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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부유층 미술 여학도 와타나베 마사에가 빠진 곳은 사랑의 불구덩이였다. 예술가의 사랑방식은 말릴 수 없는 결행인 것. 식민지국 천재를 향한 마사에의 사랑이 그러했다. 배동신의 그림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영혼이 먼저 숨막힐 듯한 속도로 달려나가 가슴에 부딪히고 질식해버렸다. 극도의 어려움에 빠져 익사해가고 있는 식민지국 청년의 손을 순식간에 나꿔채고는 펄쩍 뛰어오른 뒤, 현실 바깥으로 튕겨나가 차가운 나락에 함께 나뒹굴어 버린 것이다.
2004년 여수 자택에서 배동신(왼쪽)씨가 부인(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절박한 사랑은 대부분 불행의 뇌관 위에서 시작되는 것. 그 뇌관마저 사랑을 위한 장식처럼 보이는 법. 지배국 상류층의 딸과 가난한 식민지국 청년 사이엔 사랑의 전율 뿐,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선장 1952년 34 x 25Cm. 유화
일본의 신문이 '조선의 천재 우에노에서 꽃 피다'라고 대서특필하자 억눌려오던 한국 유학생들은 자부심으로 뭉쳤다. 당시 일본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이중섭, 강용운, 양수아, 박고석, 신상옥 등 울분을 안고 있는 한국의 유학생이 20명이 넘었다. 입선 축하자리에서 이중섭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불렀다. 고화흠(원광대 전 미술대학장) 씨에 의하면 한국 유학생들은 그 전엔 거의 모임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각자 학비조달을 위한 신문배달 등의 온갖 잡일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배동신의 입상은 그 와중에서도 이들의 정신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도우며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유학생들에게는 물감 등의 화구가 극도로 부족했다. 흰색이나 푸른색 물감을 선호하는 사람은 붉은 물감이나 녹색이 남아돌았으므로 이것들을 서로 나누는 방식들이 생겨났다.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으므로 자연스레 다른 화판을 구하는 방법이 모색되기도 했다.
적의(赤衣)의 여인 1964. 62 x 40Cm. 유화
그 무렵,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수채화의 새로운 기법이 들어왔다. 수채화의 물맛과 자연스런 번짐을 배동신은 발견하고는 흠뻑 빠져들었다. 배동신만의 ‘영혼의 번짐기법’을 익힌 때가 이때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수채화 순수기법’을 터득하고는 갈고 닦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에 눈 먼 두 사람은 전쟁의 폭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배표를 들고 짐짝처럼 배의 밑창에서 숨죽이며 한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쟁의 폭격과 부모의 결혼 결사반대를 피한, 사랑의 도피행. 1945년 2월 그렇게 그들은 나주 금천면에 어렵게 신혼살림을 펼쳤다. 친형이 그곳에서 조그만 과수농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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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작 광견/수채화
▶2003.12.22 서울옥션 배동신 소개글 중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 졸업. 배동신은 1930년대 말 가정형편상 그림공부를 못한 울분으로 무작정 금강산으로 떠나 금강산을 그리다가 운명적으로 박수근과 만나 그에게 회화의 기초를 배운다. 배동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자질을 한눈에 알아본 문학수의 권유로 동경유학을 꿈꾸게 된 배동신은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넘는다. 무일푼으로 도일하여 온갖 고생을 하면서 그림공부를 한 그는 일본 신인미술가의 등용문인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초상”을 출품(1943)하여 입상, 일약 촉망 받는 화가가 된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조선의 젊은 천재 우에노에서 꽃피다”라는 제목으로 배동신의 입상을 대서특필했다. 한국유학생 환영회 때 이중섭은 아리랑을 불러 배동신의 입상과 등단을 축하했다.”
▶ 1984년 KBS TV 미술관
- 전 문예진흥원 미술평론 위원 유준상 해설 중에서(TV미술관 배동신 수채에 의한 조형) -
“배동신은 문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인간 최초의 감성 속의 미를 추구하는 작가이다.”
