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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호]
맑은 영혼 혹은 자유를 위한 고뇌
-김윤배의 신작시
김현정
김윤배의 신작시는 문제적이다. 한 편 한 편 모두 크고 묵직한 주제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처음 읽을 때는 그것이 쉽게 와 닿지 않으나 다시 읽어 곱씹어보면 시가 거느리고 있는 다양하고 새로운 시세계를 접하게 된다. 유명한 화가의 화폭에 담긴 파버카스텔의 이면을 통해 자신의 파버카스텔의 의미를 추출하고 있는 시와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정신으로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가수의 삶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있는 시, 그리고 조용하던 카스피해의 시추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은 욕망”을 형상화한 시도 보인다. 또한 그루터기에 붙어있는 마지막 찻잎을 통해 ‘비전향’의 이면을 엿보고 있는 시와 어느 시인의 묘비명에 새겨진 문구를 보며 자유의 소중함을 드러내고 있는 시도 있다. 이처럼 그의 시에는 맑은 영혼을 그리워하고 자유를 갈구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이 잘 그려져 있다.
그의 낡은 구두를 네가 기억한다면 그는 어떤 어둠으로 너를 데리고 갔을까
네가 지나간 자리마다 실핏줄처럼 살아나는 고뇌의 흔적이 대지거나 바람이거나 늪지인 것을 알았다면 그는 어느 가슴에 낡은 구두를 걸어두고 싶었을까 그의 퀭한 눈빛과 솟아오른 광대뼈와 날카로운 턱선을 더듬어 나가다 잠시 멈추고 생각 깊던 네가, 흔들리는 불빛 너머 먼 산맥을 짚다 툭 부러지는 죽음을 알았다면, 너는 그의 영혼을 울어준 파버카스텔*이겠다
내 파버카스텔은 나의 흰 뼈다 흰 뼈가 내 낡아가는 시간을 읽고 구릉의 침묵을 읽고 여름 햇살 챙챙한 묘역을 읽었을 것이다 묘역에 남아 있는 노래는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흰 뼈는 호수의 물결이 바람을 닮아가는 걸 보았다 흰 뼈는 산맥을 태운 오래 된 재였거나 무수한 산줄기를 몸 속에 세워준 파버카스텔이겠다
몽환의 파버카스텔
미지의 심연이여
* 고흐가 즐겨 사용하던 연필
- 「몽환의 파버카스텔」 전문
이 시는 화가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파버카스텔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고흐의 작품에 등장하는 “낡은 구두”를 볼 때 우리는 단지 그 낡은 구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구두의 주인까지 떠올리게 된다. 윤기와 탄력이 있는 신발이 아닌, 오랜 기간 신은 것으로 보이는 주름지고 꺾인 풀죽은 모습을 통해 고단한 주인의 모습까지 읽게 된다. 또한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퀭한 눈빛과 솟아오른 광대뼈와 날카로운 턱선”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고흐의 작품을 보며 그의 화폭을 스쳐갔을 파버카스텔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화폭에 등장하는 대상을 가장 먼저 본 고흐의 고뇌도 보지만, 그 화가의 고뇌에 따라 움직였을 파버가스텔의 고뇌도 읽는다. 즉, 시인은 “낡은 구두”를 리얼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의 내면 깊게 잡은 짙은 “어둠”과 고뇌의 모습, 그리고 고뇌 가득한 인물을 그리기 위한 그의 심연 속에 있는 고뇌의 모습을 읽어내면서 화가의 손에 이끌려 그려졌을 파버카스텔의 고뇌도 투시하고 있다. “흔들리는 불빛 너머 먼 산맥을 짚다 툭 부러지는” 그의 죽음 앞에서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에 바빴을 파버카스텔의 고뇌도 읽고 있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파버카스텔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신의 파버카스텔이 “흰 뼈”임을 드러낸다. 이 “흰 뼈”가 “내 낡아가는 시간을 읽고 구릉의 침묵을 읽고 여름 햇살 챙챙한 묘역을 읽었을 것”이라고 한다. 고흐의 고뇌를 담은 그림을 그린 파버카스텔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파버카스텔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은 자신의 파버카스텔인 흰 뼈를 “산맥을 태운 오래된 재”거나 “무수한 산줄기를 몸 속에 세워준” 대상으로 보고 있다. 즉 자신의 그림의 자양분이자 에너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파버카스텔은 자신의 갈 길이 정해진, 예측 가능한 것이 아니고 “몽환”적이면서 “미지의 심연”을 찾아나서는, 노마드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의 파버카스텔은 생성적이라 할 수 있다.
