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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하는 모든 남성의 쓸쓸한 의식
김훈의 〈화장〉
인간은 물질에 좌우되는 동물이다. 유심론이니 유물론이니 하며 아직도 풀리지 않는 논쟁이 있지만, 인간은 물질의 지배를 받는 허약한 동물이다. 김훈의 〈화장〉 첫 문장 “운명하셨습니다”에서 ‘운명’은 육체의 운동이 정지되었다는 뜻이다. 당직 수련의가 시트를 끌어당겨 아내의 얼굴을 덮은 것도,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으로 떨어진 것도 아내의 육체에 대한 조치이고 정보이다. 〈화장〉은 병들고 시들어가는 인간의 몸과 그 몸을 바라보는 주인공 오 상무의 반응을 치밀하고 정교하게 묘사한다. 오 상무는 생명의 아름다움이 아직 노화되지 않은 건강한 육체에서 온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소설은 인간의 몸이 물질,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병이 들고, 병이 들면 볼품이 없어지고, 화장을 하면 한줌 재밖에 남지 않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소설은 여섯 개의 구성으로 전개된다. ①아내가 죽었다. ⓶ 빈소가 차려졌다. ⓷ 추은주를 기억한다. ④ 광고기획안 회의를 한다. ⑤ 다시 추은주를 기억한다. ⑥ 아내를 화장하고 개를 안락사 시킨다. 이 소설은 모든 남성이 의식의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본능을 섬세하지만 동시에 아주 색적인 언어를 동원해 드러냈다.
뇌종양을 앓던 아내가 이 년 동안 고통스럽게 투병하다가 죽자 화장품 회사 오 상무는 장례 절차를 준비한다. 그는 잡지사 여기자였던 약혼자가 번 돈으로 대학원을 마치고 그 약혼자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으며 단칸 전세에서 시작해 십억 원 대 단독주택을 마련했다. 화장품회사 말단사원에서 시작해 상무까지 승진할 만큼 열심히 일했고 능력도 인정받았다. 오 상무는 뇌종양에 걸린 아내를 돌보다 이제 아내의 죽음을 맞았다. 오 상무 역시 전립선염으로 인해 배뇨가 어려워 고통을 겪고 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통보받던 순간 터질듯한 방광의 무게에 짓눌려서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무거움을 느낀다. 빈소를 차린 뒤 오 상무는 죽은 아내의 치료비와 병실료를 지불한다. 사장은 전화를 걸어 여름 신상품 광고기획을 마무리해달라고 지시한다. 오 상무는 ‘내면여행’과 ‘가벼움’이라는 두 가지 시안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한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면서 오 상무는 회사 부하 직원인 ‘추은주’를 떠올린다. 오 상무는 시종일관 건조하고 합리적이다. 그의 마음에는 감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 그가 감성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추은주에 대해서이다. 젊은 여성의 육체에 매료되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오 상무는 육체의 소멸과 소생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장례식을 마친 오 상무는 아내가 키우던 진돗개 ‘보리’를 안락사 시킨다. 회사 직원에게 여름 광고 전략으로 ‘가벼움’을 선택하라고 지시한 그는 깊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의 육체가 메말라가는 과정, 부하 직원 추은주의 육체에 대한 매혹, 오 상무의 업무 처리가 서로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죽음을 앞둔 몸, 젊고 매력적인 몸이 오 상무가 근무하는 화장품 회사의 제품 광고 결정에 반영되면서 한편에서는 죽음을 묘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매혹을 묘사한다. 죽음과 매혹은 몸의 양면성이다. 인간의 매혹은 죽음을 향해 끌려간다. 그렇게 해서 노화이든 질병이든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맞닥뜨린 인간의 몸은 마침내 매혹이라고는 한 올 덩어리도 없이 화장되기 좋은 형태가 된다.
이런 인간의 삶에 대해 칼 세이건은 말하기를 “삶은 인간에게 환상적인 많은 것들을 선사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 모두 도로 빼앗아버린다. 맛만 보고 빼앗겨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배고픈 사람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딱 한 숟가락만 맛보게 하고는 상을 치워버리는 꼴이다.”라고 했다.
