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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
내면의 상처와 치유의 자기서사
임 채 성(시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의도치 않게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는 개인이 다른 존재나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할 때 일어나는 정서적 불일치의 결과다. 사람에 따라서는 유난히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 있고, 같은 상황에서도 덜 받는 사람이 있다. 생각이 담대하고 속악한 현실 원리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은 상처를 잘 받지 않는다. 그에 비해 마음이 여리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대개 상처를 잘 받는 편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외부의 비난이나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상처를 받는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자신의 몸속에 나이테처럼 새기고 있다. 상처는 나무 밑동에 새겨놓은 칼금과 같은 것이어서, 그 사람의 내면이 여리면 여릴수록 더 큰 흉터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 흉터는 속악한 현실과 끝없이 불화하고 그것에 저항하면서도,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사람의 표식이다. 자신의 상처에서 미래로 가는 길을 찾고, 그 길 위에서 세상 너머를 꿈꾸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의 상처에 피는 꽃이다. 시인의 내면에 응어리져 있는 상처가 드러남으로써 새로운 경험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고 노래한 랭보 이후의 시인들은 사회와 그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면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해서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다. 시인이 되려면 상처를 자양분으로 삼기 위한 성찰적 사유와 그 상처에서 꽃을 피우기 위한 주술적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유를 통해 상처의 원인과 과정을 되돌아보며, 정제된 언어를 통해 치유의 꽃을 피울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과 세상에게서 받은 상처를 보듬고 승화시킴으로써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매개체로 삼는 시인이 송가영 시인이다. 그의 상처는 서구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적 전통 가치관이 충돌하면서 생긴 것들이다. 그는 가슴 깊이 새겨진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효과와 정서적인 결핍을 채워주고, 36.5℃의 피가 도는 인간으로서의 정서적 충만감을 채워줄 안식처로서 시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송가영 시인의 첫 시조집 『막사발을 읽다』는 상처와 결핍에서 역으로 발견한 삶의 희망을 노래한다. 송가영 시인이 창조하는 시편들은 살아가면서 타인과의 충돌로 단절된, 스스로 닫아버린 마음의 빗장을 풀고 소통을 재개하기 위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상처받은 영혼, 아픔과 슬픔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자아에 대한 성찰과 희망의 가치를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집은 산수자연과 따뜻한 인정, 안온한 행복감을 노래한 낭만적인 서정시집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이 녹아있는 고뇌의 일기장이자 굴곡진 삶의 이력서이며, 관조자의 위치에서 돌아보는 자전적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고희를 훌쩍 넘긴 시인이 일흔 해 넘게 외롭게 싸워온 삶의 흔적, 그 속에서 캐낸 시적 깨달음이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조는 대부분 뼈아픈 체험에서 왔다. 그 때문인지 겉멋을 부리기 위해 언어를 비틀거나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빼어난 수사에 집착하기보다는 진솔한 고백을 먼저 하려한다. 외롭고 고달픈 삶의 여러 현장에서도 행복을 꿈꾸었던 과거를 건너오는 동안 추억으로만 남은 부모님과 고향, 그리고 유랑의 체험들…. 일상에서 찢기고 다친 마음을 ‘막사발’ 같은 언어로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이 시조집이다. 더러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날 선 비판을 가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객관적 상관물과 환유를 지배적인 시적 기법으로 구사하며 시인의 에스프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송가영 시인이 시집 속에서 한결같이 묘사하고 추구하는 봄의 서사는 삶의 현실에서 입은 상처의 기억을 찾아내고 치유하려는 시인의 희망이자 미래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1. 상처, 그 내밀한 나이테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어떤 상황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내던져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예기치 않은, 의도하지 않은 갑작스런 상황의 변화는 자아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 순간을 재빨리 벗어날 수 있다면 짧은 해프닝으로 끝나겠지만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대처하기 어렵다면 상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때 받은 심리적 충격은 오래도록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법이다.
