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서해평화협력지대와 북방한계선’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NLL이 정교하게 작도(作圖)되어 있습니다. 석도는 북한의 암초입니다. 연평도에서부터 석도까지의 거리가 3km인데, 1953년 8월에 연평도에서부터 1.5km로 半分해서 정밀하게 NLL을 작도했습니다.
아주 공평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도 위에 함박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여기도 중심선에 정확하게 작도되어 있습니다.
1999년도에 일어났던 연평해전과 2002년에 일어났던 서해교전이 전부 이 해역(연평도 서방의 장방형 해역을 가리키며)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왜 이 넓은 바다를 두고 여기에서 일어나느냐? 연평도의 방어문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북한경비정들은 사곶에 80여 척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 어선들을 잡기위해 북한경비정들이 밑으로 나옵니다. 주간에는 어선들이 나와서 고기를 잡으니까, 어선의 북쪽에 우리 고속정이 항상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한경비정들이 언제 내려와서 우리 어선을 잡아갈지 모릅니다.
NLL이라는 선이 눈에는 안 보이지만 남쪽으로 2km, 북쪽으로 2km 정도는 비무장지대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북쪽도 그 2km 안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2km를 침범하면 우리는 발동이 걸려서 잡으러 나가야 합니다. 그 영역으로 들어오면 순식간에 NLL을 넘어와서 우리 배를 데리고 나가기 때문이죠. 언론보도에 의하면 북한의 어선은 전부 군 소속 무장선입니다.
우리의 어선개념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북한은 상선에도 군인이 타고 있고 무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쪽에는 군인들 중에서도 굉장한 군인들만 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같이 ‘평화수역이다, 공동어로수역이다’라고 한다면 북한의 고기잡이배가 더 앞으로 나오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지금보다 더 아래에서 교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연평도를 방어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을 방어하지 못하면 인천도 쉽게 잃게 됩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그 많은 인원이 죽고 포로가 되면서도 해군이 지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까 잠깐 소개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다행히 NLL분야를 구축함에 근무하면서 현장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서해5도 봉쇄사건(1973년 서해사태) 때도 현장에 있었습니다.
1982부터 연평도에 자원해가서 1년간 지휘관으로 근무해보니 NLL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때부터 NLL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합참 해상작전과장은 해상작전 전체를 보좌하는 직책입니다.
1994년 12월1일에 평시작전통제권을 미군으로부터 가져올 때도, 검토해본 결과 NLL문제는 유엔사에서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결론이 나서 유엔군 사령관이 관리하도록 되었습니다. 지금도 NLL문제는 유엔사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합참 전략기획부장은 합참에 소장급 해군직위로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해상에 전투가 생겼다고 하면 제 임무도 아닌데 가서 도와줘야 합니다.
합참이 굉장히 규모가 큽니다만 해군의 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합참 전략기획부장은 사실 대미관계, 주변국 관계나 국방정책이라든지 군사전략을 수립하는 아주 중요한 직책입니다.
백령도·대청도·소청도를 백령도서군이라고 하고, 연평도·우도를 연평도서군이라고 합니다. 지도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이쪽은 저수심입니다. 물이 빠질 때는 모래사장과 갯벌이 드러납니다. 제한된 시간에만 다닐 수 있도록 되어있지요.
연평도와 우도는 고지가 낮아서 대게 100고지 이내 입니다. 우도에는 유일하게 민간인이 살지 않습니다. 해군과 해병대만 들어가 있는 아주 작은 섬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남북정상선언(10.4)에 평화협정지대를 설치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NLL과 관련돼서는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고 민간선박이 NLL을 통과해서 해주로 자유롭게 왕래하겠다는 것이 여기에서 합의가 되었습니다.
우리 대통령님께서 돌아오셔서 ‘정상회담 합의 중에서 최대의 성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북정상선언에 따라 제2차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있었는데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설정은 합의를 못 봐서 장성급회담에서 협의,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옛날에는 ‘협의한다’고만 했는데 이번에는 희한하게 ‘해결한다’는 말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지요. 옛날의 남북기본합의서를 보면 전부 ‘협의한다’고만 되어있습니다. 이것도 상당히 의미심장한 거죠.
다음으로 ‘북측 민간선박의 해주항 직항을 허용한다’고 했는데, 민간선박이라고 규정을 하니까 국민들이 혼란스럽게 되는 거지요. 이것은 이미 허가가 되었습니다.