▶ 1973년 8월호 신동아 - 미술평론가 이경성
한국 수채화의 전통은 과거 경북출신의 화가들이 이어왔다. 이인성, 손일봉, 이경희 등이 바로 그 기수들이다. 그런데, 광주 주재 화가 배동신의 출현은 한국수채화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동시 중앙집권적인 예술문화에 하나의 쐐기를 박은 셈이 되었다. 그의 수채화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것은 구성의 웅대함과 운필의 속도이다. 거의 대상의 본질을 찌른 그의 시각의 정확성은 세부적 묘사를 생략한 대담한 구도 속에 여실히 실현되고 있다. 작품 [정물]의 다섯개의 과실은 시각의 묘에서부터 그 과실을 담고있는 유기적인 관계가 완벽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거기에다 극도로 요약된 색감의 사용으로 거의 청교도적인 금욕을 구현하고 있다. 수채화가 배동신의 출현은 화단의 커다란 수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1990년 3월 29일자 Korea Herald
- 미술평론가 Perry A. Bialor 1990년 원고를 재 게재함.
배동신, 후쿠사이와 같은 “그림을 향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
예술가 배동신은 192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소생했다. 올해로 그의 나이 고희를 맞았다. 일제치하 당시 대망을 품은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회화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되고 그는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결혼을 했고 두 딸과 아들을 두었다. 그후 20년간 그가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젖어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묵묵히 피아노 레슨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젊은 예술가들이 현대 기법을 채택하여 가는 동안 예술은 유행에 편승하지 못하였다. 1974년에서야 처음으로 그의 작품은 서울에서 열린 그룹전에 전시되었고 그의 가족은 1978년에 서울로 이주했다. 배동신은 총체적 인격의 소유자이며 단순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술을 향한 진한 헌신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는 권위주의와 물질적 소유에는 초월한 사람이지만 술친구와 함께 하는 허심탄회한 얘기와 그림에 사로잡혀 무아지경에 이르는 시간을 즐긴다. 후쿠사이와 같이 그는 “그림을 향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이다. 배동신에게 성공의 화신은 늦게 찾아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생전에 그는 그의 조국에서도 인정을 받는 행운아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배동신은 1943년, 1944년 그리고 1946년에 그룹전시회에 참가했었고 그의 첫 개인전은 1973년 도쿄와 타이페이에서 열렸었다. 도쿄에서 첫 개인전 이후 그는 세 차례나 더 개인전을 열어 일본 예술계를 사로잡았다. 일본에서 그는 일곱차례나 수상 경력을 장식하면서 당당히 거장으로 부상해 갔다. 한국에서 대중에게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선 보인 것은 1974년 가진 갤러리 그룹전에서 였다. 1978년에 그는 국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초대전에 참여했고 이때 그의 가족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1979년에 발간된 초대 일백인선집(회화 및 조각분야)에 망라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80년 국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수채화가 배동신은 한국 예술가로서는 여러 가지면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다. 비록 서양화풍의 화가이긴 하나 그는 오로지 수채화만을 고집한다. 게다가 그는 파리 화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통해 조정된 특이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이 예술가는 “만일 유화가 육식에 비유될 수 있다면 수채화는 채식이라 할 수 있죠”라고 하면서 “유화가 동적이며 극적인 감동을 연출한다면 수채화는 상큼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전해줍니다”라고 덧 붙였다. 배동신의 부드러움과 투명한 성격이 잘 중재된 그의 화풍에 반영되고 있다. 배동신은 그의 화폭에 담기는 소재를 확고 부동한 신념으로 선택하고 제한한다. 주로 풍경을 담는 중에도 그는 무등산을 수없이 그려냈다.
