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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의 성립과 분열 그 상황 속에서의 유대의 상황
序 論
이천년 전의 기독교 역사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밑바탕이 된 당시의 사회와 문화 또한 역사적 사실들이 매우 중요하게 나타난다.
즉 기독교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초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전과 이후의 시대상을 바르게 이해하여야만 올바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헬레니즘이 유대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헬라문화는 이후 유럽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문화로 꽃피워 졌고 크리스트교는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에 접목되어 당시의 로마에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에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의 성립과 분열 그 상황 속에서의 유대의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
本 論
A.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1. 알렉산더의 정복과 정책 a. 알렉산더의 통일제국 다니엘서 2장에는 느부갓네살이 꾼 꿈에 큰 우상이 나오고(단2:31-35) 그에 대한 해석이 다니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7장에는 다니엘이 꾼 꿈과 환상 중에 네 짐승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8장에는 그 꿈과 그 해석 중에 여러 나라들이 나오는데 그 셋째가 헬라로(단8:21) 단10:2 에서는 헬라 군이 단11:2 에서는 헬라 국이 나온다.
주전 5세기 중엽부터 도시 국가 간의 치열한 전쟁이 전개되어 오다가 서로 패하고 망하게 되었다. 그때에 북방의 야만족으로 알려진 마케도니아가 헬라 세계에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
그때의 마케도니아의 지도자는 필립 2세(382-336 B.C)였는데 그는 정력적인 독재자였다. 그는 군제를 개혁하고 트라키아(Thrakia)해안의 광산 지구를 공략하여 재력을 얻었다(357 B.C).
그는 세계정복을 꿈꾸어 왔으나 고도 아이기아(Aigia)에서 암살당했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둔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주전 336년에 약관의 나이 20세에 필립 2세의 뒤를 이어 마케도니아 왕이 된 알렉산더는 헬라의 통일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주전 334년경 막강한 장비와 무기를 갖춘 정예 3만5천의 병력을 이끌고 페르시아로 진군하여 소아시아, 두로, 가사 등 주요지역을 단숨에 공략했다.
그가 정복한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웠으며 나일강 델타지역에 세운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의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그 외 그의 정복사업은 이오니아 바다로 부터 인도의 푼잡까지 그리고 코카사스 산맥으로부터 리비아 사막과 애굽 국경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즉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그리스 세계와 오리엔트 세계와의 통합이 이루어 졌으며 그리고 그의 동서 융합 정책으로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문화권의 융합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래서 이 지역이 하나의 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10여년이란 짧은 시일에 전무한 세계최대 제국을 건설했던 알렉산더도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B.C 323년 33세로 별세하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로마가 그리스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의 역사를 헬레니즘 시대라고 구분한다.
알렉산더의 정복결과 이루어진 융합 정책으로 그리스와 동방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문명이 형성되었다. 이 문명을 고전적 그리스 문화와 구분하여 헬레니즘 문화라 구분한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탄생은 전적인 그의 융합 정책으로 이루어 졌는데 그 첫째로 결혼 정책으로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시킴으로써 융합 정책을 폈으며 둘째로 동서의 인종이 함께 거주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많은 교통로를 개척하고 통상을 원활하게 하였으며 흠정화폐를 발행하여 그의 지배 영역에서 사용하게 하였다.
b. 알렉산더의 동서 융합정책 동서 문화가 융합 되는 가운데서도 정치, 경제, 풍속, 제도 등의 면에서는 동방의 전통이 견지 되었다.
알렉산더 자신도 동방의 제도를 답습하여 폐르시아식 의관을 사용하였고 신하들에게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그러나 언어, 학문, 예술의 분야에서는 그리스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특히 그리스어는(코이네 헬라어)는 그의 전 영역의 공통어로서 동방세계 전역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언어는 지중해(동부) 세계의 공용어가 되어 거의 6세기나 지속되었다.
