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제장소 : 경북 영천시 녹전동 932번지(구인재), 유전(劉荃), 동도시조(東渡始祖) 묘역(녹전동 산 20-1)
◎ 시제일시 : 2012년 11월14(음 10.1),
◎ 참가인원 : 200여명
◎ 사진촬영 : 거창유씨 종친 유병찬
◎ 글 * 구성 : 유영문
♥ 전(荃) 할아버지 묘역의 지세(地勢)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천하의 명당처럼 좋은 자리였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논하는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묘역을 자주 찾아온다고 한다. 전해온 바, 전(荃) 할아버지께선 당대의 정학(성리학)의 대가였으며, 천문, 지리, 풍수에 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이곳을 눈여겨 봐뒀다 돌아가신 연후, 이곳에 영면의 자리를 부탁하셨는지 후손으론 알길이 없지만 하여튼 명당임엔 틀림이 없어 보였다.
소쿠리 형상의 양지바른 동산에 소의 유두(乳頭)처럼 나와 있는 곳에 할아버지의 음택(陰宅)이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기(氣)의 흐름이 할아버지의 바로 아래칸 할머니 묘소 아랫부분에서 멈췄다고 하니 한마디로 말해서 기(氣)의 흐름이 용혈(龍穴)된 곳에 유전(劉荃) 할아버지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묘역주변이 '개발계획특구'로 지정되어 주변 땅값이 폭등을 했고 구인재와 할아버지의 묘소 아랫부분 경계지점 포도밭이 남의 명의로 되어 있어 머지 않아 타인이 이 땅을 매수하여 공장을 짓게 된다면 1,000년전 이곳에 음택을 마련하여 후손의 발복을 염원하던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소원도 유씨(劉氏)후손의 쇠락과 함께 명멸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움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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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묘금도 유씨(劉氏)의 시조인 중국 한나라 유방의 40세손 유전(劉荃)
동도시조(東渡始祖) 묘역(영천시 녹전동 산 20-1)
♥ 잔디를 입힌 현재의 모습은 2012년 11월, 봉분을 새로 봉축하고 1,000년 전 이곳에 자리를 마련하신 할머니를 깨워 정면에서 우측으로 봉분을 옮겼다고 한다.
이곳 묘역을 참배하게 되면 아랫쪽 석물이 할머니 봉분을 중심으로 좌측에 쏠린 모양으로 서 있는 걸 볼 수 있다. 새로 묘역조성을 위해 봉분을 헐고 땅을 파보니 할머니의 관이 묻힌 빨간 점토가 기존의 봉분과는 동떨어진 우측에 위치하고 있어 관이 묻힌 자리를 중심으로 바르게 봉분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옮겼다고 한다.
할머니의 유체는 백골이 진토되어 흙이 되었지만 정신과 육체는 대한민국 묘금도 유씨(劉氏)의 넋이 되어 현재의 우리가 있게 한것이다.
한강물이 검룡소의 큰 기운을 받아, 큰 물줄기를 형성하여 장장 1,280리 길, 뿌리를 뻗어 영혼을 넘나들 듯 춤을 추듯이... 1,000년전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분의 실체가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다.
▲ 유전(劉荃) 시조의 바로 한칸 아래, 배우자이신 농서이씨(隴西李氏) 할머니 묘역
♥ 예전의 사진을 보면 전(荃) 할아버지의 묘소를 둘레석으로 하고, 뒷부분에 곡담을 만들어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보는 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이곳에서 만난 복수의 종친 관계자에 의하면 후손의 발복이 안된 이유는 묘소 뒷쪽의 곡담이 기운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곡담을 헐었고, 또 묘소를 두른 둘레석은 당시 고려의 장례예법이 둘레석을 치지 않은 현재의 모습이었기에 철거를 하였다고 한다.
자세한 내막은 알수가 없으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고이 잠들어 계신 시조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편안한 자리를 보전하지 못하게 해드린 후손으로서 부끄러울 따름이다.
▲ 좌측 묘역 아래에서 본 묘역 배치도
상-유전(劉荃)할아버지, 하-농서이씨(隴西李氏)할머니
♥ 예전의 사진을 보면, 할아버지의 봉분 뒷편으로 곡담과 둘레석이 되어 있는 걸 볼 수 있다.