송가영 시인의 『막사발을 읽다』에는 지나온 삶에서 얻은 여러 상처의 결이 도도록한 무늬로 돋을새김 되어 있다. 그의 시조는 무의식 속에서 해소되지 못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한 내면의 정서적 보고서이자 심리적 고뇌의 산물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것은 현실에서 미해결된 자아와 세계간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장애를 일으키는 현실의 문제를 시조라는 매개물을 통해 정신적으로 해독시키는 것이다. 즉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본능적인 소망과 갈등요인을 시조라는 창작물을 통해 고백하고 토로함으로써 자아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것이다. ‘나’라는 자아의 존재이유를 찾고 싶은 욕망과 그 너머 존재하는 타자와 그 주변부에 대한 애증을 추적하는 일, 그것이 송가영 시학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 바탕이라 할 수 있다.
달에 목멘 그림자가 마침표 찍고 있네
성엣장만 떠다니는 핏기 없는 강물 위에
수정 빛 겨울 나이테
교각에 매달릴 때
티 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을 배경 삼아
차례차례 돌아드는 창백한 바람 앞에
숨죽인 여울 물소리
귓바퀴에 감겨 우네
햇빛의 알갱이가 웅크린 잿빛 도시
아직 다 털지 못한 빙점의 시간들이
빳빳이 곱은 가슴에
고드름을 꽂는다
- 「고드름이 꽂힌다」 전문
시인이 실재하는 현실 속의 자아는 찬바람 씽씽 부는 한겨울에 서 있다. 그곳은 “달에 목멘 그림자가 마침표 찍고 있”는 곳이다. 더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극한의 지점으로서 “성엣장만 떠다니는 핏기 없는 강물”이나 “수정 빛 겨울 나이테”와 더불어 겨울의 한기를 뼛속까지 느끼게 하는 배경이다. 그런 가운데 “티 없이 펼쳐져 있는 하늘”은 그 처연한 절망감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대비는 그 비극성을 극대화시키는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역설적 표현이다. 자신의 고통과는 상관없는 심리적 경계 너머의 상반된 세상을 마주할 때, 그곳의 자아는 고립감과 소외감을 더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극한의 겨울 앞에 ‘내던져진’ 시적 자아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은 이제 울음뿐이겠다. “귓바퀴에 감겨 우는” “숨죽인 여울 물소리”는 자아의 분신이리라. 온몸이 얼어붙고 저절로 몸이 움츠러드는 겨울은 그래서 자아가 느끼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대한 환유이다. “아직 다 털지 못한 빙점의 시간” 속에서 냉기로 얼어붙은 가슴에 ‘고드름’이 꽂히는 절망적인 상황이 극한의 언어들로 매조지고 있다. 원치 않는 현실로 인해 우울감이 극에 달한 내면의 상태를 ‘고드름이 꽂히는’ 것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돌아본 길 위에는 상처자국 선명하다
가로수 밑동에 남은 흙탕물 앙금부터
그 여름 바람에 꺾인 우람한 가지까지
사랑만이 사랑인 줄 알았던 젊은 날도
신혼집 골목처럼 아스라이 멀어지고
홀로 된 길 위에 서서 사진첩을 펼친다
주저앉아 울부짖던 그 밤의 아우성도
어깨 위 먼지처럼 훌훌 털고 돌아서는 밤
다시금 생의 수틀에 청솔 하나 감친다
- 「황혼의 저녁」 전문
개별적인 정서나 감정은 시인의 내적체험과 창조적 상상력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드름이 꽂힌다」에서 극대화된 시인의 우울감은 「황혼의 저녁」에서 그 원인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황혼의 저녁」에서 시적 자아는 과거를 돌아보는 현실의 한 지점에 와 있다. 그 현실은 “생의 수틀에 청솔”을 ‘감침질’ 하는 곳이다. 거기서 바라보는 과거는 “상처자국 선명”한 삶의 행로, 즉 “길”이다. 그 길 위의 “가로수 밑동”에는 “흙탕물 앙금”이 남아있고, “가지”는 “바람에 꺾”여 있다.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쳤음을 의미한다. 그 폭풍우는 “사랑만이 사랑인 줄 알았던” “신혼집”을 “멀어지”게 함으로써 “홀로” 길 위에 남게 만든 고통의 원흉이다. 헐거워진 사랑의 아귀가 빠져버린 절망감에 “울부짖”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른 지금은 “훌훌 털고 돌아서는” 여유를 되찾은 상황이다. 과거의 아픈 기억을 털어내고 삶의 의지를 다잡는 행위가 언제나 초록빛을 잃지 않으며, 꼿꼿한 바늘잎을 피우는 “청솔”로 형상화된 것이다. 파괴와 일그러짐 속에서도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긍정적인 사유가 생명시나 생태시의 한 형태로 발현되고 있다.