2. 헬레니즘 세계의 주요 국가 알렉산더 대왕의 뜻하지 않은 죽음은 그가 이룩했던 대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의 제국은 그의 장군들에 의해 크게 3분되었다.
안티고누스의 후계자들은 마케도니아를 셀류커스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그리고 프톨레미의 후계자들은 에집트를 지배하였다. 이들 국가 가장 강력했고 직접적으로 유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국과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국이었다.
a 프톨레미 왕국 (에집트) 마케도니아의 장군들 중의 하나인 프톨레미 소테르(Ptolemy I Soter B.C 367-282))는 알렉산더가 별세한 후에 에집트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통치자들보다 심리적으로 유리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시신(屍身)을 입수하여 알렉산드리아 시(市)에 안치하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B.C 305년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영토확장에 힘썼으며 이후 프톨레미 2세 3세 4세에 걸쳐 확장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 당시 에집트는 다수의 에집트 원주민과 자유로운 폴리스의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 인들이 섞여 있어서 그 통치에 어려움이 있었다.
왕은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에집트인 통치에는 에집트 고대의 파라오 정책을 그리스 인들에게는 신성시된 군주로 행세하였다. 당시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문화적으로나 상업으로나 헬레니즘 세계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다.
b 셀류커스 왕국 (시리아)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는 알렉산더 휘하 장군들 중의 하나인 셀류커스 1세(Seleucus I Nicator B.C 258-280) 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바벨론 총독으로서 세력을 확장하여 동쪽으로 인더스까지 지배세력을 확장했으나 마우리아 왕조(Mauryan dynasty)의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왕위 계승자들은 선대의 영토를 많이 잃었다. 6대인 안티오쿠스 3세(223-187 B.C)는 선왕대의 상실했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확장정책과 때맞추어 로마의 동방으로의 확장정책과 충돌을 일으켜 그 확장 정책은 위축되었고 국력은 쇠약해졌다. B.C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에 의해 로마에 예속되기 까지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였다.
B 헬레니즘 세계의 사상과 종교
1. 사 상
알렉산더의 원정과 동서 융합정책으로 고양된 세계 동포주의 는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사상과 사회의 공통적 특징이었다. 폴리스의 공동체적 생활보다는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두드러졌다.
상대주의와 세계동포주의, 개인주의와 도피주의는 헬레니즘 시대의 모든 그리스 문화의 양상을 특징지었다. 철학사상에는 에피쿠로스학파, 스토아학파, 회의학파 등이 있었는데 각각 그 주장의 차이는 있었으나 이러한 근본적인 특징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에피크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기독교 초기 로마세계의 상류사회를 지배하는 주된 사상이었다.
a 스토아학파
에피크로스학파와 나란히 나타난 헬레니즘-로마시대 즉 고대 그리스 시대 말기에서 로마 지배의 시대에 걸치는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 유파로서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 초기 스토아학파 B.C 3세기의 키프로스의 제논에 의해 시작되었고 뒤이어 크리시포스(ChrysipPos)를 대표자로 한다. 철학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에서 윤리학에 중점을 두었다.
또 논리학의 역사에서는 명제 논리를 성립시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설을 계승하여 존재는 모두 영원히 생동하는 화기로 이루어 졌고 이것이 법칙(Logos)에 따라 생성 변화하면서 만물의 세계가 성립한다고 하는 유물론 적이면서 변증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철학대사전, (서울:한국이데아,1992),P.601.
이 Logos는 우주와 인간을 함께 지배하는 보편적인 `세계이성'으로 해설된다. 그리고 이러한 견지에서 윤리학이 말해졌다.
인간의 본성(자연도 세계이성의 일부를 나누어 가진 것이므로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사는 것 즉 그리스도인도, 이국인도, 노예의 주인도, 노예도 전체의 인간의 어떠한 차별도 없이 비이성적인 욕망을 제거하고 인간 본성인 이성에 의해 평정, 부동(平靜, 不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유덕한 생활방식'이라 가르쳤다.
