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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달천순흥안씨(서파공파) 원문보기 글쓴이: 樂山 樂水
通訓大夫 行醴泉郡事 西坡 安先生 墓碣名幷序
晦軒夫子倡道東方嘉惠後昆仁深而德厚源遠而流長子孫至六七世而金玉滿朝卿相布列先生獨以盛滿之戒脫屣名利歸臥梓鄕聿修大祖至貴緖永尊儒家之基業蔚爲一代之矜式百世之模範時
晦軒先生(회헌선생)이 東方(동방)에 道(도)를 일으켜 아름다운 恩惠 (은혜)를 베풀어 後孫(후손)들이 自己를 克復하고 禮로 돌아가라는 仁(인) 의 精神(정신)을 깊게 하고 德(덕)을 쌓아 맑고 깊어 子孫은 면면히 이어 六,七世 에 이르러 黃金(황금) 과 珠玉(주옥)이 가득하며,
公卿(공경)과 宰相(재상)이 布列(포열) 하였으나 선생 홀로 成勢(성세) 가득한 때의 警戒(경계)로서 名譽(명예)와 利益(이익)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鄕里(향리)로 돌아와서 偉大(위대)한 祖父(조부)의 遺業(유업)의 端緖(단서)를 더욱 닦아 儒家(유가)의 基業(기업)을 旺盛(왕성)하게 永遠 (영원)토록 정 하는 것을 일대 의 矜持(긍지)로 삼았으니 百世 (백세) 의 模範(모범)이다.
則端廟遜位矣獨抱幽貞而超然自靖於深山艸樹之間其義與六忠之成仁錦城之殺身不甚相遠矣其後孫僻在嶺外克軆迺祖之訓世世業儒不求聞達
때는 곧 端宗(단종)이 世祖(세조)에게 王位(왕위)를 讓位(양위) 했을 때로 홀로 白石 같은 굳은 節介(절개)를 지녀 超然(초연)히 깊은 山草木 사이 에서 스스로를 꾀하고 기 의리는 死六臣(사육신)과 더블어 仁(인)을 成就 (성취)하고, 錦城大君(금성대군)이 殺身(살신)함과 그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의 後孫은 후미진 산골에 살면서 克己 復禮(극기복례)라는 祖父(조부)의 敎訓(교훈)을 代代(대대)로 있는 선비를 業(업)으로 하고 榮達(영달)을 求(구)하지 아니하였다.
貽爵之典不及於泉壤俎豆之儀亦毁於一時則今於四百年之後何能想衆其潛光隱德之萬一哉後孫宗熙敎煥敎悳等方營改碣以其於先祖大君師傳順原君之狀訪余於曉山樵舍屬以顯刻詩自顧廢蟄絶筆久矣而均是爲先竊有所感於心者謹按狀而敘之
爵位(작위)를 더하는 祝典(축전)은 九泉(구천)에 미치지 못한다 하고 祭禮(제레)의 儀式(의식) 또한 한결같이 허물치 아니 하였으니 사백년 후의 오늘에 어찌 능히 그 깊은 配慮(배려)와 陰德(음덕)의 萬의一 이라 도 想像(상상)할수 있으리요.
後孫 宗熙 敎煥 敎悳 등 이 바야으로 墓碑(묘비)를 고쳐 세우고자 그들의 先祖(선조)에 관하여 鳳林大君(봉림대군)의 師傳(사전)이 있었던 順原君 (순원군) 應昌(응창)公이 쓴 문서를 가지고 曉山(효산)의 나의 草家 (초가) 를 찾아와 맑고 밝은 글을 지어달라고 委屬(위속)하니 늙어 蟄居 (칩거) 하면서부터 붓을 잡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으나 우선 사사로이 마음으로 느끼는 바가 있어 옷깃을 바로하고 삼가 문서를 살펴 이 글을 짓는다.