2007년 말까지 통항절차와 항로대만 해주면 됩니다. ‘해상 불가침경계선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게 바로 NLL입니다. 국민들이 잘 모르게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1992년도에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보면 한 구절 들어있습니다. 그것도 부속합의서에 ‘우리는 해상 불가침 경계선을 앞으로 협의한다’고 되어있죠. 해상 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는 현재의 관할구역을 존중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굉장히 규모가 큰 합의서에서 일개 문구에 불과한 것을 인용해서 하겠다는 아주 기가막힌 일입니다. ‘종전선언, 평화체제구축을 위해 군사적으로 상호협력을 한다’는 것은, 남북정상선언에 보면 3자 또는 4자의 정상이 모여서 종전선언을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큰 구속력은 안가지고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뒷받침한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다음에 재향군인회, 성우회의 여러 분들이 모여서 규탄을 하였습니다. 서북도서를 지키고 있는 해병대와 해군인데 주로 해병대가 방어를 많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2007년 11월10일에 대통령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난 뒤에 해병대 전우회에서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서북도서를 지킬 수 없다’고 나서서 규탄하는 집회를 했습니다.
연평해전과 서해교전 때 해군참모총장을 하신 이수용, 장정길 두 분이
‘NLL은 수도권을 지키는 안보 사활선이다, 정치적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수 없다, 두 차례의 교전은 북한의 NLL 재설정 전략에 따른 의도적인 도발이다, 우발적 무력충돌이 아니다, NLL사수는 해군의 최우선 사명이자 임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의 전직 국방관료 세 분은 이 정부 들어와서 최초의 직위를 받으신 분들입니다. 조영길 전 국방부장관께서는 ‘북한은 NLL 양보 땐 서해5도 철수 요구할 것’, 김종환 전 합참의장은 ‘공동어로수역의 덫’, 김희상 전 청와대 국방보좌관은 ‘NLL무너지면 인천 앞바다까지 위험’ 하다고 기고를 하셨습니다.
세 분 모두 육군출신입니다. 서해 5도에 거주하고 있는 옹진군 주민들이 NLL재설정 논의를 반대하는 건의문에 1만 17명이 서명했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은 공개된 일반자료, 국방백서라든지 정부에서 나온 자료만 활용한 것입니다.
북방한계선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설정된 배경을 살펴보면 정전협정에 해상분계선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1951년부터 1952년 초에 북한은 12마일 영해를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서해5개 도서가 북한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 당시 전 세계에 통용되는 영해가 3마일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3마일을 주장했죠. 합의가 안 되니까 북한이 포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단, 피차의 해면을 존중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는 단서가 들어있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 쪽에서는 북쪽에 있는 유엔군의 해공군 전력을 제한해야 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해·공군력이 워낙 강해서 압록강 앞에 있는 대화도, 동해 끝에 있는 마양도를, 바다고 공중이고 전부 우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봉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유엔군사령관이 일방적으로 NLL을 그은 것입니다.
서해는 당시 영해기준인 3마일(5.5Km)로 중간선 원칙을 따랐고, 동해는 위도와 평행하게 해서 NLL이 정확하고 공정하게 설정되었습니다.
동해는 군사분계선의 연장선으로 해서 407Km까지, 서해는 한강 하구로부터 백령도 서쪽까지 296km로 되어있습니다. 이걸 기준으로 해서 해군은 그동안 작전구역을 정해서 서해를 지켜왔습니다.
요즘 많은 학자들이 생각할 때 북방한계선은 우리끼리 정한 것이니까 법적인 근거가 없지 않느냐고 하는데, 북방한계선의 합법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국방부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설치 목적이 정당합니다. 충돌방지, 정전체제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설정되었고 지금까지 한반도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선을 넘어가려면 유엔군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1970년에 한 번 동해에서 북한 간첩선이 도망가는 것을 잡기 위해서 넘어간 것 외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넘어간 적은 없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1년에 17번 정도 넘어오고 있습니다. 국제법적으로 합법적입니다. 중간선 원칙을 학자들이 많이 이야기 합니다. 연평도와 소청도가 47마일인데, 국제법에는 24마일까지 선을 연결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에도 48마일, 50마일로 되어있습니다. 지형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묵인하고 있습니다. 동해에서 보면 북한은 고성에서부터 나진까지 160마일을 죽 그어서 그 안은 전부 자기 영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20년 동안 여기에 대해서 북한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국제법에서는 ?從 또는 ?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휴전체제의 일부로 고정이 되었습니다. 단, 동해 NLL은 본래 국제법상 등거리 원칙에 따라서 해안 경사와 90도에 맞도록 그어야 하는데, 위도와 평행하게 그었기 때문에 한국에 불리하게 작도되어 있습니다. 재설정 검토가 필요합니다.