스토아학파는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동시에 세계주의적 이기도한 사상인데 그것은 당시의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세계이성의 지배라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숙명이라는 견해도 신의 섭리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사상도 생길 소지가 있다.
* 중기 스토아 학파
B.C 2세기의 로드스의 파나이티오스(Panaitios)와 포세이도니오스(Poseidonio
s)를 대표자로 하고 운명 그리고 사회적 억압에의 수동적인 인종이라는 지배계급의 뜻에 부합되는 사상이 만들어 졌다.
동시에 그 자연 법적 사상은 로마 법학의 철학적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로마에서는 철학이 정도가 높은 교양에는 필요부가결한 것으로 되었다. 스토아학파와 더불어 철학이 비로소 로마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이다.
* 후기 스토아 학파
A.D 1세기에 제정로마에 이르고 이 제국의 세계 국가론의 기초가 되고 또 쇠퇴하고 있는 노예제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자연과의 명상적 합일 내면적 자유에로의 침잠이라는 도피적인 정신적 위안을 주는 관념론으로 변질하고 기독교를 로마제국 내에 보급하는 길을 닦았다.
그 대표자에는 세네카(L.A.Seneca), 에피크터트스(Epikteto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us)등이 있다 철학대사전, ( 서울:한국이데아,1992),P.601.
b 에피크로스학파
에피크로스학파는 사상가들은 스토아학파의 숙적(宿敵)들이었다. 이 두 진영 간의 논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사모스의 에피크로스(Epikuros B.C 341-270)이다.
그는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이며 유물론자이다. 이 학파는 에피크로스가 기원전 306년 아테네의 자기 정원에서 시작했으며 학교를 세우고 이것을 정원학교라 불렀다.
그의 스승은 나우시파네스였으며 그는 데모크리스토프학파의 인물이었다. 에피크로스 학파의 시조 헬레니즘 시대란 외세의 침입을 받아 그 지배하에 있던 시대로 그로 인하여 그리스 본래의 문화에 외국의 문화가 혼합되었으며 이 상태는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고전적인 철학도 그 모습이 퇴색되어 주로 개인적인 인생문제가 주된 관심이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하여 공허가운데서 운동하는 원자로부터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지만 원자는 '직선운동에서 빗나간' 자의성을 갖는다고 보고 데모크리토스의 기계적 결정론에 새로운 견해를 가했다 철학대사전,(서울:한국이데아,1992),P.678.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말해둬야 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인 람프사코스의 메트로도로스는 쾌락설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속하는 아폴로도로스는 책을 많이 쓴 저술가이고 '정원의 창주'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돈의 제논과 파이드로스는 키케로가 그들의 강의를 듣고 존경한 사람들이다. 시론은 베르길리우스의 스승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가다라의 필로데모스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저서들의 대부분은 '헤르쿨라네움 문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주의에 관한 풍부한 사료(史料)로 되는 것은, 루크레씨우스 카루스( B.C 96-55)이다. 그의 교훈시 '자연에 관해서'는 에피크로스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혁신한 것을 글자 그대로 서술하려고 한다.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서울:이문출판사,1983),P.332.
에피크로스학파는 당시의 다른 학파와 마찬가지로 수신처세(修身處世)의 윤리학(倫理學)을 주로 논(論)하였으며 특히 쾌락(快樂)을 중시하였다. 에피크로스는 쾌락을 선(善)으로 고통(苦痛)을 악으로 보았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아무런 쾌락이나 취하여 도리어 그 부작용으로 일어나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여 선택함으로 영속적인 쾌락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쾌락은 일시적 환락(歡樂)에 취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서 생기는 불만이 없는 생활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P.. 28-29.
c 회의(懷疑)학파
당시의 여러 학파들이 각각 자신의 주장이 진리(眞理)라고 주장하는데다 정치적 도덕적 생활까지 혼란해지자 모든 기성 진리에 대한 회의가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0.
