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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6835]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 시모음
縱筆(종필)-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조선 붓 가는 대로 쓰다
淸風動萬松(청풍동만송) 맑은 바람에 온 소나무는 물결치고
白雲滿幽谷(백운만유곡) 흰 구름은 그윽한 골짜기에 가득하네
山人獨夜步(산인독야보) 산에 사는 사람 혼자 밤에 걷노라니
溪水鳴寒玉(계수명한옥) 개울은 맑고 차가운 옥 소리를 내네
高峯先生集 (고봉선생집)
奇大升 [1527년(중종 22) ~ 1572년(선조 5)]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幸州. 자는 明彦, 호는 高峯 · 存齋.
1549년(명종 4) 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奇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 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 ·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 해 사헌부지평 · 홍문관교리 · 사헌부헌납 ·
議政府檢詳 · 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遠接使의 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典翰이 되어서는 趙光祖 · 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 ·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德原君에 봉해졌다.
이황과 12년 동안에 이루어진 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情이다.”라고 하여 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理財養民論 · 崇禮論 · 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學行이 겸비된 士儒로서 학문에서는 四七理氣說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다.
제자로는 鄭雲龍 · 高敬命 · 崔慶會 · 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 · 『왕복서(往復書)』 ·
『이기왕복서』 · 『朱子文錄』 · 『高峯集』 등이 있다.
광주의 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文憲.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시모음
夏景(하경)-기대승(奇大升) : 1527~1572 朝鮮 여름 풍경
蒲席筠床隨意臥 (포석균상수의와) 대 평상에 자리 깔고 내 멋대로 누웠더니
虛鈴疎箔度微風 (허령소박도미풍) 창문 성긴 주렴 사이로 실바람이 솔솔
團圓更有生凉手 (단원갱유생량수) 부채질을 더하니 바람 더욱 시원해서
頓覺炎蒸一夜空 (돈각염증일야공) 푹푹 찌는 더위도 오늘밤엔 사라졌네.
次百祥樓韻 (차백상루운) -奇大升 백상루 시의 운에 따라
別題 百祥樓
城北危樓鬼效功 (성북위루귀효공) 성 북쪽의 높은 누각 귀신이 솜씨 부렸나?
翶翔雲際壓晴空 (고상운제압청공) 구름으로 날아올라 맑은 하늘 압도하네. * 날 고
香山縹氣飛朱栱 (향산표기비주공) 묘향산 고운 기운 두공에 날아오고 * 옥색비단 표
渤海祥光隱畫櫳 (발해상광은화롱) 발해의 서광은 단청 난간에 은은하다. * 난간 롱
朗月照襟開玉界 (낭월조금개옥계) 밝은 달 가슴 비추며 하늘을 여니
仙風吹夢落瓊宮 (선풍취몽낙경궁) 선풍은 꿈결에 불어 저 달에 닿는구나.
悠悠往事憑誰問 (유유왕사빙수문) 아득한 옛 일은 누구에게 물어보나?
一曲漁歌細雨中 (일곡어가세우중) 뱃노래 한 가락 보슬비 속에 들리네.
* 百祥樓: 평안남도 安州郡에 있는 누각. 청천강 가에 있으며 선조 때 李視가 가사 ‘백상루별곡’을 지었음. 關西第一樓로 불림.
* 危樓: 매우 높은 누각. 一作 樓高.
* 鬼效功: 귀신이 공을 들이다. 一作 鬼效工.
* 翶翔: 하늘 높이 빙빙 날아다님. 하는 일없이 놀며 돌아다님.
* 晴空: 구름이 없이 맑은 하늘.
* 香山: 妙香山. 평안북도 寧邊郡에 있는 명산. 높이 1,909m.
* 縹氣: 푸르스름한 기운. 靑氣.
* 朱栱: 붉게 칠한 柱頭(기둥머리). 주두는 ‘기둥 머리를 장식하는 넓적하게 네모진 나무’로 대접받침이라고도 함.
* 渤海: 중국 요동반도와 산동 반도 사이의 바다.
* 畫櫳: 단청한 난간.
* 玉界: 하늘. 天空.
* 仙風: 신선 바람. 신선 같은 풍채. 仙風道骨.
* 瓊宮: 옥으로 꾸민 아름다운 궁전. 달(月)의 이칭. 瓊宮瑤臺.
* 悠悠: 썩 먼 모양.
1567년(명종22) 遠接使 종사관으로 관서에 나갔을 때 안주의 백상루에 올라 그 경치를 읊은 두 수 중 둘째 수이다.
백상루는 안주읍성 서북쪽에 있는 장수의 지휘대인 將臺이다.
관서팔경의 하나이고 청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어 백 가지 절경을 볼 수 있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이 백상루는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누정이었다.
수련에서 백상루의 멋진 자태가 귀신의 조화인가 하며 놀라고,
함련에서 주변의 풍광으로 보며 묘향산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누대의 두공에 어려 있고, 발해만의 祥光이 난간에 비치는 풍경이다.
경련은 백상루에서 본 달과 하늘의 모습이다.
밝은 달이 앞섶을 헤치며 하늘을 열어 보이는 듯, 맑은 바람이 백옥경의 달까지 살랑살랑 부는 듯하다 하였다.
미련은 그렇게 신선의 경계에 취해 있다가 현실세계로 돌아온 모습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아득한 옛일을 물어보려 해도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어느덧 가랑비 속에 뱃노래만 아스라히 들리고 있다.
시는 東韻으로, 二四不同, 二六對와 反法, 粘法 등이 잘 이루어졌다.
狎鷗亭압구정-奇大升(기대승) 압구정
荒榛蔓草蔽高丘(황진만초폐고구) 거친 숲 뒤엉킨 풀이 높은 언덕 뒤덮었으나
緬想當時辦勝遊(면상당시판승유) 화통하게 놀던 그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人事百年能幾許(인사백년능기허) 백 년 넘게 사는 사람 그 몇이던가
滿江煙景入搔頭(만강연경입소두) 어지러운 강 풍경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요월정운(邀月亭韻)-기대승(奇大升)
조선 중기 퇴계와 서신으로 우정을 쌓았다는 성리학의 거봉 기대승(奇大升, 1527~1772) 7언율시 한시
夫君才氣合乘車(부군재기합승차) 그대의 재주와 기운은 수레를 탈만한데
遁跡江湖放浪餘(둔적강호방랑여) 강호에 숨어 방랑하여 자취를 감추었네
載酒引船風色嬾(재주인선풍색란) 술을 싣고 배를 타니 풍색은 조용하고
藝花扶杖月華虛(예화부장월화허) 꽃 심고 지팡이 짚으니 달빛도 밝네
經心舊學惟心也(경심구학유심야) 옛 학문에 마음을 다스리니 오직 한 마음
脫手新詩更賁如(탈수신시경분여) 새로운 시에 손을 대니 다시 흥겨워지네.
雨露九天應下漏(우로구천응하루) 하늘의 비와 이슬은 당연히 내려오려니
直長威望壓周廬(직장위망압주려) 직장의 위엄과 명망이 주려를 압도하리라
요월정(邀月亭)은 전남 장성군 황룡강 언덕의 정자로 강건너 월봉산 옥녀봉과 절벽아래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에 세워진 정자로 달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기대승의 호는 고봉(高峰)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으로 8년간 서신을 주고 받으며 퇴계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고봉은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제시하였다.
정자에 올라 그림 같은 황룡강을 바라보며 소회를 시로 표현한 것으로 성리학을 오려 궁구한 학자로서의 고심한 흔적이 녹아여 있다. 직장(直長)과 주려(周廬)는 벼슬의 하나로 생각된다.
장성군에 하서 김인후 위패를 모신 필암서원은 간적이 있는데, 이번을 기회로 요월정 방문도 계획 해야 겠다.
33 천산둔(天山遯)에 나오는 돼지가 뛰어다니는 둔(遯)과 이 수련 두번째 둔(遁) 모두 숨는다는 뜻이나, 조금의 차이가 있다.
경련 두번째 경분여(更賁如)은 다시 이같이 즐거워지네로 주역 22번 산화비(山火賁)에서는 꾸민다(발을, 수염을 등)는 말이다.
