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정 성 천
진정한 어둠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물론 사진을 현상하는 작업으로 인공적인 암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서 진정한 어둠 속에 온몸을 내맡겨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두운 그믐밤이라고 하나 언제나 별빛들이, 흐린 날도 먼 인공의 불빛들이 항시 존재하기에 일상에서는 진정한 어둠을 경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특히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는 진정한 어둠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적인 짙은 어둠도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강원도 백룡동굴에서의 진정한 어둠에 대한 체험은 아주 색다른 체험으로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경험이었다.
배를 타고 가는 동굴이 있다기에 어렵사리 인터넷 예약을 하고 강원도 산길을 꼬불꼬불 찾아 그 동굴에 갔었다. 배를 타고 간다기에 동굴 속이 물로 차 있어 동굴 속 어느 구간까지는 배를 타고 가는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동굴 입구까지만 동강 물줄기를 거슬러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육로 접근은 험난한 바위 절벽 길이라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배가 운행된다고 말한다.
배를 타고 들어가는 동굴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던 나는 동굴 답사 시작부터 실망감에 흥미를 잃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봐왔던 여느 석회암동굴과 별반 다름이 없는 전형적인 동굴 모습밖에 볼 수 없어 이번 여행이 괜한 시간만 낭비하는 그렇고 그런 여행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 반환지점인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진정한 어둠을 체험해 보았을 때 이번 여행이 쓸모없는 시간 낭비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동굴을 따라 밝혀 놓은 유도 등을 따라 많은 돌고드름과 석순, 석주 등을 감상하며 한참을 갔다. 동굴 마지막으로 짐작되는 다소 높은 장소에 다다르니 가이드가 일행을 정돈시켜 앉혀 놓고 모든 사람의 머리 램프를 끄고 절대 침묵을 지키라고 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동굴 속을 밝히던 유도 전등 스위치를 일시에 내려 버렸다. 갑자기 어둠이 사방에서 확 몰려와서 순식간에 모두가 어둠의 정적 속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가이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10분간 절대 침묵으로 조용히 앉아서 진정한 어둠과 고요를 한번 체험해 보라고 말이다.
자연 불빛은 물론이고 한줄기 인공의 불빛도 전혀 들어오지 못하는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서 경험하는 진정한 어둠은 밤의 어둠에서 느끼던 두려움과 막막한 불안감을 넘어선 그 어떤 느낌이었다. 물론 이것도 100% 절대 어둠은 아니리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아주 미세한 빛이 동굴 벽이나 우리의 몸에서나 아니면 그 어디선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항상 자연에서의 절댓값은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경험해 보는 것 중 가장 극대한 것이 우리가 아는 자연 절댓값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그때의 그 어둠이 내가 경험한 절댓값에 가장 가까운 진정한 어둠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 자연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어둠도 잠시 익숙해지면 희미하게나마 주위를 분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정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봐도 정말 한 치 앞에 있는 손의 윤곽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그것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정확하게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늑하고도 편안한 느낌, 순수한 근원에서 나오는 그 어떤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보통 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찾아왔다. 눈을 감아 보았다. 더 짙은 어둠이 의식을 채운다. 태어나기 전 어머니 뱃속에서 느끼던 어둠 즉 우리의 의식이 막 생겨날 때의 암흑이 이와 같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더 충만하고, 더 평안하고, 더 아늑하고 더 고요한 느낌이 내 의식을 꽉 채운다.
그렇다면 평소 어둠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고 늘 상 빛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분명하게 볼 수는 없어도 주위를 어렴풋이 분별할 수가 있기에 그 어둠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아닐까? 어둠이 두렵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빛의 모자람으로 인한 흐릿한 분별이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동굴 속 가장 깊숙한 곳에 갇혀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어둠이고 그 진정한 어둠 속에서 주위를 분별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때 우리의 의식은 오히려 원초적인 고요한 행복감으로 물든다는 것인가?
우리는 어둠을 ‘악의 상징으로’, ‘범죄의 온상으로’, ‘두려움과 불안의 실체로’ 여기며 모두가 어둠을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빛은 선하고 어둠은 악한 것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분별하는 눈의 잣대로 빛은 환해서 편리하고 어둠은 보이지 않아서 불편할 뿐이다.
백룡동굴의 경험은 많은 것을 나에게 시사해 준다. 더 깊이 갇히면 갇힐수록 분별하는 능력은 그만큼 떨어지나 그와 반대로 평온한 원초적인 행복감이 증가한다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우리는 좀 더 많은 앎이, 좀 더 많은 분별이 우리의 삶을 좀 더 편안하고 더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진정한 행복은 앎이 아니라 그 앎을 넘어선 고요하고도 진정한 무분별의 자리 즉 모름의 자리에 익숙해지는 상태가 아닐까?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둠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첫댓글 나도 백룡동굴 체험을 하고 싶다. 태초의 카오스 세계의 정적 어둠 ?
초화화 얘기는 뭐꼬? 다른 작품 ?
카카오가 열리지 않아서 여기서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