▲ 2010년 유전(劉荃)할아버지의 묘역
♥ 어떤 종친은 현재의 잣대로 두분을 나란히 모시면 좋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나름대로 당시의 법도와 예법에 맞게 장례절차도 진행되고 봉분(封墳)의 위치도 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모셔진 그대로 잘 보전하면 좋지 않을까?
시대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논리라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왕릉의 왕들도 부부가 따로 떨어져 있는 봉분(封墳)은 각자 짝을 맞춰 나란히 모셔야 한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필자의 생각은 옛것 그대로 잘 보전하고 지키면 되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모든 사물을 저울질하고 재단하면 안되는 것이다.
▲ 우측 묘역 아래에서 본 묘역 배치도
(상-유전(劉荃) 할아버지, 하-농서이씨(隴西李氏) 할머니)
♥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앞에 있는 석물 중 작은 비석은 1900년대의 오래된 비석으로, 하성 조병렬님이 쓴 "병부상서죽간유선생지묘(兵部尙書竹諫先生之墓)' 가 상석옆에 희미한 글자를 간직한 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고, 오른쪽 까만 비석 "병부상서죽간유선생지묘(兵部尙書竹諫先生之墓)'는 '묘갈명 병소서'의 조규승님이 직접 지어 올린 선조에 대한 학문과 덕행(德行)이, 최근에 새로 조각을 하여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 앞에 있는 석물(우측)
♥ 죽간 유전 시조 묘도(墓圖)
♥ 죽간일집 부록편, "능묘사적(陵墓事蹟)" 인원선조편에 보면, 묘지기 정가가 유씨재사(劉氏齋舍)에 살며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묘역 주변에 있는 묘표석(墓表石)과 신도비(神道碑)등 석물을 남몰래 묻어 증거를 없애고 사패전토(賜牌田土)의 향화비(香火費)로 받은 수세(收稅)로 엄연히 부호가(富豪家)처럼 행세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대인(中國大人)의 무덤을 새로 봉축(封築)하라는 조정의 명령이 하달됨에 조관석(朝官石),교배석(交拜石),갑주석(甲胄石),망주석(望柱石)만은 그전대로 다시 세웠으나 비석(碑石)만은 영영 어디에 묻었는지 알 수 없어 찾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이 지역 90세 가량의 촌노(村老)분이 석물 뒤 잡초가 우거진 곳이 예전엔 저수지(방죽)였는데 이곳에 신도비 등 석물을 투석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사진에 보이는 석물은 최근에 설치한 것으로 예전에 이런 석물을 전문으로 훔쳐 팔아 온 도둑들에 의해 훼손되고 사라져 최근에 다시 세운것이라 한다. 이런일이 단지 우리 가문만의 일이 아니겠지만 이제라도 잘 보전하고 잘 지켜 선조를 모시는일에 누(累)가 되어서는 아니되겠다.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 앞에 있는 석물, 좌측 망주석 뒷편은 옛 저수지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역 아래에 2기의 봉분(封墳)과 우측에 돌보지 않은 정면에 보이는 1기의 봉분(封墳)은, 죽간 일집에 보면, 1902년 인원선조가 할아버지의 묘소를 발견하기 전까지 이곳에 아무렇게나 투장되어 온 타인의 무덤이라고도 하고, 임진왜란 때 전몰장병의 초혼장이라고도 한다. 1907년 이 지역 사림들과 종중의 뜻있는 종친들이 시조의 학문과 덕행을 기려 관청에 '다른곳으로 이전을 해달라' 청원도 하고, 재판을 하였다고 하나 아직까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당시에 말끔히 정리되지 않고 오늘에까지 이른것일까?
후손으로서 시조의 묘를 몇백년동안 돌보지 않아 실전되어 찾질 못하다가 인원선조의 각고의 노력과 헌신으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제라도 부끄러운 후손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 아래에 신원불명의 2기의 봉분
(후손의 무덤 추측)이 있고, 우측 아래 하얀전선이 지나간 봉분은 무명 묘,
♥ 유전(劉荃) 시조의 묘역 오른쪽 하단에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몇기의 무덤이 있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성주이씨(星州李氏) 무덤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 마져 인원선조가 시조의 묘역을 찾을 무렵 성주이씨(星州李氏) 후손들이 자기들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하여 재빨리 등기를 해버렸다 한다.