先生諱理西坡其號也安氏系出順興文成公晦軒夫子爲六世祖諱于器順平君文順公號竹屋子高祖諱牧順興君文淑公號謙齋曾祖諱元崇順城君文惠公祖諱瑗兵曹典書恭愍壬申言事忤旨而流外入我
先生의 諱는理, 西坡는 그의 號이다.順興安氏(순흥안씨)로 文成公(문성공) 晦軒先生 (회헌선생)이 六代祖가 되고 五代祖의 諱(휘)는 于器(우기) 封君 (봉군)이 順平君(순평군) 諡號(시호)는 文順公(문순공)이며 號(호)를 竹屋 (죽옥)이라 하셨다. 高祖의 諱(휘)는 牧(목), 封君(봉군)이 順興君 (순흥군) 이고 諡號(시호)를 文淑公(문숙공), 號(호)를 謙齊(겸제)라 하셨다. 曾祖(증조)의諱(휘)는 元崇(원숭), 封君(봉군)을 順成君(순성군)이라 받았고 諡號(시호)를 文惠公(문혜공)이라 받았다. 祖(조)의 諱(휘)는 瑗(원)인데 恭愍王(공민왕) 壬申年(임신년) (1392년)刑曹典書(형조전서)로 있을때 圃 隱(포은) 鄭夢周(정몽주)의 黨(당)이라 하여 外地(외지)에 流配(유배) 되 었다.
朝屢徵不起諡景質考諱從約海州牧使贈吏曹判書俱載杜門志妣貞夫人東萊鄭氏蓬原府院君良度公良生女正統癸酉先生生于瑞原舊第風儀俊偉宇量宏深文章學業得於家庭而一代名流推而宗之伯仲兩兄以貳相判尹俱登貴顯獨不樂仕進杜門讀書以探積薀奧爲務嘗曰吾家自先正以後歷顯于朝昆季子姪充滿臺府闔族無一人服褐者此正歛藏之時也不樂仕進天順癸酉外補宜寧黽勉赴任歲値凶荒民多散亡割俸設賑恩信晋洽流逋四歸道伯以治積褒聞于 朝翌年甲戌移拜醴泉郡事未幾
朝鮮(조선)에 들어와서 屢次(누차) 朝廷(조정)에서 벼슬길로 불렀으나 끝내 나가시지 않고 돌아가시나 諡號(시호)를 景質公(경질공)이라 내렸다, 考位(고위)의諱(휘)는 從約(종약), 海州牧使(해주목사)를 歷任(역임)하시고 돌아가시니 贈職(증직)으로 吏曹判書(이조판서) 였으니 杜門洞誌 (두문 동 지)에 모두 記載(기재) 되어 있다.
配位(배위)는 貞夫人 東萊鄭氏(동래정씨) 蓬原府院君(봉원부원군) 良度公 (량도공) 良生의 따님으로 正統(정통) 癸酉年(계유년) (太祖二年1393年)에 瑞原(서원)의 옛집에서 先生이 태어나시니 의젓한 風采(풍채)에 才智 (재지)가 뛰어났고 度量(도량)은 넓고 깊었으며 文章(문장)의 學業(학업)은 家庭(가정)에서 攄得(터득)하여 當代(당대)의 名士(명사) 들에 推仰 (추 앙)되어 큰집의 伯氏(백씨) 仲氏(중씨) 두형과 함께 宰相(재상)이나 判尹 (판윤)과 같이 귀한 몸으로 顯達(현달)의 길에 오를수 있었으나 홀로 벼슬 길에 나아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門을닫고 讀書(독서) 하며 深奧 (심오)한 학문을 探覽(탐람)하는데 힘섰다, 일찍기 우리가문은 先賢(선현) 悔軒 (회헌)先朝(선조) 로부터 智德(지덕)이 뛰어난 분이 잇달아 태어나서 조정에서는 형제와 질 들이 臺閣(대각)과 府院(부원)에 가득하고 문중의 한 사람도 벼슬하지 않은 者(자)가 없으니 이것은 바로 곳집을 貪 (탐) 하는 時節(시절)이라고 말했다.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단종(端宗)癸酉年 (서기1453년)외직(外職)으로 宜寧(의령)에 赴任 (부 임)하여 일 년 사이에 힘써 善政(선정)을 베풀었으나 凶年(흉년)으로 많은 백성들이 흩어지니 선생의 祿俸(녹봉)으로 곤궁한 백성을 구하고 은혜와 신의가 두루 미치게 하니 유민이 사방에서 돌아왔다,
觀察使(관찰사)가,그선정을 褒賞(포상)하니 朝廷(조정)에서 그 내용을 듣고 翌(익) 갑술년醴泉郡事(예천군사) 로 昇進(승진) 시켜다,
莊陵遜位投紱歸鄕卜居樓巖山下名其里曰大龍山改山名曰龍巖盖取諸葛孔明臥龍之意改軒號曰樂園取司馬公獨樂之趣也景泰丁丑六臣禍起時事猝變錦城大君與本府使李甫欽謨復事覺同被誅戮府中冠帶之族七十餘家一時殄滅當此之時先生杜門謝客深自韜晦名公巨卿多折簡而不答方伯守宰每來訪而弗見瞻望寧越一嶺間隔恒自悲傷逍遙終老嘗