“무등산은 광주를 감싸고 내려다보는 거대한 실물이다” 마치 세잔느가 세인트 빅토리산을 흠모했듯이 그는 무등산을 사모했다. 또한 그의 소재는 목포항이었고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접시에 담긴 사과들 여성의 흉상. 전신상 (서구스타일의 옷을 입고 하이힐 구두를 신은 모습을 종종 그린다) 그리고 가슴이 몹시 클로즈업된 누드로 이어진다. 배동신은 한 점의 수채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수 백장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려낸다. 한국의 어떤 화가도 그의 끝없는 습작과 준비 작업을 따르지 못 할 것이다. (매일 2-3시간씩) 배동신은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하여 빠르고 직접적인 공격을 선호하는데 특히 외광에서 그려지는 풍경화는 더욱 그렇다. 그는 그의 작품속에 무한한 자유를 불어넣는다. 그 자유는 채색된 필치와 각진 선들이 화폭 전체에 널리 퍼지면서 중복되고 겹쳐진 투명함들이 안개처럼 표현 되도록 이끌어 준다. 아낌없이 분출되는 단호한 선들은 수채화법이 되었다. 광주와 항구를 그린 많은 작품들은 이러한 단편적 비젼과 시각적 충만함을 전시하고 있다. 그의 색채는 대개 침묵하고 있다. 가끔 고밀도에 이르기도 하는데 자주 빛 갈색, 자주빛 노랑과 빨강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밝은 색깔들은 단순히 지역적 의상의 표현이라든지 그의 초상화들은 표현주의적 성향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들이다. 채색된 필치는 하나의 형태를 구성한다. 최근에 제작된 누드화는 넓게 퍼진 스트록과 엷은 채색들로 표면이 짜여져 있는데 그러한 누드화외에 그는 명암을 표현하지 않는다. 기대에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의 커다란 누드화는 결코 아름답지는 않다. 그들은 커다란 젖가슴과 두꺼운 허벅지를 내 놓고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무등산과 같은 자연 현상에서나 볼 수 있는 대 걸작의 풍을 느끼게 해 준다. 누드화의 표면들은 선들과 색채의 터치들로 상처가 나고 휘갈려 있는 듯 한데 그 속에서는 화강암의 표면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생명력을 맛볼 수 있다. 그의 개인적인 원색법 속에 거대한 산이 재현되고 있는 듯한 것이다. “영향력인가 진화력인가?” 1957년이래 야심에 찬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전위주의자로서 그리고 서구의 보조에 발맞춰 나가는 최신식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들은 전통주의나 사실주의의 그리고 파리 학교 스타일의 “잘 다듬어진 그림”을 배격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1957년에 “강렬한 추상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어 이것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축소주의 및 대중예술과 함께한 단색화 법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1990년대에는 “찬색조의 추상주의”와 개념주의로 발전해 가면서 오로지 대중예술만이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라 모방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75년 조선일보사에서 후원한 연례 서울 현대 예술축전이 개막되면서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각각의 시대적 움직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래되어 왔는데 전통문화와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한 사실주의를 재발견하고 이것을 “대중을 위한 예술”로서 감지하여 한국의 진정한 현대주의를 찾는 데에 15년이 걸린 셈이었다. 전위주의의 영향에 의한 독단적인 현대주의가 다양화되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 것이었다. 이것은 배동신의 묵묵한 주장에 공감대가 이룩된 것과 같았다. 배동신의 예술은 전기향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와 색깔을 지닌 채 하나의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 Perry A. Bialor-뉴욕의 예술 평론가로서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 코리아 헤랄드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면에 문화면 기사를 기고한바 있음.
번역: 김수정-보스톤 대학원 영문학 석사학위 수여
▶ 기법과 색감으로 이룬 수채화의 성(城)
- 미술평론가 이경성의 글 중에서 -
한국 수채화의 전통은 거의 활발하지가 못하다. 1945년을 전후하여 대구의 이인성과 서울에 있는 몇몇 화가가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당시에 필요에 따라서 수채화를 제작하였다. 이와 같은 불모에 가까운 한국 수채화단에 있어서 배동신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그는 중앙 집중적인 미술풍토 속에서도 전남 광주에 생활의 중심을 두고서 의욕적이며 창조적인 수채화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그가 작가로서 성장한 곳은 일본이란 타국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유럽으로부터 새로이 받아들인 수채화의 기법과 정신을 공부하고 그들과 어울려서 작가로서의 길을 출발했던 것이다. 천성이 솔직하고 깨끗한 그는 물욕을 모르는, 이른바 에꼴 드 파리식의 예술가였다. 따라서, 그의 생활은 진정 예술가들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생활의 연속이다.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작품을 만들고, 그러한 작가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 8.15 해방이라는 역사적인 계기를 통하여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조국에 돌아온 그는 고향 광주를 중심으로 하여 또 다시 뿌리를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가 찾아온 조국은 그에 있어서 모든 것이 낯설었다. 수채화의 이해도 없거니와 작가로서의, 더욱 예술가나 인간으로서의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우선 인간으로서의 생을 터전을 다시 다져야 했고, 그 터전 위에 처음으로 자기예술을 세워야 했다. 화가 배동신의 작품세계는 한 마디로 말해서 큰 규모와 정련된 기술. 그리고 세련된 색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직절적(直截的)이고 대담한 구도라든지 속도 있는 붓의 움직임은 그의 작품의 매력의 원천이다.