偶題(우제)-奇大升(기대승 1527 ~ 1572):
庭前小草挾風薰(정전소초협풍훈) 뜰 앞 작은 풀에 훈훈한 바람 일렁이는데
殘夢初醒午酒醺(잔몽초성오주훈) 어렴풋이 꿈에서 깨어나 낮술에 취하였네
深院落花春晝永(심원락화춘주영) 안뜰에는 꽃 지고 봄날은 긴데
隔簾蜂蝶晩紛紛(격렴봉접만분분) 주렴 너머 벌 나비 뒤섞이어 늦도록 날고 있네
>殘夢(잔몽) : 잠을 깨고도 어렴풋이 꾸는 꿈의 세계
>紛紛(분분) : 흩날리는 모양이 뒤섞이어 어수선함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로 유명하다
圍 碁(위기) - 고봉 기대승
空堂閑坐且圍碁 빈방에 한가로이 앉아 바둑을 에우면서
撥得幽懷自一奇 그윽한 회포푸니 하나의 기이로다
蜩甲形骸眞欲幻 허물벗는 매미처럼 탈바꿈하려 하고
蛛絲意緖政堪遲 줄치는 거미처럼 정감은 느릿느릿
涪翁妙句心能會 부옹의 묘한 글귀 마음으로 이해하고
商皓神機手已知 상산사호의 신기도 손이 벌써 알았노라
戲罷一場成浩笑 한판 놀이마당 끝내고 큰 웃음 지으니
綠楊黃鳥亂啼時 푸른 버들 꾀꼬리 어지럽게 울어대네
次諸公期韻 차제공기운-기대승(奇大升, 1527 ~ 1572)
제공의 “期”자 운을 빌어
獨來湖上佇佳期 (독래호상저가기) 좋은 시절 기다리어 호숫가로 홀로 와서
掃榻逍遙日有爲 (소탑소요일유위) 의자 쓸고 소요하며 매일 하는 일 있다네.
風撚柳條纔欲嚲(풍연류조재욕타) 바람은 버들가지 흔들어 휘 늘어도
雪封梅苔不曾陂(설봉매태불증피) 매화 위 쌓인 눈은 흩날리지 않는구나.
茶烟縷縷當簷散(다연루루당첨산) 차 연기는 올올히 처마 끝 흩어지고
月影微微入戶隨(월영미미입호수) 달그림자 서서히 집으로 들어온다.
高枕細聽寒漏永(고침세청한루영) 베갯머리 들려오는 가늘고 긴 찬 낙숫물 소리
夢回晴旭上簾時(몽회청욱상렴시) 발 위에 해 뜨고서야 꿈에서 깨어났네.
佇 : 우두커니 저, 기다리다.
山中待春(산중대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산중에서 봄을 기다리며
雪後山窓寒更徹(설후산창한갱철) 눈 내린 뒤 산창에는 추위가 더욱 사무치는데,
孤燈照坐夜如何(고등조좌야여하) 외로운 등불 아래 앉아 있으니 이 밤은 어떠한가.
幽香忽到詩人袖(유향홀도시인수) 그윽한 향기 문득 시인의 소매에 닿으니
知是南枝梅已花(지시남지매이화) 남쪽 가지에 매화가 이미 피었음을 알겠노라
주중취기(舟中醉氣)- 기대승(奇大升)
江頭盡醉偶佳期(강두진취우가기) 나루터 만취가 하기 우연한 좋은 기회
杯酒淋灕欲濕衣(배주림리욕습의) 잔술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려하는구나
牽興不須愁日晩(견흥불수수일만) 흥에 겨워 저무는 것도 두렵지 않아
題詩且可餞春歸(제시차가전춘귀) 시를 쓰면서 봄을 전송하여 돌아가련다
風煙冉冉猶相惹(풍연염염유상야) 바람에 날리는 연기 하늘하늘 일어나고
花絮紛紛只自飛(화서분분지자비) 꽃같은 버들솜, 분분히 스스로 날아다닐 뿐
仙夢一宵超物外(선몽일소초물외) 신선의 꿈 하룻밤에 속세를 벗어나
世間塵土莫來圍(세간진토막래위) 세간의 흙먼지이여, 나를 에워싸지 말아라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 선생의 필적
偶吟(우음)-奇大升(기대승) 우연히 읊다
春到山中亦已遲(춘도산중역이지) 산중에 봄이 와 벌써 늦봄이라
桃花初落蕨芽肥(도화초락궐아비) 복숭아꽃 떨어지자 고사리 싹 돋아나네
破 煮酒仍孤酌(파당자주잉고작) 깨진 냄비에 술 데워 혼자서 마시고
醉臥松根無是非(취와송근무시비) 취하여 소나무 밑에 누우니 시빗거리 하나 없네
가을밤에(秋夜)-기대승(奇大升)
가을 절후가 남은 더위 거두니 / 素節收殘暑
서늘한 기운 점점 살에 닿는구나 / 新凉漸逼肥
빗소리 의자에 침범하여 차갑고 / 雨聲侵榻冷
벌레 울음 침상 가에 구슬프다 / 虫響近床悲
정적을 좋아하면 일을 함에 해로우니 / 抱寂妨趨事
한가한 노닒은 후일에 맡기리라 / 偸閑任後時
그윽한 걱정에 어느덧 밤 깊은데 / 幽憂知夜永
턱 고이고 만 가지 사색에 잠겨 드노라 / 萬緖入支頣
청강사(淸江詞)-기대승(奇大升)
맑은 강 끝없이 흐르니 / 淸江流不極
바다에 들어가면 물결을 돌릴 수 없네 / 入海無回波
그대와 함께 놀면서 / 與君共遊戲
이러함을 느끼니 정이 어떠하랴 / 感此情若何
벗을 삼아 금석에 견주어 / 托契比金石
살든 죽든 절차탁마 함께하리 / 生死同琢磨
풍진을 모두 씻어 버리니 / 風塵兩濯澣
심원한 의사 몹시 교교하네 / 皎皎幽意多
서로 지켜 길이 변치 않으면 / 相將永不移
뜬세상은 웅덩이처럼 보이리라 / 浮世看微渦
주중취기(舟中醉氣)-기대승(奇大升)
江頭盡醉偶佳期(강두진취우가기) 나루터에서 우연한 좋은사람 만나 흠뻑취하니
杯酒淋?欲濕衣(배주림리욕습의) 잔술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려하는구나
牽興不須愁日晩(견흥불수수일만) 흥에 겨워 저무는 것도 두렵지 않아
題詩且可餞春歸(제시차가전춘귀) 시를 쓰면서 봄을 전송하여 돌아가련다
風煙??猶相惹(풍연염염유상야) 연기는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하늘 일어나고
花絮紛紛只自飛(화서분분지자비) 꽃같은 버들솜, 이리저리 자연스럽게 날아다닐 뿐
仙夢一宵超物外(선몽일소초물외) 신선의 꿈 하룻밤에 속세를 벗어나
世間塵土莫來圍(세간진토막래위) 세간의 흙먼지이여, 나를 에워싸지 말아라
[浮碧樓(부벽루) / 奇大升(기대승)1527 ~ 1572]
錦繡山前寺(금수산전사) 금수산 앞 영명사
大同江上樓(대동강상루) 대동강 위 부벽루라
江山自古今(강산자고금) 강과 산은 고금이 그대로인데
往事幾春秋(왕사기춘추) 지나간 일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粉壁留佳句(분벽류가구) 장식한 벽에는 좋은 시 남아 있고
蒼崖記勝遊(창애기승유) 이끼 낀 바위에는 즐겁게 논 일 새겨 있네
경舟不迷路(경주부미로) 배도 갈 길을 잃지 않거니
余亦沂淸流(여역기청류) 나도 물처럼 맑게 흘러가리라
山堂寒日(산당한일)-奇大升(기대승) 산당의 추운 날에
一室空山裏(일실공산리) 아무도 없는 외딴 산골집에 있으니
蕭條歲欲窮(소조세욕궁) 쓸쓸히 한 해가 저물어 가네.
凍泉時自汲(동천시자급) 때때로 몸소 얼음 언 샘물 길어오고
枯蘖且相烘(고얼차상홍) 마른 나무등걸로 화롯불을 피운다네
靜憩窓間日(정게창간일) 조용히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쬐고
閒聽谷口風(한청곡구풍) 한가로이 골짝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듣노라
生涯聊可慰(생애료가위) 남은 날들 그럭저럭 지낼만 하거늘
此意與誰同(차의여수동) 이 마음을 누가있어 전할까
讀書(독서)- 기대승(奇大升) 글을 읽으면서
글 읽을 젠 옛사람 마음을 보아야 하니 / 讀書求見古人心
반복하며 깊이 마음을 붙여야 한다 / 反覆唯應着意深
마음에 견득하면 체행해야 하는 법 / 見得心來須體認
언어만 가지고서 찾으려 들지 마소 / 莫將言語費推尋
訪朴大均(방박대균)-奇大升(기대승)
綠江一棹興悠然(록강일도흥유연) 푸른 강에서 노를 저으니 흥이 절로 나는데
來訪煙波老病仙(래방연파로병선) 안개 낀 물결은 병든 신선을 늙게 하네.
人事可堪輸白眼(인사가감수백안) 인간만사를 백안으로 보니 어이 견디며
窮通更莫問蒼天(궁통경막문창천) 궁하고 통하는 것 다시 저 푸른 하늘에 묻지 말아요.
秋林漠漠風吹急(추림막막풍취급) 가을 숲 막막한데 바람은 세차게 몰아치고
寒雨蕭蕭葉殞筵(한우소소엽운연) 찬비 쓸쓸하니 나뭇잎 그 자리에 바로 떨어지네.