머지않아 단종이 왕위를 세조에게 양위 하니 職銜(직함)을 버리 고 鄕里(향리)에 돌아와 살곳을 樓巖山 (루암산) 아래로 정하고 그 마을에서 命名(명명)한 大龍山 (대룡산)의 산명을 고쳐 龍巖 (룡암)이라 하였는데
이는 諸葛孔明(제갈공명) 臥龍(와룡)의 뜻을 대강을 고쳐 取(취)하였다, 사는 집의 軒號(헌호) 를 樂園(낙원) 이라 한 것은 司馬光 (사마광) 의 獨樂園記(독낙원기)에서 취 하였다, 景泰 (경태) 丁丑年 (정축년) (世祖 2년 1457년) 死六臣 (사육신)의 하가 일어났고 갑작스런 變(변) 으로 錦城大君 (금성대군)이 順興府使 (순흥부사)李甫欽 (이보흠)과 더불어 端宗復位謀議事件 (단종복위모의사건)이 發覺 (발각)되어 함께 죽임을 당 했을때 府中(부중)의 老少(노소) 族人(족인) 70余戶(여호)가 一時에 죽임을 당하였다 ,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선생은 문을 닫고 손님 만나기를 사절사절하며 하며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깊이 감추고 이름있는 公卿(공경)으로부터 많은 편지를 보내왔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으며 관찰사 수령 등이 매양 찾아왔으나 대면(對面) 하지 않았다, 영월을 한산봉우리 사이를 두고 우러러 쳐다보며 항상 스스로를 비난,상심하고 거릴면서 노령을 보내었다.
以一馬一僮往來廢府宿水寺及坪里卽先正讀書之古址有洗硯池每感慕咏以爲常其詩曰竹水淵源泗水湄讀書吾祖長於斯徘徊感慕油然意月照庭梧洗硯池常以水月盛滿之戒命子孫勿仕定省之暇使讀朱書以軆先祖慕晦菴之意絶不語及榮達事京居姪孫輩在貴顯之列者閔其鄕曲淡泊每以
일찍이 말 한필 과 시종 한 사람 으로 폐부(廢府)의 숙수사(宿水寺) 와 평리(坪里) 를 왕래하였는데 그곳은 先賢 晦軒 先祖 께서 글 읽은 옛터이며 세연지(洗硯池)가있어서 매양 감동과 흠모(欽慕) 의 시 를 노래하였으니 그 시 에 이르기를 “竹溪水(죽계수)는 淵源(연원)을 泗水 (사수)에 두고, 우리할아버지 이곳에서 오랫동안 글읽었네, 서성이며 感慕 (감모)하는 마음 구름처럼 이는데 달이 뜰을 비추니 여기가 洗淵池임을 깨우쳐주네, 언제나 물 과 달이 가득차 있네”라고 했다
벼슬 하지 말며,밤 에는 부모 잠자리 보아드리고, 새벽에는 안부를 살피 고, 여가 있으면 朱子書 (주자서)를 읽도록 하며, 회헌 선조가 晦菴 (회 암)선생을 欽慕(흠모)뜻을 禮(예) 로서 다하라고 자손에게 警戒(경계)하라 命하였다, 한양에서 생질이나 종손들이 귀한 몸으로 현달하는 列(렬) 에있는 일은 말하지 못하게 하고 시골에서 꾸밈없이 그들을 憐憫 (연 민)하였다,
嘉味供之卽皆却之曰小白藜藿於分足矣焉用官下物膏梁也歿後數世己卯禍作京中諸族及大宗之家俱被慘酷惟先生之家獨免時人服其前知之鑑事載莊陵誌墓在順興府南大龍山桂谷子坐原
맛있는 음식을 드리면 모두 물리치고 “소백산의 명아주 잎과 콩잎이 분수에 맞는데 어찌 관청의 膏粱珍味(고량진미)가 필요 하겠는가 ”라고 儉素(검소)했다,
돌아가신 몇 해 후에 기묘사화 가 일어나 京中(경중)의 여러 족인 과 큰댁들이 다같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나 오직 선생의 집만 면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공의 앞날을 밝혀 알아보는 혜안에 탐복 하였다, 이일은 莊陸誌(장육지)(端宗 에 관한 일을 수록한 책)에 기제 되어있다.
