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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속의 물길 광주천
광주동구 숲문화재 해설가 최 병 남
1.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하천은 문명의 발상지, 크고 작은 도시 형성, 생계유지 수단, 놀이터, 휴식 공간,
지역의 경계로서 방어 수단, 물의 풍부함에 따라 도시 번영의 원동력이 됨.
삶의 터 제공, 동림동 유적 발굴, 광주 읍성터 발굴로 확인 됨. 동림동 마을은 청동기시대와 5~6세기에 조성된 백제시대의 대규모의 집단 취락지. 삼국시대 주거지로 고기잡이, 논과 밭을 일구어 생계를 꾸림, 놀이터, 쉼터.
2. 광주천의 시작은 어디일까?
광주천은 무등산에 시작하여 24.4Km를 달리며 광주의 중심부를 적시고 영산강으로 흘러 간다. 광주천의 발원지는 무등산 ‘샘골’ - 광주광역시 동구 지원동 용연과
화순군 경계인 장불재(긴골)를 오르는 800m 지점. 샘골 - 야생동물들이 자주 찾음.
샘골에서 솟아난 물길은 그 곳에서 서쪽으로 용추계곡을 따라 1.2Km 쯤 흐르며 치마바위를 거치고 용추폭포를 이루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무등산에는 3개의 계곡이 있는데, 그중 남쪽으로 흐르는 계곡이 용추계곡이며,
북쪽으로 원효계곡이, 서쪽으로는 증심사 계곡이 흐른다.
용추계곡의 길이는 4Km로 계곡을 따라 제2수원지를 만들면서 제2수원지로 흘러들기까지 울창한 숲을 이룬다. 울창한 숲에 가려진채 청정한 폭포수를 힘차게 내려치는 용추폭포는 무등산의 자랑거리, 1936년 일제가 제2수원지를 만들면서 폭포수를 맞으러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상수원이 오염된다며 폭포 윗부분을 폭파해 원형이 손상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옛날에는 오월단오, 유월유두, 칠월칠석, 복날 등에 물을 맞는 풍속이 있어 용추계곡을 찾았는데, 이곳에는 석창포가 자생해 단오날이면 이곳을 찾아 창포로 머리를 감았다고도 하는데 아직도 폭포 주변 이곳저곳에서 창포가 잎을 내고 꽃을 피운다.
1996년부터 5년간 자연 휴식년에 들어간 뒤 등산객의 발길이 끊겼다가 그 후 휴식년이 끝났음에도 도시민들의 발길은 여전히 드문 곳이다.
덕분에 무등산 계곡 가운데 가장 자연 상태가 잘 보존된 계곡으로 남아있다.
용추폭포의 경관을 만들어내며 계곡을 흘러내린 물은 제2수원지에 담겼다가 용연마을 지나 교동마을 앞에서 서교 저수지에 담겼다가 내리는 물과 만나 내지교, 녹동교를 지나 광주의 도심을 향해 흘러간다.
하지만 동복수원지(광주시소유로 관리권으를 갖고 있음)의 물을 끌어다 쓰면서부터는 그리운 옛날 이야기가 됨. 1939년 축조되었던 제2수원지는 보조수원으로서 역할을 할뿐이며, 약간씩 흘러내린 물들은 용연정수장으로 취합된다.
용연정수장에서 정수하면서 나오는 물이 광주천으로 흐를 뿐, 발원지라는 것이 무색하게 샘골에서 흘러온 물은 곧바로 광주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 광주천을 적시는 물은 용연정수장 아래 용연마을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적은 유량들을 이리저리 보태면서 광주천을 만들고 있다. 용산동에 이르면 서쪽 화산저수지(골뫼저수지)물과 제석산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오는 물이 장군바위를 돌아 용산교 부근에서 광주천에 더해지고, 그것보다, 약간 아래쪽에서는 동쪽의 소태실골 물이 합세하여 더 큰 물길을 만든 광주천은 증심사천이 기다리는 원지교를향한다.
광주 동구 운림동 새인봉과 중머리재 북서쪽 골짜기인 신림골에서 발원하여 삼애산장 및에서 증심사쪽에서 내린 물과 합류하여 북서류하다 동쪽 덕산골 물을 더하고 문빈정사를 지나 성촌마을 앞들에서 성촌 북쪽골인 빈대실골 물과 제1수원지 물, 금성골 물을 더해 서류한다. 천지가든에서는 마집봉 북쪽에서 출발한 동조골 물이 밑에 이르러 가리재골 물이 되어 동산마을을 지나 만나게 된다.
계속 서류하다 태봉 밑 운임교를 지나 학운여중 바로 앞쪽을 거쳐가다 북동쪽 조나니골과 숲실 덤박골 물을 더해 남서쪽으로 감돌아 홍림교(속칭 배고픈다리)를 지나 원지교에서 광주천과 합류한다.