사르륵 사르륵 백지 위에 새기는 하루
쓰다가는 지우고, 틀리면 또 고쳐 쓰듯
흘러간 내 지난날도
다시 쓸 수 있을까
칼날이 와 닿아도 꿈쩍 않는 연필처럼
어떤 글도 순식간에 지우는 지우개처럼
꼿꼿한 바른 문장으로
되살릴 순 없을까
삐뚤고 빼뚤 해도 하릴없는 내 것이라
지금껏 그래왔듯 그러안고 가야할 날들
오늘도 요령껏 쓴다
‘나’라는 서사시를
- 「일기를 쓰며」 전문
절망감에 빠져 있던 시적 자아가 다시 일어서 삶의 의지를 다잡으며,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단계적인 인생 여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서사다. 이처럼 송가영 시인에게 있어 개별적인 작품들이 이루는 총체적인 삶의 층위는 자기서사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다. 시인이 쓴 작품이 직접적으로 자기 삶의 역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는 자기서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불확실성과 유동성이 자기서사의 특징적인 면이긴 하지만 상징이나 은유를 통해 개인의 체험을 드러내는 것이 또한 시인이고 보면 그 전형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일기를 쓰며」는 이러한 자기서사의 양태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 시편이다. 일기는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일상 기록이다. 자신의 일과 생각 따위를 기록하는 1인칭 서사문이기 때문에 가장 개인적이면서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도 일기를 쓰는 행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화자로서 기능한다. 화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과 미련을 일기에 빗대 고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 지우거나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일기에 비해 지나간 삶은 수정이나 가필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비타협성이 현실적인 갈등 요소로 작용하지만, 세월이라는 처방전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지나온 삶보다 앞으로 진행될 삶에 방향성을 맞추게 된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 미래지향적인 의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 초월적 의지는 결국 단편적인 소품이 아닌 큰 줄기로서의 “‘나’라는 서사시”로 귀결된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철학적 달관이야말로 송가영 시학의 뼈대이자 구심점이라 할 수 있다.
#2. 희망, 봄날에 대한 그리움
절망의 대척점에는 희망이 있다.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희망의 끈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희망은 미래지향, 긍정적 사유, 구원 등 삶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집약한다. 따라서 단어 자체로 보면 희망이란 말이 결코 좋은 의미만은 아니다. 희망을 떠올리는 것은 현실 자체가 그만큼 답답하거나 고통스럽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생각하면 절망이 더 희망적이다. 절망(切望)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를 말함이고, 희망(希望)은 뭔가를 바라는 상태를 이른다. 바라는 것이 없는 삶은 안분지족(安分知足)과 무욕의 삶이다. 그러나 세속의 언어에서는 ‘자포자기’나 ‘무기력’, 혹은 ‘불능’의 양태로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망이란 말을 더 편애하는 것이다.
