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승선했던 동방원양(주)의 51동방호가 북양(北洋) 시절, 몇 번 째 항차인가 기억이 아리송하지만, 이 선박이 항해 중 SOS(긴급구조신호)가 발신됨으로 조난 당했다고 TV에 방송되므로 선원들의 온 가족들이 온통 난리를 겪은 적이 있었다.
* SOS는 구조를 위한 대표적인 모스부호(● ● ● ― ― ― ● ● ●)이다. 일반적으로 "Save Our Ship"의 머리글자라고들 알려져 있으나, 그렇지 않고, SOS의 부호가 간결하고 판별하기 쉽기 때문에 1952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전기통신조약 부속 무선규칙에 의해 세계 공통의 조난신호로 규정된 것이라 한다.
이 사건은 본선이 북양(北洋) 조업장으로 항해 중 일본 혹카이도(北海道)와 혼슈(本州) 사이인 쓰가루(津軽)해협을 항과(航過)하고 있는 야간, 자정(子正)을 막 넘긴 내 당직 시간에 맞춰, 함께 항해하던, 친구인 101행복호 정x천 선장의 연락으로 처음 알았다.
“서 형, 지금 어딘교?” 하고 느닷없이 위치를 물어왔다.
“쓰가루해협 통과 중 아이가…. 갑자기 위치는 와 묻노?” 했더니 웃으면서,
“서 형 배는 우찌 그렇소? 부산에선 야단 났다 아이오. 모르요?” 하면서 내용을 들려줬다.
정 선장은 나와 FAO(훈련소) 동기생이지만 훈련소 입소하기 전에 이미 연안어선에서 많은 경험과 이력을 쌓고 있었는데도 해기사(海技士) 면허장이 없어 선장을 하지 못해 면허 취득을 위해 입소(入所)했던 친구다.
원내가 쓰가루 해협, 빨간선이 대략의 항로
육상강좌의 마지막 부분에 면허시험이 있었다. 취득하지 못하면 실습선조차 승선이 안 되므로 퇴소해야 한다. 당시 시험은 모두 주관식이었다. 시커먼 A4 용지 너댓 장을 나누어 주고 칠판에다 5~6개의 문항을 분필로 적고는 아는 대로 적어 가게 하는 식이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해야 면접시험을 볼 자격이 부여된다. 예상대로 결과는 불합격자가 여럿 있었다.
반년 동안 함께 딩굴었는데 그냥 둘 수는 없어 선장훈련생으로서 이해할 만한 동료들과 상의했다. “우리는 이미 합격했지만 한 번 더 응시하고 낙방한 친구들을 한 사람씩 맡아 뒤에 앉히고 아예 답안지를 찢어 넘겨주는 방식으로 합격을 시키자고…”
그 중에 ROTC 장교출신이 있어 그의 아이디어로 작전명을 「자갈치」라고 하고 비밀리에 추진했다. 아무도 눈치재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요즘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당시는 제도적으로 가능했다. 물론 「자갈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훈련소 측에서도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면허를 취득하였기에 대환영이었다. 정 선장도 이 중의 한 사람이었다.
면허를 따자 누구보다 먼저 선장이 된 것이었다. 경력이나 실기(實技)는 나보다 대선배였지만 나이도 적었고 또 훈련생활 중에 여러 가지로 얽힌 인연이 있어 개인적으로는 내가 형 대접을 받는 사이였다. 교신 내용이 사적(私的)인 일이라 교신들이 뜸한 시간을 이용하여 나를 부른 것이다.
자그마한 키에 딱 벌어진 어께하며 얘기하다 가끔 살짝 보조개를 만들며 웃는 모습에다 마도로스에 어울리는 옷차림 등으로 진작부터 남포동 유명 다방이나 술집 아가씨들의 인기를 끌었었다.
내용인즉 내가 승선 중인 51동방호가 항해 중 조난 당했다는 SOS(긴급구조신호)를 날렸는데, 이 신호를 일본 해상보안청이 먼저 캣취하고 한국해양경찰에게 연락, 사실 여부의 확인도 없이 TV에 방송돼버림으로써 선원가족들이 아연실색, 관계기관들 앞에 모여 난리가 났었다는 것이다.
선박에는 조난으로 침몰하는 경우 자동적으로 물위에 떠오르면서 모스(몰스) 부호로 선명(船名)과 조난신호를 발신하게 되는 ‘조난신호발신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필수 장비이기에 늘 선박의 최상층부에 항상 실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에 대부분의 어선들이 그랬듯이 우리 51동방호도 일본에서 중고선(中古船)을 구입했기 때문에 그 신호는 일본선박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한국국적으로 바꿀 때 이 신호도 정식 한국명으로 변경하고 출항해야 마땅한 것인데, 회사에서 성급한 어획(漁獲)을 위해 슬쩍 내려서 육상의 수리업자에게 맡겨두고 그냥 출항시켜 버린 것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본사(本社)가 법을 어긴 것이 되지만, 본선(本船) 선장(船長)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법적 비품을 갖추지 않았으니까.
