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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정경
1. 정경(正經, Canon)의 개념
모든 정신과 의식은 ‘문헌’을 통해 강화되고 무장된다. 그리고 자신이 동의하고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로 무장되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고전(古典)을 반드시 읽어야 삶으로의 실현이 가능하다. 종교도 일종의 ‘의식무장’이어서 세계의 대종교는 모두 문헌 곧 정경(경전)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도 여러 경전이 있고 이슬람교도 쿠란(코란)을 가지고 있으며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역시 정경을 설정하여 집회때마다 낭독한다.
그러므로 먼저 ‘정경’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정경(Canon)이란 신앙의 진리와 이 신앙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윤리 생활을 규정하는 척도로서, 해당 종교의 최고 규범이 되는 책을 말한다.
그리스도교 정경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그리스도교 정경으로 인정된 책은 몇 세기 동안 저술되고 전수된 여러 책 중에서
① ‘하느님 말씀’으로 인정받아 엄선되고, ② 교회가 거룩한 전례에서 함께 읽을 수 있도록 결정한 책이다.
‘정경’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논(Canon)’은 원래 ‘칸나(canna)’에서 유래 되었다. 이 말은 갈대를 뜻하는 명사인데 ‘갈대’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경’과 연결된 이유는, 길이를 측정하는 자가 아직 대중들에게 보급되기 이전 사람들이 치수를 재기 위한 측정 도구로 갈대를 사용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갈대를 꺾어 자 대신 사용하던 관습은, ‘삶의 잣대’를 의미하는 ‘정경’을 나타내는 단어에 갈대가 어원적으로 결합되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어의 확장의 과정에서 정경은 삶의 잣대, 규범, 지침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각각의 종교는 이렇게 정경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책을 선정함으로써
① 다른 이론이나 교리가 들어와 해당 종교의 교리(dogma)를 윤색시키거나 오염시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② 경신례를 위한 집회 때 정경 이외의 다른 책이 주요 텍스트로 낭독되는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2. 구약성경과 다른 종교
그리스도교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정경은 다른 종교에서도 그 내용이 공유된다는 특성을 가진다. 유다교와 이슬람교 같은 세계의 대종교는 모두 각각의 정경 안에, 우리가 구약성경을 통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내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한 현상이 야기된 이유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가 모두 ‘셈족 문화권’을 배경으로 형성된 종교라는 데 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셈족의 뿌리에서 나온 종교들이기에, 이슬람교 정경인 쿠란과 유다교 정경은 모두 셈족 언어로 저술되어 있다(쿠란은 아랍어로,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책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에 모세, 아브라함 같은 구약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유다교와 이슬람교에서도 대단한 성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나자렛 사람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당연히 이러한 사실을 체계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저술된 신약성경을 그리스도교의 중추적 문헌으로 여긴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서 조명된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표하고 있기에,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을 당신의 성경으로 사용한 흔적을 신약성경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기에 그 중요성을 폄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정경의 핵심을 굳이 선별해야 한다면 그 내용은 신약성경에서 대부분 발견한다.
(1) 미쉬나와 탈무드, 그리고 쿠란
유다교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 그저 예수라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던 30대 초반의 남성일 뿐, 그리스도는 아니었음을 천명한다. 이것은 그들이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였다. 곧 유다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구약성경에 해당되는 책들만을 정경으로 설정한다. 대신 자신들의 정경을 해설하여 전수하는 작업을 초세기부터 진행시켰고, 이렇게 구전된 해설은 기원후 1세기 말부터 체계적으로 편집되어 「미쉬나」라고 하는 모음집으로 묶이게 되었다.
사실 에즈라 이후 토라를 해석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는 임무를 수행했던 ‘세페림(서기관)’이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토라에 대한 해석을 전하는 데 주력하였고 그 결과 토라 자체에도 없는 새로운 전통들이 구축되었다. 그 작업은 「미드라쉬」와 「미쉬나」로 구분된다.