계속 북류하던 물길은 원지교에 이르러 동쪽에서 온 증심사천과 합류하여 방학교 - 설월교- 방림교- 학림교- 남광교- 학강교- 양림교- 금교- 서석교- 부동교- 중앙대교- 광주교- 광주대교- 천교- 태평교- 양유교- 양동복개상가 아래를 지나간다. 복개구간 밑 양유교를 앞에 두고 누문동에서 흘러오는 동계천과 합류한 물은 양동교- 발산교- 광천1교- 용봉천과 두암천을 받아안고 무등경기장을 감돌아 오는 서방천과 광천2교에서 합류하여 서류하다가 유천동- 극락초- 시청사- 계수마을 앞에서 극락천과 만나 치평동과 유덕동 평촌마을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가 영산강 본류와 만난다. 광주천의 큰 지천 중 동계천, 용봉천, 서방천, 극락천은 1985~1997년 사이 모두 복개되어 하수구로 전락, 지금은 광주천으로 흘러들지 못하며 복개되었다.
3. 삶의 역사를 안고 흐르다.
광주천(일제시대) 이전에는 乾川(건천), 조탄강. 광주천 물은 광주의 젖줄로 풍요로운 고을을 이루며 삶. 광주천의 옛모습 - 둔치와 물의 경계가 없는 모래톱과 자갈톱 등으로 들고나면서자연스럽게 이어져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광주천이 인위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이다.
광주천을 중심으로 한 천변 좌우의 깎아지른듯한 지금의 제방은 1928년 4월부터 단계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는 석축 대신 학동, 금동, 근처에서부터 불로동, 양림동, 사구동, 양동에 이르기까지 광주천변은 팽나무와 미루나무, 실버들나무 숲이 우거진 모래사장이었고, 물 흐름도 꼬불꼬불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광주천은 해마다 홍수로 곤혹을 치루곤 하였는데, 홍수가 지면 그 넓은 백사장이 삽시간에 물바다가 되어 지금도 충장로는 물론 광산동까지 침수가 되었다고 하며 1925년의 대홍수 때는 전라남도 도청 옆 도지사 관사까지 범람한 일도 있었다고 하니 그 물의 크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범람으로 인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광주천은 광주시민들이 생활 터전이자. 고단한 삶의 휴식처로서, 어린이들에게는 신나는 놀이터와 자연학습장으로서 오랫동안 생활 깊숙이 관여해 왔다. 박선홍(무등산 저자)이 인용한 광주천에 대한 최윤상의 회고담을 통해 광주천의 전체적인 상과 지역민들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1960년대 말 이후 광주가 도시화와 산업화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광주천과 광주천으로 흘러들던 지천들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광주천에 얽힌 정 깊은 추억들을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 생활의 터전, 광주천
동림마을 유적지나 옛 조선시대 읍성터 유적지에서 볼 수 있듯이 광주천 주변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룬 아득한 옛날부터 광주천은 광주지역 농업용수 공급원의 구실울 톡톡히 해 왔다. 매립되기 전까지 500여 년 동안 고을의 옥토를 적셔주던 경양방죽의 물은 광주천의 금교와 부동교 사이에 취수구를 만들어 끌어갔다.
또 광주천의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조참보, 용천보, 임동의 보 등 수많은 보의 물들도 모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시대 이후 광주에 공장이 들어서면서부터는 공업용수 공급원으로서의 역할도 맡아왔다. 광주의 대표적인 산업체였던 가네보(종방공장, 현 일신, 전방공장)를 비롯한 도시 와까바야시, 가네보 제사공장 등도 모두 광주천의 물을 끌어다 공업용수로 썼다고 하는데, 방적이나 제사용으로 가장 알맞은 물이었다고 한다.
■ 왁자지껄 광주천 재래시장
1932년 일본이 현재의 태평극장 앞 광주천 건너편 사동의 매립지에 사정시장을 개설하기 전까지 광주천변의 넓은 백사장은 광주상권의 중심지로서 호남지방에서도 대표적인 장이 서던 곳이었다. 지금의 부동교 근처인 부동방면에는 작은 장이 4일과 9일에, 여기서 광주천을 타고 내려가 지금의 한일극장과 현대극장 사이에는 큰 장이 2일과 7일에 섰는데, 장날이면 광주뿐만 아이라 호남각지에서 장군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광주천변 백사장에는 3백여 세대의 상인들이 가건물로 된 상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니 그 시장의 규모를 볼 때 장날이면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이며 구경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재래시장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재래시장이 변모하게 된 것은 일제 중엽인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이다. 일제는 1928년부터 광주천의 물줄기를 바로 잡고 둑을 쌓는 하천정리 사업을 한 뒤 시장을 정비한다는 구실로 광주 큰 장인 공수방장과 작은 장인 부동방장을 합쳐 현재의 태평극장 앞 광주천 건너편 사동의 매립지에 사정시장을 개설키로 한 뒤 1932년 2월 3일 8천 4백50평에 점포 470칸을 지어 이른바 근대적 시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장날은 큰 장, 작은 장이 열리던 것을 합쳐 2, 4, 7, 9일로 단일화 했으며
점포도 포목전, 황호전, 잡화전, 건어물전, 곡물전, 육류전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러다가 일제는 일본 기원 2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광주신사를 개축하고 조경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정시장이 도심과 너무 가깝고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지금의 양동시장 자리로 옮겼다. 이 때의 점포수은 366칸으로 사정시장보다 1백여 점포가 줄어 들었다.