회의학파(懷疑學派)의 창시자는 퓨론(Purrhon, 360-270 B.C)인데 침묵을 회의론자 다운 태도라 여겼기 때문에 아무런 저술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티몬(Timon)과 같은 제자들의 저술에 의하여 또는 반대자들의 언급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퓨론에 있어서는 회의가 아카데미 학파에 있어서보다 약간 더 철저하다.
그의 주장이 낳은 결과는 역시 판단중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퓨론에게 있어서도 회의는 긍정적인 뜻을 갖게 되는데 리런 회의는 윤리적인 회의로 된다.
그리고 이 윤리적인 회의는 <나>를 환경의 요구로 부터 해방시켜주며 따라서 <나>가 완전한 <나>로 되어, 한결같이 <나>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요하네스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강 성위,(서울:이문출판사,1983),P.350.
이러한 판단중지에서 영혼의 안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의 판단을 중지해 버리면 모든 사물에 대하여 무관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부동심(不動心), 에피크로스학파에서 말하는 마음의 안정(Ataraxie)을 얻을 수 있다.
아르케실라오스(Arkesilaos, 315-241 B.C)는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는 회의론자의 표어까지도 의심할 만큼 극단적인 회의가였다.
카르네아데스(Karneades, 214-129 B.C)는 신(神)이나 진리(眞理)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론을 내세워 논쟁을 일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실재로 생존하고 행동하기 위하여 “아마 그럴 것이다”하는 정도의 개연적 판단(蓋然的 判斷)은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2.
2. 종 교
헬레니즘 시대에도 올림푸스의 신(神)들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었다. 대체로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서 그리스의 다신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로 미약해 졌고 밀의 종교(密儀宗敎)가 활기를 띄게 되었는데 이들은 구속(球贖)과 영생을 약속하였다.
a 밀의 종교(密議宗敎)
비밀의식에 참여함으로 개인의 심령이 구제 된다고 하는 소위 밀의 종교(密議宗敎, Mystery Religion)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리나 의식이 고대 신화(神話)에 기초한 밀의 종교(密議宗敎)는 그들의 입회 의식에서 개종자에게 정죄와 정결의 관념을 일깨워 주었다. 밀의 종교(密議宗敎)는 정교한 의식의 순서와 윤리의 규범을 만들었고 신실한 신도들에게는 영광스러운 불멸의 보상을 약속했다.
데메테르(Demeter)신(神), 디오니수스(Dionisus)신(神)등의 그리스 적인 밀의 종교가 아직도 일부에서 신봉되어오고 있었으나 동방에서 들어온 밀의 종교(密議宗敎)가 점점 그 세력을 확장 하였다.
C 헬레니즘 세계하의 유대
1. 프톨레미(Ptolemy)왕조 시대의 유대 알렉산더 대왕의 별세(別世)한 후 그의 장군들에 의하여 광대한 영토는 분할 통치 되었다.
주전 323-301년 사이에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커스왕조 두 나라는 팔레스틴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계속하여 이 지역은 다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B.C 301년의 입수스(Ipsus)전투 이후 B.C 198년까지 팔레스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하에 있었다.
프톨레미 치세 중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들의 종교화 문화적 전통을 지키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 유대인의 통치는 유대의 제사장에게 위임되었다. 프톨레미왕조는 예루살렘에 수비대를 주둔시켰으나 총독을 두지는 않았다. 내적(內的)인 행정은 유대인의 자치에 맡겨져서 대제사장의 지도하에 제사장과 평신도로 구성된 장로회의(Council of Elders)가 주장하였다.
프톨레미왕조 지배기간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은 예루살렘 제사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가 완전히 분리된 것이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혈통적인 혼합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불결하다고 간주되어 성전의 재건이나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북부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인 베델, 길갈, 실로, 세겜 등지를 방문하였다. 토착 사마리아 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세겜의 옛 성소 가까이에 있는 그리심 산위에 새로운 제사의 터를 세웠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36.