「미드라쉬」란 성문화된 본문에서 그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말하며, 이러한 「미드라쉬」 작업은 ‘할라카’와 ‘하가다’로 구분된다. ‘할라카’는 성경 본문에서 율법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해석을, ‘하가다’는 설화와 관련된 부분의 해석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미쉬나」란 이전의 라삐들이 토론하고 결정한 것들을 조직적으로 분류하여 정리한 것을 칭하는데, 다시 말해 당시까지 전해지던 구전 토라를 문서화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미쉬나」는 주제에 따라 여섯 분야로 구별 정리되어 전해진다. 「미쉬나」는 기원후 200-230년경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라삐들이 「미쉬나」에 다시 한번 해설을 가하고 이를 성문화한 것을 「탈무드」라고 한다. 「탈무드」는 다양한 시기,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수집한 많은 자료의 모음집이므로 자연히 중복이 많이 발견된다. 「미쉬나」에 대한 해설을 ‘게마라’라고 하며 이는 기원후 300년경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탈무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팔레스티나 탈무드와 바빌론 탈무드이다. 유다교에서 탈무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바빌론 탈무드를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빌론 탈무드는 팔레스티나 탈무드보다 분량 면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업은 2-3세기부터 시작되어 7세기에 완결되고 8세기경 최종 편집되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관계처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교 역시 성조사(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시작된 성조들의 이야기)를 이스라엘이 아니라 아랍인의 시각에서 해석하여, 신의 축복이 이스라엘인이 아닌 자신들(아랍인)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쿠란은 이러한 믿음과 스토리를 바탕으로 저술된 책이다.
이렇게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우리가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책의 내용을 함께 인정하고 공유하지만, 각각의 정경으로 간주하는 책의 종류와 배열은 서로 다르다. 셈족 언어권에서 공통적으로 시작된 이 세 종교는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이 그리스어로 저술되고, 유다교가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이슬람교의 쿠란이 아랍어로 저작되면서 그 갈래를 분명히 하게 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과 가장 근접한 형태의 정경인 유다교의 정경을 살펴보고 정리해 보기로 한다.
(2)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정경을 차별화시킨 이유
구약성경은 유다인들의 고대어였던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되어 있다. 그들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만을 신성한 하느님 말씀을 담는 데 적합한 용어로 보았고, 그리스 대제국의 언어였던 그리스어(희랍어 또는 헬라어)는 매우 세속적인 언어라고 간주했다. 그런데 이는 그리스어로 작성된 그리스도교의 신약성경을 견제하기 위한 태도로 이해된다. 만일 하느님 말씀이 그리스어로 작성될 수 있다는 개방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면, 나자렛 사람 예수를 구약 시대부터 줄곧 기다려 온 메시아(그리스도)로 고백한 신약성경이 정경의 범위 안에 포함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이를 의도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정경은 모두 히브리어(약간의 아람어도 포함)로만 저술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의 정경에는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제 2경전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제 2경전에 속한는 책은 칠십인역(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안에 포함되어 있던 책들인데, 그리스어로 쓰였다는 이유만으로 유다인들의 정경 목록에서 제외된 것이다.
(3) 칠십인역
칠십인역이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번역본’으로, 기원전 3-1세기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따르면 70명(또는 72명)의 학자들이 함께 모여 70일 동안 번역을 하였고, 각자가 개별적으로 번역한 것을 후에 맞추어 보니 모두 동일하게 일치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번역본을 로마숫자 LXX(70)으로 표기하며, ‘셉투아진타(Septuaginta)’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책의 신비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 형성된, 그야말로 전설적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방대한 구약성경을 혼자의 힘으로, 그것도 70일 만에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더구나 이 번역본 자체가 보여주듯 한 사람의 번역이라고 보기에는 책마다 번역 스타일이 다양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칠십인역은 히브리어 편집본인 마소라 텍스트보다 초기 형태의 본문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며, 이 성경은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초세기 사도들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방계 공동체로 선교여행을 떠날 때, 이미 세계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헬레니즘 영역권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교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이스라엘 내부에는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릴 수 없음을 깨달은 사도들은, 대신 이방계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주변 세계 신자들에게, 이미 그리스어로 번역된 칠십인역을 가지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새롭게 형성된 이방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집회 때마다 낭독하였고, 그 결과 칠십인역은 유다인들의 히브리어 성경과는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의 표준 성경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4) 정경화 과정
-유다교의 정경화
이렇게 기원후 1세기는 그리스어 성경(칠십인역)과 히브리어 성경(유다인들의 정경)이 혼재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혼란이 야기되자 유다인들은 얌니아(Jamnia)라는 곳에서 회의를 열어 그들 나름대로 성령의 감도를 받은 책을 선정하고 그 외 다른 책들이 유다교 교의 안에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당시 매우 활발하게 대중 안에 전파되고 있던 그리스도교 문헌(50년대부터 저술되기 시작한 바오로 서간과 복음서)을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제스처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나자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체계적으로 문서화하여 전하는 그리스도교 문헌이 유다교 안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고, 미리 자신들의 정경 목록을 결정함으로써 이러한 불안함을 사전에 차단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얌니아 회의에서 결정된 유다인들의 정경은 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만 작성된 24권이었다. 유다인들의 경전이 24권인 이유는 ① 그리스도교의 구약성경에 속하는 제 2경전이 누락되고, ② 이른바 ‘상·하’으로 나뉘어 있는 책들을 모두 한 권으로 취급하며, ③ 12소예언서에 해당되는 책들을 한 권으로, 그리고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를 한 권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나온 숫자이다.
