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0년간 짙은 안개에 가려 진면목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을 풀어보았습니다.
마침내 풀린 운주사 천불천탑 비밀 #4: 구층석탑의 기하문양, 석불군 '가'-'나''의 정체는?
운주골의 남쪽 들머리에 있는 구층석탑은 운주사 천불천탑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탑입니다. 적당히 다듬은 자연 암반 위에 세운 구층석탑은 높이가 11m에 달하여 늘씬한 인상을 주며 모든 탑신마다 희한한 기하문양을 새겨놓아 관람자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신비감이 감도는 석탑입니다. 맞은편 암벽에는 다수의 석불과 석인상이 구층석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운주사 천불천탑 공간에서 구층석탑-교차문(X, XX) 칠층석탑-광배석불좌상-석불군 ‘가’와 ‘나’로 둘러싸인 영역이 16관변상도의 하배관에 해당합니다. 하배(下輩)는 쉽게 말씀드리면 ‘형편없는 무리’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배관은 형편없는 자일지라도 부처님께서 극락왕생할 수 있는 방편을 보여준 곳입니다. 하배에는 세 종류의 인간군이 있습니다. 첫째는 갖가지 악업을 지으면서도 어리석어 참회하고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하품상생(下品上生), 둘째는 온갖 계율을 범하고 승단의 물건을 훔치며 허무맹랑한 부정설법을 하는 등 악업을 짓고도 스스로는 옳다고 뽐내는 하품중생(下品中生), 오역죄와 십악 등 온갖 악업을 지어 그 과보로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져 오래도록 괴로움을 받을 하품하생(下品下生)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죽기 직전에 선지식을 만나 부처를 생각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지성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온전히 부르면 염불하는 동안에 억겁의 생사를 헤맬 죄업이 사라지며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는 극락세계의 연꽃 속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천불천탑 공간에 설치된 석탑, 석불, 석인상은 상당수 망실되었기 때문에 이곳의 조성원리를 명쾌하게 밝혀내는데는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놓여 있는 석탑, 석불, 석인상만으로 하배관의 조성원리를 해석해 본다면, 이곳 하배관에 있는 구층석탑과 칠층석탑은 하품삼배지전(하품상생, 하품중생, 하품하생)의 관세음보살이나 대세지보살과 같은 보살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기원후 1세기 무렵에 불상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석탑이 부처를 상징했기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벽에 기대어 있는 석불군 ‘가’와 ‘나’는 하배관의 전각에서 주존보살 옆에 있는 여러 화불, 비구, 성문대중과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곳 하품극락에 태어난 왕생자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운주사 천불천탑은 극락왕생할 수 있는 16가지 방편을 그림으로 도해한 ‘관경16관변상도’를 지상에 재현해 놓은 세계최대 극락정토화이자 극락정토 체험장입니다. 관무량수경의 본론에 해당하는 정종분을 그림으로 도해한 관경16관변상도와 천불천탑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중성과 사용자 경험(UX)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오직 왕과 귀족들만 관경16관변상도를 통해 극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고 싶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일반 백성들은 운주사 천불천탑을 통해서 비로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관경16관변상도를 감상할 때, 관람자는 여전히 현생에 머물고 있는 존재이며 극락 안에 왕생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극락 바깥에서 극락을 관(觀) 또는 염(念), 즉 생각하고 염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람자가 운주사 천불천탑 영역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운주골에 들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왕생자가 되어 극락정토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관경16관변상도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입니다. 천불천탑은 고려 후기(13세기 말-14세기 초)에 설립된 왕립극락정토 체험장이었습니다. 11세기초에 설립된 운주사는 절이었지만, 13세기말-14세기초에 건립된 천불천탑은 절이 아니었습니다. 천불천탑은 3차원 관경16관변상도, 즉 3차원 극락정토화이면서 왕립서방정토 체험장이었습니다. '왕립'을 특히 강조한 이유는, 천불천탑이 석탑과 석불, 석인상의 예술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지방관리나 토호의 후원으로 지어진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무려 3만평에 달하는 대자연에 3차원 극락정토화를 꾸민다는 것은 개경왕실과 귀족의 재정적 후원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실제 천불천탑은 고려왕실과 중앙 권문세가의 재정적 후원으로 지어졌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여러 정황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다음 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천불천탑의 하배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석탑의 탑신이나 옥개석 밑면의 기하문양이 신비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기하문양의 상징성과 유래에 대해서 몇몇 학자가 풀어보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해석이 시원치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문양이 티베트 사원의 창살문양에서 비롯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몽골에서 유래된 문양이라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몽골텐트인 게르의 뼈대구조에서 착안된 문양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불천탑이 3차원 관경16관변상도이기에, 석탑의 기하문양 역시 대승불교의 발상지인 북인도를 출발하여 서역과 중국을 거쳐 고려에 전달된 불교의 장엄문양입니다. 즉, 고려 불교에서 불화 및 불구의 장식문양으로 널리 사용된 불교 전통문양이라는 얘기입니다.