희망은 ‘바라는 것’이므로 어차피 현재에는 없다. 실천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한 마음의 상태이므로 미래의 비전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마음가짐’이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듯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희망과 현실을 대립적으로만 생각하면 좌절감은 더 커지고 절망감은 더 깊어진다. 개인이 겪는 상처와 좌절은 객관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어두운’ 현실을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라면 충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고통을 드러내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힐링이라는 자기만족에 이르는 것은 행복추구권을 가진 인간의 본능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의 볼모가 되기에 희망은 욕망의 포로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종하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라고 하지만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온 이에게는 그냥 궤변일 뿐이다. 송가영 시인이 추구하는 ‘봄’의 시학은 이러한 희망을 담보하고 있다.
청맹과니 눈동자에 가물대는 도심 빌딩
골목 안 새벽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박쥐도 둥지를 찾아 귀소 하는 그 어름에
어제 하루 찍어 놓은 발자국 뵈지 않고
드럼통에 지펴 놓은 화톳불만 어지럽다
아득한 불면의 하늘, 별빛만이 깨어 있다
열자마자 닫혀버린 인력시장 바닥에서
떨이로 팔리지 못해 흐릿해진 눈동자들
구급차 사이렌소리 여명 동살 수혈한다
구멍 난 삶의 투망 다시 깁는 사내 앞에
제 이름 못 불려도 습관처럼 아침은 오고
첫차가 막 떠난 자리, 봄이 성큼 다가선다
- 「초꼬슴, 초꼬슴처럼」 전문
송가영 시인의 시조집 『막사발을 읽다』에서 유별나게 눈에 자주 띄는 시어가 있다. 그것은 ‘봄’이다. “잎 다 진/ 고목나무에/ 봄의 피가 다시” 돌고(「안부」), “한 살 회춘한 봄이/ 앞마당에 몸을” 풀고(「봄, 뜨락」), “다시 뜬 쨍한 햇볕 봄을 다시 노래하고”(「새싹으로 오는 봄」), “해토머리 겨울 숲도 봄옷을 꺼내 들”고(「무릇꽃 피다」), “소쿠리 가득 찬 봄이 앞마당에 엎질러지”고(「봄을 보다」), “캄캄한 터널에도 아지랑이 봄은 온다”(「3월」)며 “그리운 포옹의 몸짓”(「행복이라는 꿈」)으로 이어가고 있다. 얼어붙었던 세상 만물이 녹으면서 서로 얼싸안고 부둥키는 화해의 계절이 봄이다. 영어로 봄을 뜻하는 Spring도 용수철처럼 희망과 기운이 불끈 솟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역시 도약과 비상에 대한 희망과 염원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봄’은 곧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즉 ‘보는 것’ ‘보는 일’이다. 본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실존, 희망의 실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송가영 시인이 무의식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봄’이라는 단어는 작중 화자의 바람이 집약된 희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위의 인용시 「초꼬슴, 초꼬슴처럼」도 이러한 ‘봄’의 이미지에 수렴하고 있다. 제목으로 쓰인 ‘초꼬슴’은 ‘어떤 일을 하는 데서 맨 처음’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라는 고 신영복 교수의 「처음처럼」을 되새기게 한다.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삶의 여정에는 인생에 대한 사색과 외경, 꿈꿔왔던 여러 이상들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시인의 삶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특히 세상 속으로 들어오고 난 이후에는 좌절과 희망, 슬픔과 기쁨, 분노와 희열이 뒤섞인 가운데서도 ‘초꼬슴’의 꿈만큼은 잃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초꼬슴’의 꿈과 초심을 이 작품은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 속의 화자나 배경은 일견 시인과는 거리가 멀어 뵌다. 새벽 인력시장을 서성대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열자마자 닫혀버린 인력시장 바닥에서/ 떨이로 팔리지 못해 흐릿해진 눈동자들”은 신산한 도시 노동자의 불안정한 삶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구멍 난 삶의 투망 다시 깁는” 사내는 “습관처럼” 오는 “아침”을 맞고 있다. 그 아침은 “성큼 다가서”는 봄에 기대어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 삶이라는 말처럼, 견디며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메시아의 예언이자 믿음이다. ‘살아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과의 경계에 있다. 밤과 낮, 어둠과 밝음, 절망과 희망, 끝과 처음의 경계가 곧 ‘초꼬슴’이라는 의미다. 삶의 의지를 비장하게 다잡는 이 시조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삶의 본질은 어디서나 매한가지라는 해묵은 진실에 대한 환기일 것이다.