-개신교의 정경화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칠십인역에 속해 있는 제 2경전도 정경의 일부로 간주하며 이러한 전통을 중세까지 지속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종교개혁이 터지고 마르틴 루터(M. Luhter)가 가톨릭 교회와의 단절을 선포하면서 새국면을 맞게 되는데(16세기), 종교개혁의 시발은 베드로 대성전 건립기금마련 과정에서 발생한 ‘대사부(大赦符) 사건’이었다. 당시 독일의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강력히 비난하면서 기존 교회와 분리되는 새로운 종교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기존의 시스템에서 ‘분리’되기 위해서는 무언가 차별화된 내용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분명히 요구되었던 것이 분리된 종교의 근간이 될 ‘새로운 정경’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는 ‘성경을 통해 갖게 되는 믿음만이 참 구원의 길’임을 선언하고, 기존의 가톨릭 정경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정경 목록을 설정하게 된다.
그는 본래적 전통(유다교의 정경)이 새로운 종교의 핵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유다교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제 2경전을 뺀 나머지 책만을 구약성경으로 상정한다.
-가톨릭의 정경화
한편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와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자 그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트리엔트 공의회의 네 번째 회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정경 목록을 거듭 확인한다. 사실 루터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가톨릭교회는 정경 범위를 엄격히 규제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초대교회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책들을 어렴풋이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의 새로운 정경 설정에 자극을 받아 1546년 4월 8일, 칠십인역을 비롯한 그리스어본,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a)의 권위를 인정하고, 교회의 구약성경이 46권임을 확인한다.
(5) 유다교, 개신교, 가톨릭의 구원관 비교
우선 유다교는 자신들의 정경 중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오경의 율법을 구원의 비결로 제시한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잘 지키게 도와주는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은 신약 시대에 율법주의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 맥락이 된다.
이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듯이, 율법 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율법주의를 넘어 율법이 왜 필요한 것인지 그 신학적 본질을 다시금 깨닫게 하신다. 율법만 남아 있고 율법의 본질적 정신과 기능은 실종된 유다인들의 삶 안에, 모든 율법의 핵심은 사랑임을, 그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임을 다시금 강조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오로 신학에서 더욱 체계화된다. 사람이 율법을 통해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설파하기 때문이다(로마 3,23-31; 4장; 7장; 갈라 2,15-21; 3,6-29등).
이러한 전통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루터는 오직 성경·은총·믿음(sola scriptura, sola gratia, sola fide)이라는 슬로건을 강조하며, 교회의 전통과 교도권보다는 성경이, 제도보다는 은총이, 그리고 인간의 믿음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부각시켜 개신교의 기본 교의를 구축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이러한 개신교의 입장을 철저히 단죄하며 ‘성경뿐 아니라 성전(聖傳)’도, ‘은총뿐 아니라 은총에 대한 자유로운 협력으로서의 성사’도,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중요함을 천명하면서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낸다.
유다교 | 율법의 완벽한 준수를 통해 |
개신교 | 오직 성경, 은총, 믿음을 통해 |
가톨릭 | 성경뿐 아니라 성전도, 은총뿐 아니라 성사도, 믿음뿐 아니라 행위도 중요 |
(6) 유다교의 정경 분류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정경을 ‘미크라(낭독하기 위한 책)’ 또는 타나크(TaNaK)라고 부른다. ‘타나크’란 오경(토라)·예언서(네비임)·성문서(케투빔)의 첫머리 글자를 합하여 형성한 용어인데, 이 단어가 암시하듯이 유다인은 자신들의 경전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유다인들의 정경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책은 토라(오경)다. 그 뒤에 예언서가 등장하는데 유다교 전통에서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분류된다.