한데 수리업자가 선명(船名)을 변경하고는 멍청하게 테스트 한다고 스위치를 넣는 바람에 몇 초 동안 「51동방호 SOS」라는 조난신호가 발신(發信)돼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신호를 한국해경에 앞서 일본해상보안청에서 먼저 청취하고 한국해경에 통보해 준 것이다. 한국해경은 확인도 않고 발표를 해 버렸던 같다고 했다.
항해 중일 때는 매일 본선의 정오 위치와 어획상태, 어종(魚種) 등을 전보로 본사에 알려야 함으로 오늘 낮에도 타전했다. 그러니 본선도 본사도 정말 무심하고 있는데 날벼락이었다. 아마도 이 사실이 가짜였음이 드러나자 본사와 수리업자는 무마하느라 땀깨나 흘렸고 비용도 수월찮이 들었을 것이지만, 바로 이것이 한국사회의 후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전회(前回)의 301화영호가 통관하여 정식 국적도 취득하지 않고 바로 어장으로 출어(出漁)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뉴스는 메스컴으로서는 그야말로 대서특필할 수 있는 종류의 사건이었다. 20명 이상의 선원이 승선, 어로작업에 나선 국적 선박이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조난됐다는 것은 사실이야 어쨌든 내용을 부풀릴 대로 부풀리면서 뉴스를 장식했던 것 같다.
TV의 인터뷰에 나온 유경험자란 사람이 “이 계절에 북양(北洋)은 해수 온도가 낮아 침몰하면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놀라움은 더욱 컸고 난리도 심했으리라.
우리는 그 시간에 쓰가루(津軽)해협을 안전항해 중이었음으로 이 상황을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지만 정 선장이 들려주는 일련의 얘기와 그 후 가족들로부터 들은 바로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은 것이다. 그러나 본사에서는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었다. 실은 사실이 아니었고 또 자신들의 잘못이었기에 할 말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위로의 전보쯤은 있어야 했는데….
그 항차를 마치고 귀국하자 반쪽 얼굴이 된 아내는 한동안 그냥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 되는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리라. 본인은 직접 나서지 못했으나 부산에 살던 일가친척들이 대신 분전(?)했다고 했다. 이 일을 겪은 후 아내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죄송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인간 생리에 있어 보이지 않는 정신(精神)이 지배하는 분야가 너무 넓고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독일군에 의해 죽음을 선고받은 한 벨기에 여성이 처형 전야에 백발로 돌변한 사례를 든 미국 생리학자 알렉시 카렐((Alexis Carrel)의 얘기와 중국에서 주흥사(周興嗣)가 천자문(千字文)을 하루밤 사이에 짓고는 머리칼이 하얗게 돼버렸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이해했다. 아무튼 언제 어디서나 해난(海難) 사고는 없어야 한다.
또 하나는 구한말(舊韓末) 때 궁내부(宮內府)의 고문관으로 와 있었던 미국의 샌즈(W. F. Sands)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위험에 걸릴 확률이 20%요, 위험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80%라고 하자. 이런 일을 할 때 미국사람들은 위험에 걸릴 20%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하고 대비를 하는데, 한국사람은 위험에 걸리지 않을 80%에 해당될 것으로 생각하고 위험을 곧장 무릅쓴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험불감증을 아주 잘 꼬집고 있으나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 모두의 자성(自省) 절실하다. 이 역시 내가 얻은 교훈의 하나로 지금도 지키고 있다.(계속)
첫댓글 한국인의 '위험 불감증'이라~~
잘 표현했군요.
301화영호 불난 사건에서도 화가 치밀었는데 늑점이님 동방호가 조난사고 SOS로 가족들이 졸도할 지경으로......참 기가 막혀.
무엇보다 나의 사랑하는 후배 송하가 백발이 된 사연이 이 글과 관련이 있다니.....쩝
우리집에선 바람새 보고 피해망상증이 있다고 한답니다.
하루 쯤 비우는 여행에서도 대청소에 소지품 정리. 유언장을 다시 써서 금고에 보관 등. 유난을 떨어서리 ㅋㅋㅋㅋ
60대부터 생긴 병입니다. 60대에 앨범 싸악 불에 태우고 책은 나누어 주고.....등등
빈털털이로 살고 있답니다.ㅋ
완수님의 회고록을 통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 고생 많이 하셨으니 남은 세월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아 가십시요.
쩝! ㅎㅎㅎ! 제가 보긴 그건 피해망상증이라기 보단 '노화재촉증(?)' 같네요. 들어보셨오? 희귀병명 같지않오?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으니께 그리 급하게 서둘지 마시고 천천히 갑시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건강하시고요. 부사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재미나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뭐시기 한데 바다 위에서 돌발 사고를 처리하는 분들의 수고는 말로 형언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