■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광주천
광주천은 또한 광주의 중심을 도도히 흐르면서 고통과 저항으로 점철된 민족의 근현대사와 함께 해 왔다. 한말 의병항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광주지역의 학생독립운동과 삼일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까지 해냄으로 광주지역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광주 사람들의 애환 서린 장소 또한 광주천이다.
구한말에는 전라남도 의병의 숫자가 전국 의병의 45%에 달할 만큼 이 지역의 의병항쟁이 거세었는데 일제는 광주천의 백사장에서 의병들을 잔인하게 처형하기도 하였다. 한편 광주천의 재래시장은 광주뿐만 아니라, 호남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붐볐던 곳으로 자연스럽게 반일 항쟁의 집결지가 되기도 하였다.
광주의 삼일운동도 1919년 3월 10일 광주천변의 작은 장터에서 일어났다.
이날 숭일학교 종각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와 사직공원에서 울리는 나팔 신호로 오후 3시 반이 되자 남에서 북에서 광주천 백사장의 장은 장터로 온 광주고을 사람들이 다 모여들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해 나갔다.
학생의 날 시원이 되는 광주학생독립운동도 작은 장터와 관련이 있다.
1929년 11울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이다. 일본 명치절
(일본 메이지 일왕의 생일)이자 우리민족의 개천절(음력 10월 3일)이기도 했던 이날, 명치절 행사에 동원되었던 우리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일본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다가 식이 끝나자마자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마침 부동교 근처의 작은 장터에서 일본 개최 ‘전남산 누에고치 6만석 돌파 도민경축 대회’에 참가했던 도민들이 학생독립운동의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반일운동은 더욱 가열되었고, 그 자리에 취재차, 참가하였던 신문기자들이 보도를 신속히 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4. 옛 이야기 새록새록 광주천 주변 문화
광주교와 중앙대교 일대에는 광주공원과 사직공원, 향교 등이 있어 옛 문화적 정취가 두드러진다.
■ 거북이 전설이 담긴 광주공원
광주공원은 광주의 역사, 문화, 삶, 생태 환경적인 측면이 어우러져 있는 명소이다. 광주의 제 1호 도시공원은 보물과 문화재,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기리는 탑이나 기념비 그리고 유명한 시인들의 시비가 있으며 다양한 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어 부근의 사직공원과 함께 도심 공원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광주 향교(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9호)와 서오층석탑(보물 제 109호)이 있다. 일제 때는 신사가 세워지고 의병토벌작전과 관련하여 죽은 일본군을 위한 충혼탑이 건립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해방되고 호남지역 의병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남한 폭도대토벌작전 시기 때 활약했던 의병장 심남일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지고, 현충탑, 4. 19의거희생영령추모비가 건립되는 등 우리나라 근, 현대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곳이다. 제법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조용히 산책하며 박용철과 김영랑 시비를 찾아 시도 읊조려 볼 수 있는 운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광주공원에 서 있는 나무 한그루조차도 치열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말해준다.
일본은 자국 및 사할린, 대만, 몽고 등 동아시아 일대와 우리나라 각 지역마다 나무를 한 가지 이상씩 가져오도록 하여 광주공원을 조성하였는데, 아카시, 메타세콰이어, 히말라야시다 등의 나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동남아시아 정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당시 그 樹種(수종)과 희귀성 면에서 마치 식물원을 방불케 했었다고
하는데 해방 후 사회 혼란의 시기에 많은 수목이 사라져 공원이 황폐화 되었다.
광주공원 자리는 원래 聖居山, 聖龜山이라고 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거북과 같아서 龜岡이라 했다고 하며, 광주공원의 거북이 형상과 관련하여 구강의 전설이 전해온다. 거북이 형국의 지세를 살펴보면 양동 쪽을 향해 길게 뻗어 끝머리에 안중근 의사탑이 서 있는 곳이 거북이의 머리이며, 오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거북이의 목, 현충각이 세워진 곳이 거북이의 등에 해당된다.