북한도 조선중앙연감의 지도에 표기했고, 북한에서 우리 쪽으로 넘어온 수해물자를 인수할 때 NLL에서 만나서 호송했고, 해주에 입항하는 북한상선도 NLL위로 타고 들어갑니다. 이 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조난선박을 서로 인계?인수할 때도 NLL선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분명하게 해상군사분계선이고 휴전선입니다. 6?25전쟁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때까지는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동안 북한이 어떻게 도발했고 우리의 대응은 어땠는지 기간을 나누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먼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962년 12월에 북한의 4대 군사노선을 확정했는데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잠수함과 유도탄정을 도입하고, 고속정과 어뢰정을 대량 건조하고, 해안포도 설치했습니다. 1967년, 5년 만에 對南 군사력 우위를 달성하고 도발하기 시작합니다.
동해에서 당포함(56함)이 122미리 해안포를 맞아서 침몰했습니다. 39명이 전사하고, 30명이 다치고, 10명만이 겨우 다치지 않고 살아 남았습니다. 미 해군 정보함(푸에블로)을 항공기와 함정이 동시에 공격해서 납치했습니다.
울진·삼척의 무장공비 120여 명 해상침투는 위장 선박으로 3일간 나눠서 들어왔습니다. 미 해군 정찰기를 격추해서 32명이 다 전사했습니다. 서해 연평도 해군 방송선을 납치해서 20여 명이 지금도 북한에 포로로 있습니다.
동해에서는 해경정 863정을 공격, 침몰시켜서 2명이 포로로 잡혀있고 26명이 전사했습니다. 북한은 국제법도 무시하고 아무리 초강대국이라고 해도 자기들이 필요하면 공격합니다.
서해5도와 관련해서 가장 큰 것이 북한 서해사태 도발(1973.10~11)입니다. 1972년에 7·4공동성명으로 국민들은 곧 통일이 될 거라는 희망에 젖어있었고, 이런 화해무드를 북한이 이용한 것입니다. 일종의 ‘서해5도 봉쇄사건’입니다.
NLL을 일일 10~20여 척이 총 43회 월선하고, 10마일(18km)까지 남하했습니다. 이때 제가 초급장교 중위로서 현장에 있었습니다. 24시간 전투배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전투배치 위치에 모포를 가져다놓고 살았습니다.
남쪽에는 북한함정, 북쪽에는 한국함정이 위치할 정도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이 백령도서군(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에 근접해서 포위를 시도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한국은 저속위주의 대형함이기 때문에 크고 둔합니다.
한 바퀴 도는데 1km 정도씩 걸리는데, 북한은 소형함으로 40노트(70km)로 그 자리에서 도니까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해병대가 백령도에 여단이 있고, 연평도에 연대급이 있기 때문에 LST상륙함이 물자를 공급하러 갑니다. 중요한 물자는 LST로 옮기는데, LST를 포위하고 여객선도 포위하면서 진로를 차단했습니다. 어뢰정은 나무로 만들었고 굉장히 작기 때문에 레이더에 12km부터 나타납니다.
그래서 레이더에 나타나서 전투배치를 하면, 우리 포가 가동되는 순간에 3km 내에 들어옵니다. 어뢰를 3~4km에서 발사합니다. 그러면 구축함은 가라앉는 거죠. 실제 전투는 안 생겼지만 편대로 모의공격 기동훈련을 했습니다.
백령도 상공에 미그기가 날아다니고, 소청도 남방에 북한어선이 내려와서 고기를 잡았죠. NLL이 가깝기 때문에 내려와서 그냥 잡아갑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서북도서를 운항하는 여객선이나 화물선을 호송하는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우리 해군은 공세작전을 펼쳤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정도로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미친개에는 몽둥이가 약이다’라고 하셨죠. 결국은(1975년) 우리 구축함이 1000톤급 북한 어로지도선을 감쪽같이 가라앉혀 버렸습니다. 충돌하고 42초 만에 가라앉았습니다.
