체나 본체’ 혹은 ‘현상의 이면에 있는 불변의 어떤 기체(基體)’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불변·독자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에도 막히거나 갇히지 않는 인지 지평, 그리하여 ‘실체나 본질의 차이로 나누는 분별’에서 풀려난 채 차이들은 만날 수 있는 마음 수준을 지시하는 기호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런 이해에 의거하여 필자는 ‘일심(一心)’을 문장의 의미 맥락에 따라 ‘하나처럼 통하는 마음’ 혹은 ‘하나처럼 통하게 하는 마음’이라 번역하고 있다. ‘일심(一心)’에 대한 원효 자신의 설명, 이 개념들이 등장하는 맥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번역이다. ‘일각(一覺)’은, 이와 관련한 원효의 설명들을 종합해 볼 때,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라는 허구 관념으로 인해 분리되고 상호 격리되었던 존재와 현상 및 세계가, ‘불변·독자의 본질/실체’에 대한 무지의 착각을 떨쳐 버림으로써 분리와 격리의 벽이 무너져 ‘서로 열리고 만나는 온전한 지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심(一心)’도 이런 의미 맥락을 담아내는 용어이다. 그런 점에서 ‘일각(一覺)’을 본질/실체적 분리와 격리를 해체시켜 서로 통하게 하는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담아, ‘하나처럼 통하게 하는 깨달음’이라 번역해 보고 있다.
‘진여(眞如, tathata)’라는 용어 역시 한자어 그대로 ‘진여(眞如)’로 번역하면 ‘궁극적 실재에 관한 명사적(名詞的) 지칭’으로 이해되기 쉬워 마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 번역에서는 ‘진여(眞如)’를 ‘참 그대로’나 ‘사실 그대로’로 번역한다. 이때 ‘참’이나 ‘사실’이라는 용어로 지시하려는 것은 본체나 순수실재와 같은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다. ‘차이들을 무지에 의해 희론적(戱論적)으로 굴절시키지 않고 만나는 국면이나 지평’, 혹은 ‘희론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채 차이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국면이나 지평’을 반영한 번역이다. 이러한 ‘참 그대로’나 ‘사실 그대로’의 지평은 ‘변화·관계·차이를 품은 역동적 사태’를 지시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정념(正念)의 대상을 ‘참 그대로인 현상’(眞如法)으로 설정하는 이해가 등장하고 있다. ‘진여(眞如)’를 궁극적 실재나 존재로 이해하는 존재론적 시선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적어도 원효는 이 진여(眞如)를 ‘현상의 온전한 양상’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원효는, <본질이나 실체관념을 설정하는 근본 무지에 의해 굴절 내지 오염되지 않은 변화·관계·차이의 현상들>을 ‘진여(眞如)’로 보고 있다. 그리고 원효는 그 경험국면을 지칭하기 위해 ‘심진여(心眞如)’, ‘일심(一心)’, ‘본각(本覺) 등의 긍정형 기호들을 적극적으로 채택한다.
불변·독자의 본질이나 실체는 명사(名詞)적 부동(不動)의 사태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유형의 불변·독자의 본질/실체도 모두 무지(無知)의 허구적 산물로 간주하는 것이 원효철학이다. 원효의 이러한 관점은 붓다 및 불교철학의 핵심 통찰이기도 하다. 만약 원효가 구사하는 ‘일심(一心)’·‘일여(一如)’·‘일각(一覺)’의 ‘일(一)’을 부동(不動)의 실재(實在)를 지시하는 수사로 읽는다면 원효가 구사하는 일심이나 일여, 일각은 불변의 궁극실재가 되고, 원효철학은 불변·독자의 궁극실재에 관한 신비주의 철학이 되어 불교 내부의 변형 아트만 사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일심(一心)’·‘일여(一如)’·‘일각(一覺)’ 등의 기호가 채택되는 문장에서 원효는 철저히 비(非)본질·비(非)실체의 연기적(緣起的) 통찰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일심(一心)’·‘일여(一如)’·‘일각(一覺)’ 용어에서 원효가 채택하는 ‘일(一)’이라는 기호는 대부분 동사(動詞)적 역동의 국면을 지시한다.