相對一尊談笑地(상대일존담소지) 서로 만나 한잔 술로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
黃花何意管流年(황화하의관류년) 누런 국화꽃이 흐르는 세월과 무슨 상관이리
(憶季涵)-기대승(奇大升) 계함을 생각하다
꿈속의 매화가 나무에 가득 새로우니 / 夢裏梅花滿樹新
깨어도 맑은 생각 원빈에 있노라 / 覺來淸想在元賓
인간에 얽매임 있어 옹졸함 못 감추고 / 人間有累難藏拙
사물에 대해 경영 없으니 참을 기르기 족하네 / 物外無營足養眞
늦더위는 한 차례 지나면 감퇴하지만 / 殘暑一回須退減
사문은 천고에도 사라지지 않도다 / 斯文千古未埃塵
어느 때나 서로 만나 좋은 모임 이룰까 / 何時邂逅成佳會
달 대하고 바람 임하니 뜻이 절로 친해지네 / 對月臨風意自親
계함(季涵) :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이다.
원빈(元賓) : 당나라 한유(韓愈)의 제자 이관(李觀)의 자이다.
그는 스승과 막상막하라 불렸는데, 고봉이 자신의 제자인 정철을 그에 대비한 것이다
정효자의 시(鄭孝子詩)-기대승(奇大升)
우뚝한 금성산은 / 巍然錦城山
남쪽 땅 지덕을 누르도다 / 南紀鎭爲雄
이름난 도시 형승을 차지하니 / 名都據形勝
물산만 풍부할 뿐 아니로다 / 物産不獨豐
마을마다 대 물린 나무가 있고 / 村村自喬木
그 아래에는 덕인들의 집이로다 / 下維德人宮
어버이 섬김에 그 효심 지극하니 / 事親極其孝
정성이 하늘과 함께 통하도다 / 精誠與天通
장수를 누림도 끝이 없어 / 耈壽錫無疆
팔십에도 얼굴이 불그레하네 / 八十顔始紅
때로는 시골 노인들과 모이니 / 時從鄕老會
예의가 참으로 공손하였네 / 儀度儘匑匑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니 / 怡怡談故事
백발노인들이 모두 모여든다 / 白叟皆趨躬
태수도 어려워하고 존경하여 / 太守竦且敬
임금에게 아뢰려고 하였다네 / 意欲達黈聰
소자는 아는 것이 없지만 / 小子未有知
높은 행실만 우러를 뿐이로세 / 卓行徒仰嵩
시를 지어 남은 빛 거둬들이니 / 綴詩挹餘光
만고에 높은 바람 드리우리라 / 萬古垂高風
同諸友步月甫山口號(동제우보월보산구호)-奇大升(기대승)
친구들과 함께 보산에서 달빛을 거닐며 소리치다
涼夜與朋好(량야여붕호) 서늘한 밤 친구들과 함께
步月江亭上(보월강정상) 강가 정자에서 달빛을 거닐었네.
夜久風露寒(야구풍로한) 밤이 깊어지자 바람과 이슬 차가워지니
悠然發深想(유연발심상) 나도 몰래 깊은 생각에 잠기었네
〔天上秋期近〕-기대승(奇大升) 하늘은 가을이 가까워지다
뜨거운 햇볕 걷고 석양이 지니 / 悠陽收畏日
명랑하게 높은 하늘 피었구나 / 寥朗展高天
서늘바람 쇄락함을 깨닫고 / 漸覺凉風洒
이내 옥이슬 매달림을 보노라 / 仍看玉露懸
분분하게 늙은 물건 꺾어지고 / 紛紛摧老物
자꾸자꾸 흐르는 해를 전송하네 / 亹亹送流年
풍진 속에 분주하며 / 奔走紅塵裡
부질없이 실솔편을 읊조린다 / 空吟蟋蟀篇
임꺽정
양주(楊州)의 백정인데 힘세고 날래었네.
조정이 혼란하고 백성 살기 어려운데 게다가 흉년이 겹치니 도둑질을 시작했네.
세력이 커지자 구월산에 근거잡고 관아창고 급습하여 백성들에 나눠줬네.
백성도 의적(義賊)이라고 환호하고 동조했네.
경기 황해 휩쓸고 한양에 출몰하니 병력을 동원하여 서림(徐林)을 잡았네.
아내를 구출하려고 전옥서(典獄署) 습격 알아냈다.
관군이 잡으려다 번번이 실패하고 3년 만에 곽순수 홍인성이 그를 잡았네.
조정이 어지러우니 도적이 활개 쳤다.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 이언적은 주희(朱熹)를 사모하고 벼슬하는 틈틈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주리론(主理論)을 심득했네.
삼사(三司)를 거치면서 김안로(金安老)를 반대하고 경주로 쫓겨나서 학문에 정진했네.
전주의 부윤이 되어 송덕비가 세워졌네.
이예형조(吏禮刑曹) 판서 거쳐 좌찬성이 되었으나 윤원형이 을사사화로 사림을 살육하니 추관직(秋官職) 팽개쳐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네.
양재역 벽서사건 강계에 유배되고 만년(晩年)의 학문연구는 구인록(求仁錄)에 묶였네.
후배인 이황(李滉)에 와서 주리론(主理論)이 집대성됐다.
이황(李滉)
진사 이식(李埴)의 후처 박씨 막내로 태어나서 두 살에 부친 잃고 모친이 훈육했네.
여섯 살 천자문 읽고 공손히 묵송(默誦)했네.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논어(論語)를 배웠는데 무릇 일의 옳은 것을 리(理)라고 합니까?
조용히 벽을 향하여 생각을 정리했네.
주역을 궁구하다 침식(寢食) 잊고 병이 나서 일생 동안 몸이 여위는 병으로 고생했다.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고 문과 별시 2등 했네.
여러 벼슬 거쳤으나 쉰 세 번 사퇴하며 성학십도(聖學十圖) 바치고 도산서원에서 정진했네.
마침내 이치와 기운에서 이치를 중요시했네.
선조(宣祖)
명종(明宗)이 후사(後嗣) 없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중종(中宗) 후궁 창빈 안씨 막내의 막내라.
학문에 정진하고서 사림 명사 등용했네.
조광조 신원(伸寃)하고 왕도정치 신봉(信奉)했으나 선비들은 동서로 갈려 당파싸움 시작했네.
동인은 영남의 주리론(主理論) 서인은 기호(畿湖) 주기(主氣)라.
동인이 분파하여 남인 북인 갈리고 왜국의 전국여파(戰國餘波)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나니 임금은 왕성을 버리고 의주로 달아났네.
명나라 원병오고 의병이 봉기(蜂起)하며 이순신(李舜臣) 활약으로 7년 전쟁 이겨냈네.
뒤늦게 영창(永昌)을 낳아 광해군(光海君)을 어렵게 했네.
이이(李珥)
이원수(李元秀)와 신사임당(申師任堂) 셋째로 태어나서 신동으로 이름나서 구도장원(九度壯元) 하였네.
어머니 열여섯 살에 죽어 금강산에 들었네.
여러 벼슬 거쳤으나 성혼(成渾)과 이기문답(理氣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바치고 석담(石潭)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
정연한 논리 잡아서 이기론(理氣論)을 펼쳤네.
동서분당 조정에서 분당을 막으려고 만언봉사(萬言封事) 시무육조(時務六條) 10만 양병 주장하고 조정(調整)이 여의치 않아 석담으로 물러갔네.
이기이원(理氣二元) 이어받고 주기론(主氣論)도 참고하여 기발이승(氣發理乘) 주장하여 독창성을 드러냈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 펼쳤네.
이순신(李舜臣)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요 불멸(不滅)의 인걸(人傑)이라.
스물여덟 무과시험 낙마(落馬)하여 떨어졌고 4년 후 급제하여서 변방무사로 돌았네.
정읍현감 되었을 때 유성룡(柳成龍)이 추천하여 전라수사 승진하여 전란에 대비했네.
마침내 왜란이 일어나자 연전연승 시작했다.
한산대첩 부산싸움 제해권을 장악하고 삼도수군(三道水軍) 통제사(統制使)로 한산도에 웅거(雄據)했네.
그러나 원균(元均)의 시기로 백의종군(白衣從軍) 하였네.
원균이 패전하자 통제사로 복귀하여 열두 척 병선(兵船)으로 명량대첩 이루었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 바쳐 대승했네.
곽재우(郭再祐)
조식(曹植)의 외손자로 별시(別試) 2등 취소되니 남강 가에 정자 짓고 은거하려 하였네.
왜란에 관군이 패하자 의병 모아 일어섰네.
의령의 정암진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매복(埋伏)과 유격(遊擊)으로 진주 싸움 도왔네.
천강(天降)한 홍의장군(紅衣將軍)이 벼슬 받아 축성(築城)했네.
경상좌도(慶尙左道) 방어사(防禦使)로 가등군(加藤軍)과 싸웠고 계모상과 병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니 사헌부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됐네.
조정과 불화하여 남인(南人)이라 지탄되니 귀향하여 정자 짓고 벽곡(辟穀)하여 솔잎 먹어 세상의 근심을 잊고 신선되려 했었네.
정철(鄭澈)
큰누나는 인종(仁宗) 귀인(貴人) 작은누나 계림군(桂林君) 부인 궁중에 드나들며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지.