유대지역 즉 예루살렘 시나 유대인이 거주하는 인접 지역은 그리스화한 헬레니즘 도시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들 도시들은 상당수의 그리스인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거주했는데 점점 그리스화 되었다.
이러한 연안도시는 아플로니아(Apollonia), 욥바(Joppa), 아조터스(Azotus), 가자(Gaza)등이 있으며 사마리아 지역도 사마리아시(市)와 스키도 폴리스(Scythopolis)에 상당수의 그리스인이 살고 있었다.
에집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에집트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종교생활을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자의(自意)로 알렉산드리아, 아리스노우, 헤르모폴리스, 에드프 등지의 나머지 백성과 떨어진 특별한 구역에 살았다.
그러나 에집트 정부에서 그들을 강제로 따로 격리시키는 일은 없었다. 시민의 권리면에서도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마케도니아인들과 그리스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2. 셀류커스(Seleucus)왕조시대의 유대 에굽의 플레토미가(家)와 시리아의 셀류커가(家)의 수많은 전투가 있은 후 유대 지역은 드디어 플레토미가의 통치를 떠나 셀류커스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즉 B.C 198년 셀류커스가의 안티오쿠스3세가 에집트인들과 싸워 승리하고 팔레스틴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3세는 페르시아 제국때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특권들을 다시 그들에게 부여하고 성전 제사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며 성전수리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의 정책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B.C 190년 소아시아의 미그네시아 전투에서 안티오쿠스3세가 로마군에게 패함으로써 셀류커스왕조의 쇠퇴가 시작되었고 B.C 188년 그가 죽자 유대 역사상 문제가 많은 시기가 도래 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의 사후(死後) 왕위 쟁탈전 끝에 안티오쿠스 4세가 왕좌를 차지하였다. 그는 헬레니즘 찬양자로서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헬레니즘화 하려고 결심 하였다.
이 시기에 셀류커스왕조는 외부로부터의 심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에서 셀류커스왕조는 재정적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낀 안티오쿠스 4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직을 돈을 많이 내는 사람에게 팔았다.
그 결과 대제사장들이 자주 갈리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초기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 3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헬레니즘에 물든 유대인들은 오니아스를 배척하고 그의 동생 야손을 지지하였다.
야손은 왕에게 더 많은 조공을 약속함으로서 대제사장으로 지명받을 수 있었다. 당시 대제사장직은 행정직인 동시에 유대의 최고의 성직(聖職)이었는데, 그와 같은 최고의 성직의 매매(賣買)는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야손은 헬라 파 유대인들의 협조로 예루살렘에 체육관을 세우고 유대 소년을 헬라 관습에 따라 나체로 운동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풍조에 대하여 하시딤(Hasidim, 경건한자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대섭,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서울:성광문화사,1986),P.40.
야손의 가까운 조력자인 메네라우스는 제사장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안티오쿠스에게 야손 보다 더 많은 조공을 바침으로 야손 대신 대제사장에 임명되었다.
하시딤은 자격 없는 메네라우스가 금전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을 보고 격분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에집트를 복속시킬 수 있었으나 로마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전략상 유대지역을 장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폴로니우스 장군을 보내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대적자들을 학살하였으며 요세 아크라를 건설하고 군부대를 주둔시켰다(B.C 167).
할례나 안식일을 지키는 것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는 것 성경소유 등이 금지되었다. 메네라우스는 계속 대제사장으로 있었으나 이제 그는 야웨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곳에서 쥬티퍼를 섬기게 되었다.
D 마카비 전쟁과 유대통치
1. 마카비 독립전쟁- 아티오쿠스4세의 유대교 박해는 많은 순교자를 냈었다. 그는 특히 안식일에 유대인들을 학살함으로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아무 저항도 없이 순교해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도 경건한 하시딤 외에 율법에 충실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루살렘 북서쪽 마데인(Modein) 마을의 제사장 마타디아는 왕의 관리로부터 이방의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자 거부하였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이 앞으로 나와 희생제사를 드렸는데 그는 이것을 보고 분노하여 왕의 관리를 죽이고 제사 드리는 자도 죽였다.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마타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들과 함께 뭉쳤고 하시딤도 그들에게 동조하였다.