전기 예언서는 그리스도교 정경 분류에서 ‘신명기계 역사서’라고 불리며, 모세 이후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지켰는지, 그리고 그곳에 어떻게 왕국이 세워지고 다시 남북으로 분리되어 멸망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전기 예언서 다음에는 후기 예언서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전기’, ‘후기’의 구별은 연대기적 구별이 아니라 배치된 순서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후기 예언서에는 모두 4개의 예언서가 포함되는데, 이른바 ‘대예언서’라고 불리는 3권의 예언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와 ‘소예언서’라고 불리는 12권의 예언서(한권으로 간주)다. 여기서 대소의 구별은 그 중요도에 의한 구별이 아니라 단순히 양적인 구분이다.
소예언서에 해당되는 책이 12권이나 되지만 이 12개를 다 합해도 대예언서 한권 분량도 못 미치기에 한 권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다인들은 후기 예언서를 모두 4권으로 보고 있다.
유다인들은 ‘오경’과 ‘예언서’ 범주에 들지 않는 나머지 모든 작품을 모아 ‘성문서’라는 그룹에 포함시킨다. 그러므로 시문학, 지혜문학, 묵시문학, 역사문학 작품 등이 성문서에 속한다.
모세오경 |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
예언서 | 전기 예언서 | 여호수아기, 판관기 상·하, 사무엘기 상·하, 열왕기 상·하 |
후기 예언서 | 대예언서: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 |
소예언서: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드야서, 요나서, 미카서, 나훔서,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하카이서, 즈카리야서, 말라키서 | ||
성문서 | 시편, 욥기, 잠언, 룻기, 아가, 코헬렛, 애가, 에스테르기, 다니엘서,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역대기 상·하 |
(7) 그리스도교의 정경 분류
그러나 이러한 유다인들의 정경 분류는 그리스도교에서 그 형태를 달리한다. 칠십인역을 그리스도교의 표준 성경으로 인정하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제 2경전 부분도 정경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특히 가톨릭)에서는 구약성경을 모두 4부류로 구분하는데 그 처음이 ‘오경’이요, 다음에 등장하는 부류가 ‘역사서’이다. 이 역사서 범주 안에는 크게 2개의 역사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신명기계 역사서’와 ‘역대기계 역사서’이다.
‘역사서’ 범주는 유다교의 정경 분류에는 등장하지 않는 부류로, 유다 전통에서 전기 예언서로 간주되고 있는 책들(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상·하, 열왕기상·하)에 룻기를 첨부하여 ‘신명기계 역사서’라 하고, 성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역대기상·하를 ‘역대기계 역사서’라고 부르면서 여기에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상·하를 첨부시킨다.
다음에 등장하는 부류는 ‘시서와 지혜서’이다. 여기에는 집회서, 지혜서 등 제2경전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배치되어 있는 부류는 ‘예언서’이다. 예언서는 유다인들의 전통과 거의 유사하나 바룩서(제2경전), 애가와 다니엘서(유다인들의 전통에서는 성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다니엘서의 경우, 기존의 예언문학과 구별되는 문체와 내용(묵시문학)으로 되어 있음에도 그리스도교가 이 책을 예언서로 간주하는 이유는,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다니엘서의 여러 내용(특히 7장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 개념)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모세오경 |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 |
역사서 | 신명기계 | 여호수아기, 판관기, 룻기, 사무엘기 상·하, 열왕기 상·하 |
역대기계 | 역대기상·하, 에즈라기, 느헤미야기, 토빗기, 유딧기, 에스테르기, 마카베오기 상·하 | |
시서와 지혜서 | 욥기, 시편, 잠언, 코헬렛, 아가, 지혜서, 집회서 | |
예언서 |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애가, 바룩서(예레미야의 편지 포함), 에제키엘서, 다니엘서,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드야서, 요나서, 미카서, 나훔서,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하카이서, 즈카리야서, 말라키서 |
(8) 제2경전과 외경, 그리고 위경
이상의 구별은 본질적으로 제 2경전이라는 책들의 첨부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유다인들의 정경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칠십인역을 통해 그리스도교 안에 보존된 내용, 곧 제2경전으로는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의 일부분이 있다.
이와 같은 구약성경의 유다교적, 가톨릭적, 개신교적 구성-배열의 혼란은 용어상의 혼란도 야기시켰다. 개신교의 경우, 유다인들의 정경에서는 제외되었으나 칠십인역을 통해 그리스도교 안에 보존된 제2경전을 ‘외경(外經)’ 곧 ‘정경 외의 경전’이라고 부른다.