천불천탑의 기하문양은, 크게 분류하면 (1) 마름모꼴 문양, (2) X꼴 문양, (3) 꺽쇠 문양, (4)수직선 문양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 자주 등장하는 기하문양은 마름모꼴 문양과 X꼴 문양입니다. 기하문양의 상징성 및 기원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9층석탑의 탑신을 장식한 이중 마름모꼴 안에 십자형 꽃문양과 옥개석 밑면에 새겨진 꺽쇠문양(V)의 상징성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인도불교의 동쪽 전달통로는 북인도(간다라)-서역(카슈가르-둔황)-중국-한반도입니다. 불교와 함께 수백 년에 걸쳐 동아시아로 전달된 불교예술은 지역과 시대의 특색이 더해지면서 서역양식(키질·쿠차), 중국양식(북위·수·당), 우리나라 양식(고구려·백제·신라·고려)의 불상, 불탑, 불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자식은 부모얼굴을 닮듯, 고구려·백제·신라불상에는 중국불상의 영향이 남아 있고, 중국불상에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서역불상의 자취가 남아있고, 서역불상에는 간다라불상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불교 전통문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전통문양은 나름의 족보가 있고 뿌리가 있습니다. 운주사 석탑의 기하문양은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기에 마치 별나라에서 온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우리가 불상·불탑·불화를 연구할 때처럼 석탑의 기하문양도 고려-중국-서역-간다라에 이르는 불교전통문양 전체를 관통해서 살펴봐야만 그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핵심만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X꼴 문양은 석가모니 부처나 아미타불이 좌정한 연화대좌, 금강대좌, 사자대좌를 장식하는 문양으로 널리 사용된 불교 전통문양입니다. 마름모꼴 문양은 석가모니 부처나 아미타불이 좌정한 전각의 바닥 타일 장식문양으로 흔히 사용된 불교 전통문양입니다. 물론 마름모꼴 문양은 경패 테두리를 장식하는 문양으로도 사용됐습니다.
자, 그러면 9층석탑의 기하문양의 상징성과 조형원리를 해석해 봅시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조성하기 위한 설계도가 13세기말-14세기 초 고려의 관경16관변상도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따라서 하배관 영역에 자리한 구층석탑의 옥개석 밑면의 겹친 꺽쇠(∨) 문양의 의미는 서복사장 16관변상도에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서복사장 16관변상도 상배관의 중앙(상품상생)과 중배관의 중앙(중품상생)의 전각에는 기와지붕과 공포 위쪽 도리 사이에 마치 노출된 서까래를 묘사하려는 듯 수많은 빗금이 좌우대칭으로 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빗금이 전각의 서까래를 표현한 것이라면, 전각의 서까래가 방사상으로 뻗어나간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전각 아래 연못의 연꽃 위에 태어난 왕생자가 아미타삼존을 올려다봤을 때입니다.
즉, 관경16관변상도는 전각 및 전각 안에 좌정한 아미타삼존은 정면에서 본 대로 그렸지만(平遠), 전각의 서까래는 왕생자가 올려다 본 시선으로 그린(高遠) 이중시점의 그림입니다. 고원법으로 그린 서까래는 둔황 막고굴의 아미타경변상도 벽화에서 더욱 또렷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전각의 서까래는 겹친 꺽쇠(∨)처럼 보여 운주사 구층석탑 옥개석 밑면의 서까래 문양과 놀랄 만큼 똑같습니다.
천불천탑 하배관에 설치된 9층석탑의 옥개석은 마치 아미타삼존불이 좌정한 궁궐의 팔작지붕을 닮았습니다. 팔작지붕(옥개석)의 밑면에는 방사상으로 뻗어나간 서까래(겹친 꺽쇠문양)가 새겨져 있습니다. 석탑의 탑신에는 이중마름모 안에 십자형 꽃잎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관경16관변상도의 도상에서 아미타삼존이 좌정한 전각을 장엄하기 위해 궁전 바닥에 깐 타일문양입니다. 저는 9층석탑을 바라보면, 관경16관변상도에서 하배관 전각에 좌정한 관세음보살이 연상됩니다.
관경에 의하면, 생을 다하기 직전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무거운 죄업에서 벗어난 하품인은 죽는 순간 하배관 연못의 흰 연꽃 위에 탄생하게 되며, 여러 겁이 지난 후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보배연못 앞 전각에 나타나 왕생자를 위하여 일체 불법의 참모습과 모든 죄업을 소멸하는 대승법문을 자세히 일러줍니다. 하품왕생자는 미묘한 법문을 듣고 기쁨에 넘쳐 합장하면서 연못 위 전각을 올려다봅니다. 이 순간 하품왕생자의 눈에는 찬란한 광명을 비추는 관세음보살의 모습과 보살의 두광 너머로 팔작지붕의 서까래가 보일 것입니다. 관무량수경과 관경16관변상도의 도상으로 해석하면, 운주사 천불천탑 공간의 9층석탑은 하배관 전각의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설법을 하는 관세음보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