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시아가 누구인가? 다윗의 자손이며 다윗이 주로 부른 그리스도(눅 20:41-47)
1. 오늘의 말씀 : 눅 20:41-47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 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45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어제 집사님들과 대화하며 맘몬의 세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의한 이익이라도 기회만 되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듭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맘몬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합니다. 세상 사람도 불의한 목적을 이루는데 지혜와 열정이 넘치는데, 하물며 주의 일이 목표인 나는 어찌해야 하리까!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자녀보다 정말 지혜롭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로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받은 계시로 인해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주신 것임을 깨닫고 도리어 기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합니다(고후 12:10). 이는 그가 약할 때 강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땅의 일, 지극히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그런 나를 보며 절망하였습니다. 육체의 가시처럼 사탄의 사자로 인해 심히 괴로웠습니다. 이는 나의 약한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인해 도리어 기뻐하며 땅의 일에서 벗어납니다. 각양의 사람에게 각양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두리번거리지 않게 하시며, 내게 주신 은사를 귀히 여기게 하소서. 내게 위임하신 주의 일에 정진하게 하소서. 내 영혼을 보혈로 씻어주사 정결하게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말씀을 조명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 이를 두고 성전의 지도자들이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행동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 대신 사람들을 보내 예수의 권위를 따져 묻고 예수를 총독에게 넘기고자 세금 문제를 거론하였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허구성을 증명하고자 터무니없는 질문으로 예수를 몰아붙인다. 그때마다 예수는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지혜로 대응하여 그들로 침묵케 한다.
변론의 마지막 부분은 예수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질문하신다. 예수의 질문은 두 가지이며, 소위 다윗의 자손이 의미하는 메시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42절, 새번역).
첫 번째 질문에 관해 예수께서 스스로 대답하신다. “다윗이 친히 시편에서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였다”(43절, 새번역).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44절, 새번역).
예수께서 인용하신 시편은 “다윗의 시”이다.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 110:1).
다윗은 “주(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라고 말한다. 앞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며, 뒤에 나오는 “내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내 주 그리스도께 말씀하시되”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하신 말씀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셔 승천하신 사건을 미리 내다본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행 2:33-35).
“그(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2:20-22).
두 번째 질문의 요지는 이러하다. 이렇듯 다윗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주로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약속되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다윗의 계보로 오신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중략)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 16).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또한, 예수를 그리스도(히, 메시아)로 고백하는 자는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눅 18:35).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눅 18:42).
예수 그리스도는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며 동시에 다윗이 주로 부른 그리스도이다. 이는 역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보다 훨씬 높으신 “주”이시다. 다윗은 선지자이며, 그리스도를 미리 보고 증거하였다(행 2:30-31). 그가 미리 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정체성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밝히 드러난다.
하지만 예수의 공생애 시절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다윗이 미리 본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아 됨을 다윗과 같은 왕으로 여겼을 뿐이다.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메사아로 국한 시켰고,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다윗처럼 강력한 왕으로 등극할 것을 믿었다. 예수가 왕이 되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정의를 실현할 것으로 믿은 것이다. 이때 예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지상적 삶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는 정치적 메시아이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적 메시아이다. 그 뜻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백성들은 예수가 자신들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님을 알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지만 그들의 불신이 메시아의 사역을 좌절시키지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메시아의 길을 가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죽으셨다. 그리고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승천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믿는 자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예수의 메시아 됨을 오해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제라도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들은 구원받는다. 이 구원의 약속은 당시의 유대인들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임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 2:37-39).
20:45-47절에서 예수는 서기관들의 외식을 고발하며 제자들을 각성시키신다. 모든 백성이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을 들을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원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잔치에서 윗자리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46-47절, 새번역).
서기관들은 바리새인 중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소위 성경 전문가였다. 그러나 이들은 가르치는 권한을 남용하여 허세를 부리고 명예욕을 채우고 재물을 탐하였다. 이들은 종교의식을 위해 입는 긴 옷을 입고 다니며 허세를 부리고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과 잔치의 상석을 차지하였다.
특히 서기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당시 서기관들은 남편의 유언에 따라 과부의 재산을 돌보도록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착복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서기관들은 길게 기도하며 종교성을 과시하였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신임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심판은 엄중하다.
주목할 것은 서기관들에 대한 경고가 서기관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는 물론 모든 믿는 자가 제자 군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도자 역할을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이다.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남용하여 사욕을 채우는 모든 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메시아가 누구인가? 예수 당시 많은 사람이 예수의 메시아성을 오해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아로 간주하였다. 그를 인간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주는 메시아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아 됨은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사건으로 그 정체성이 드러난다. 예수의 공생애 당시 아무도 예수의 메시아성을 바로 알지 못하였다. 심지어 제자들도 메시아 사역을 성취하는 십자가의 현장에서 다 도망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진리의 영이 임했을 때 비로소 예수의 메시아성을 바로 깨달았다.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오순절 선포가 바로 이것이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곧 하늘에서 오신 인자가 땅에 들리신 것이다(요 3:13-14). 이제는 그를 믿는 자마다 창세전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 3:15; 딛 1:2). 이 생명을 알고 생명의 교제를 할 때 비로소 예수를 영으로 안다. 비로소 예수를 바로 알게 되며, 참된 메시아를 믿게 된다.