당시의 유문(劉門)의 후손들이 너무나 나약하고 힘이 없어 눈뜨고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나, 이제라도 우리 할아버지의 묘역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이런 무덤들을 자기들의 조상옆으로 돌려보내고 유씨(劉氏) 묘역을 새롭게 단장하는 유문(劉門)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역 오른쪽 하단에 성주이씨(星州李氏) 묘'라고 지칭된 무덤들(녹전동 산 21-1번지)
♥ 죽간일집과 전해온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이씨의 무덤(李塚)으로 판단되어 소송중이었다고 하나, 나중에 알고보니 임진왜란 때 전몰장병의 무덤이라 하였다 한다.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역 중심으로
제일 위, 전 할아버지/하, 농서이씨 할머니 아래 우측 1기의 무덤은?
♥ 유전(劉荃)시조 할아버지의 묘소 앞 손을 올리고 있는 비석은... 하성(夏城) 조병열(曺秉烈)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름 마지막 글자 열(烈)자는 글자가 이지러져 있어 희미하게 보여 정확히 열(烈)자 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글자의 형태로 봐서 열(烈)자로 보인다.
또한 우리가 흔히 아는 조씨(曺氏)는 창녕(昌寧)이라고 알고 있는데 하성(夏城) 조병렬"로 되어 있어 처음엔 의아했는데 조씨는 곧 창성(昌城),창산(昌山),하성(夏城),하산(夏山),창녕(昌寧)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전(劉荃)시조 할아버지의 묘표를 작성한 분이 "하성 조자기'로 되어 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 유씨 가문과 창녕조씨 가문과의 관계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이곳 시조 묘역 바로 앞에 자리한 '묘갈명 병소서'를 지은 하성(夏城) 조규승(曺逵承)님도 죽간일집의 그의 글에서 "우리 선조(하성,조자기)께서 묘지(墓誌)를 지으셨는데 후손으로서 감히 사양하지 못해 위와 같이 서술한다'라고 하였다.
▲ 유전(劉荃)시조 할아버지의 묘 앞에 있는 손을 올리고 있는 비석은...
전면에는 "병부상서죽간선생지묘" 조병열(曺秉烈)" 근서' 융희 2년(1908년)무신(戊申) 4월" 라고 씌어 있고,
양 옆, 뒷면에는 "하성 조규승"님의 "묘갈명병소서"가 씌어 있다.
♥ 유전 시조 할아버지의 묘 앞에 있는 손을 올리고 있는 비석 앞면...
조병열(曺秉烈) 근서(謹書),삼가 씀> 융희 2년(1908년) 무신(戊申) 4월라고 기록되어 있다. 양옆,후면은 창녕(하성) 조규승(曺逵承)님이 시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한 "묘갈명 병소서"가 기록되어 있다
♥ ※ 근서(謹書) : 삼가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 같은 것을 쓴다는 뜻임.
※ 근찬(謹撰) : (귀인의 명령 등에 의하여) 삼가 편찬함(일). 또는, 이글은 내가 지었다.
용례 - 조선 세종 28년(1446) 9월 상한에…신 정인지는 두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씁니다. ; 正統十一年九月上澣…臣鄭麟趾 拜手稽首 謹書 [훈민정음 정인지서]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 앞에 있는 묘갈명 병소서
"조병열(曺秉烈)근서(謹書),삼가 씀" 옆에 있는 비석(조규승 근찬(謹撰),삼가지음)
♥ 단기4322년(서기1989) 5월에 이 비석을 세우다. "병부상서죽간유선생지묘(兵部尙書竹諫劉先生之墓)"
비석 말미에 보면, 하성(夏城) 조규승(曺逵承) 근찬(謹撰)' 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 있어서, 하성(夏城) 이란 뜻은...
조(曺)는 곧 창성(昌城),창산(昌山),하성(夏城),하산(夏山),창녕(昌寧)이기도 하다. 창녕(昌寧)의 옛 지명들은 하나같이 '불'과 관련된 화(火)의 이름을 쓰고 있다.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 조계룡(曺繼龍)의 탄생지 설화가 된, 화산(火山)인 화왕산(火旺山)에 당시 성을 쌓았으니 창성(昌城), 하성(夏城)이라 부르고 현재는 창녕(昌寧)이다. 해(日)가 두개나 겹치는 창(昌)자나 여름 하(夏)도 모두 불과 무관하지는 않다. 따라서 조씨(曺氏) 이름자 앞에 이러한 연유로 창녕(昌寧) 또는 하성(夏城)을 쓰는 것이다.