물론 가톨릭도 이들을 제 1경전의 책들과 구분하기 위해 ‘제 2경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는 결코 그 책들이 2등급의 정경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신자들에게 똑같은 권위를 갖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 외에도 정경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이 여럿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한 책들을 가톨릭에서는 ‘외경’이라 부르는데, 개신교에서는 여기에 해당되는 책들을 ‘위경(僞經, 거짓 경전)’이라고 부른다.
이미 개신교는 가톨릭의 제2경전에 해당되는 책들을 ‘외경’으로 명칭했기 때문에 ‘외경’이라는 용어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 다른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3. 구약과 신약
그리스도교 정경이 구약, 신약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은, 우리 정경에서 ‘계약’이 얼마나 중요한 모티브인지를 암시한다. ‘계약’이란 두 당사자 사이에 체결되는 관계를 가시화한 것으로, 고대 근동의 계약은 일반적으로 짐승을 잡아 두 조각으로 가르고 이를 양편에 둔 후, 그 사이를 계약자들이 지나가는 행위를 통해 체결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표현은 ‘카라트 베리트’이고, 이를 직역하면 ‘계약을 자르다’이다. 이러한 행위는 계약을 어겼을 경우 어떤 결과가 오는지 경고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결국 성경이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내용으로 하여 편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구체적으로 ‘구약’이 무엇이며 ‘신약’이 무엇인지, 곧 옛 계약의 실체가 무엇이며 새 계약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1) 구약이란
구약은 하느님을 ‘임금’으로 고백하고 이스라엘은 그분만을 임금으로 모시는 ‘백성’이 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계약이다(탈출 19,3 이하). 구약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러한 ‘임금-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전개되는 하느님의 계시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에 등장하는 그 많은 비극적 사건이 바로 이러한 계약을 스스로 어긴 불충실과 죄 때문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사고는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사상이 된다.
(2) 신약이란
신약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새 이스라엘은 그분의 자녀(상속자)가 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계약을 말한다. 곧 왕-백성의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을 인식한 이전의 계약이 너무도 옛것이 되었기에,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새 이스라엘(로마 12,5; 1코린 1,30; 6,15; 10,17; 12,27; 콜로 1,18 등)이 그리스도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듯 하느님을 더 이상 ‘왕’이 아닌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기에(로마 8,15; 갈라 4,6) 이러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새로운 계약의 수립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새롭게 체결된 계약이 새 계약 곧 신약이다.
(3) 구약과 신약의 연계성
구약과 신약은 놀라운 정도의 체계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은 차원에서 매우 분명한 연속성을 보여준다.
우선 계약을 맺으려면 계약의 상호적 대상(갑-을 관계)이 필요하다. 또한 고대인들의 계약 체결에서는 언제나 제사가 동반되었다. 이는 현대인들이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 증서를 쓰는 법적 절차를 밟는 것과 유사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사제’와 ‘제물’, 제사가 드려진 ‘장소’가 제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계약에는 언제나 ‘징표’가 전달되었다. 갑-을이 계약을 맺었음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일종의 표식을 주고받는 것인데, 예를 들어 결혼식 때 예물을 서로 주고받는 행위와 유사하다. 결혼식 때 나누어 낀 예물반지는 그 둘이 특별한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만일 한 사람이 불륜이나 외도로 그 관계에 성실하지 못하게 되면 그 예물반지는 다시 반환되어야 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약에는 그 계약을 구체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일종의 약관)이 동반되는데 성경의 구약과 신약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구약의 두 대상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다. ‘백성’과 그들의 ‘임금’이라는 구체적인 관계가 형성되었음을 계약한 것이다. 이때 드린 제사는 인간 사제가 시나이산에서 동물을 제물로 삼아 체결되었다(탈출 24,5-8). 또한 이 계약의 예물로 주어진 것은 ‘땅’이었다. 곧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한 하느님은 그 관계에 대한 당신의 예물로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땅은 이스라엘이 계약에 성실하지 않았을 때 언제든지 박탈당할 수 있는 예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계약을 잘 준수하기 위한 약관이 동반되었는데 그것은 ‘율법’이었다. 곧 율법대로만 살면 하느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고, 그렇게 계약은 유효한 것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은 신약에서 다음과 같이 변화된다. 신약도 역시 두 존재 간의 계약으로 체결되었다. 하느님과 새 이스라엘이 계약의 두 주체이다. 