마타디아가 죽자 (B.C 166) 마카비라 불리우는 그의 셋째 아들 유다가 저항 운동을 지휘하게 되었다. 매우 유능하고 과감한 유다는 저항운동을 전면적인 독립전쟁으로 바꾸어 놓았고 또 성공적으로 싸웠다. 이 유대인의 투쟁은 그의 별명에 따라 마카비 전쟁이라고 불리운다.
셀류커스왕조에서는 그들의 반란초기에 과소평가하여 하급 장군들에게 분견대를 보내었으나 마카비는 유격전으로 계속적인 승리를 하게 되었고 이에 심각성을 인식 했을 때에도 안티오쿠스 당시 파르디아의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충분한 군대를 유대에 보낼 수 없었다.
이후 상당수의 시리아 군대가 유대에 파견되었으나 엠마오에서 유대의 마카비에게 대패하게 되었고 마카비는 승전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고 대제사장인 메네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도주하였다.
B.C 164년 12월 유다 마카비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쥬티퍼의 제단을 허물고 새로운 제단을 쌓았다.
마카비는 시리아의 요세인 아크라를 공격하자 안오쿠스 4세의 사망 후 실질적인 권한을 쥐게 된 리시아스가 직접 많은 군대를 끌고 진격해 왔다.
마카비는 그들에게 패하였고 그들은 권력투쟁의 문제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화해를 제의해 왔다. 유다 마카비는 종교적 자유와 더불어 정치적 자유의 획득도 목표로 하였으나 하시딤의 목적은 종교적 자유의 획득에 있었다.
결국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던 하시딤의 의견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유다 마카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의 추종자들과 계속적인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전쟁을 해 나갔다. 결국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 하였다가 B.C 막강한 시리아 군대에 의해 B.C160년 사망하였다.
2. 하스몬왕조
유다 마카비의 전사 후에 그의 동생 요나단이 저항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시리아군은 여러 차례 요나단의 유대 저항세력과 싸웠으나 그들을 완전히 진압할 수 없었다.
B.C 153년 알렉산더 발라스가 안티오쿠스4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데메트리우스1세를 대적하였다. 권력투쟁에서 양자는 다같이 유대인의 도움을 청했는데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대한 답례로 발라스는 요나단을 대제사장 및 유대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왕권과 제사장권한은 한사람에게 통합되었고 마치 옛날의 신정정치가 부활되는 듯하였다.
요나단이 시리아 장군에 의해 살해된 후 그의 현제인 시몬이 그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 당시 시리아는 또다시 내분 상태에 빠졌다.
이네 시몬은 데메트리우스를 지지함으로써 데메트리우스는 유대인들에게서 받던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후 유대 국민들과 사재는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와 대제사장으로 삼을 것을 결정 하였다.
이러한 결의에 의해 하스몬왕조가 합법화 되었다. 그러나 시몬은 B.C 134년 프톨레메호에 의해 살해되었고 두 아들마저 죽을 뻔 했으나 요한만이 살아남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요한힐카누스1세라는 칭호로 시몬의 뒤를 이었다.
몇 개월후 프톨레미호의 요청에 의해 안티오쿠스7세는 그의 지배권을 재확인 하기위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요한힐카누스는 항복하였다.
안티오쿠스는 유대의 자치권을 보장 했지만 예루살렘의 요세를 헐어버리고 시리아에 조공을 받치게 하였다. 마카비 일가는 마카비시대 초기에 하시딤과의 동맹을 맺었었다.
그러나 요나단의 통치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두개당파와 바리세당 그리고 에세네파등 세 당파가 있어 이들과 관계를 가졌다.