▶ 2008년 2월 23일 전남일보기사
영혼의 선객 배동신 중에서.. 김현석 기자
1974년 일본 도쿄(東京)의 미술가화랑과 오사카(大阪)의 한국화랑에서 배동신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장은 문이 열리자마자 탄성의 도가니가 돼 들끓었다.
전시회가 열리기 전부터 일본 수채화협회 회장인 후아이쇼우씨는 배동신 수채화전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팸플릿의 자화상 그림을 보고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그것을 액자에 넣어두고 공부한다는 말을 편지로 전해온 터였다. 그렇게 1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온 그림들이었다.
전설 같은 배동신의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자 일본관객들은 순식간에 감동의 비명을 질러댔다.
당시 일본 미술가협회 회장이었던 구라다헤이키치씨는 "정말 놀라운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화가의 작품이다. 창작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취재로 북새통을 이룬 기자들의 입에서도 하나같이 "와~ 크다! 무겁다! 대담하다! 이사람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다르다! 이것이야 말로 회화 그 자체의 창작이다!"라고 감탄하며 대서특필의 경쟁에 열을 올렸다.
일본 황실에서도 바쁘게 전시장을 방문했다. 왕족들도 탄성을 연발했다. 외국귀빈들도 줄을 이었다. 그렇게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전시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관객들의 어깨가 서로 닿아 밀려나가는 바람에 안타까워하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줄을 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일본 주재 한국대사관의 윤탁씨의 말에 의하면 일본 기자들이 "일본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세계적인 화가"라고 하나같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했기 때문일까.
흔히 배동신을 일본의 전설적 화가 호쿠사이와 비교한다.
일본에서는 1800년경에 활동한 호쿠사이에 대한 이런 일화가 흘러다닌다.
어느날 지인이 찾아와 수탉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오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 왔을 때 그는 다시 한 달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인이 한 달 후에 찾아 왔을 때 호쿠사이는 다시 두 달을 연기했다. 두 달 후에 왔을 때 다시 6개월을 연기했다. 매번 그런 식으로 어느덧 3년이 흘러갔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기다림에 지쳐버렸다. 3년이 지났을 때 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찾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호쿠사이가 다시 연기하려는 눈치가 보이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당장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 호쿠사이는 알겠다며 그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냈다. 그것은 지금껏 볼 수 없는 최고의 명화였다. 그러자 지인은 더욱 분노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릴 수 있으면서 왜 3년이나 기다리게 했소?”
호쿠사이는 말없이 지인을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화실의 사방벽과 방 안에는 지난 3년 동안 밤낮으로 습작한 수탉그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쿠사이의 전설은 감동적이지만 일본 특유의 과장과 인위의 모습이 배어있다.
배동신의 몰입과 열정이 호쿠사이보다 덜하겠는가? 천재성을 타고난 뒤 최고의 몰입과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배동신이 남겨놓은 지금의 위대한 작품은 나올 수가 없다.
배동신은 한 점의 수채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수 백장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린다. 어떤 화가도 그의 끝없는 습작과 준비작업을 능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술 마시거나, 특별한 일 외의 모든 시간을 그는 작업에 몰두한다.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해 직접적이면서 빠른 공격을 선호하는 그의 모습은 위대한 검객이 검무를 추거나 면벽의 선객이 삼매에 몰두하는 듯한 몰아의 모습이다.
이처럼 타고난 천재성과 최고의 몰입만이 천상의 풍경을 지상까지 견인해낼 수 있는 것이며, 의식의 내부 가장 깊숙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영혼의 세계를 화판에 인양해낼 수 있는 것이다. 타고난 천재성과 끝없는 숙련만이 눈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천상의 세계와 영혼의 기척,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