워낙 빨리 가라앉으니까 갑판에 있는 선원들도 물에 빨려 들어가서 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끝났습니다. 그 후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서해5도를 요새화 해야겠다’고 해서 대만의 검문도와 마조도式으로 요새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고속정도 국내개발을 시작했습니다.
11월까지 서해사태 도발을 하고 나서 북한이 처음으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항의를 했습니다.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 경계선을 잘라서 이북해역은 북한의 연해라고 주장하고 대신 서해5도는 한국 것이다, 그러나 출입선박은 사전에 허가를 받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때부터 해군력이 워낙 강하니까 200마일 경제수역, 50마일 군사수역 같은 국제법에 맞지 않는 것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 NLL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정부의 사수의지가 있었고 연합사와 유엔사가 한국 정부를 지지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추가도발을 저지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지니까 다시 평화통일의 화해무드가 조성이 되었습니다. 1992년도에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오고 바로 비핵화 선언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1992년도에 북한은 벌써 핵무기 3개 내지 6개는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994년에 김정일이 先軍정치를 하고 군사노선을 헌법에 명문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미국에게서 평시작전 통제권을 가져왔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보면 南北간 합의서 가운데 이것만큼 잘 된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 보면 무력을 절대 사용하지 않도록 되어있습니다. 지휘관 간의 직통전화도 가설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만 잘 지켜지면 전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정부에서 평시작전 통제권을 가져오라고 한 것이지요. 그때 아무리 검토를 해도 NLL관리가 안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관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안보는 힘으로 하는 것이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NLL은 유엔사가 관리한다고 명문화를 한 것이지요. 1998년, 북한이 사정거리 1300km의 노동미사일을 태평양에 쏩니다. 대량살상무기 보유로 자신감이 생긴 거죠. 그래서 1996년에 상어급 잠수함, 1998년에 유고급 잠수함 침투사건이 생겼죠. 대남 군사력 우위를 달성한 겁니다.
한 가지 굉장히 중요한 것이 인민무력부장이라고 김일철 현재 해군차수라는 사람입니다. 해군참모총장을 17년하고 무력부장을 하자마자 NLL무력화에 착수합니다.
1999년 6월 초부터 8일간 우리 관할해역을 최대 15척, 14km까지 침범하며 유린합니다. 이때 정부에서는 ‘먼저 쏘지 마라, NLL을 지켜라, 그쪽이 먼저 쏘면 응징해라,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4가지 지침을 내립니다. 어떻게 싸웁니까? 기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오랫동안 북한이 도발할 것을 이미 알고 우리 대형함정들이 미리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서로 쏘지는 못하니까 충돌하는 형식의 25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해전을 재연한 겁니다. 북한은 자동화장비가 없기 때문에 쏘기 위해서는 가까이 와야 하고 우리는 자동화된 무기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야 해서 그런 전투방식을 쓰게 된 겁니다.
그 후에 김정일은 지휘관을 처벌하지 않고 1년의 시간을 줄 테니 복수하라고 합니다. 국민일보에 ‘北, 연평해전 패배 설욕 벼른다’고 보도되었던 것처럼 엄청난 훈련을 하게 됩니다. 연평해전 후에 바로 북한이 대란 응징을 하겠다고 합니다.
정부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미국에 항공모함을 요청해서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스테니드 항모전투단이 옵니다. 비행기가 없어서 오는 길에 주섬주섬 주워서 72대를 가지고 7월 초에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연평해전이 끝났습니다. 북한이 연평해전에서 졌기 때문에 틀림없이 더 큰 도발을 할 것이었는데 미국에서 항공모함이 와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연평해전이 끝나고 1999년 9월2일에 북한이 또다시 NLL 무효화를 주장하고, 2000년 3월에는 서해 5개 섬 통항질서를 발표합니다. 북한은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협박을 합니다.