선생의 묘는 순흥부 의 남쪽 대룡산의 桂谷(계수나무골)둔덕에 子坐로 모셨다,
純廟壬午以士林公議腏享于龍淵祠配淑人慶州李氏鷄川君從直女月城君之秀五世孫墓祔先生兆後育五男伯文叔文俱無後季文䕃副司直贈兵判興文佐郞益文司果判書三男瑛明經進士號五之堂玎忠順衛瑠佐郞二男熙別坐燾司果二男烋同樞有學行信判官進士六男公澤敎官公祐忠順衛公弼生員公信文校理公健部將公直忠順衛四男公俊公輔部將公獻公翼瑠一男公綽別坐一男長孫武兼燾一男延孫武科同樞一男進業承直郞判官一男慶南餘不盡祿
순조 임오년 (서기1822년)사림의 公論에 依하여 龍淵祠(용연사)에 配享(배향)되었다, 配位는 淑人 慶州 李氏로 鷄川君 從直公의 따님으로 月城君의 才色兼備한 五世孫이고 墓는 先生의墓域뒷편에 계신다, 아드님은 다섯분을 키우셨는데 伯文 叔文은 함께 後孫이 없고 季文 은 蔭職 으로 副司直 을 歷任하고 贈職으로 兵曹 判書였고 興文은 佐郞을 歷任하고 益文은 司果를 歷任 贈職으로 判書 였다, 季文 의 子 瑛 은 明鏡進士로 號는 五之堂이라하고 玎(정)은 忠順衛를 지냈고 瑠(류)는 佐郞이었다,四男 興文의 子 熙(희)는 별좌 였고 燾(도)는 司果를 지냈다. 五男 益文(익문)의 자 烋(휴)는 同知中樞府事 를 역임 하였고 學行이 출중 했다. 信은 判官(판관)을 역임 했다. 瑛(영) 의 子 公擇 (공택)은 敎官이었고 公祐(공우)는 충순위 公弼(공필)은 生員. 公信 (공신)은 文科에 及第하여 郡守(군수),弘文館敎理(홍문관교리) 經筵參 贊官 (경연참찬관)등을 역임 하고 公健(공건)은 部將 公直(공직)은 忠順衛 (충순위)였다.
玎(정)의 子公俊(공준) 公輔(공보)는 部將,公獻(공헌) 公翼(공익) 等이 있 었다.
瑠(류)의 子 公綽(공작)은 別坐(별좌)
熙(희)의 子 長孫(장손)은 武科에 及第하여武兼(무겸)을 지냈고
燾(도)의 子 延孫(연손)은 武科에 及第하여 同知中樞府事 를 역임하였고
烋(휴)의 子 進業(진업) 承直郞(승직랑)으로 判官(판관)을 지내고
信(신)의 子 慶南(경남)이 있었고 남은이가 많으나 기록를 다하지 못한다
於乎先生生於詩禮之庭簪纓之族初不以富貴利達貳其心閉門守靜沈潜性理以至於堂詩名流之推重則其操守之堅學問之深有不可窺測而暫試外補遺愛兩邑又豈足以展其所蘊哉枳棘之林己非鸞鳳所棲山梁之雉又從色斯擧矣不俟終日棲山韜晦終使人不知而泯其迹焉則其出處之正志節之高足以凛百世質神明矣如非操守學問之根其於素定則烏能就之如是其介潔哉
오호라 선생이 時와 禮의 뜰에서 高官大爵(고관대작)의 門閥(문벌)에 태어나 첫 번째로 부귀와 영달을 외면 하였고 .둘째로는 그 마음의 문을 닫아 靜觀(정관)을 지키고. 性理學에 沈潛(심잠)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높이 받들어 중히 여기게 됨에 이르렀고. 그 지조를 지키는 바가 견고 하여 학문의 깊이가 있어 엿보아 가능치 못하였으며 暫時(잠시)나마 한때 외직에 나가서 博愛(박애)를 두 고을에 베풀었으나 어찌 그 深奧(심오)한 뜻을 足히 펼쳤다 할 수 있겠는가.