나무들이 뿌리의 노역을 잃어버린 계절은 나이테가 보이지 않았다
호수는 격류를 뿌리치고 오래된 이끼를 보였다
거식증을 앓기 시작하기 전, 숲에서 마지막 부른 노래가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였다 나무처럼 서고 싶었던, 나무처럼 강직하고 싶었던, 나무처럼 묵묵하고 싶었던 노래는 지금도 그 숲에 흐르고 있다
호수 같은 눈동자를 갖고 싶었던 너를 위해 백두대간 하나쯤 얻고 싶었다 호수가 마르며 목숨 근처에 사막이 보인다고 울먹이던 너를 기억한다 너의 거식증으로 우리 앞의 생은 언제나 쓸쓸했다
묘원은 산허리를 가까이 부르고 있어 너의 사계가 황량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붉은 흙이 잠시 열리고 닫히는 순간이 한 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기억은 슬프거나 아득해서 발인의 무거운 아침이 떠오르지 않는다
거식증을 앓는 산맥은 앙상하다
* 무한궤도의 노래
- 「거식증을 앓는 산맥」 전문
가수 신해철에 대한 헌사에 가까운 시라 할 수 있다. 세상을 산맥에 비유하고 있다. 나무들은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아야 잘 자라며, 호수도 발원지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공급되고 자정작용이 이루어질 때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의 현실은 어떠한가? 정치, 사회, 문화 등의 분야에서 “거식증”에 걸린 것처럼 시스템이 원활하지 않다. 신해철이 노래한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교실”도 사라졌고, “소년시절에 파랗던 꿈”도 사라진, 삭막한 현실이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이곳에는 거대한 ‘자본(힘)’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신해철은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그러한 현실을 만들기 위해 건강한 노래를 불렀다. “거식증을 앓기 시작하기 전, 숲에서 마지막 부른 노래가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였다.”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나무처럼 서고 싶었던, 나무처럼 강직하고 싶었던, 나무처럼 묵묵하고 싶었던 노래”를 지속적으로 불렀던 것이다. “호수 같은 눈동자를 갖고 싶었던 너”의 간절한 소망을, 그리고 “호수가 마르며 목숨 근처에 사막이 보인다고 울먹이던” 슬픈 모습을 시인은 기억한다. 또한 그는 너의 “거식증”으로 인한 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쓸쓸했다고 노래한다. 그 가수가 부재한 지금, 지금 여기의 현실은 “거식증을 앓는 산맥”처럼 앙상하기 그지없다. 신해철이 “세상이 변해갈 때 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 때론 실망하며 때론 변명도 해보”고,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라고 노래한 대목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탈피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소망했던 무의식적 욕망들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 그리고‘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가?’하는 근본적인 고민들을 시에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원유의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카스피해의 시추 현장은 그녀들을 설레게 하는 미지의 언어였다 시추선은 카스피해의 붉은 수평선을 거느리고 몇 달 째 암석층을 뚫는 드릴작업 중이었다 언제 원유가 솟구쳐 검은 욕망 오색으로 물들일지, 긴박한 호명은 수평선에서 지평선으로 이어졌다
그녀들은 아침 식탁에서 루즈를 꺼내든다 루즈는 소음기가 장착된 피스톨이다 잠시 휘청하는 사이 낙오의 대열에서 쓴 잔을 드는 것이 그녀들의 서바이벌 룰이었다
우랄강은 아트라우*를 술 취하게 만들고 그녀들의 침실을 넘보기도 했다 지류가 침실로 흘러 불안한 도강이 가끔 있었다 그런 날은 식탁이 조지아산 포도주로 물들었다
시추선의 드릴은 그녀들 가슴을 지나치지 않았다 두려운 며칠이 지나고 시추선의 갑판이 익숙해지면서 가슴으로 드릴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녀들 가슴에 뚫려 있는 시추공에서 포도빛깔 절망이 흘러넘치는 날이 잦았다
그녀들 중 누군가는 중앙아시아로 돌아올 것이다 우랄강 붉게 흐르는 언덕에 서서 아침 식탁의 안개웃음을 기억하고 시추의 날들 돌아보게 될 것이지만 신도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
그녀들은 중앙아시아 석유 시추현장에 파견된 인턴사원이었다
*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우랄강 하구의 도시로 카자흐스탄 석유 산업의 전진기지다.