밤 도운 들숨날숨 병원 창에 매달린다
형광등 뿌연 불빛 마지막 몸부림인 듯
때 절은 블라인드 위에 제 몸을 뒤척인다
사하라 모래밭을 휘도는 물줄기같이
폐경의 콘센트에 링거를 꽂아보지만
암전된 터널 속에는 풀싹 하나 볼 수 없다
마른 입술 축여가며 다시 앉은 재봉틀
바늘 끝에 맺히는 핏방울이 되우 붉다
손등에 파란 길 하나 도도록이 일어선다
어찔한 크레졸 냄새 동살이 털어내면
햇살의 바늘귀에 꿰어지는 신경세포
찢긴 생 박음질하듯 아침을 또 깁는다
- 「아침을 깁다」 전문
희망을 상징하는 단어 중 ‘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아침’일 것이다. ‘봄’이 ‘화해’와 ‘어울림’의 이미지라면, ‘아침’은 ‘시작’과 ‘혁신’이라는 이미지에 가깝다. 「아침을 깁다」에는 희망을 이야기하되 새롭게 시작하는 ‘전환기’로서의 아침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병원에 누워 있다. “밤 도운 들숨날숨”이나 “때 절은 블라인드”, “폐경의 콘센트”, “링거”, “암전된 터널” 등의 시어들이 암울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잘 말해준다. “풀싹 하나 볼 수 없”는 암흑의 터널은 길기만 하다. 그럼에도 화자는 생의 의지를 다독이듯 “마른 입술 축여가며” “재봉틀” 앞에 다시 앉는다. 재봉틀은 화자의 숨은 이력을 보여주는 장치이자 “찢긴 생”을 “박음질하”는 희망의 도구이다. 또한 바늘에 찔려 “되우 붉”게 맺힌 핏방울은 생명의 상징이다. 거무죽죽하게 죽은피가 아니라 생명력이 느껴지는 붉은 피라는 점은 “손등에 파란 길 하나 도도록이 일어서”게 만드는 활력으로 작용한다. ‘병원 냄새’로 통하는 “어찔한 크레졸 냄새”를 털어내고 온몸의 “신경세포”를 “바늘귀에 꿰”는 행위는 삶의 의지가 충만한 상태가 되었음을 말한다. 병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마지막 수 종장은 그래서 삶의 숭고함마저 느끼게 하는 절창으로 각인된다. 마음 귀에 울려오는 재봉틀 소리가 우렁찬 팡파르로 울려 퍼지는 것이다.