아내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오 상무는 병의 판정부터, 투병, 임종, 장례까지 죽음의 전 과정에 참여하여 죽음에 대해 경험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내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나 슬픔 역시 준비된 것이었고 따라서 매우 정제된 반응을 할 수 있다. 아내가 뇌종양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에도 오 상무에게는 당혹감이나 혼란 같은 것이 없었다. 대신 오 상무는 아내의 뇌종양 발병에 대한 의사의 설명, 병들어 죽어가는 아내의 육체에 대한 감각적 묘사, 현대의학이 질병과 죽음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단호한 표명들을 매우 객관적이고도 섬세하게 그린다. 아내의 뇌종양이 가져오는 고통을 오 상무는 알지 못하나, 그 역시 노화로 인해 지독한 배뇨장애를 겪고 있는데 이를 통해 죽어감의 고통을 안다. 질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질병에 걸린 인간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음을 안다. 죽은 뒤에 고통이 사라짐은 죽음의 완성이 물질적 존재인 인간이 겪는 몸의 고통이 종식됨을 의미하니 죽음은 현재완료의 사태이다.
아내가 뇌종양에 걸리기 삼 년 전에 오 상무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추은주를 보았다. 오 상무의 나이 쉰이 되었을 때였다. 중년이 언제부터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겠으나 나이 쉰이라는 것은 공자의 말씀을 빌리면 지천명이고 플라톤의 말을 빌려도 선의 이데아를 아는 때이다. 나이 마흔은 공자에 따르면 불혹이고 고대 그리스에 따르면 아크메, 그러니까 정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능력을 말하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육체적 능력만을 기준으로 삼아 여자의 정점은 스물두 살이라고 하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스물두 살부터 여성은, 또 거기에 더해 인간은 육체적으로 쇠락의 길로 들어선다는 뜻일 것이다. 그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출산의 역할만을 보았고 남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역할까지 보아서 스물두 살을 정점으로 삼았으니 남과 여를 불문하고 생물적 능력의 전성기는 당시로서는 그 나이였다. 현대의 연구로는 스물여섯 살에 정점을 찍고 노화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급전직하의 육체가 되는 것은 아니고 나이 쉰 전후가 되면 이른바 중년이 된다. 〈화장〉의 오 상무가 추은주를 처음 보았을 때의 나이이다.
중년기는 이전 생애주기보다 외모 변화와 신체의 노화, 사회관계와 가족관계의 변화, 부모・배우자・친구와의 결별, 죽음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하며 인생의 제2전환기로서 여러 특징들이 나타난다. 오 상무가 추은주를 발견하고 느낀 감정에서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라는 것은 추은주의 몸에 대한 감정이다. “당신의 몸은 구석자리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결제서류를 작성하고 있던 당신의 둥근 어깨와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이 당신의 두 뺨에 드리운 그늘은 내 눈앞에서 의심할 수 없이 뚜렷했고 완연했습니다.” 그는 추은주의 몸에서 살아있음을 발견했다. “아, 살아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기득한 것이로구나 싶어서, 저의 마음속에 조바심이 일었습니다.”