4월 8일에 정상회담 발표를 하고, 6월15일에 했는데 3월부터 협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협박에 넘어가죠. 대통령님이 다녀오셔서는 ‘이제 한반도 전쟁위협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바로 북한의 상선 10여 척이 10여 일간 영해, 제주해협, NLL을 통과하며 유린합니다. 또 연평도 서방에서 NLL을 통과해 해주에 입항하는 상선이 있었는데, 이때 초계함이 앞을 가로막았지요. 상선이 초계함을 받아버려서 초계함이 많이 손상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한 마디도 못합니다. 그 당시 정책이 그랬습니다. 먼저 공격을 못하게 되니까 얻어맞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걸 그대로 두니까 북한이 기고만장해서 햇볕정책, 6·15 공동선언, 월드컵 분위기를 악용해 도발합니다. 이틀 동안 똑같은 도발 예행연습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의 방침은 1999년과 똑같았습니다. ‘먼저 쏘지 마라, 맞고 나서 대응하라.’ 북한이 이틀 동안 2척이 분리된 구역에서 예행연습을 했기 때문에 우리 대형함이 대비를 못했습니다. 대형함이 있었으면 대비가 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고속정이 침몰했습니다.
요즘은 무기체계가 발달했기 때문에 먼저 맞고는 살아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먼저 맞고 대응하라’고 했죠. 이렇게 정부의 사수의지가 미약하면 북한의 도발을 자초하는 겁니다.
이것이 북한이 주장하는 해상분계선입니다. 1973년에도, 1999년에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선 위로는 다 자기들의 영해라는 겁니다.
2000년도에는 이렇게 사이에 3km 정도 통로를 내어준다고 하니까 우리 국민들이 솔깃하죠. ‘북한이 처음에는 주장하는 선 위로 다 내어놓으라고 했는데 이만큼 양보해주는구나, 정말 자비롭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정말 잘못된 생각이죠.
이게 바로 살라미 전술입니다. 살살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전술이죠. 북한은 아주 집요합니다. 1973년부터 지금까지 NLL 요구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변합니다.
북한 상선이 영해를 침범한 것을 나타낸 지도입니다. 2001년 6월2일 하루 상황입니다. 원래는 북한 상선들이 407km밖으로 다닙니다.
그러나 이때는 손을 못 썼지요.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하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서해교전 사진입니다. 어망이 이런 식으로 놓여 있습니다. 꽃게를 잡으려면 어망을 바다에 내려놓습니다. 며칠 전에 내려놓은 것을 거둬서 들여가고 또 새 것을 내려놓는 거죠.
주간에 전쟁이 나서 그렇지 야간에 났으면 어망에 걸려서 스크루가 다 감겨버립니다. 그러니까 서해에서 전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망은 레이더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눈으로 보고 피해야 합니다.
북한이 얼마나 정교하게 준비를 했는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배의 기관실이 가장 넓습니다. 기관실에 맞아서 물이 차면 금방 가라앉습니다. 정장이 있는 곳에 포격을 해서 정장을 조기에 죽이는 식으로 아주 철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참수리호를 전시해 놓은 곳에 가서 보시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모릅니다. ‘맞고 나서 대응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맞으면 대응할 길이 없습니다. 소설가 한 분이 2007년 6월에 쓰신 ‘서해교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걸 보시면 북한 애들이 김정일의 지침을 받아서 얼마나 정밀하게 준비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북한 국방부장관이 해군출신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이니 얼마나 자세하게 준비했겠습니까? 서해교전에서 침몰한 참수리 호를 수심 27m에서 인양했습니다. 서해교전이 있은 뒤 51일 만에 끄집어 올리고 43일 만에 한상국 중사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사실은 침몰한 배를 끌어올리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배를 인양하는 구조함은 무장도 없습니다. 북한군 코앞에서 그런 작업을 하는데 북한이 가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미국에 요청을 했습니다. ‘한상국 중사를 찾아야 한다, 그 친구가 배 안에 있는지, 배 밖에 있는지 찾아야한다.’ 그러니까 미국사람들이 ‘좋다, 맞다. 전쟁을 하다 다친 애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시체라도 건져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고 해서 도와줬습니다. 우리는 말로 준비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힘으로 준비를 합니다. 그래놓고도 안되니까 구조함에 유엔군사령부에 있는 장교들을 태워놓았습니다. 북한한테 ‘유엔사 장교들이 타고 있다, 공격하면 유엔에 대한 도발이다’라고 판문점에서 정식으로 만나서 이야기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얼마나 한국을 위해서 애쓰는지, 정말 눈물이 쏟아집니다. 제가 미국군과 합의서를 체결했습니다. 정말 눈물이 쏟아집니다.