계림군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죽고 가족은 흩어졌네.
아버지 풀려난 후에 담양 선영(先塋) 이주하고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과 기대승(奇大升)을 사귀었네.
무등산 활개 밑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별시 문과 장원하여 사헌지평(司憲持平) 되었는데 명종의 사촌동생 살인죄로 죽였고 서인(西人)의 맹장(猛將)이 되어 폭풍같이 살았네.
조정에서 내쳐지자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지었고 강원감사 제수되자 관동별곡(關東別曲) 훈민가(訓民歌)라.
정여립(鄭汝立) 추국(推鞫)한 뒤에 우의정에 올랐네.
광해군(光海君)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 소생인데 임진왜란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 중 분조(分朝)를 짊어지고 명망을 얻었네.
영창대군(永昌大君) 났으나 선조(宣祖) 죽자 즉위하여 전후 복구 힘쓰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네.
만주에 후금(後金)이 일어나자 강홍립(姜弘立)시켜 투항했네.
영창대군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임해군과 영창대군 형제를 제거했다.
모후(母后)를 유폐시키고 인륜을 져버렸네.
대북파(大北派) 득세하여 서인들 몰락하고 폐모론(廢母論) 대두(擡頭)하여 명신(名臣)들을 내쳤네.
궁궐을 중건(重建)했으나 반정으로 쫓겨났네.
허균(許筠)
허엽(許曄)의 후취부인 박씨의 막내인데 허성(許筬)은 이복형이요 동복(同腹)은 허봉(許篈) 초희(楚姬). 문장가(文章家) 형제들인데 이달(李達)에게 시 배웠네.
문과중시(文科重試) 장원하고 황해도사 되었지만 기생을 끌어들여 반년 만에 파직이라.
불교를 좋아하다가 수안군수 쫓겨났네.
명나라 사신에게 누나의 시 보여주고 삼척부사 되었으나 염불참선 파직됐다.
서얼들 친구로 삼아 공주목사 체직이라.
계생과 교유하고 조카와 사위 부정합격 계축옥사 일어나자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했네.
유재론(遺才論) 호민(豪民) 이끌어 홍길동이 되려했네.
허준(許浚)
용천부사 허론(許碖)의 아들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내의원에 봉직하며 어의(御醫) 명성 얻었네.
마침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여 의성(醫聖)이 됐네.
왕자의 두창(痘瘡) 고쳐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고 왕명으로 어의들과 동의보감 편집했네.
의학을 총망라하여 임상의학 백과전서라.
내장방서(內臟方書) 오백 권과 임상처방 종합하여 내외잡병(內外雜病) 탕약 침구 출전과 약방 나열 자신의 경험을 더해 실용화에 힘썼네.
증상을 중심으로 고금의서(古今醫書) 열람하고 향약집성(鄕藥集成) 의방유취(醫方類聚) 중국의서 망라했네.
중국과 왜국에 전해 임상의학 고전이라.
출처 네이버 등에서 인용
[옮긴 글]
조선 성리학자 기대승(奇大升)
기대승(奇大升.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선조(宣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ㆍ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본관 행주(行州). 전남 나주(羅州) 출생. 진(進)의 아들.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宣祖) 때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병을 얻어 귀향(歸鄕)하다가 고부(古阜)에서 객사(客死)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능히 고금(古今)에 통했고, 이퇴계)(李退溪)와 성리학을 문답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편지 왕복만도 8년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후세 유학자들이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중에는 이퇴계 자신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까지 되었다.
그는 이퇴계ㆍ김인후(金麟厚)에게 문학(問學)하였으나, 이퇴계는 그와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이 있은 후 후배로서 대하지도 않을 만큼 동등한 입장에서 입론(立論)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중기의 문신ㆍ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ㆍ홍문관교리ㆍ사헌부헌납ㆍ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ㆍ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ㆍ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조 1수가 전한다.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 빙월당에서 북쪽으로 약 200미터 가파른 산 중턱에 있다.
빙월당(氷月堂)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강산동 452.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기대승(奇大升)을 모시는 월봉서원(月峯書院)의 강당이다.
월봉서원은 기대승을 주벽으로 박상(朴祥)⋅박순(朴淳)⋅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등 조선조의 학자와 명신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원래 월봉서원은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기대승 사후 7년만인 1578년(선조 11)에 광산구 신용동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이후 광산구 산월동으로 이건하였으며, 1655년(효종 6년)에 사액되어 사우⋅동재(明誠齋)⋅서재(存省齋)⋅강당(忠儒堂)이 갖추어졌다.
월봉서원의 액호는 이산리(李山裏), 나머지 편액은 송준길(宋浚吉)이 썼던 것인데 현판들은 현재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월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41년 현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짓고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외삼문 등의 건물을 건립하였다.
현재의 빙월당은 백우산 기슭 광곡마을의 원 종가터로 높다란 대지 위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경관이 매우 좋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통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월설월(氷月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장판각은 빙월당 우측에 2동의 맛배집인데, 이곳에 고봉집·논사륙·왕복서·이기왕복서 등의 목판 474매가 보존되어 있다.
저서<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고봉 기대승과 그 유적들
고봉(1527-1572)이 살았던 16세기는 한국의 문예부흥기였다.
당대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 면앙 송순 등을 비롯해 조선의 성리학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고봉의 학문적 성과는, 그의 스승이자 그와 8년간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토론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던 퇴계 이황의 말에 나타난다.
퇴계는 당시 선조에게 대답하는 말 가운데 “고봉의 식견이 넓고 월등해 통유(通儒·유학에 통달하다)라고 할만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고봉은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는데, 그의 업적 가운데 31살에 내놓은 `주자문록’은 당시 학문계에 충격을 줬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는 생전에 700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핵심을 주자대전 120권에 담았다.
하지만 워낙 어렵고 방대한 양이라 당시 조선학자들 가운데 다 읽은 이가 없었다.
그런데 고봉이 해설서까지 냈으니. 하지만 고봉의 학문은 그동안 학계나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퇴계학이나 율곡학 등이 후학들의 연구에 의해 풍성해진 것과 대비된다.
46세에 떠난 고봉에겐 제자들이 없었다.
더욱이 일제 식민사관이 해방 이후까지 이어져오면서 그의 사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게 고봉학술원 강기욱 씨의 설명이다.
고봉은 32세에 문과 을과에 장원을 하며 본격 정계에 진출하는데, 마지막엔 성균관 최고위직인 대사성까지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은 오늘날 국립 서울대 총장에 비견되지만, 당시 조선이 유교의 나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고위직으로 봄이 옳다.
광산구 임곡동 너브실 일대는 고봉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면서, 그의 유적이 집중된 곳이다.
고봉의 생가는 너브실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지금의 신룡동이지만, 고봉의 묘지와 수양하며 공부했다는 귀전암 터, 그의 사후 아들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때 머물렀다는 칠송정이 있고 마을 맨 안쪽에 월봉서원이 있다.
월봉서원의 원래 자리는 지금의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에 있었다.
효종 5년(1654년)에 유림들의 상소로 사액(임금이 편액을 내림)됐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었다.
이후 다시 세워졌지만,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폐쇄됐다.
이후 1941년 지금의 위치에 후손들이 `빙월당’이라는 제실을 지었는데, `빙월당’은 정조가 고봉의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 같다고 한데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그 후 1981년 현재 자리에 월봉서원을 복원하면서 빙월당은 서원의 강당이 됐다.
또한 마을 입구엔 고봉 선생의 6대 손인 기언복이 숙종 때 터를 잡은 이래 300년 역사와 학풍을 이어온 애일당 겸 고봉학술원이 자리하고 있다.
- [광주드림](2008. 8. 21) -
☞시조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가마는
백년(百年) 못하야셔 무덤우희 밧츨 가니
하믈며 녀나믄 장부(丈夫)야 닐러 무슴 하리오.
[출처] 縱筆(종필)-붓 가는 대로 쓰다-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淸風動萬松(청풍동만송) 맑은 바람에 온 소나무는 물결치고白雲滿幽谷(백운만유곡)/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시모음|작성자 kbs4677
縱筆(종필)-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조선 붓 가는 대로 쓰다
淸風動萬松(청풍동만송) 맑은 바람에 온 소나무는 물결치고
白雲滿幽谷(백운만유곡) 흰 구름은 그윽한 골짜기에 가득하네
山人獨夜步(산인독야보) 산에 사는 사람 혼자 밤에 걷노라니
溪水鳴寒玉(계수명한옥) 개울은 맑고 차가운 옥 소리를 내네
高峯先生集 (고봉선생집)
奇大升 [1527년(중종 22) ~ 1572년(선조 5)]
전라남도 나주 출신. 본관은 幸州. 자는 明彦, 호는 高峯 · 存齋.
1549년(명종 4) 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奇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 해 2월 검토관이 되어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 ·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 해 사헌부지평 · 홍문관교리 · 사헌부헌납 · 議政府檢詳 · 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遠接使의 從事官이 되었고, 그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서 典翰이 되어서는 趙光祖 · 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侍讀官을 겸직했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 ·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종계변무의 주문을 지은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德原君에 봉해졌다.