처음에 힐카누스는 바리세파와 좋은 관계를 가졌으나 그들 중에서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들과의 관계가 나빠지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게 되었다.
B.C 104년 힐카누스가 죽자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가 권좌에 올라 일년간 다스렸다. 힐카누스는 자신의 아내가 여왕이 되는 것을 원하였으나 아리스토불루스가 권력을 빼앗았다.
그는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어 굶겨 죽였고 자신의 동생들은 투옥시키고 한 동생은 암살했다. B.C 103년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자 그의 처가 세 동생을 석방 시켰다.
그녀는 그중 큰 형제인 알렉산더얀네우스를 대제사장 자리에 앉히고 그와 결혼 하였다. 얀네우스는 하스몬가에서 최초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얀네우스는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며 특히 바리세파와 분쟁하였다.
백성들은 바리세파의 편에 서 있었으며 시리아의 원조를 받아 얀네우스와 싸웠기 때문에 얀네우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그는 바리세인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하여 800명의 바리세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그들의 처자를 살해 하였다.
얀네우스의 사후 그의 처 알렉산드라는 권좌를 이어받고 대제사장직을 그의 맏아들 힐카누스2세에게 맡겼다.
알렉산드라는 죽은 남편의 충고에 따라 바리세파와 화해하였다. 알렉산드라가 죽은 다음(B.C 67년) 그녀의 아들인 힐카누스와 아리스도불루스와 권력문제로 싸우게 되었고 이 싸움을 이용하여 로마는 유대를 쉽게 정복하게 되었다(B.C 63년).
結 論
지금까지 헬라의 성립에서 시작하여 하스몬왕조의 몰락까지의 유대역사와 헬레니즘 문화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헬레니즘의 생성은 실로 유럽세계와 전세계에 주요한 사건이 된 것을 확인할 수 가있었다.
특히 헬레니즘세계는 당시유럽 지역과 지중해 지역의 문화를 동방의 문화와 접목시킴으로써 위대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이 문화는 고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와 역사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헬레니즘의 동서 융합정책으로 유대인들은 헬라군이 되어 다른 지역에 이주하게 되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사 드리기 위하여 서로 특별한 곳에 모여 살게 되었으며 프톨레미왕조 하의 알렉산드리아 같은 곳에서는 히브리 성경을 당시의 세계 공통어인 헬라어로 번역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70인경이다. 또한 언어적 통일로 로마시대에도 헬라어를 사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상이 쉽게 전파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물론 로마시대의 잘 닦여진 도로의 덕분도 있었지만 언어의 통일이야 말로 기독교 전파의 견인차적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유대인들은 프톨레미왕조의 통치 때 유대인과 사마리아의 분리가 있었고 셀류커스왕조의 시대에는 대제사장직이 매매되기도 하였으며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안티오쿠스4세의 박해는 가장 심한 박해였다. 이에 마카비전쟁이 시작되었고 유대는 하스몬왕조를 성립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가운데 예루살렘성전을 재건하려고 애를 섰으며 한 때는 쥬티퍼가 섬겨지던 그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려고 힘을 썼다.
이러한 가운데 메시아 대망(大望)사상은 싹이 텄으며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였다.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리스도 대망사상이 없었다면 예수의 부활 후 그리스도의 전파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같이 유대는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 헬라제국 프톨레미왕조 셀류커스왕조 헤롯가의 억압 속에서 메시아 대망사상을 키워왔으며 예수 그리스도 이후 로마의 박해를 받으며 기독교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타민족의 지배 하에서도 유대민족은 하나님과의 율법을 지키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마카비 등 경건주의 자들에 의하여 유대가 하나님은 섬기기 위한 투쟁을 보았을 때 현재 우리의 현실 속에 세상의 많은 문화와 세상풍조가 믿는 자들을 구속 시킬 때 우리의 모습은 경건한 자들로서 마카비와 같은 용기를 내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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