너 만한 너른 품새 세상천지 또 있을까
먼 대륙 날고 날아 난바다도 건너갈 때
태산도 품안에 드는 은유를 되새긴다
털리고 짓밟히고 쓸리기도 했을 게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친구가 되지 못해
바람에 말갛게 씻긴 꽁무니가 하얗다
바람에 몸을 맡긴 가벼운 너의 행보
새처럼 구름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양지 뜸 아늑한 땅에 부르튼 생을 뉜다
그리하여 정화수에 묵은 앙금 갈앉히고
눈빛 맑은 옛 도공의 손길을 되짚으면
가슴에 불꽃을 묻은 큰 그릇이 되느니
- 「막사발을 읽다」 전문
누구나 꿈꾸는 희망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막사발을 읽다」는 구도자의 몸짓으로 삶의 완성에 이르는 처연한 생의 서사라 할 수 있다. 이 시조에는 “털리고 짓밟히고 쓸”린 자아의 고뇌와 “부르튼 생”이 먼지 알갱이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 먼지알갱이는 “먼 대륙 날고 날아 난바다도 건너가”며,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새처럼 구름처럼 허공을 떠돌”아 다닌다. 그러다 양지바른 “아늑한 땅”에 안착해 “눈빛 맑은 옛 도공의 손길”을 만나는 순간, 먼지알갱이는 더 이상 먼지나 흙의 존재가 아니다. “가슴에 불꽃을 묻은 큰 그릇”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가 ‘막사발’로 전이되는 서사적 전개가 구도적 삶의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막사기’로도 불리는 ‘막사발’은 말 그대로 ‘막 쓰는 사발’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이 밥그릇,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 생활그릇으로 쓰던 것들이다. 주로 서민들이 쓰던 그릇이어서 투박하면서도 소박한 멋이 있다. 화려하고 세련된 멋은 적어도 서민의 삶과 생활의 애환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이 때문에 세상에 이보다 “너른 품새”를 가진 그릇은 없다. 가히 “태산도 품안에 드는 은유를 되새”길만 하다. 「막사발을 읽다」는 대상과 이미지의 결속을 통해 표현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시조 본연의 역할에도 충실하다. 그리하여 고진감래의 세월을 묵묵히 견디며 대기만성을 꿈꾸는 이 땅의 이름 없는 약자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로도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3. 가족, 그 공동체적 이상향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아 있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 하나로 꼽히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금언처럼 간결하면서도 수수께끼처럼 아리송한 이 문장은 대체로 행복한 가정은 하나로 뭉치고, 불행한 가정은 분열하고 대립한다는 쪽으로 이해된다. 행복한 세상의 필요조건은 가족이며, 분열되지 않은 온전한 자아는 타인과, 또 세상과의 합일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행복은 무아지경에 다다른 일체성의 상태를 지향할 뿐이다. 이상적인 그 경지를 어떻게 실현하고 지탱해 나갈지의 행동 강령이나 지침은 부차적 각론에 해당한다. 각론은 그때그때 바뀌어도 핵심 원리는 변치 않는 것이다. 이것이 가족을 향한 바람직한 지향점일 것이다.
송가영 시인의 시조에는 고통과 기억, 극복과 치유라는 체험적 상상력 너머 가족에 대한 애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자기서사의 연장선상에서 가족해체에 대한 회한과 남은 가족에 대한 사랑 등 애증의 가족사가 하나의 창작 동인(動因)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경평야로 대표되는 김제 들녘을 배경으로 유년기를 보낸 시인에게 부모는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의 고향이다. 반면 그의 피와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들은 홀로 쌓은 공든 탑이자 어느 하나 놓칠 수 없는 아픈 손가락이다. 이러한 가족사의 내밀한 정서가 그가 쓰는 시조의 힘이자 원동력이다. 송가영 시인의 창작 바탕에는 화해와 용서와 화합에 대한 꿈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의 시가 고통의 언어와 치유의 시학을 지향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시대사적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는 치료제로서 가족에 대한 깊은 애착과 그리움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는 몇 편의 시들을 살펴보자.