이황과 12년 동안에 이루어진 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情이다.”라고 하여 主情說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한 理弱氣强說을 주장하여 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主理說과 맞섰다.
그는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理財養民論 · 崇禮論 · 言路通塞論 등이다.
그는 學行이 겸비된 士儒로서 학문에서는 四七理氣說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왕에게 아뢰었다.
제자로는 鄭雲龍 · 高敬命 · 崔慶會 · 崔時望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논사록』 · 『왕복서(往復書)』 · 『이기왕복서』 · 『朱子文錄』 · 『高峯集』 등이 있다.
광주의 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文憲.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시모음
夏景(하경)-기대승(奇大升) : 1527~1572 朝鮮 여름 풍경
蒲席筠床隨意臥 (포석균상수의와) 대 평상에 자리 깔고 내 멋대로 누웠더니
虛鈴疎箔度微風 (허령소박도미풍) 창문 성긴 주렴 사이로 실바람이 솔솔
團圓更有生凉手 (단원갱유생량수) 부채질을 더하니 바람 더욱 시원해서
頓覺炎蒸一夜空 (돈각염증일야공) 푹푹 찌는 더위도 오늘밤엔 사라졌네.
次百祥樓韻 (차백상루운) -奇大升 백상루 시의 운에 따라
別題 百祥樓
城北危樓鬼效功 (성북위루귀효공) 성 북쪽의 높은 누각 귀신이 솜씨 부렸나?
翶翔雲際壓晴空 (고상운제압청공) 구름으로 날아올라 맑은 하늘 압도하네. * 날 고
香山縹氣飛朱栱 (향산표기비주공) 묘향산 고운 기운 두공에 날아오고 * 옥색비단 표
渤海祥光隱畫櫳 (발해상광은화롱) 발해의 서광은 단청 난간에 은은하다. * 난간 롱
朗月照襟開玉界 (낭월조금개옥계) 밝은 달 가슴 비추며 하늘을 여니
仙風吹夢落瓊宮 (선풍취몽낙경궁) 선풍은 꿈결에 불어 저 달에 닿는구나.
悠悠往事憑誰問 (유유왕사빙수문) 아득한 옛 일은 누구에게 물어보나?
一曲漁歌細雨中 (일곡어가세우중) 뱃노래 한 가락 보슬비 속에 들리네.
* 百祥樓: 평안남도 安州郡에 있는 누각. 청천강 가에 있으며 선조 때 李視가 가사 ‘백상루별곡’을 지었음. 關西第一樓로 불림.
* 危樓: 매우 높은 누각. 一作 樓高.
* 鬼效功: 귀신이 공을 들이다. 一作 鬼效工.
* 翶翔: 하늘 높이 빙빙 날아다님. 하는 일없이 놀며 돌아다님.
* 晴空: 구름이 없이 맑은 하늘.
* 香山: 妙香山. 평안북도 寧邊郡에 있는 명산. 높이 1,909m.
* 縹氣: 푸르스름한 기운. 靑氣.
* 朱栱: 붉게 칠한 柱頭(기둥머리). 주두는 ‘기둥 머리를 장식하는 넓적하게 네모진 나무’로 대접받침이라고도 함.
* 渤海: 중국 요동반도와 산동 반도 사이의 바다.
* 畫櫳: 단청한 난간.
* 玉界: 하늘. 天空.
* 仙風: 신선 바람. 신선 같은 풍채. 仙風道骨.
* 瓊宮: 옥으로 꾸민 아름다운 궁전. 달(月)의 이칭. 瓊宮瑤臺.
* 悠悠: 썩 먼 모양.
1567년(명종22) 遠接使 종사관으로 관서에 나갔을 때 안주의 백상루에 올라 그 경치를 읊은 두 수 중 둘째 수이다.
백상루는 안주읍성 서북쪽에 있는 장수의 지휘대인 將臺이다.
관서팔경의 하나이고 청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어 백 가지 절경을 볼 수 있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이 백상루는 진주의 촉석루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 누정이었다.
수련에서 백상루의 멋진 자태가 귀신의 조화인가 하며 놀라고,
함련에서 주변의 풍광으로 보며 묘향산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누대의 두공에 어려 있고, 발해만의 祥光이 난간에 비치는 풍경이다.
경련은 백상루에서 본 달과 하늘의 모습이다.
밝은 달이 앞섶을 헤치며 하늘을 열어 보이는 듯, 맑은 바람이 백옥경의 달까지 살랑살랑 부는 듯하다 하였다.
미련은 그렇게 신선의 경계에 취해 있다가 현실세계로 돌아온 모습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아득한 옛일을 물어보려 해도 주변에 아무도 없고, 어느덧 가랑비 속에 뱃노래만 아스라히 들리고 있다.
시는 東韻으로, 二四不同, 二六對와 反法, 粘法 등이 잘 이루어졌다.
狎鷗亭압구정-奇大升(기대승) 압구정
荒榛蔓草蔽高丘(황진만초폐고구) 거친 숲 뒤엉킨 풀이 높은 언덕 뒤덮었으나
緬想當時辦勝遊(면상당시판승유) 화통하게 놀던 그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人事百年能幾許(인사백년능기허) 백 년 넘게 사는 사람 그 몇이던가
滿江煙景入搔頭(만강연경입소두) 어지러운 강 풍경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요월정운(邀月亭韻)-기대승(奇大升)
조선 중기 퇴계와 서신으로 우정을 쌓았다는 성리학의 거봉 기대승(奇大升, 1527~1772) 7언율시 한시
夫君才氣合乘車(부군재기합승차) 그대의 재주와 기운은 수레를 탈만한데
遁跡江湖放浪餘(둔적강호방랑여) 강호에 숨어 방랑하여 자취를 감추었네
載酒引船風色嬾(재주인선풍색란) 술을 싣고 배를 타니 풍색은 조용하고
藝花扶杖月華虛(예화부장월화허) 꽃 심고 지팡이 짚으니 달빛도 밝네
經心舊學惟心也(경심구학유심야) 옛 학문에 마음을 다스리니 오직 한 마음
脫手新詩更賁如(탈수신시경분여) 새로운 시에 손을 대니 다시 흥겨워지네.
雨露九天應下漏(우로구천응하루) 하늘의 비와 이슬은 당연히 내려오려니
直長威望壓周廬(직장위망압주려) 직장의 위엄과 명망이 주려를 압도하리라
요월정(邀月亭)은 전남 장성군 황룡강 언덕의 정자로 강건너 월봉산 옥녀봉과 절벽아래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에 세워진 정자로 달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기대승의 호는 고봉(高峰)이며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 논쟁으로 8년간 서신을 주고 받으며 퇴계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고봉은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제시하였다.
정자에 올라 그림 같은 황룡강을 바라보며 소회를 시로 표현한 것으로 성리학을 오려 궁구한 학자로서의 고심한 흔적이 녹아여 있다. 직장(直長)과 주려(周廬)는 벼슬의 하나로 생각된다.
장성군에 하서 김인후 위패를 모신 필암서원은 간적이 있는데, 이번을 기회로 요월정 방문도 계획 해야 겠다.
33 천산둔(天山遯)에 나오는 돼지가 뛰어다니는 둔(遯)과 이 수련 두번째 둔(遁) 모두 숨는다는 뜻이나, 조금의 차이가 있다.
경련 두번째 경분여(更賁如)은 다시 이같이 즐거워지네로 주역 22번 산화비(山火賁)에서는 꾸민다(발을, 수염을 등)는 말이다.
偶題(우제)-奇大升(기대승 1527 ~ 1572):
庭前小草挾風薰(정전소초협풍훈) 뜰 앞 작은 풀에 훈훈한 바람 일렁이는데
殘夢初醒午酒醺(잔몽초성오주훈) 어렴풋이 꿈에서 깨어나 낮술에 취하였네
深院落花春晝永(심원락화춘주영) 안뜰에는 꽃 지고 봄날은 긴데
隔簾蜂蝶晩紛紛(격렴봉접만분분) 주렴 너머 벌 나비 뒤섞이어 늦도록 날고 있네
>殘夢(잔몽) : 잠을 깨고도 어렴풋이 꾸는 꿈의 세계
>紛紛(분분) : 흩날리는 모양이 뒤섞이어 어수선함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로 유명하다
圍 碁(위기) - 고봉 기대승
空堂閑坐且圍碁 빈방에 한가로이 앉아 바둑을 에우면서
撥得幽懷自一奇 그윽한 회포푸니 하나의 기이로다
蜩甲形骸眞欲幻 허물벗는 매미처럼 탈바꿈하려 하고
蛛絲意緖政堪遲 줄치는 거미처럼 정감은 느릿느릿
涪翁妙句心能會 부옹의 묘한 글귀 마음으로 이해하고
商皓神機手已知 상산사호의 신기도 손이 벌써 알았노라
戲罷一場成浩笑 한판 놀이마당 끝내고 큰 웃음 지으니
綠楊黃鳥亂啼時 푸른 버들 꾀꼬리 어지럽게 울어대네
次諸公期韻 차제공기운-기대승(奇大升, 1527 ~ 1572)
제공의 “期”자 운을 빌어
獨來湖上佇佳期 (독래호상저가기) 좋은 시절 기다리어 호숫가로 홀로 와서
掃榻逍遙日有爲 (소탑소요일유위) 의자 쓸고 소요하며 매일 하는 일 있다네.