화학자이자 물리학자로 시작해 발달심리학자이자 노화전문가로 전환했던 로버트 하비구스트(Robert James Havighurst)는 자신의 저서인 Developmental Tasks and Education에서 말하기를 중년기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지만 동시에 노화에 따른 생물학적 변화를 가장 크게 느낀다고 했다. 오 상무는 오너가 있는 대기업 급 화장품 회사의 상무이다. 상무 위에는 그 오너 한 사람밖에 없다. 그러니 그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고 상중인데도 오너인 사장이 전화를 걸어 재고나 다름없는 신상품의 마케팅 전략을 확정해서 집행하라고 했는데, 이는 그가 화장품업계에서 마케팅의 역량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영향력이 절정에 달해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에 그는 언제부터인지 전립선염을 앓고 있다. 추측하건대 그가 전립선염을 앓기 시작한 때는 아내가 뇌종양에 걸리기 이전이다. 추은주가 청첩장을 줄 때에도 그는 전립선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작품에는 전립선염으로 묘사되나 증세를 보아서는 전립샘비대증이다. 이 질환은 요로 폐쇄 증상을 수반할 수 있는데 오 상무가 이 증상을 겪고 있다. 전립샘비대증은 주로 사십대 이후에서 찾아온다. 그러니 전립샘비대증에 걸렸다는 것은 몸의 노화가 시작됐다는 것이며 노화를 몸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 상무의 질환은 완치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 상무는 생명의 유한성, 육체의 유한성에다가 노화와 죽음의 필연성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는 쇠락해가는 자신의 몸을 어쩔 수 없이 그냥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급전직하의 노화가 시작되는 나이를 미국 듀크대 연구팀은 서른여덟 살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아내가 뇌종양에 걸리기 전에 오 상무는 추은주를 의식의 중심에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은주에 대한 생각은 아내의 질병과 관계가 없다. 오 상무는 중년에 새롭게 인식되는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여성의 몸’에 초점을 맞추고 추은주가 가진 섹슈얼리티와 생식성에 집중한다. 평론가들은 여성의 몸에 대해 과도하게 집중하는 오 상무의 태도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작가를 향해 말하는 것이기도 한데, “자신의 남성성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남성의 과장된 몸짓”(심진경)이라거나 “복합적인 중년에 대한 탐색을 단순화시키고, 더러는 왜곡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김경수)라고 비판하나 이것은 그야말로 비판을 위한 비판이고 늙어가는 몸을 의식하는 중년의 남자에게 이런 태도는 보편적인 내면이다. 그것을 내면적으로 소화하느냐 아니면 상대방에게 행사하느냐에 따라 성추행이 안 되고 되는 것이다. 법은 인간의 내면까지 규제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두고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도덕에 앞서는 것이 본능이다.
인간사회가 약속한 사회윤리가 있다 보니 그에 대해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중년에 들어선 남성들은 관음증은 가질지언정 젊은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과 언급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않을 뿐이다. 무의식 안에 번식의 본능이 있는 남성은 여성의 생식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러다 보니 남성은 젊은 여성을 찾는다. 오 상무가 추은주를 보며 떠올리는 단어, 둥근 어깨·머리카락·두 뺨·빗장뼈·가슴의 융기·가슴뼈·어깨뼈·푸른 정맥 등이 오 상무의 젊은 여성에 대한 연민을 잘 보여준다.
반면에 오 상무의 몸은 고환·근력·느낌·마려움·무게·방광·배설·변기·병원·비뇨기과·잠·짝변기·사우나·성기·소변·오줌·오줌방울·요도·통증·항문·화장실 등의 명사, 기다려다·나가다·난감하다·남다·내보내다·녹다·누다·느끼다·다급하다·덜렁거리다·들락거리다·따라가다·딱딱하다·떨어지다·뜨겁다·맺히다·무겁다·부풀다·빠져나오다·빼다·삼투되다·스미다·쓰라리다·(힘을)주다·지지다·짓누르다·추스르다·허우적거리다·힘들다 등의 동사와 형용사로 묘사된다.
자신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는 오 상무의 심리는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부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건강한 몸을 가진 이들은 추은주·오미영·김민수·박진수·정철수·보리처럼 이름이 적힌다. 그러나 나이가 들거나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아내·오 상무·사장 등을 이름이 거세된 채 등장시킨다. 오 상무는 자신의 이름조차도 드러내지 못하며 아내에 대해서도 질병을 앓다 소멸된 몸이라는 생각에서 이름 적기를 하지 않는다. 오 상무에게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이들은 존재자가 아닌 것이며 그저 아무개 수준으로 불리어도 무방하다.