▲ 유전(劉荃) 시조 할아버지의 묘 앞에 있는 "묘갈명 병소서"는
하성 조병열(曺秉烈) 근서, 삼가지음이라 되어 있고, 옆에 있는 까만 비석 뒷면에는 "하성 조규승(曺逵承) 근찬", 이글은 내가 지었다' 라고 되어 있다.
♥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묘역을 관리하고 있는 관리인 아저씨와...
필자(파란옷) 옆, 저 관리인은 김씨성을 가진 분인데...우리 종사의 일을 너무나 훤히 꿰뚫고 있었다. 관리인의 말을 전체를 긍정할 순 없지만, 앞으로 우리 유씨 대종회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보였다.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이 근방을 조정으로부터 사패지로 하사받아 예전에 묘역과 사패지를 관리하던 정씨일가의 무단점거와 횡포(?)로 우리 유씨(劉氏)의 소중한 자산과 묘역이 훼손되고 사라져 버린 것들을 다시 찾아 시조의 망명동기와 업적에 대한 바로 세우기를 해야 하겠고, 이제는 남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묘역 주변의 땅들을 다시 매수하여 시조로부터 시작된 기운을 방해하는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이곳도 개발붐이 일어 공장이 들어오고 특히 구인재(求仁齋) 바로 옆 포도밭이 지금은 다른 사람 명의로 되어 있어 이곳에 공장이라도 들어선다면 이곳에 음택을 마련하시고 유씨(劉氏) 자손이 창성하리라는 시조(始祖)의 바람이 허무하게 무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면에 보이는 건물(구인재) 앞 포도밭은 현재 타인의 소유로 되어 있어 이곳이 타성씨의 소유로 된다면 시조(始祖) 할아버지의 묘역 앞쪽이 막히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얼마전에 이지역이 "개발계획특구'로 지정되어 땅값이 들썩이고 벌써 주변 토지나 건물이 속속 외지인의 소유로 되어가고 있다 한다.
▲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재각 구인재(求仁齋)
♥ 오늘(11.13일)이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시제일(음력 10.1)
♥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조상에 대한 숭조사상이 수십만 우리 유씨(劉氏) 뿌리의 근원인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시제일에 너무 썰렁(?)한 참배...
♥ 유전(劉荃) 할아버지로부터 견규,견구,견익할아버지로 시작된 선조의 후손들이 천년의 세월속에 이제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선조의 유체를 이렇게 설단으로 대신하게 되어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게 순리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고 나를 키워 준 조상이 있기에.. 조상에 대한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유전(劉荃) 할아버지의 후손 설단..
실전된 선조들의 묘를 찾지 못해 이렇게 설단을 세워 제를 올리고 있다..
♥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유전(劉荃) 시조(始祖) 할아버지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일집에 실려 있는 빼어난 싯구는 천하의 이태백이도 울고 갈만큼의 매력으로 다가왔고 역사에 관심있는 필자로선 단연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우리의 자랑스런 시조임에야..
2012년 하계휴가를 미룬 채... 아껴 두었던 휴가를 죽간일집에 실려 있는 시조 할아버지의 시(詩)에 나타난 답사지역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시조가 처음 왔다는 경북포항, 영덕, 영천을 중심으로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죽간일집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는 제오정을 찾아 죽간일집을 발간하게 된 동기와 목판본의 원형 상태를 볼 수 있었고, 시(詩)에 나타난 영덕군 고래불 해수욕장 근처의 영덕군 괴시리 "관어대"도 찾아보았고, 경주를 찾아 분황사와, 계림숲, 계림의 봉황대를 찾았을 땐 시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시조의 묘역을 찾아 참배를 하였고, 마음속으로 시조가 지었다는 종보4호에 실려 있는 "술회"를 읊조리며 시조에 대한 추모를 하였다.
술회(述懷)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말함
一自東來後(일자동래후) 이 몸이 한번 고려(高麗)에 온 뒤로
那忘故國愁(나망고국수) 어찌하여 고국(故國)수심 잊어버리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