風撚柳條纔欲嚲(풍연류조재욕타) 바람은 버들가지 흔들어 휘 늘어도
雪封梅苔不曾陂(설봉매태불증피) 매화 위 쌓인 눈은 흩날리지 않는구나.
茶烟縷縷當簷散(다연루루당첨산) 차 연기는 올올히 처마 끝 흩어지고
月影微微入戶隨(월영미미입호수) 달그림자 서서히 집으로 들어온다.
高枕細聽寒漏永(고침세청한루영) 베갯머리 들려오는 가늘고 긴 찬 낙숫물 소리
夢回晴旭上簾時(몽회청욱상렴시) 발 위에 해 뜨고서야 꿈에서 깨어났네.
佇 : 우두커니 저, 기다리다.
山中待春(산중대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산중에서 봄을 기다리며
雪後山窓寒更徹(설후산창한갱철) 눈 내린 뒤 산창에는 추위가 더욱 사무치는데,
孤燈照坐夜如何(고등조좌야여하) 외로운 등불 아래 앉아 있으니 이 밤은 어떠한가.
幽香忽到詩人袖(유향홀도시인수) 그윽한 향기 문득 시인의 소매에 닿으니
知是南枝梅已花(지시남지매이화) 남쪽 가지에 매화가 이미 피었음을 알겠노라
주중취기(舟中醉氣)- 기대승(奇大升)
江頭盡醉偶佳期(강두진취우가기) 나루터 만취가 하기 우연한 좋은 기회
杯酒淋灕欲濕衣(배주림리욕습의) 잔술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려하는구나
牽興不須愁日晩(견흥불수수일만) 흥에 겨워 저무는 것도 두렵지 않아
題詩且可餞春歸(제시차가전춘귀) 시를 쓰면서 봄을 전송하여 돌아가련다
風煙冉冉猶相惹(풍연염염유상야) 바람에 날리는 연기 하늘하늘 일어나고
花絮紛紛只自飛(화서분분지자비) 꽃같은 버들솜, 분분히 스스로 날아다닐 뿐
仙夢一宵超物外(선몽일소초물외) 신선의 꿈 하룻밤에 속세를 벗어나
世間塵土莫來圍(세간진토막래위) 세간의 흙먼지이여, 나를 에워싸지 말아라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1572) 선생의 필적
偶吟(우음)-奇大升(기대승) 우연히 읊다
春到山中亦已遲(춘도산중역이지) 산중에 봄이 와 벌써 늦봄이라
桃花初落蕨芽肥(도화초락궐아비) 복숭아꽃 떨어지자 고사리 싹 돋아나네
破 煮酒仍孤酌(파당자주잉고작) 깨진 냄비에 술 데워 혼자서 마시고
醉臥松根無是非(취와송근무시비) 취하여 소나무 밑에 누우니 시빗거리 하나 없네
가을밤에(秋夜)-기대승(奇大升)
가을 절후가 남은 더위 거두니 / 素節收殘暑
서늘한 기운 점점 살에 닿는구나 / 新凉漸逼肥
빗소리 의자에 침범하여 차갑고 / 雨聲侵榻冷
벌레 울음 침상 가에 구슬프다 / 虫響近床悲
정적을 좋아하면 일을 함에 해로우니 / 抱寂妨趨事
한가한 노닒은 후일에 맡기리라 / 偸閑任後時
그윽한 걱정에 어느덧 밤 깊은데 / 幽憂知夜永
턱 고이고 만 가지 사색에 잠겨 드노라 / 萬緖入支頣
청강사(淸江詞)-기대승(奇大升)
맑은 강 끝없이 흐르니 / 淸江流不極
바다에 들어가면 물결을 돌릴 수 없네 / 入海無回波
그대와 함께 놀면서 / 與君共遊戲
이러함을 느끼니 정이 어떠하랴 / 感此情若何
벗을 삼아 금석에 견주어 / 托契比金石
살든 죽든 절차탁마 함께하리 / 生死同琢磨
풍진을 모두 씻어 버리니 / 風塵兩濯澣
심원한 의사 몹시 교교하네 / 皎皎幽意多
서로 지켜 길이 변치 않으면 / 相將永不移
뜬세상은 웅덩이처럼 보이리라 / 浮世看微渦
주중취기(舟中醉氣)-기대승(奇大升)
江頭盡醉偶佳期(강두진취우가기) 나루터에서 우연한 좋은사람 만나 흠뻑취하니
杯酒淋?欲濕衣(배주림리욕습의) 잔술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려하는구나
牽興不須愁日晩(견흥불수수일만) 흥에 겨워 저무는 것도 두렵지 않아
題詩且可餞春歸(제시차가전춘귀) 시를 쓰면서 봄을 전송하여 돌아가련다
風煙??猶相惹(풍연염염유상야) 연기는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하늘 일어나고
花絮紛紛只自飛(화서분분지자비) 꽃같은 버들솜, 이리저리 자연스럽게 날아다닐 뿐
仙夢一宵超物外(선몽일소초물외) 신선의 꿈 하룻밤에 속세를 벗어나
世間塵土莫來圍(세간진토막래위) 세간의 흙먼지이여, 나를 에워싸지 말아라
[浮碧樓(부벽루) / 奇大升(기대승)1527 ~ 1572]
錦繡山前寺(금수산전사) 금수산 앞 영명사
大同江上樓(대동강상루) 대동강 위 부벽루라
江山自古今(강산자고금) 강과 산은 고금이 그대로인데
往事幾春秋(왕사기춘추) 지나간 일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粉壁留佳句(분벽류가구) 장식한 벽에는 좋은 시 남아 있고
蒼崖記勝遊(창애기승유) 이끼 낀 바위에는 즐겁게 논 일 새겨 있네
경舟不迷路(경주부미로) 배도 갈 길을 잃지 않거니
余亦沂淸流(여역기청류) 나도 물처럼 맑게 흘러가리라
山堂寒日(산당한일)-奇大升(기대승) 산당의 추운 날에
一室空山裏(일실공산리) 아무도 없는 외딴 산골집에 있으니
蕭條歲欲窮(소조세욕궁) 쓸쓸히 한 해가 저물어 가네.
凍泉時自汲(동천시자급) 때때로 몸소 얼음 언 샘물 길어오고
枯蘖且相烘(고얼차상홍) 마른 나무등걸로 화롯불을 피운다네
靜憩窓間日(정게창간일) 조용히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쬐고
閒聽谷口風(한청곡구풍) 한가로이 골짝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듣노라
生涯聊可慰(생애료가위) 남은 날들 그럭저럭 지낼만 하거늘
此意與誰同(차의여수동) 이 마음을 누가있어 전할까
讀書(독서)- 기대승(奇大升) 글을 읽으면서
글 읽을 젠 옛사람 마음을 보아야 하니 / 讀書求見古人心
반복하며 깊이 마음을 붙여야 한다 / 反覆唯應着意深
마음에 견득하면 체행해야 하는 법 / 見得心來須體認
언어만 가지고서 찾으려 들지 마소 / 莫將言語費推尋
訪朴大均(방박대균)-奇大升(기대승)
綠江一棹興悠然(록강일도흥유연) 푸른 강에서 노를 저으니 흥이 절로 나는데
來訪煙波老病仙(래방연파로병선) 안개 낀 물결은 병든 신선을 늙게 하네.
人事可堪輸白眼(인사가감수백안) 인간만사를 백안으로 보니 어이 견디며
窮通更莫問蒼天(궁통경막문창천) 궁하고 통하는 것 다시 저 푸른 하늘에 묻지 말아요.
秋林漠漠風吹急(추림막막풍취급) 가을 숲 막막한데 바람은 세차게 몰아치고
寒雨蕭蕭葉殞筵(한우소소엽운연) 찬비 쓸쓸하니 나뭇잎 그 자리에 바로 떨어지네.
相對一尊談笑地(상대일존담소지) 서로 만나 한잔 술로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
黃花何意管流年(황화하의관류년) 누런 국화꽃이 흐르는 세월과 무슨 상관이리
(憶季涵)-기대승(奇大升) 계함을 생각하다
꿈속의 매화가 나무에 가득 새로우니 / 夢裏梅花滿樹新
깨어도 맑은 생각 원빈에 있노라 / 覺來淸想在元賓
인간에 얽매임 있어 옹졸함 못 감추고 / 人間有累難藏拙
사물에 대해 경영 없으니 참을 기르기 족하네 / 物外無營足養眞
늦더위는 한 차례 지나면 감퇴하지만 / 殘暑一回須退減
사문은 천고에도 사라지지 않도다 / 斯文千古未埃塵
어느 때나 서로 만나 좋은 모임 이룰까 / 何時邂逅成佳會
달 대하고 바람 임하니 뜻이 절로 친해지네 / 對月臨風意自親
계함(季涵) :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자이다.