그 사람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가서 찾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북한도 1999년 연평해전 때 똑같은 위치에 침몰했는데 안 찾아갑니다. 우리는 끌어올렸죠.
그때 제가 역시 힘으로 해야 억지가 달성되는 것이지, 말로는 평화가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미국 사람들한테 정말 고맙습니다. 유엔 참전 16개국 장교들도 현재 와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고 난 다음에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전우가 사수한 NLL, 우리가 지킨다’로 정신무장을 해서 북한선박이 NLL 월선 시 즉각 경고사격을 했습니다. 10km, 20km에서 막 쏘니까 그냥 도망가는 거죠. 제가 이때 작전사에 있었는데, 사실 제3차 서해교전(결승전)을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2차 북핵위기 발생하고 신정부가 출범하면서 햇볕정책을 계승해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했으나,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지요. 정부가 불안해하는 거죠. 그래서 정부가 북한에게 사정해 남북 장성급회담을 하면서 6·4 합의를 합니다.
북한이 요구한게 뭐냐? ‘DMZ에 있는 모든 선전탑과 확성기를 제거하라, 대신 남북함정끼리 통신망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 그래서 정부가 요구를 수락했죠. 2004년 6월15일에 남북함정 통신망을 개통했는데, 제대로 통화가 안 됩니다.
개통하고 한 달도 안된 2004년 7월14일에 서해교전 때 우리 배를 가라앉힌 등산곶 684함이 NLL을 재침범합니다. 그때 북한은 남북함정 통신망을 기만통신으로 사용했습니다. 북한 함정이 내려오면서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통신으로는 ‘나는 중국어선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죠.
이 사건 때문에 국방부 장관님이 나가시고, 합참정보본부장이 강제 전역되고, 해군 작전사령관도 처벌받았죠. 그러다 보니 군에서는 작전이 소극적으로 되기 시작했죠.
2004년 8월부터는 손이 묶여서 북한함선이 NLL을 침범해도 묵인하고, 북한의 남북함정 통신망 사용규정 미 준수도 묵인합니다. 교신율이 35.7%입니다.
통신이라는 것은 ‘왜 내려오느냐’라고 이야기하면 ‘올라가겠다’고 답을 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는 거죠. 2006년 3월에 북한에서 장성급 회담을 하면서 백지상태에서 NLL 재설정을 요구합니다.
그때 우리가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겠다고 했는데 남북기본합의서 근거로 하자고 주장하는 거죠. 그래서 통일부의 종합검토 시사가 신문지상에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바로 국방장관회담에서 NLL을 논의하자고 제의하게 되는 겁니다. 북한은 도서주변에서 NLL남방 1~2Km, 12마일(20km) 영해를 주장합니다. 한국은 ‘좋다, 일단 한번 논의해보자’며 서해 NLL 재설정도 가능함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2007년 5월에 공동어로수역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북한은 회담기간 중에도 서해교전 발발 협박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들은 상당히 움츠러들지요. 이때부터 NLL문제 때문에 국방부와 통일부의 마찰이 시작됩니다.
국방부에서는 ‘왜 통일부가 나서느냐’는 거죠. 그래서 ‘해군력이 미약했던 북에 NLL은 유용한 선이다, 북한의 요구는 정전협정?국제법을 위배한 억지다’라고 2007년 7월3일 국방부 홈페이지에 북방 한계선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을 게재합니다.
북한의 해상도발과 우리의 대응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1973년 이래로 똑같은 주장을 해오고 있습니다. 군사우위를 달성할 때는 평화공세를 하면서 무력도발이 증가합니다. 북한한테는 우리와 합의한 사항, 국제법 모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서해5도, NLL사수 사수정책을 잘 추진했을 때는 북한 도발이 감소되었고, 1998년도 이후로 지금까지 북한의 NLL 무력화 정책에 계속 속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서해 평화협력지대에 대해서 분석해보겠습니다. ‘서해평화협력지대’가 왜 등장하게 되었느냐의 과정을 더듬어 보면 2006년 3월부터 북한의 NLL재설정 주장에 대해 종합검토에 착수하기 시작했고, 5월에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논의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이걸 알고 재향군인회에서는 안보정책자문회의를 긴급히 소집했습니다. NLL 재설정 안 된다, 전시작전 통제권 환수 안 된다, 보안법 폐지 안 된다는 문제를 토의했습니다.