무상급식 아이들이 헤드라인 타는 저녁
홍동백서 주과포혜 차려놓은 제상 앞에
사진 속 아버지 말씀 귓전에 울려온다
드넓은 만경평야 금빛 물결 일어나면
올 굵은 목소리로 꾸짖듯 타이르듯
콩 한 쪽 보리쌀 한 톨도 좀도리로 나누라던
돌아보면 멀기만 한 세상의 뒤꼍에서
내가 사는 이 하루도 밥 한 술 무게일 뿐
허기진 도시의 텃밭 오늘 다시 밟는다
개수대 물소리가 은하수를 밝히는 밤
그 옛날 까치밥을 등불처럼 내다 걸 때
옹이 밴 낯익은 손이 조리질을 하고 있다
- 「좀도리 밥상」 전문
족보 있는 집안에는 대물림하여 전하는 가훈이 있다. 그중 ‘9대 진사, 12대 만석꾼’으로 알려진 경주 최부잣집의 육훈(六訓)은 특히 유명하다. ‘재산은 만 석 이상 모으지 마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등의 가르침은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념과 같은 ‘타인을 배려하는 나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대대손손 만석의 부를 누리면서도 이웃과 공존하며 근방 주민의 존경을 받아 온 이유일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 못지않은 나눔의 철학은 송가영 시인의 가계에서도 엿보인다. 작중 화자의 아버지는 제상 위 사진으로 남아서 여전히 “콩 한 쪽 보리쌀 한 톨도 좀도리로 나누라”는 말씀을 전한다. 좀도리는 전라도 방언으로, 절미(節米)라고도 한다. 쌀독에서 쌀을 퍼서 밥을 지을 때 한 술씩 덜어 조그만 단지나 항아리에 모아두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남을 도왔던 좀도리의 전통은 오늘날 어려운 이웃에게 온정을 전하는 나눔 운동으로 발전했다. “무상급식 아이들”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는 제삿날 저녁, 좀도리로 나눔을 실천했던 아버지의 말씀은 화자에게 “허기진 도시의 텃밭”을 일구게 한다. 이러한 좀도리의 나눔 미덕은 추운 겨울 먹을 것이 부족한 날짐승을 위해 남겨 두던 ‘까치밥’으로까지 이어지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의식으로 확장된다. 이웃사랑의 본질은 생명존중사상이라는 철학적 깨달음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아들아,
네 바늘을 함부로 쓰진 마라
그것은 편견에 찢긴 마음을 감쳐 매고
고통과 아픔에 막힌 가슴 혈을 뚫는 것
침통鍼筒을 열기 전엔 가만히 눈을 감고
심장의 고동소리가 네 몸 속 핏줄 따라
손끝에 전해져 오는 경건함에 귀를 대라
몸져누운 신경들이 하나 둘 일어설 때
들어보렴,
흰 가운을 부여잡는 저 숨소리를
겨울을 딛고 일어선 봄꽃들의 환호성을
새벽 별밭 우러르며 한 땀 한 땀 세상을 톺은
어미의 피 맺힌 손이 꽃으로 받들었던
오롯한 그 바늘임을 잊지 마라,
내 화타야
- 「바늘심서- 화타, 윤정에게」 전문
부모에게서 상생과 나눔, 생명존중의 철학을 물려받은 시인은 다시 자식들에게 그러한 가르침을 전수하려 한다. 시대적 변화와 상황에 따라 그 가르침은 다양한 형태의 당부로 이어진다. 당부란, 말로 전하는 부탁이다.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듯 적재적소에 맞게 ‘상식 밖’의 일은 하지 말라는 경계이기도 하다. ‘화타, 윤정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바늘심서」는 한의사 아들에게 전하는 당부의 메시지다. 흔히 ‘삼국지’로 불리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화타는 중국 한나라 말기의 의사로 명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지어 관리들의 행동지침과 백성들에 대한 도리를 설명했듯, 시인은 ‘침술’에 쓰이는 바늘을 통해 아들에게 의사로서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주문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 한복 바느질에 사용하던 바늘과 대비시키며 용도는 달라도 그 속에 담긴 윤리적 본질은 같다는 것을 설파한다. 칼도 요리사가 쓰면 도구가 되지만, 미치광이가 쓰면 흉기가 되는 것처럼 바늘의 끝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서정적인 언술로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한의사 아들에게 전하는 이러한 당부는 또 다른 자식과 손주들에게까지 두루 이어진다. “넘어지면 일어나는 게 세상사 아니더냐”(「겨울 오뚝이- 현에게」)며 건설업에 종사하는 아들 ‘현’을 격려하고, “인공지능 로봇세상”을 “네 손으로 이루거라”(「태권브이의 후예- 손주 겸에게」)라며 “어느새 우리 앞에/ 다가선 그 미래를” 손주에게 맡기기도 한다. 이러한 충고는 삶의 여러 난제들에 부닥쳤을 때 가고 싶은 길을 열어줄 이정표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시인이 내리사랑으로 전하는 당부의 메시지는 밝고 따뜻하다. 그러한 따뜻함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은 딸 등의 주변 인물들을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품과 격을 드높이는 찬양의 미학으로도 이어진다. 그것은 후대를 지원하는 집안의 어른이자 수많은 인생 역정을 겪어온 선배로서 진심을 담아 전하는 삶의 진정성일 것이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있다던가