진심(眞心) 역시 일심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일심의 ‘심’이나 진심의 ‘심’은 명사(名詞)적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형성되는 ‘상태’나 ‘지평’을 지시하는 기호로 보인다. 그리고 ‘일심’의 ‘일’이나 ‘진심’의 ‘진’은, ‘심’이라는 명사적 존재를 수식하는 형용사가 아니라 ‘심’이라는 역동적 상태의 내용을 알려주는 수사 용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래야 일심이나 진심이라는 용어를 채택하는 『대승기신론』나 원효, 나아가 선종(禪宗)에서의 용법과 의미 맥락에 상응한다고 생각한다. ‘진심(眞心)’을 문자 그대로 ‘참 마음’으로 번역하면, 생멸하는 현상 이면에 불생불멸의 본체(本體)를 설정하는 우파니샤드 류(類)의 ‘본체-현상론’에 빠져들기 쉽다. 일심(一心)을 ‘한 마음’으로 번역할 때도 같은 문제에 봉착한다. 이런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필자는 ‘진심(眞心)’을 ‘참 그대로와 만나는 마음/마음 지평’으로 번역한다. 이때 <참 그대로와 만난다>라는 말은 ‘본체-현상론’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무지의 분별적 가공 없이 차이들과 만난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심이나 진심은 모두, ‘불변의 동일성과 독자성’ 혹은 ‘불변·독자의 실체나 본질’을 설정하는 근본무지(無明) 및 그에 의한 ‘차이들의 왜곡’이 원점에서부터 거두어진 인지(認知) 지평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무지의 분별적 왜곡 없이 차이들과 만나는 마음/인지 지평’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원효는 유식학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원효철학은 유식학적 통찰을 뼈대로 삼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러 저술들 가운데 『이장의(二障義)』는 원효의 유식학 이해가 얼마나 탁월한 수준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유식학의 핵심 내지 궁극 목표는 <무지(無知)를 조건으로 삼은 식(識)들을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식(識)들’로 바꾸는 것>(식(識)의 전변(轉變, 轉識得智,전식득지이다.) 그런데 앞서 거론한 것처럼,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오온(五蘊)·12처(處)·18계(界) 이론‘이 지니는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는, <인간의 경험은 모든 감관능력에 예외 없이 ’의식능력‘(意根)이 결합되어야 발생한다는 점에서 주관적/관점적 속성을 지닌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모든 것을 관점적/주관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오온 인간에서는, 몸 내·외부의 조건들이 상호관계 맺고 상호작용함으로써 오온 현상의 발생·형성·유지·변화·소멸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오온 인간은, 특유의 의식능력으로 인해, 그 현상들을 관점적/주관적 경험‘으로 처리한다.> 유식학은 ’오온·12처·18계 이론‘의 이러한 의미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의식능력‘(意根)이 결합되어야 발생하기에 주관적/관점적 속성을 지니며, 따라서 ’모든 것을 관점적/주관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무지를 조건으로 삼은 식(識)들’을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식(識)들’로 바꾸는 것[식의 전변(轉變), 전식득지(轉識得智)]을 유식학의 핵심 내지 궁극 목표로 삼은 것이다.
앞서 논의한 관련 내용의 핵심을 다시 요약해 본다 : 아뢰야식·말나식·육식·대상세계 상호관계의 상호작용은 결국 말나식 층위의 핵심인 ‘자아감각’을 축으로 삼아 그 내용을 형성한다. 따라서 아뢰야식·말나식·유식·대상세계의 상호관계·상호작용은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의 경험 형성’ 과정이다. 그리고 아뢰야식과 말나식은 모든 <‘의식능력’(意根)의 이해·관점·견해의 구성 및 선택> 내용 여하에 따라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내용>과 <‘사실 그대로’를 왜곡하는 내용>의 두 가지 가능성을 지닌다. 그리고 유식학의 실제적 목표는 말나식의 청정분을 구현하는 일이다. 아뢰야식 층위의 식(識) 현상은 잠재적·심층적 현상이라 지각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식학의 목표를 이루는 관건은 말나식을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자아적 현상’(말나식의 淸淨分)으로 바꾸는 것이다.