그 검토결과와 군 원로 면담을 대통령님께 건의한 것을 신문보도를 통해 접했습니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 계룡대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에 가셔서 NLL문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2007년 5월에 드디어 서해 공동어로구역 설정, 북측 민간선박의 해주항 직항운항, 임진강 수해방지, 한강하구 골재채취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등의 골격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정상회담 발표 직전에 북한이 또 장성급 회담을 결렬시킵니다.
전형적인 전술이죠. NLL재설정을 하지 않으면 회담하지 않겠다고 협박합니다. 북한이 이렇게 나오니까 우리 정부는 잘못하면 정상회담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해서 큰일이 난거죠. 정상회담 발표가 난 뒤에 바로 통일부 장관이 ‘NLL은 영토개념이 아니고…’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국방부는 급하니까 NLL변경문제를 유엔사에 타진했고, ‘유엔사의 사전허가 없이는 NLL재설정은 불가능하다’고 유엔 사령관이 분명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비서실장은 ‘우리가 제의하지 않아도, 북한이 제의할 수 있다’며 NLL논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9월27일에 청와대에서 ‘DMZ와 NLL 평화지대화, 해주공단 건설방안 검토 중’이라고 언론에 보도 자료를 내보냅니다. 북한은 회담할 때까지 의제를 공개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김정일은 DMZ 평화지대화는 거부하고 NLL 평화지대화만 받아들입니다. 2007년 12월12일 남북장성급 회담에서 서해공동어로구역 설정에 실패했습니다. 12월28일까지 했던 조선·해운협력 분과위원회 회의에서도 합의사항이 없었습니다.
오늘 서해 평화협력지대 추진위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것이 의제에 서해공동어로구역 설정이 들어있는데 국방부 참석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북한은 장관이 나오는데 우리는 NSC 상임위원장이 직접 나왔습니다. 평화협정지대 내에 NLL와 공동어로수역, 북한 상선 문제가 있습니다. NLL문제는 아까 말씀 드렸고, 최근에 들어와서 북한이 공동어로수역을 이야기하면서 살며시 ‘우리가 여태까지는 다 달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 마음은 이 정도면 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부에서는 솔깃하죠. 이정도 주는 거라면 괜찮지 않겠느냐 싶은 거죠.
북한은 서해5도를 가져가기 위해서 엄청난 병력을 투입해놓았습니다. 서해병력의 60~70%가 여기에 집결해 있습니다. 우리 평택항 아래쪽에 있지요.
그래서 공군기가 떠도 (백령도쪽을 가리키며) 우리 군함은 공군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튼튼하게 지키지 않으면 서해도서를 확보할 길이 없습니다. 지정학적, 군사적으로 우리가 불리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이 도와주는 겁니다. 24시간 공중에서 위성으로 쳐다보면서 도와주는 겁니다. 우리는 핵실험 장소도 몰라서 3일 동안 우왕좌왕했습니다.
서해5도의 군사 전략적 가치입니다. 역대 참모총장님들이 말씀하신대로 수도권(인천·서울)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한국 생존이 걸린 핵심방어구역(Critical Defense Zone)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북한의 옆구리를 겨누는 비수죠. 지금도 연합사·유엔사·주한미군(정보 등)의 도움으로 힘겹게 방어하고 있습니다. 서해5도 지역에 나가있는 군인들은 항상 대함 유도탄의 위협을 느끼면서 생활합니다.
대함 유도탄이 날아오면 한두 발은 방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6, 7발을 맞으면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 만큼 어렵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있기 때문에 북한이 그런 짓을 못하는 거죠.
북한의 의도는 뭐냐? NLL을 조금이라도 무력화해서 전력을 전진 배치하여 서해5도를 고립시키고 장악한다는 겁니다. 목적은 도계선 이북을 통째로 다 가져가는 겁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아까 지도에서 보셨지만 연평도 위에 있는 조그만 석도, 암초도 1953년에 NLL을 작도할 때 영해를 주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국제법에 암초도 영해를 주도록 되어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 구축해서, 제3차 서해교전 발발 운운하며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군 배치를 해 놓았기 때문에 이 협박이 말로 하는 협박이 아닙니다.