탱자나무와 가시나무 숲은 난새 나 봉황새가 이미 서성거리 곳이 못되고. 청백한 선비가 이 높은 학문으로 어찌 모양새를 따르겠는가,
종일토록 기다리는 것이 없이 산을 서성거렸고 끝내 남으로 하여금 그의 才智나 학문을 알지 못하게 하여 발자취를 없게 하였다.
그래서 去就(거취)와 바른 志操(지조)나 절도가 고상하여 그 바탕을 凜凜(름름)케 했음은 神이 밝혀다, 志操(지조)를 지킴이 學問의 뿌리와 같지 않이하고 본디부터 정해진 바탕 인즉 어찌 능히 一朝에 그의 進退(진퇴)가 이 와 같이 高潔(고결)한 性品(성품)일수 있겠는가.
巾衍舊藏中經鬱攸後生末學無攸攷徵幸有順原君狀德之文亦足以代太常之記述而傳於後無疑矣黃石公有言曰後人苟不公百世無賢人不佞雖筆萎言輕竊自附於百歲之公言繼之以銘曰
책장의 오래된 藏書中(장서중)에 經典(경전)이 가득하나 이 後學이 未盡 (미진)하여 詳考(상고)할 길이 없어으나 多幸(다행)이 順原君(수원군) 應昌公 (응창공)과 같은 德 (덕)있는 분이 쓴 文章(문장)이 있어 最上의 記述(기술)을 하는, 資料(자료) 족하여 後世(후세)에 疑問(의문)없는 글을 전하게 되었다.
中國前漢(중국전한)의 創業功臣(창업공신)인 張良(자량)을 길에서 만나 兵書(병서)를 傳授(전수)했다는 黃石公(황석공)은 “後世(후세)사람이 한때 公明正大 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百世를 두고 아첨하지 않은 賢人(현인)은 없다.”고 말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 비록 문장력이 쇠약해지고 말을 가벼이 한다 할지라도 사사로이 스스로를 百年의 公論(공론)에 붙이고 이어 글을 지었다.
知滿而退明哲之卓炳幾而先自靖之篤獨樂有園臥龍有岡婆娑初脫畧名韁行藏允合心行跡俱潔朱書大訓傳家旨訣光先遺後永世裘葛桂谷之陽有鑱其石千載起敬過者必式
知慧(지혜)가 充滿(충만)하고 그대 물러 났음은 환히 밝힌 聰明(총명) 우뚝이 솟아 얼마나 빛났는가 그대의 先見之明 (선견지명)스스로를 다스림이 그 얼마나 도타웠나
홀로 즐기는 동산에는 그대 누워 있고 龍巖(용암)의 산등성이 龍이 누워있네, 춤추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벗어나서 名分(명분)을 다스림이 가죽신처럼 굳세었네, 미쁨을 쌓아 올려 마음 에 모아 발자취 高潔 (고 결)함 과 붉은 丹心(단심) 다 갖추었네.
偉大(위대)한 敎訓(교훈)을 서서 傳家(전가)의 趣旨(취지)로 하고 밝은 先祖(선조)가 後孫(후손)이 永世(영세)토록 存續(존속)하는 秘訣(비결)을 갓옷과 베옷에 남겨 이곳 桂谷(계곡) 의 양지바른 곳에 뽀족이 서있으니 그돌 천년을 두고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고개 숙여 敬虔 (경건)한 마음 일어 날것이다,
外裔孫將士郞前 惠陵參奉 眞城人李中轍謹撰
崇錄大夫 前判敦寧府事 海平人 尹用求 謹書
聖誕二千四百八十四年癸酉四月 日 十五代손敎煥改立
外孫(외손)의後裔(후예)將士郞(장사랑)前惠陵參奉(전혜능참봉)眞城人李中轍(진성인이중철)이 삼가 글을 지었고
숭록대부 전판돈녕부사 해평인 윤용구가 삼가글을썼고
孔紀 2484(서기1933)癸酉年 사월 15代孫 敎煥이 고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