한국교회에도 메시아성에 대한 오해가 크다. 그를 지상적 왕인 다윗의 자손으로만 아는 이들이 있다. 예수를 인간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주는 만물 안의 신으로 간주한다. 이렇듯 소원이 절박한 사람이 더욱 간절하고 절실하고 공을 들여 믿는다. 이것은 육으로 아는 메시아이다. 그러다 어느 날 진리의 영이 임하여 메시아를 바로 깨닫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음을 영으로 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생명의 교제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생명의 교제는 삼위 하나님의 사귐에 동참하며, 그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다. 영생의 믿음은 모든 상황에서 그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이 믿음을 가진 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요동하지 않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씨에스 루이스는 인격적 신뢰의 믿음을 가리며 사랑으로 형성된 신뢰에서 나오는 “믿음의 고집”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생명과 관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다!
“어떤 이에게 필요한 일이 분명하지만, 그가 우리를 신뢰하는 경우에만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개를 덫에서 꺼내줄 때, 아이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뽑을 때, 수영을 못하는 소년을 물에서 건질 때... 그들의 불신이 유일하고 치명적인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앞발을 덫 속으로 더 깊숙이 넣어야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손가락을 더 아프게 해야 손가락 통증이 멈춘다고, 그대로 빠져들 것 같은 물이 몸을 떠받쳐 줄 것이라고. 이 모든 믿기지 않은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이 우리를 믿어야 합니다”(C.S.루이스, ‘믿음의 고집에 대하여’, “세상의 마지막 밤”).
믿음의 고집은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의 관계에서 나온다. 깊은 물에 빠져드나 건지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을 신뢰한다. 가시 박힌 손가락이 더 아프나 가시를 빼내시는 주를 온전히 신뢰한다. 끝없는 고난이 지속되나 고난을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견딘다. 그 결국을 미리 보며 감사한다.
하지만 생명의 교제, 곧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사랑의 신뢰가 없는 믿음의 고집은 무모한 맹신과 아집과 폭력을 불러온다. 더구나 삼위 하나님이 아닌 인간 지도자나 영적 지도자에 대한 믿음의 고집은 국가나 교회에 크나큰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 대한 팬덤은 자신과 공동체에 크나큰 화를 자초한다.
4. 나의 묵상
나는 오랫동안 메시아성을 오해하였다. 예수를 따르던 무리처럼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았다. 예수 잘 믿으면 문제해결, 고난 면제, 만사형통, 가정 행복, 목회 성공, 고종명(평안히 죽는 것), 죽은 후 천국 가는 것 정도로 여겼다. 예수께서 엄중히 경고하신 서기관들의 모습이 내가 선망하던 목회자 상이었다. 종교성을 과시하고 문안받기를 좋아하고 명예욕을 채우고 허세를 부렸다.
문제의 본질은 예수가 누구인지, 메시아성에 대한 오해에 있었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만 반복하면서 그것을 목회로 착각하였다. 신앙은 퇴보하였고 목회는 어그러졌다. 육으로 아는 메시아는 인간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주는 거짓 신이었다. 내가 받을 몫은 가혹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심판의 무덤에서 복음이 계시되었다.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되셨다. 그를 믿음으로써 창세전 약속된 영생을 얻었다.
이후 날마다 생명의 교제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에 참여하여, 페리 코레시스를 누리며, 그를 신뢰한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그를 신뢰한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는 사랑으로 형성된 신뢰이다. 거기서 나오는 “믿음의 고집”은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풍요롭게 만든다, 놀랍고도 신비한 힘이 있다!
오늘도 하나님은 내게 꼭 필요하기에 그 일을 행하신다. 가시 박힌 손이 더욱 아프나 가시를 빼내는 자비로운 손길을 신뢰한다. 깊은 수렁에 빠져드나 수렁에서 건지시는 인자한 손길을 신뢰한다. 물론 생명의 교제, 인격적 신뢰가 없을 때도 내게 믿음의 고집이 있었다. 그때는 무모함과 아집과 편견과 폭력을 불러왔다. 이제는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사랑으로 형성된 신뢰를 한다. 다윗처럼 주의 인자가 내 목숨보다 귀함을 고백한다. 그 인자하심, 십자가에 나타난 그 사랑으로 넉넉히 승리한다.
5. 묵상 기도
아버지... 예수를 따르는 무리처럼 저도 메시아를 오해했습니다. 그저 인간의 소원이나 기대를 채워주는 신으로 오해했습니다. 나의 소원이나 기대가 이루어지는 듯싶으면 기뻐하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좌절되면 낙망하고 열심도 사그라졌습니다. 육으로 아는 예수는 믿을수록 혼돈과 미궁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목사가 되어서는 주께서 경고하신 서기관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겉은 평토장한 무덤 같았으나 속에는 탐심과 정욕이 가득했습니다.
아버지여... 무지와 오해 속의 신앙과 목회, 내가 받을 것은 공의의 심판뿐이었습니다. 하오나 심판의 자리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복음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영으로 아는 그리스도, 그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으로 보내셔서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셨습니다. 주여,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보내신 자에게 영생을 주셨나이다. 날마다 생명의 교제로 삼위 하나님과 사귐을 가집니다. 삼위 하나님의 페리 코레시스에 참여합니다.
아버지... 생명의 교제는 삼위 하나님과 사랑으로 형성된 신뢰를 형성하게 합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내게 꼭 필요한 일임을 고백합니다. 이는 생명의 교제를 풍요롭게 하고 힘있게 하는 “믿음의 고집”입니다.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서만 형성되는 믿음의 고집입니다. 특정한 정치지도자나 교회 지도자에 대한 믿음의 고집은 화를 자초합니다. 사람에 대한 팬덤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범사에 감사하게 하소서. 새가나안교회 예배 가운데 함께 하소서. 진리의 영으로 역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첫댓글 아멘~인간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주는 만물 안의 신으로 우상을 만들지 않게 하시고 아버지의 영광으리 보이시고 풍성한 생명의 교제로 인도 하소서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