반면에 오 상무는 추은주에 대해 묘사할 때 경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추은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 젊고 건강한 몸에 대한 존경이다. 추은주에 대한 묘사는 삶에 대한 생기와 촉촉함으로 가득 찼다. 오 상무가 아내의 죽음을 ‘정신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인식하듯이 추은주에 대한 묘사도 시종일관 추은주의 ‘몸’에 대해 물질적으로 묘사한다. 오 상무가 하는 행위는 추은주의 건강한 몸에 대해 바라보고 음미하며 존경하는 것이다.
오 상무는 자신의 몸과 추은주의 몸을 비교한다. 여기에 아내는 개입되지 않는다. 나중에는 오 상무의 마음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나 추은주를 발견하던 때에는 아내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때 아내는 뇌종양을 앓기 전이었으니 노화가 진행되는 몸이긴 하지만 죽음에 가까이 가지 않았기에 개입되지 않았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노화는 진행되나 본능은 여전히 살아있는 남성성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오 상무 뿐 아니라 모든 포유동물의 수컷이 갖고 있는 쿨리지 효과도 작용할 것이다. 거의 모든 포유동물의 숫컷은 동일한 암컷과 교미를 지속하면 지친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암컷과 교미하면 새로운 흥분감을 느낀다.
오 상무는 적절한 거리를 두고 추은주를 관찰할 뿐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윤리이다. 인간은 본능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그 갈등에서 본능이 승리하면 사회적으로는 물의가 일어나겠으나 그것을 나쁘게 볼 수는 없다. 어차피 본능을 따라간 것이므로 윤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돌을 던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본능을 누르고 윤리를 선택한다. 본능을 선택하기에는 사회적 비난의 위험부담이 매우 크고 이미 쌓은 것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리는 인간의 본능을 규제한다. 왜냐하면 본능이 무제한 발현되면 사회적으로 약한 인간들이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특히 본능보다 윤리에 충실한 모습은 ‘동방예의지국’ 한국이 서양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오 상무도 그러하다. 대략 이천 년 기준 십억 대의 단독주택과 대기업 급 화장품 회사의 상무, 아내와 딸, 그런 기득권을 자신의 본능과 바꾸기에는 그는 너무 현명하고 한편으로는 용기가 없고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가장 결정적일 텐데 노화되었다. 그래서 오 상무는 윤리를 생각하며 추은주의 온기는 적당히 느끼면서 윤리라는 가시에 찔리지 않을 만큼 거리도 유지한다. 그는 고슴도치 딜레마에서 거리두기를 선택했다. 오 상무는 몸 대신 생각을 현란하게 가동한다.
따라서 오 상무와 추은주 사이에는 어떤 상호성의 법칙도 있지 않다.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깊은 정서적 유대와 헌신을 공유하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된다. 그러나 오 상무와 추은주 사이의 관계는 사회적 성취를 이룬 사람 대 평균 이하의 근무평점을 받는 사람, 노화가 많이 진행된 쉰 살이 넘은 사람 대 이제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한 사람 등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또한 직장 상사 대 사원의 관계이다 보니 공감대도 없다. 이것은 추은주가 남편의 직장 발령에 따라 외국으로 가면서 상무인 오 상무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떠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오 상무에게 추은주는 자신의 노화를 확인하고 젊은 몸을 선망하는 물적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체 없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당신이 당신의 몸속의 노을빛 살 속으로, 내가 닿을 수 없는 살의 오지 속으로 영영 저물어버릴 것 같은 조바심으로 나는 졸아들었고, 분기 말의 저녁마다 당신의 어깨는 저무는 날의 위태로운 노을로 내 앞에 번져 있었습니다.”라고 오 상무는 고백한다.
추은주가 결혼하던 날 오 상무는 전라북도 지역으로 출장 중이었다. 추은주가 제주에서 신혼의 첫 밤을 보낼 때 오 상무는 화장품 마진율 인상을 요구하는 총판장들과 룸살롱에서 술을 마셨고 만경강 어귀 포구마을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 여관방에서 당신의 몸을 생각하는 일은 불우했습니다. 당신의 몸속에서, 강이 흐르고 노을이 지고 바람이 불어서 안개가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고 새떼들이 내려와 앉는 환영이 밤새 내 마음속에 아른거렸습니다.”