원빈(元賓) : 당나라 한유(韓愈)의 제자 이관(李觀)의 자이다.
그는 스승과 막상막하라 불렸는데, 고봉이 자신의 제자인 정철을 그에 대비한 것이다
정효자의 시(鄭孝子詩)-기대승(奇大升)
우뚝한 금성산은 / 巍然錦城山
남쪽 땅 지덕을 누르도다 / 南紀鎭爲雄
이름난 도시 형승을 차지하니 / 名都據形勝
물산만 풍부할 뿐 아니로다 / 物産不獨豐
마을마다 대 물린 나무가 있고 / 村村自喬木
그 아래에는 덕인들의 집이로다 / 下維德人宮
어버이 섬김에 그 효심 지극하니 / 事親極其孝
정성이 하늘과 함께 통하도다 / 精誠與天通
장수를 누림도 끝이 없어 / 耈壽錫無疆
팔십에도 얼굴이 불그레하네 / 八十顔始紅
때로는 시골 노인들과 모이니 / 時從鄕老會
예의가 참으로 공손하였네 / 儀度儘匑匑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니 / 怡怡談故事
백발노인들이 모두 모여든다 / 白叟皆趨躬
태수도 어려워하고 존경하여 / 太守竦且敬
임금에게 아뢰려고 하였다네 / 意欲達黈聰
소자는 아는 것이 없지만 / 小子未有知
높은 행실만 우러를 뿐이로세 / 卓行徒仰嵩
시를 지어 남은 빛 거둬들이니 / 綴詩挹餘光
만고에 높은 바람 드리우리라 / 萬古垂高風
同諸友步月甫山口號(동제우보월보산구호)-奇大升(기대승)
친구들과 함께 보산에서 달빛을 거닐며 소리치다
涼夜與朋好(량야여붕호) 서늘한 밤 친구들과 함께
步月江亭上(보월강정상) 강가 정자에서 달빛을 거닐었네.
夜久風露寒(야구풍로한) 밤이 깊어지자 바람과 이슬 차가워지니
悠然發深想(유연발심상) 나도 몰래 깊은 생각에 잠기었네
〔天上秋期近〕-기대승(奇大升) 하늘은 가을이 가까워지다
뜨거운 햇볕 걷고 석양이 지니 / 悠陽收畏日
명랑하게 높은 하늘 피었구나 / 寥朗展高天
서늘바람 쇄락함을 깨닫고 / 漸覺凉風洒
이내 옥이슬 매달림을 보노라 / 仍看玉露懸
분분하게 늙은 물건 꺾어지고 / 紛紛摧老物
자꾸자꾸 흐르는 해를 전송하네 / 亹亹送流年
풍진 속에 분주하며 / 奔走紅塵裡
부질없이 실솔편을 읊조린다 / 空吟蟋蟀篇
임꺽정
양주(楊州)의 백정인데 힘세고 날래었네.
조정이 혼란하고 백성 살기 어려운데 게다가 흉년이 겹치니 도둑질을 시작했네.
세력이 커지자 구월산에 근거잡고 관아창고 급습하여 백성들에 나눠줬네.
백성도 의적(義賊)이라고 환호하고 동조했네.
경기 황해 휩쓸고 한양에 출몰하니 병력을 동원하여 서림(徐林)을 잡았네.
아내를 구출하려고 전옥서(典獄署) 습격 알아냈다.
관군이 잡으려다 번번이 실패하고 3년 만에 곽순수 홍인성이 그를 잡았네.
조정이 어지러우니 도적이 활개 쳤다.
이언적(李彦迪)
회재(晦齋) 이언적은 주희(朱熹)를 사모하고 벼슬하는 틈틈이
성리학을 연구하여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주리론(主理論)을 심득했네.
삼사(三司)를 거치면서 김안로(金安老)를 반대하고 경주로 쫓겨나서 학문에 정진했네.
전주의 부윤이 되어 송덕비가 세워졌네.
이예형조(吏禮刑曹) 판서 거쳐 좌찬성이 되었으나
윤원형이 을사사화로 사림을 살육하니 추관직(秋官職) 팽개쳐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네.
양재역 벽서사건 강계에 유배되고 만년(晩年)의 학문연구는 구인록(求仁錄)에 묶였네.
후배인 이황(李滉)에 와서 주리론(主理論)이 집대성됐다.
이황(李滉)
진사 이식(李埴)의 후처 박씨 막내로 태어나서
두 살에 부친 잃고 모친이 훈육했네.
여섯 살 천자문 읽고 공손히 묵송(默誦)했네.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논어(論語)를 배웠는데
무릇 일의 옳은 것을 리(理)라고 합니까?
조용히 벽을 향하여 생각을 정리했네.
주역을 궁구하다 침식(寢食) 잊고 병이 나서 일생 동안 몸이 여위는 병으로 고생했다.
향시(鄕試)에 장원을 하고 문과 별시 2등 했네.
여러 벼슬 거쳤으나 쉰 세 번 사퇴하며 성학십도(聖學十圖) 바치고
도산서원에서 정진했네.
마침내 이치와 기운에서 이치를 중요시했네.
선조(宣祖)
명종(明宗)이 후사(後嗣) 없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 중종(中宗) 후궁 창빈 안씨 막내의 막내라.
학문에 정진하고서 사림 명사 등용했네.
조광조 신원(伸寃)하고 왕도정치 신봉(信奉)했으나
선비들은 동서로 갈려 당파싸움 시작했네.
동인은 영남의 주리론(主理論) 서인은 기호(畿湖) 주기(主氣)라.
동인이 분파하여 남인 북인 갈리고 왜국의 전국여파(戰國餘波)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나니 임금은 왕성을 버리고 의주로 달아났네.
명나라 원병오고 의병이 봉기(蜂起)하며 이순신(李舜臣) 활약으로 7년 전쟁 이겨냈네.
뒤늦게 영창(永昌)을 낳아 광해군(光海君)을 어렵게 했네.
이이(李珥)
이원수(李元秀)와 신사임당(申師任堂) 셋째로 태어나서
신동으로 이름나서 구도장원(九度壯元) 하였네.
어머니 열여섯 살에 죽어 금강산에 들었네.
여러 벼슬 거쳤으나 성혼(成渾)과
이기문답(理氣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바치고 석담(石潭)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
정연한 논리 잡아서 이기론(理氣論)을 펼쳤네.
동서분당 조정에서 분당을 막으려고 만언봉사(萬言封事) 시무육조(時務六條)
10만 양병 주장하고 조정(調整)이 여의치 않아 석담으로 물러갔네.
이기이원(理氣二元) 이어받고 주기론(主氣論)도 참고하여
기발이승(氣發理乘) 주장하여 독창성을 드러냈네.
현실과 이상 사이에 인본주의(人本主義) 펼쳤네.
이순신(李舜臣)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이요 불멸(不滅)의 인걸(人傑)이라.
스물여덟 무과시험 낙마(落馬)하여 떨어졌고 4년 후 급제하여서 변방무사로 돌았네.
정읍현감 되었을 때 유성룡(柳成龍)이 추천하여 전라수사 승진하여 전란에 대비했네.
마침내 왜란이 일어나자 연전연승 시작했다.
한산대첩 부산싸움 제해권을 장악하고
삼도수군(三道水軍) 통제사(統制使)로 한산도에 웅거(雄據)했네.
그러나 원균(元均)의 시기로 백의종군(白衣從軍) 하였네.
원균이 패전하자 통제사로 복귀하여 열두 척 병선(兵船)으로 명량대첩 이루었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목숨 바쳐 대승했네.
곽재우(郭再祐)
조식(曹植)의 외손자로 별시(別試) 2등 취소되니 남강 가에 정자 짓고 은거하려 하였네.
왜란에 관군이 패하자 의병 모아 일어섰네.
의령의 정암진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매복(埋伏)과 유격(遊擊)으로 진주 싸움 도왔네.
천강(天降)한 홍의장군(紅衣將軍)이 벼슬 받아 축성(築城)했네.
경상좌도(慶尙左道) 방어사(防禦使)로 가등군(加藤軍)과 싸웠고
계모상과 병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니 사헌부 탄핵을 받아 영암에 유배됐네.
조정과 불화하여 남인(南人)이라 지탄되니 귀향하여 정자 짓고
벽곡(辟穀)하여 솔잎 먹어 세상의 근심을 잊고 신선되려 했었네.
정철(鄭澈)
큰누나는 인종(仁宗) 귀인(貴人) 작은누나 계림군(桂林君) 부인
궁중에 드나들며 경원대군(慶原大君)과 친했지.
계림군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죽고 가족은 흩어졌네.
아버지 풀려난 후에 담양 선영(先塋) 이주하고
김인후(金麟厚) 송순(宋純)과 기대승(奇大升)을 사귀었네.
무등산 활개 밑에서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별시 문과 장원하여 사헌지평(司憲持平) 되었는데
명종의 사촌동생 살인죄로 죽였고 서인(西人)의 맹장(猛將)이 되어 폭풍같이 살았네.