이 사진은 2007년 12월13일 장성급 회담에서 우리 실무자 해군 소령이 북한의 행위를 저지하는 장면입니다.
우리 측 방송기자들이 남북 수석대표의 첫 발언을 촬영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북측의 요구사항을 선전하기 위해 빔 프로젝터를 가동해 일정에 없는 브리핑을 하려고 하자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잠깐 나왔죠. NLL을 연두색으로 표시된 영역만큼 달라는 겁니다.
지금 정부의 입장은 국방부와 통일부가 NLL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교전을 우발적 무력충돌로 생각하는데, 절대 우발적 무력충돌이 아닙니다.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도발입니다. 여기서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에 무력충돌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대북 군사유화 정책을 취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북한의 NLL침범과 통신망 규정 미 준수도 수용하는 거죠. 심지어 1년에 17번 내려오는데, 정상회담 직후에 2주 동안 5번 내려왔습니다.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논의 가능한 것으로 양보도 합니다. 북한의 전형적인 살라미 전술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가지고 가는 전술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겁니다.
2007년 11월1일에 대통령님께서 하신 말씀의 언론보도를 제가 요약해 봤습니다. ‘NLL은 합의되지 않은 선이고, 국제법상 영토선 획정기준에 맞지 않는 선이다.
목숨 걸고 지킨 영토선, 그 말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선 때문에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 아니냐. 합의된 선이라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NLL문제는 ‘어릴 적 땅따먹기 할 때와 같이 땅에 줄 그어놓고 네 땅 내 땅 그러는 것 같다. 그림까지 딱 넣고 합의도장 찍어버려야 하는데… 다시 긋는다고 우리나라에 뭐 큰 일이 나고 당장 안보가 위태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정서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NLL문제 직접 거론하지 않고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축으로 우회해 해결한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NLL은 명백한 해상 군사 분계선으로 양보가 불가능합니다. 북한이 요구하면 우리가 동해 NLL 재설정을 요구하며 반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의 북한 해상 무력도발에 대해서 우리가 사죄를 요구해야 합니다.
정전협정에 관해서는 관리주체인 유엔사와 사전 협의가 필수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힘이 없으니까 연합사·유엔사의 능력을 활용하여 북한의 도발을 억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2차 국방장관회담 합의사항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을 협의, 해결하자’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연합사와 유엔사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잠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국방백서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요약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연합사 작전계획으로 방어하고 있습니다. 연합사가 대한민국과 같이 방어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방어하느냐? 미군 현 병력의 50%인 69만 명과 전투장비가 자동적으로 오게 되어있습니다. 전쟁 나기 전부터 우리가 요청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옵니다. 함정 160척, 항공모함 5개. 여기 있는 토마호크는 구축함이나 잠수함에서 발사하는데 2500km를 날아가서 10m내에 떨어집니다.
미군이 항상 이야기합니다. ‘어디를 맞힐까?’ 그래서 어느 아파트를 맞춰달라고 하면, ‘아니, 동 호수를 이야기해라’고 합니다. 우리 공군기를 다 합쳐봐야 600대도 안 되지 않습니까? 항공기 2000여 대가 옵니다. 질이 다릅니다.
F-15도 무장이 다르지요. 해병대는 미 해병대의 70%입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것은 아마 24시간 내에 들어올 겁니다. 이 병력들이 우리 작전 계획상 못박혀있기 때문에 지금 이라크·아프간에도 파병을 못하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미군은 ‘이 작전 계획 때문에 우리가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라크에 가 있는 미군의 25%가 예비군입니다. 이라크·아프간의 상황을 빨리 종료해야 하는데 대한민국 작전계획 때문에 병력을 못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동두천에 있는 1개 여단을 데리고 나갔죠. 미국 사람들은 약속을 하면 죽어도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싫다고 하는 거죠. 69만 병력도 필요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싫다고 하는 69만 지원 병력을 이제 일본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연합사가 앞으로 일본에 생길 겁니다.
유엔사는 북한의 재침 시 16개국이 자동 참전하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엔사가 연락 장교를 한국에 파견하고, 일본에 후방지휘소와 장비 저장시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어도 남한을 공격하지 못하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