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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71
창세기 26:1-11
이삭에게 주신 언약(1)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계시를 언약이라는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 성경이다. 그러기에 윤리 도덕적인 교훈이나 경제적인 문제 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은 삶에 대한 온갖 교훈으로 해석해 낸다. 그러다 보니 이삭의 거짓말에 대한 본문을 대하면 아브라함과 같이 거짓말을 반복하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우리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정도의 교훈으로만 생각한다.
거짓말이 얼마나 큰 죄요 무서운 죄악이기에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두 번 거짓말과 이삭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의 흐름을 계속 이어오면서 이미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한 언약의 어떤 면을 말씀하시는 것일까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1절). “흉년”이란 히브리어로 ‘라아브’인데 ‘흉년, 부족, 결핍, 굶주림, 기근’이라는 뜻이다(12:10에서는 “기근”으로 번역하였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고 이삭 때에 두 번째 흉년이 들었다고 말씀하였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 핵심이 아브라함이었고 이제 이삭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언약으로 주신 땅이기 때문에 그 땅에서 풍족하게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셔야 되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흉년이 들게 하시는가? 그렇다면 흉년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인지 생각해야 한다. 아모스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라아브)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라아브)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땅인데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참고 시 33:19). 이런 점에서 이삭에게 흉년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굶주림의 상태를 주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말씀으로 풍족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에게 기근을 통해 언약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이삭에게도 보여 주고자 하신다. 그것을 위해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갈급하고 굶주려 있어야 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라고 하였는데 “블레셋”(히, ‘펠리쉬트’)은 함의 후손 중에서 미스라임의 후손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다고 하였다(10:14). ‘펠리쉬트’는 ‘(먼지 속에서) 구르다, 뒹굴다’라는 ‘팔라쉬’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 있는 자였으나 지금 먼지 같은 것 안에서 굴러 살려고 하는 상태에 있다. 하나님은 그런 이삭을 꺼내어 자신의 언약 안으로 이끌어 들이실 것이다. “아비멜렉”이라고 하여서 아브라함 때의 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랄이 발전하여 블레셋 족속이 되었고 왕을 통상적으로 아비멜렉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삼상 21:10-15, 시 34편).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절). 이삭이 그랄로 간 의도는 애굽으로 가기 위한 것이다. 그랄은 애굽으로 가기 위한 길목으로 가나안 땅을 떠나는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75년을 살면서 모리아 산의 계시도 경험하였지만 유목민으로 사는 입장에서 풍요함을 누릴 수 있는 애굽으로 가는 것은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브라함의 길을 그대로 답습함으로 이삭 역시 죄성을 가진 자로 하나님의 언약이 아닌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그대로 이삭에게 주신다. 이런 점에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라고 하신 언약을 이삭에게 그대로 주신 것이다. 여기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야라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말하는데 신명기에는 다음과 번역하였다.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야라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신 28:52)
사사기 19:9에서는 “날이 저물어”라고 번역하였고, 이사야 32:19에는 땅이 가라 앉는다는 의미로 썼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땅, 그곳은 이삭이 있어야 성전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가리키는 바 예수 그리스도 안이다. 그곳에서 죄악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날이 저물어 어둠의 상태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무너뜨리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 자체가 무조건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를 상징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가는 것은 막지 않으셨고 또한 후에 야곱은 가족들을 다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간다. 고로 애굽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보여 주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때문에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은 각 인물들을 자기 언약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는 것으로 차이가 날 뿐이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3-5절). “이 땅에 거류하면”이라는 말의 ‘구르’는 ‘체류하다, 거하다, 분쟁을 일으키다, 싸우다’라는 뜻이다. 출애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출 6:3-5)
이삭과 야곱은 언약의 땅에 태어나긴 하지만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주실 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땅으로 주시기까지 이삭은 체류하면서 싸우고 있어야 하는 땅이다. 궁극적으로 “네 자손”(히, ‘제라’)에게 주어지기까지이다. 즉 단수로 표현된 언약의 자손(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이다. 그때까지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써의 땅이다.
이삭이 거류하는 근거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내 말, 내 명령, 내 계명, 내 율례, 내 법도”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계속 주셨던 ‘내 언약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믿음으로 이끄셨던 것을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서도 “순종”이란 ‘듣다’라는 뜻의 ‘샤마’이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잘 순종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저 그 말씀이 들려져 그 말씀에 이끌려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거나 율법적인 행위로 순종함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인 성령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채우시고 이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삭도 아브라함과 같이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 언약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이삭도 그렇게 이끌어 가신 것을 언약을 주셨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복”(히, ‘바라크’)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인데 그것을 언약의 땅에 체류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곧 언약의 실체요 완성자이신 십자가 죽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난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복이 이삭(후손)에게로 계속 전달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6-11절).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을 가지고 성경이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여러 문서들을 편집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부분이 잘못 편집된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성경이 두 번이나 기록한 것은 각각의 계시에 대한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세 사건의 공통점은 거짓말이라는 것 외에는 모든 조건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이삭의 거짓말에 대한 기록을 통하여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누구든지 세상의 권력과 힘을 두려워하여 자기 살 길을 찾는 죄인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죄성을 뛰어넘어 언약을 드러내시며 그 언약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이미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아들들들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의 경우와는 달리 후손에 대한 약속이 깨뜨려질 위험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여기서 이삭이 알아야 했던 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약속의 자녀를 위하여 이삭 자신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아비멜렉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라고 말함으로 자신이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아비멜렉을 사용하여 이삭이 종교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언약의 후손이라는 자격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짓말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베푸신 언약처럼 이삭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언약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 주셨다(2024031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