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학기 “철학산책” 과제물(1)
「새말 새몸짓」을 읽고
내 삶에서 인문학이란?
서강대 인문계 1학년 예주은
“인문학 없는 근대화.”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철저히 동양사상에 기대어 오면서도 근대화, 세계화 과정에서는 인문학을 외면하고 배제시켰다. 그야말로 모순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른들은 말한다. “인문학은 아주 중요하단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재수를 하던 스무 살에도 인문학이 무엇인지, 무엇이 인문정신인지, 인문학이 왜 중요한지 들어본 적이 없다.
문이과를 결정해야했던 고등학교 2학년 때가 문득 떠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지만 친구들과 나는 그 때부터 취업을 걱정했다. 문과에 가면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가지 않는 이상 취업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일명 ‘문, 사, 철(국문, 사학, 철학)’의 경우 이제 더는 한국에서 소용이 없다는 선생님의 말 때문이었다. 이과를 권하던 선생님들은 무조건 취업이 우선되는 공대를 추천하시곤 하였다. 그 누구도 인문대학을 권하지 않았다.
2018년 3월 5일 저녁, “철학산책” 수업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전화통화를 했다. 스물한 살 대학생들의 통화주제는 ‘부조리함’이었다. 교수님이 하신 말씀에 따라 친구에게 근대화 과정에서 산업적이고 기술적인 면을 성장시키는 한편 인문학도 같이 성장시켰어야 했다고, 그래야 우리나라가 ‘학습’의 문화가 아니라 ‘창조’의 문화로 조금씩 변화할 수 있다고 푸념했다.
친구도 내 말에 크게 맞장구를 쳤고 우리는 서로 열띤 토의를 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부조리함에 사로잡혔다는 것이었다. 당장 우리가 4,5년 후 학교 밖으로 세상으로 나갔을 때, 인문학 전공자가 과연 자신의 목소리를 얼마나 당당하게 낼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며 통화를 끝마쳤다.
작(作)을 배우고 다시 작(作)을 넘는다는 것
강의를 듣고 우리나라가 ‘창조’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두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안도와 씁쓸함이었다. 물론 씁쓸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을 해냈을 때 굉장한 경쟁력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 꿈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영화감독) 즉, 예술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감정이 누구보다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지금의 나, 앞으로의 나는 ‘창조’를 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인데 지금껏 ‘학습’에 길들여진 삶을 수년 간 살아왔으니 아마 내가 만드는 작품도 영화적 클리셰만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생겼다.
중국의 문화로부터 독립을 추구했던 세종대왕처럼, “무소조술(無所祖述)”을 이야기했던 정인지처럼, 사상적 모델(중국)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추세에 새로운 자신들의 사상을 만들어냈던 동학 창시자들처럼 나 또한 이제 그들을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 ‘디자인’하고 인문학 지식만을 머릿속에 집어넣기 바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인문학적 정신으로 유연하고 창의적인 이야기와 작품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사고의 전환이 생겼다.
마지막으로《데미안》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어릴 적, 책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이해하진 못했지만 멋있는 말이겠거니 하고 일기에 적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 시절과 달리, 이 구절을 멋있는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인문학 정신으로 새롭게 곱씹어 보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