조정에서 내쳐지자 사미인곡(思美人曲)을 지었고 강원감사 제수되자
관동별곡(關東別曲) 훈민가(訓民歌)라.
정여립(鄭汝立) 추국(推鞫)한 뒤에 우의정에 올랐네.
광해군(光海君)
선조의 둘째 아들 공빈(恭嬪) 김씨 소생인데 임진왜란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 중 분조(分朝)를 짊어지고 명망을 얻었네.
영창대군(永昌大君) 났으나 선조(宣祖) 죽자 즉위하여
전후 복구 힘쓰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네.
만주에 후금(後金)이 일어나자 강홍립(姜弘立)시켜 투항했네.
영창대군 옹립하려는 유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임해군과 영창대군 형제를 제거했다.
모후(母后)를 유폐시키고 인륜을 져버렸네.
대북파(大北派) 득세하여 서인들 몰락하고
폐모론(廢母論) 대두(擡頭)하여 명신(名臣)들을 내쳤네.
궁궐을 중건(重建)했으나 반정으로 쫓겨났네.
허균(許筠)
허엽(許曄)의 후취부인 박씨의 막내인데 허성(許筬)은 이복형이요
동복(同腹)은 허봉(許篈) 초희(楚姬). 문장가(文章家) 형제들인데 이달(李達)에게 시 배웠네.
문과중시(文科重試) 장원하고 황해도사 되었지만 기생을 끌어들여 반년 만에 파직이라.
불교를 좋아하다가 수안군수 쫓겨났네.
명나라 사신에게 누나의 시 보여주고 삼척부사 되었으나 염불참선 파직됐다.
서얼들 친구로 삼아 공주목사 체직이라.
계생과 교유하고 조카와 사위 부정합격 계축옥사 일어나자 대북파(大北派)에 가담했네.
유재론(遺才論) 호민(豪民) 이끌어 홍길동이 되려했네.
허준(許浚)
용천부사 허론(許碖)의 아들 의과(醫科)에 급제하여 내의원에 봉직하며
어의(御醫) 명성 얻었네.
마침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하여 의성(醫聖)이 됐네.
왕자의 두창(痘瘡) 고쳐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고
왕명으로 어의들과 동의보감 편집했네.
의학을 총망라하여 임상의학 백과전서라.
내장방서(內臟方書) 오백 권과 임상처방 종합하여
내외잡병(內外雜病) 탕약 침구 출전과 약방 나열 자신의 경험을 더해 실용화에 힘썼네.
증상을 중심으로 고금의서(古今醫書) 열람하고
향약집성(鄕藥集成) 의방유취(醫方類聚) 중국의서 망라했네.
중국과 왜국에 전해 임상의학 고전이라.
출처 네이버 등에서 인용
[옮긴 글]
조선 성리학자 기대승(奇大升)
기대승(奇大升.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선조(宣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 자 명언(明彦). 호 고봉(高峰)ㆍ존재(存齋). 시호 문헌(文憲), 본관 행주(行州). 전남 나주(羅州) 출생. 진(進)의 아들.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한 후 선조(宣祖) 때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나,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병을 얻어 귀향(歸鄕)하다가 고부(古阜)에서 객사(客死)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학으로 능히 고금(古今)에 통했고, 이퇴계)(李退溪)와 성리학을 문답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편지 왕복만도 8년을 계속했을 뿐 아니라, 후세 유학자들이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나중에는 이퇴계 자신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까지 되었다.
그는 이퇴계ㆍ김인후(金麟厚)에게 문학(問學)하였으나, 이퇴계는 그와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변론이 있은 후 후배로서 대하지도 않을 만큼 동등한 입장에서 입론(立論)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조선 중기의 문신ㆍ성리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 아버지는 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딸이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은 그의 계부(季父)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49년(명종 4) 사마시(司馬試)에,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 해 8월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되었다.
그러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듬해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ㆍ홍문관교리ㆍ사헌부헌납ㆍ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ㆍ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같은 해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집의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그의 관로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한 바 있고,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 뒤 이황과 12년에 걸쳐 서한을 교환하였는데,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이른바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숭례론(崇禮論)ㆍ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그는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조 1수가 전한다. 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마을 빙월당에서 북쪽으로 약 200미터 가파른 산 중턱에 있다.
빙월당(氷月堂)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강산동 452.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기대승(奇大升)을 모시는 월봉서원(月峯書院)의 강당이다.
월봉서원은 기대승을 주벽으로 박상(朴祥)⋅박순(朴淳)⋅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 등 조선조의 학자와 명신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원래 월봉서원은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기대승 사후 7년만인 1578년(선조 11)에 광산구 신용동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이후 광산구 산월동으로 이건하였으며, 1655년(효종 6년)에 사액되어 사우⋅동재(明誠齋)⋅서재(存省齋)⋅강당(忠儒堂)이 갖추어졌다.
월봉서원의 액호는 이산리(李山裏), 나머지 편액은 송준길(宋浚吉)이 썼던 것인데 현판들은 현재 장판각에 보존되어 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월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41년 현 위치에 빙월당을 새로 짓고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외삼문 등의 건물을 건립하였다.
현재의 빙월당은 백우산 기슭 광곡마을의 원 종가터로 높다란 대지 위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주변은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경관이 매우 좋다.
빙월당의 당호는 정조가 고통의 고결한 학덕을 상징하는 ‘빙월설월(氷月雪月)’의 뜻으로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장판각은 빙월당 우측에 2동의 맛배집인데, 이곳에 고봉집·논사륙·왕복서·이기왕복서 등의 목판 474매가 보존되어 있다.
저서<고봉집(高峰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思錄)>
고봉 기대승과 그 유적들
고봉(1527-1572)이 살았던 16세기는 한국의 문예부흥기였다.
당대 퇴계 이황과 하서 김인후, 면앙 송순 등을 비롯해 조선의 성리학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고봉의 학문적 성과는, 그의 스승이자 그와 8년간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토론 `사단칠정논쟁’을 벌였던 퇴계 이황의 말에 나타난다.
퇴계는 당시 선조에게 대답하는 말 가운데 “고봉의 식견이 넓고 월등해 통유(通儒·유학에 통달하다)라고 할만하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고봉은 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했는데, 그의 업적 가운데 31살에 내놓은 `주자문록’은 당시 학문계에 충격을 줬다.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는 생전에 700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핵심을 주자대전 120권에 담았다.
하지만 워낙 어렵고 방대한 양이라 당시 조선학자들 가운데 다 읽은 이가 없었다.
그런데 고봉이 해설서까지 냈으니. 하지만 고봉의 학문은 그동안 학계나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퇴계학이나 율곡학 등이 후학들의 연구에 의해 풍성해진 것과 대비된다.
46세에 떠난 고봉에겐 제자들이 없었다.
더욱이 일제 식민사관이 해방 이후까지 이어져오면서 그의 사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는 게 고봉학술원 강기욱 씨의 설명이다.
고봉은 32세에 문과 을과에 장원을 하며 본격 정계에 진출하는데, 마지막엔 성균관 최고위직인 대사성까지 올랐다.
성균관 대사성은 오늘날 국립 서울대 총장에 비견되지만, 당시 조선이 유교의 나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보다 훨씬 고위직으로 봄이 옳다.
광산구 임곡동 너브실 일대는 고봉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곳이면서, 그의 유적이 집중된 곳이다.
고봉의 생가는 너브실에서 십리 가량 떨어진 지금의 신룡동이지만, 고봉의 묘지와 수양하며 공부했다는 귀전암 터, 그의 사후 아들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때 머물렀다는 칠송정이 있고 마을 맨 안쪽에 월봉서원이 있다.
월봉서원의 원래 자리는 지금의 광산구 산월동 월봉마을에 있었다.
효종 5년(1654년)에 유림들의 상소로 사액(임금이 편액을 내림)됐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었다.
이후 다시 세워졌지만,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폐쇄됐다.
이후 1941년 지금의 위치에 후손들이 `빙월당’이라는 제실을 지었는데, `빙월당’은 정조가 고봉의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 같다고 한데서 가져온 이름이었다.
그 후 1981년 현재 자리에 월봉서원을 복원하면서 빙월당은 서원의 강당이 됐다.
또한 마을 입구엔 고봉 선생의 6대 손인 기언복이 숙종 때 터를 잡은 이래 300년 역사와 학풍을 이어온 애일당 겸 고봉학술원이 자리하고 있다.
- [광주드림](2008. 8. 21) -
☞시조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 신릉군(信陵君)만 할가마는
백년(百年) 못하야셔 무덤우희 밧츨 가니
하믈며 녀나믄 장부(丈夫)야 닐러 무슴 하리오.
[출처] 縱筆(종필)-붓 가는 대로 쓰다-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淸風動萬松(청풍동만송) 맑은 바람에 온 소나무는 물결치고白雲滿幽谷(백운만유곡)/ 高峯(고봉) 奇大升(기대승) 시모음|작성자 kbs4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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