구약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이라면 신약은 이스라엘을 넘어 새로운 공동체로 형성된 ‘새 이스라엘’ 곧 ‘교회’를 대상으로 체결된 것이다. 신약의 제사에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사제요 제물로 등장한다. 구약이 인간을 사제로, 동물을 제물로 바친 유한한 제사가 동반된 경우였다면, 신약은 완벽한 사제이신 예수님이 완벽한 제물인 예수님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의미에서 구약의 여러 제사를 완성하는 단 한번의 제사이며 이를 통해 완벽한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본다(히브 9,11-28; 10,11-18등). 이 계약의 제사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다. 구약이 시나이산에서 제단을 만들어 이루어졌다면, 신약은 골고타산에서 십자가를 제단 삼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새 계약의 결과로 주어진 예물 또한 ‘땅’이었는데 구약의 경우와 같은 지상의 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는 특수한 공간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지상의 나라와 병존하는 또 다른 초월적 나라가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행해지는 하느님의 통치야말로 지상적 영역의 유한한 통치를 넘어서는 매우 강력하고 힘 있는 통치이다. 이 통치가 구현되는 시공간을 ‘하느님 나라’라고 하고, 이곳은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실존적이고 직접적인 시공간이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라는 신약의 예물(징표)은 ‘복음’이라는 약관을 통해 유지된다. 구약이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계약의 결과를 소유할 수 있었다면 신약은 복음서에 제시된 가르침대로 삶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 신약 | |
대상 | 하느님 - 이스라엘 | 하느님 – 새 이스라엘(교회) |
사제 | 인간 | 예수 그리스도 |
제물 | 동물 | 예수 그리스도 |
제사장소 | 시나이 | 골고타의 십자가 |
내용 |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임금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 | 하느님은 새 이스라엘의 아버지 새 이스라엘은 그분의 자녀(상속자) |
징표(예물) | 약속의 땅 | 하느님 나라 |
방법 | 율법준수를 통해 | 복음의 완성을 통해 |
4. 왜 계약이라는 모티브를 사용했나?
성경이 ‘계약’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은 현대인들에게 좀 생소한 것일 수 있다. 하느님 말씀을 담고 있는 성경은 비즈니스적 어감을 강하게 풍기는 계약과 좀처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 저자들이 생각한 ‘계약’의 의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암이나 불의의 사고보다 사람을 더 강하게 죽음으로 몰아가는 병은 절망, 두려움, 불안 같은 부정적 심리이다. 살아가는 데 누구에게나 ‘공공의 적’으로 느껴는 것은 삶의 고비마다 복병처럼 숨어 있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고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러한 두려움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역설적이지만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그 실체와 친해지는 것이다. 서로 협상을 통해 가까워지고 일종의 안전지대를 도모하게 되면 턱없이 높아만 보이던 두려움도 조금은 가법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세상이 두렵다면 우리는 세상과 가까워져야 하고, 죽음이 두렵다면 죽음과 가까워져야 한다.
‘계약’이란 바로 이러한 ‘두려움’과 ‘가까이 감’의 역학 관계를 관료화된 사회 안에서 적극 도용하여 부상시킨 사회·정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약은 원래부터 ‘보호’와 ‘안전 도모’를 가장 궁극적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데, 이러한 사정은 계약이 처음 등장할 때의 배경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계약’은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제창된 제도였다. 외세의 침입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던 고대국가들은 언제 발생하게 될지 모르는 급작스러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조약’ 또는 ‘계약’을 개발시켰다. 곧 ‘상호 계약’ 또는 ‘동맹’이라는 제도는 갑작스러운 침략을 미리 차단함으로써 불필요한 두려움으로 에너지를 낭비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장치였던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느님과의 계약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 존재라고 믿었던 하느님과 협정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절대자와 누구도 분리시킬 수 없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바로 이를 통해 불의의 사고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나이에서 맺었던 이 계약을 실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도입했던 전문적 도구가 바로 여러 율법 조항과 그 율법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탈출 20,1-17; 신명 5,1-22)이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생명을 가장 안전하게 보장해 주기 위한 계약과 이를 존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해방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금령을 통해 인간 각 개인의 무차별한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한 삶을 도모하게 하는 가장 진지하고도 비폭력적인 무기들이 바로 십계명의 조항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