- 「시추의 날들」 전문
위 시에서는 카스피해의 석유 시추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본의 욕망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카스피해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있는 내륙호로,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사이에 있는 이곳은 바다와 호수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어 분쟁지역이기도 하다. 석유매장량이 많은 카스피해의 시추 현장에는 “원유의 유혹”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석유 시추현장에 파견된 인터사원인 그녀들은 언제 뿜어져 나올지 모르는 원유에 대한 “검은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녀들은 자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기라고 하듯 아침 식탁에서 루즈를 바른다. 그 루즈는 “소음기가 장착된 피스톨”이며, 이러한 행위가 그곳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논리이기도 하다. 우랄강은 우랄강 하구의 도시이자 카자흐스탄 석유 산업의 전진기지인 아트라우를 취하게 만들고, “그녀들의 침실을 넘보기도” 한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을 가로지르는, 두 나라의 젖줄이던 이 강은 이제 “원유”에 대한 검은 욕망으로 가득 찬 욕망의 강이 된 것이다. 시추의 드릴은 때로 “그녀들 가슴을” 유혹했고, 또한 그녀들의 가슴에는 “포도빛깔 절망”이 넘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시인은 우랄강 하구에 있는 카자흐스탄 석유 산업 전진기지에 도사리고 있는 자본의 욕망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의 손길이 순수했던 이곳에까지 미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찻잎이 투명한 색깔을 버리는 계절이 되면 가지들을 베어낸다 베어낸 그루터기에 찻잎 한 장을 남긴다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찻잎 한 장을 위해 혼신으로 햇빛을 모으고 바람을 모으고 물을 모은다 순간순간 고사(枯死)의 유혹으로 흔들리는 그루터기를 깨워 새순을 밀어올린 찻잎 한 장은 새순이 새 가지에 이르기 전, 그루터기를 떠난다 결연한 생명력이다
결연한 생명력은 시와 혁명 사이에도 있다
비전향은 죄였다 사무치는 감동이 있어서 비전향이 아니다 절대의 가치가 있어서 비전향이 아니다 전향 하고 싶으나 전향 되지 않는 문장으로 비전향이다
젊은 날의 영혼이 한 번 기운 것으로
목숨을 놓고 저울질 할 수 없는 편향으로
꽃인들 마지막 한 잎의 목숨을 버리고 싶을까
- 「마지막 한 잎」 전문
사람의 신념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 신념이 청년시절 자신의 삶의 좌표를 제시해주었거나 그 신념으로 자신이 조금이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비전향”도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베어낸 그루터기에 붙은 찻잎 한 장이 그루터기의 혼신의 힘에 의해 자라는 것을 목도한다. 그러나 찻잎 한 장의 새순이 돋아나기 전 그루터기를 떠나게 되는데, 이 모습을 시인은 “결연한 생명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결연한 생명력은 “시와 혁명”에도 존재하며, “비전향”과 연결시키는 것이 독특하면서도 참신하다. 그러면서 비전향의 이유를 새로운 시각으로 도출해낸다. 어떠한 “절대적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향 하고 싶으나 전향 되지 않는 문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영혼이 한 번 기운 것”을 쉽게 고치지 못하고 있다. 시인은 “비전향”을 선악의 개념으로 접근하지 않고, 젊은 날 한 번 기운 ‘영혼의 이름으로’까지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시인의 연민의 시선과 균형감각을 읽을 수 있다.
나무십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묘비를 일으켜 세운다
-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은 세상은, 세상이 그를 원해 삐걱거렸다
두렵지 않은 세상은 두렵지 않아 삐걱거렸다
크레타섬은 죽음 어디 쯤에 있을 것이다
첫 문장의 전율은 시간이 가며 함께 낡아간 것일까
샐비어술은 주점의 나무계단을 흘러내렸다
나무계단이 바다를 향해 무릎을 꺾고 있다
어둠은 바다와 잇닿아 있다
나는 크레타섬의 어둠에 들게 해달라고 기도 한다
밤의 에게해는 부드러운 젖가슴을 드러낸다
아직은 살아 있는 말들이 밤바다로 쏟아져 내린다
죽음은 밤에 피레에스프항을 출항해서 밤에 크레타섬의 이라클리오항에 닿는다
묘비명 한 행은 너무 멀고 가파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
- 「나무십자가」 전문
이 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새겨진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구를 통해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그의 소설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신성모독D미로 파문당할 만큼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있다. 그도 그는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로 ‘자유’를 갈구 여기원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의 묘비명을 통해 알 수 있고 있은 그가 자유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을 할 때에도 어떠한 두려움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자유’가 얼마로 간절 여기소중은 것인지를 다시 한수 느낄 수 있다. 이 시의 마지막 행 “묘비명 한 행은 너무 멀고 가파르다”라고 한 데서는 그가 묘비명처럼 되기 위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럽고 험난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윤배의 신작시를 통해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을 목도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에 길들여진 모습들, 즉 고뇌를 모르고 살아가는 무의미한 삶과 거식증을 앓는 쓸쓸한 삶, 그리고 ‘검은 욕망’으로 순수함을 잃어가는 현실과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의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맑은 영혼을 되찾고자 고뇌하고, 자유를 갈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원래 그대로의’, 본연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정 | 1999년 작가마당으로 비평활동 시작. 저서 한국현대문학의 고향담론과 탈식민성, 백철 문학 연구, 대전 충남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등. 현재 세명대 교양과정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