추은주는 첫날 저녁 빈소에 왔다. 오 상무는 추은주가 어디론가 출장을 가거나 휴가를 가서 빈소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추은주가 조문할 때 오 상무는 추은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블루진 바지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 엎드린 추은주의 등과 엉덩이는 완연한 몸이었다. 사망 후 본 아내의 몸, 뼈와 가죽뿐인 몸, 엉덩이 살이 모두 말라버린 아내의 몸과 대비되는 몸이었다. 오 상무는 고개를 흔들어서 생각을 떨쳐냈다.
그런 마음은 추은주가 결혼해서 출산한 뒤에도 계속 됐다. “어쩌다가 회사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당신과 마주칠 때, 당신의 몸에서는 젊은 어머니의 젖냄새가 풍겼습니다. 얿고도 비린 냄새였습니다. 가까운 냄새인지 먼 냄새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냄새였지요. 확실하고도 모호한 냄새였습니다. 당신의 몸냄새는 저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왔고, 저는 어쩔 수 없이 당신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첫번째 수술 후 여섯달만에 재발해 “두번째 수술이 끝나고 아내가 회복실에서 병실로 실려왔을 때 나는 아내가 이제 그만 죽기를 바랐다. 그것만이 나의 사랑이며 성실성일 것이었다. 아내는 삭정이처럼 드러난 뼈대로 다만 숨을 쉬고 있었다.” 칼 세이건은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는 삶의 내용물을 모두 더한 합계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화장품 회사에서 업무에 대한 평가를 숫자로 따지는 오 상무에게 삶과 죽음의 가치 역시 계량될 수 있다. 하긴 삶 자체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 삶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채워 넣어서 가치가 매겨지는 것일 테다. 그런 점에서 삶은 무엇을 채워 넣는 그릇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삶에 대해 평가를 내리려면 하나의 삶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의 가치를 모두 더해야 한다.
잡지사 기자로 오 상무의 학업을 지원했고 십억 대의 단독주택까지 장만하는 데 일조한 것이 아내의 삶 안에 들어가는 긍정적 가치일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건강했을 테니 그것도 한 때 긍정적 가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뇌종양이 재발해 죽음을 눈앞에 둔 아내의 삶에는 긍정적 가치보다 부정적 가치가 훨씬 더 많이 들어 있다. 불치병에 걸려 고통을 나날을 보내는 아내는 병상에 누운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히려 오 상무와 딸의 노동력을 불필요하게 소모한다. 과거의 인생이 아무리 아름다웠고 오 상무도 아내를 또는 아내의 몸을 사랑했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죽음을 예약한 상태인 아내에게는 미래가치가 없다. 오 상무는 삶 그 자체에도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에게 삶은 오직 내용물이 가진 가치로 평가된다.
아내의 몸을 직접 씻긴 오 상무는 추은주를 향한 속마음을 드러낸다. “그 새벽 두시의 병원 복도에서 당신의 아기의 입속을 생각했습니다. 당신께 달려가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사랑한다고, 시급히 자백하지 않으면 아내와 저와 그리고 이 병원과 울트라 마린블루의 화장품과 이미지들이 모두 일시에 증발해버리고 말 것 같은 조바심으로 저는 발을 구르고 싶었습니다.” 죽어가는 아내에 비해 추은주는 오 상무 기준으로 볼 때 내용물이 가진 가치가 높다. 그 가치가 오 상무로 하여금 추은주에 대해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도록 한다.