그래도 개중에는 더 아픈 하나가 있어
다시는 가질 수 없는 막내가 그러했다
옛 품안 그 아들도 제 아들 품고 보니
촉촉하게 젖어드는 어미 마음 알겠는지
안갚음 말 없는 안부 눈빛으로 전한다
덥혀진 체온 따라 잘린 탯줄 이어지고
담석수술 보약인 양 건네주는 젖산 우유
아들의 젖을 무는 듯 내 목젖이 뜨겁다
- 「아들의 젖을 물다」 전문
시인이 가족들을 대하는 눈빛에는 감사와 고마움이 함께 깃들어 있다. 그 감사의 마음은 물질적인 보상이나 곁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봉양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 아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 그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히 느꺼운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 이전에 자신의 피와 살을 물려준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러한 바탕에는 시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신도 몸을 던져 일곱 남매 키우셨나요?”(「사부곡」)라며 되물었던 삶의 진실이다. 부모님의 내리사랑을 또다시 대물림하는 시인, 한없이 몸을 낮춘 시인의 눈에는 자식의 작은 배려마저도 고맙기 그지없다. 「아들의 젖을 물다」는 이런 마음의 결정판이다. “더 아픈” 손가락인 “막내”가 “건네주는 젖산 우유”에 그만 목이 메어버린 것이다. ‘막내’라는 존재는 나이가 들어도 보살피고 돌봐줘야 할 것 같은 ‘어린아이’의 이미지인데, 그런 막내가 담석수술 후의 어머니를 오히려 보살피고 있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듯, 어머니에게 “젖산 우유”를 건네주는 아들의 “안갚음”을 화자는 마치 “아들의 젖을 무는” 것 같다고 표현한 것이다. 어머니로서의 화자가 자식의 ‘안갚음’을 ‘안받음’하면서 느끼는 감회가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송가영 시조미학의 근간을 이루는 한 축이 왜 ‘가족’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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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시인 예이츠(W. B. Yeats)는 나이 오십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일상에서 삶의 행복을 찾았다고 전해진다. 예이츠는 읽을 책 한 권, 맛있는 커피 한 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거리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오롯이 나를 마주함으로써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스스로의 마음이 여유로 충만해야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해 줄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삶의 여러 굴곡을 겪어온 고통스런 과거 앞에서 송가영 시인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안으로 삭여온 세월의 무게만큼 스스로의 내면이 깊어지고 단단해진 결과다. 수많은 상처와 고통을 자신의 후대에는 전하지 않으려는 옹골찬 의기가 이 시집에는 가득하다. 그것은 “손닿는 그 가까이 있을 줄은 알면서도/ 하늘 향한 헛손질만 거듭해온 지난나날”을 뒤로 하고 “그리운 포옹의 몸짓”(「행복이라는 꿈」)으로 그려갈 역전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송가영 시인이 구축해온 자기서사의 은유가 오늘의 이 결실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더 높고 오뚝한 시조미학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