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날마다 조금씩 사라진다 (외 4편)
최병숙
너는 날마다 조금씩 사라진다
날마다 닳아지며
조금씩 소모되는 네가
거울 앞에 선 나의 지루한 얼굴과 손바닥 위
때때로 피워 올린 무지갯빛 거품은
너만의 사랑법일까
견고하던 너의 생각과 몸뚱아리는
날마다 무르고 물러져 간다
세상의 바람을 등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의 먼지 묻은 우울의 손을 씻어주고
권태의 가슴을 씻어 주었던
네 안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생각들,
둥글게 둥글게 원만한 모습으로 깎이고 다듬어지며
결국엔 너의 몸은 닳고 닳아져서
지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빛깔과 향기로운 몸뚱아리는 어디로 갔을까
너는 서로 안쓰러운 등 비벼대며 살다가
사라지는 황홀한 거품인가
흔적 없이 사라진 빈 비눗곽에 넘쳐나는 서늘한 그늘
아직도 지독한 허무의 거품들로 남아서
내 가슴속에서 안개처럼 서성거리고 있는 너는
목소리
가슴속에서 형체도 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너는 누구니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너는
마음이 호수처럼
나지막하게 가라앉을 때
더 크게 들리는 맑은 목소리
보이지 않는
너를 만나고 싶다
늙지도 않는
영원히 평행선이 될 수 없는 우리가
나이에 맞게 늙어갈 수 있도록
내 안의 너에게 악수하고 싶다
언제나 어두운 동굴 속
석순처럼 자라고 있는
내 안의 보이지 않는
푸른 목소리
늙은 냉장고
나의 몸은 너무 오랫동안 비대해졌지
둔탁한 몸을 열면
클린 랩으로 덮었던 투명한 기억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
냉동되지 않은 비릿한 상처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도
꾸역꾸역 수납장처럼 받아들이기만 했지
거식증에 걸린 여자가
자꾸 먹으면 먹을수록 뱉어내는
허무한 습관처럼
푸른 락앤락 뚜껑을 열고 닫으며
어느덧 포화상태가 되어버린 나는
이제 더 이상 몸속의
냉각 순환 팬(fan)을 돌리지 못한다
날개들은 부러지고
살과 살들 사이의 뼈들과
혈관들은 숨쉬지 않는다
이젠 비워야해
조금씩 조그만 빈틈들을 남겨야해
꽉 들어찬 욕망들 사이 사이로
서늘한 냉기가 돌아야해
지나간 시간의 칸칸마다
비워야 생생해지는
신선한 마음들을 만들어야해
껍질을 벗고 싶다
질긴 집착처럼 붙어 있는 너의 옷을 벗긴다
발그레하게 취기어린 줄무늬 몸뚱아리
속이 다 비치는 미농지처럼 얇디얇은
속옷까지 벗기다 보면
드디어 드러나는 우윳빛 속살
단단하고 작은 서산 육쪽마늘
습관처럼 생각 없이 옷을 벗기다 보면
어디서 숨어 있다 나오는 걸까
야무지고 매운 독기에
자꾸만 손이 아리다
우윳빛 속살과 속살이 부딪쳐 만나는
맨 가슴과 맨 가슴이 서로 뜨겁게 껴안아
그렇게 질긴 껍질을 벗어버린
생살로 으깨지고 곱게 다져져야
하나의 맛깔스런 의미로
절인 배추 속 갈피갈피마다
소리 없이 스며드는 너
지금 나는
진부한 나의 질긴 껍질을 벗고 싶다
처음의 떨리는 생가슴을 다시 만나고 싶다
상실의 벽
신축건물 3층에 있는 단골 치과
그 기다란 치과용 의자에 누웠다
바짝 긴장하는 내 얼굴에
참수 당하는 포로처럼 검은 소독용 마스크가 씌워진다
따끔한 마취주사 몇 대에 몽롱하게 둔해진 입속의 감각
나는 마스크의 둥그런 구멍으로 붕어처럼 입만 벌린 채
의식의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닌다
완고한 뿌리의 벽을 뚫고
멀리서 들려오는 전기 드릴 소리
그 무자비한 폭력
잇몸 뼈를 뚫고 들어오는 몰인정한
저 침입자는 나를 서글프게 한다
실핏줄이 엉켜있는 부드러운 살 속 벽을 뚫고
인공의 티타늄 나사못을 박아야 하는
내 입속의 작은 벽
몇 달이 지나면 잇몸 속에는
뿌리 박은 인공의 나사못 위에
인공치아가 심어지겠지
나는 이제 더 이상 생의 그 깊은 맛을
음미하지 못할 것이다
반쯤은 허공에 들떠서
무덤덤한 맛으로
세월을 따라 거부할 수 없는
상실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경기도 파주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문학 • 선>2011년 겨울호
출처: (사)한국작가회의 경기 광주지부 너른고을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일송 한기수
첫댓글 너무나 좋은시 잘 감상했읍니다.
예, 좋은 시지요.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시이기도 하고요. 회장님이 댓글 안 달아 주셔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섭섭해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호호호
자기 감각에서 새로운 상상의 감각으로의 뛰어넘으려는 인내가 보이는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좋은시 감상하고 갑니다. 건필하세요.
첫댓글 너무나 좋은시 잘 감상했읍니다.
예, 좋은 시지요.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시이기도 하고요. 회장님이 댓글 안 달아 주셔서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섭섭해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호호호
자기 감각에서 새로운 상상의 감각으로의 뛰어넘으려는 인내가 보이는 좋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시 감상하고 갑니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