여름 광고 카피를 위해 오 상무는 두 명의 젊은 과장 박진수 및 정철수와 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개의 카피는 ‘내면여행’과 ‘가벼움’이었다. 둘 가운데 하나를 발인하고 화장하는 날까지 결정해야 했다. 오 상무는 선뜻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가벼움’은 화장품 마케팅의 콘셉트로 등장하지만 이는 오 상무의 심리상태이기도 하다. 아내는 병 때문에 몸무게가 삼십 킬로그램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벼운’ 존재이다. 아내의 사망 이후 절차는 매우 가볍게 진행됐다. 유해는 장례를 치르기 전까지 병원에서 준비한 냉동실에 보관되고, 장례 절차도 영안실 직원이 전화로 간단히 해결해서, 죽음이라는 무거운 사태를 오 상무는 가볍게 마칠 수 있었다. 죽은 아내의 몸은 화장(火葬)을 통해 더욱 가벼워졌다.
가벼움은 추은주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오 상무에게 청첩장을 전하는 추은주를 맞으면서 오 상무는 추은주의 결혼을 날아감, 즉 가벼움으로 해석한다. 추은주는 아내의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남으로써 오 상무를 더욱 가볍게 했다.
오 상무는 아내의 화장을 마치고 나서 ‘여름 화장품’의 광고 구상을 ‘내면여행’ 대신 ‘가벼워진다’로 잡았다. 이는 오 상무에게 남은 것이 ‘가벼움’이라는 것이다. 아내의 뇌종양, 추은주라는 존재를 떨치고 오 상무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가벼움으로 해석된다. 그 가벼움은 일상을 초월한 가벼움이 아니고 껍데기만 남은 수동적인 가벼움이며 허허벌판 같은 가벼움이다. “추은주도 돌아가고 없었다. 빈소는 또 비었고, 영정 속에서 아내는 엷게 웃고 있었다.”
아내는 죽어서 화장되었고, 아내가 기르던 보리는 안락사 되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온 오 상무는 퇴사를 신청한 추은주의 근무 평점을 인사담당이사에게 물어본 뒤 인사부 직원이 가져온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경리과 직원이 가져다 준 부의금으로는 딸의 혼수를 위해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는다. 내려놓음의 이 과정은 매우 건조하며 어떤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과 삶이 물질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시사한다.
인간은 예고된 죽음이라 해도 막상 죽음의 광경을 목격하면 당혹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오 상무는 장례 과정에서 회사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하며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아내가 좋아했던 개 ‘보리’를 안락사 시키면서 죽음을 향한 불안감을 무화시킨다. 아내의 죽음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인간의 슬픔과 고독감 같은 정서도 통제한다. 그에게서는 인간의 ‘영혼’을 보내는 의식은 없고 병들어 죽는 몸을 보내는 의식만이 있다. 자신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던 아내의 오랜 투명생활이 끝나자 그는 회사의 여름 상품 광고 구상을 ‘내면여행’이 아닌 ‘가벼워진다’로 결정하고는 모처럼 깊은 잠에 빠진다.
떠나버리는 또는 떠나보내는 삶에 대해 오 상무는 인생이 가진 비의를 숨김없이 은유와 상징으로 드러낸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아내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죽은 아내의 몸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더욱이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는 젊고 건강한 추은주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잔인하다. 아내의 장례기간 중 추은주가 어디론가 출장을 가거나 휴가를 가서 빈소에 나타나지 말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이성적이고 냉정한 그가 추은주 앞에서는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잔인하다. 그런 주인공을 두고 소설가는 어느 모임에서인가 “개X놈”이라고 표현했다는 뉴스가 있는데, 아마도 X는 ‘잡’일 것이다. 오 상무는 ‘개X놈’이라서 너무나 인간적이다.
아내와 추은주가 떠난 지금, 그의 마음은 가볍다. 아내와의 긴 여행도, 추은주를 향한 내면여행도 끝났다. 딸도 두 달 뒤면 결혼해서 유학 가는 사위를 따라 뉴욕으로 갈 것이다. 그는 이제 가벼워졌다. 가벼워짐은 관계된 또는 관계하는 사물들이 사라질 때 이루어진다. 그의 의식조차도 허물어져 내렸고 증발해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전립샘비대증으로 고생하는 예순을 향해 가는,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매력적이지 않은 남자의 쓸쓸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