원효의 일심철학은 유식학이 지니는 이러한 의미의 연장선에서 창발적으로 수립된 것으로 보인다. 원효는, 『대승기신론』과 『입능가경』에 등장하는 ‘일심(一心)’이라는 기호가 <‘중관적 통찰을 품은 유식학적 시선’4) 에서 해탈·열반의 핵심 내용과 불교철학의 체계를 압축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라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일(一)’과 ‘심(心)’에 각각 그에 상응하는 압축적 의미를 배정한다.
‘일(一)’이라는 기호에는 ‘하나처럼 통함’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 핵심은 이렇게 요약된다 : 식(識)도 예외 없이 변화와 관계의 현상이어서 ‘본질/실체에 의한 분리나 격절적(隔絶的) 불통’이 없기에 자신 및 타자들과 마치 하나처럼 통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하나처럼 통함‘은 ’둘로 나뉨은 없지만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아닌 통함‘(不二而不一)이다. 하나처럼 통하기에 ’둘로 나뉨이 없지만‘(不二), 동시에 식(識)을 축으로 한 모든 현상은 ’상호 개방과 상호 침투‘[通攝]의 관계로 ’선로 연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不一). 그러나 현실의 식(識)은, ‘식(識) 자신의 이해 결핍’(無明)에 의해, 이 ‘하나처럼 통하는 사실 그대로의 양상’(法界一相)을 서로 분리·격절된 본질/실체의 현상으로 오인한 후 ‘왜곡·오염된 식(識) 작용’(분별·망상)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일(一)’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하나는 본연적 의미이다. <식(識) 관련 현상들은 비본질/비실체 관계로서 ‘둘로 나뉨이 없지만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아닌’(不二而不一) 관계로 하나처럼 통하고 있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실적 의미이다. <인간의 현실에서 망각되고 왜곡·오염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하나처럼 통함’이며, 따라서 인간이 회복·구현해야 할 과제가 여기에 있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심(心)’이라는 기호에는 인간 경험의 유식학적 특성을 나타낸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의식능력(意根)’이 결합되어야 발생하기에 주관적/관점적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모든 것을 관점적/주관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유식학은 <‘무지를 조건으로 삼은 식(識)들’을 ‘사실 그대로 이해하는 식(識)들’로 바꾸는 것>(識의 轉變)을 목표로 삼는데, ‘심(心)’은 이러한 유식학적 시선과 목표를 잘 반영하는 기호이다.
이렇게 보면 ‘일심’이라는 기호에 입각한 원효 기획의 면모가 포착된다. 원효는 ‘중관을 품은 유식학’의 핵심과 목표를 ‘일심’이라는 기호에 압축시키면서 이를 통해 불교 이론 전체를 통섭적(通攝的)으로 재구성하는 새로운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 기획을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일심에 관한 정의적(定義的) 해설, 일심으로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을 통합시키는 것, 일심으로 유식학의 전식득지(轉識得智)를 해설하는 것 등 ‘일심(一心)’에 관한 원효의 논의와 해설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앞서 거론한 것처럼, 유식학의 목표를 이루는 관건은 말나식을 ‘사실 그대로에 부합하는 자아적 현상’(말나식의 淸淨分)으로 바꾸는 것이며, 이때 아뢰야식은 말나식의 <‘사실 그대로’로서의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 현상‘>의 경향성이 집적되는 범주가 된다. 그러므로 ’제8아뢰야식의 청정분‘이나 ’제9아마라식‘ 역시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 현상‘의 범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원효의 ‘일심(一心)’은 이러한 유식학적 통찰을 토대로 삼고 있다. 그럴진대 ‘일심(一心)’ 역시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 현상’의 범주가 된다. <‘참 그대로인 국면’(眞如門)으로서의 일심>은 ‘무아로서의 오온’이며, ‘하나처럼 통하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이다. 그것은 ‘1인칭의 삭제’가 아니라 ‘새로운 1인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새로운 1인칭으로서의 일심(一心)’은 변화·관계의 현상과 접속한 채 변화·관계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파도 타는 자유와 안락의 유희를 누리는 관점적 1인칭 주체/주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