이 거북이의 4개의 발은 동쪽으로 현재의 어린이놀이터가 바른편 뒷발, 남쪽으로 광주향교의 뒤편이 왼편 뒷발, 서쪽으로 구시장터가 왼편 앞발, 북쪽은 실내체육관 쪽이 바른편 앞발에 해당한다.
전설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은 이 거북이가 광주의 정기를 안고 있어 만일 멀리 떠나버린다면 광주 발전이 없을 것이라고 믿어, 광주에서 못 떠나게 하기 위해 현 향교와 노인당 주변인 거북꼬리 부근에 성거사를 세우고 목 부분에 오층석탑을 눌러 세웠다고 한다. 거북이는 원래 위험을 느끼면 등딱지 속으로 쏙 움츠려 들지만 이 거북이는 사지를 쫙 벌리고 있으니 광주가 번성할 징조라고 믿어 왔다.
이에는 광주지역 사람들의 풍요를 비는 염원이 담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일제시대 이래 공원의 곳곳에는 이 전설의 주인공인 거북이의 몸이 훼손되어 온 아픈 역사가 담겨져 있다. 1940년 일본 사람들이 그들의 신사를 개수한다는 구실로 등허리를 파헤치고 발을 끊어내는 등 그 원형을 많이 변경시켜 버렷고, 1982년에는 종합체육관을 지을 때 다이너마이트를 폭파해 거북의 머리 쪽이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상처 입은 머리 부분에는 수궁갈비집이 들어서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각종 시설물들이 공원 안에 들어서게 되면서 성스러운 거북이의 형국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다. 광주 발전의 염원을 담은 광주 지역의 전설이 온전히 담겨 있는 광주 공원이 일제의 만행에 이은 우리들 자신의 일천한 문화 인식으로 인하여 되살리지 못하고 말살되고 만 것이다.
■ 社稷공원, 땅의 신(社)과 오곡의 신(稷)에게 제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곳.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에 있는 공원으로 원래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며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사직단이 있던 곳으로, 삼국시대 때부터 설치되어 왕 대신 광주목사가 매년 제사를 주관했었는데, 사직단에서 1년에 네 차례 풍년을 비는 祈穀祭와 가뭄에 祈雨祭를, 비가 많이 오면 祈晴祭를, 눈이 오지 않으면 祈雪祭등을 지냈다.
사직공원이 조성된 것은 일제 때로 1924년 일본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하고는 처음 신공원이라 했다가 해방 후에 사직단이 있던 곳이라 했다가 지금의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에 사직동물원이 들어서면서 사직단은 헐리고 말았는데, 그 뒤 사직단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자 1991년 동물원을 우치공원으로 옮기고 사직단을 복원함으로서 1894년 갑오년에 폐지되어 왔던 사직제가 1994년 4월 100년 만에 부활하게 되었다.
주요 시설로는 복원된 사직단과 광주방송국(KBS), 경찰충혼탑, 양파정, 전통국궁 수련장인 관덕정,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팔각정 등이 있다. 조경이 잘 되어 있으며, 매년 4월 중순이면 벚꽃이 만발한다. 특히 매년 4월 15일을 전후해서 벚꽃이 만발, 이 무렵이 되면 밤에 전등을 가설하여 시민들이 밤에도 벚꽃을 즐길 수 있다. 사직공원은 광주공원과 이어지고 있으나 아쉽게도 중앙로가 개설되면서 두 공원이 잘리고 말았다. 현재 이 두 개의 공원이 그대로 이어져 있다면 역사문화적인 면에서 생태 환경적 측면에서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 옛정취 간직한 광주향교
구동 광주공원과 사동 사이에 옛 형태를 비교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 무리의 기와집이 바로 광주향교이다. 광주향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성거산의 서남쪽 산자락에 해당하며, 구강의 전설에 의하면 거북이의 왼편 뒷발에 해당하는 곳이다.
1582평 부지 안에 공자와 성현들을 모신 大成殿과 東廡 , 西廡등의 祭享(제향)공간, 명륜당 등의 강학 공간, 그 밖에 유림과 유생들의 숙소 등 10여 채가 들어서 있다. 향교는 공자의 제사를 모시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교육하는 곳으로 지금의 학교라 할 수 있는데, 향교의 학생을 校生이라 불렀는데 대체로 15~16세 정도면 입학할 수 있었다. 광주 항교도 옛날에는 지역의 인재를 양성했던 곳으로 고경명장군 등의 위인이 나왔으며, 현재는 전통혼례의 예식장으로 개방되는 한편 한문 강습 및 전통 혼례식, 제례, 상례,등의 다양한 정통 문화 보급에 힘쓰고 있다. 광주향교는 처음에는 서석산 장원봉 밑에 있었다. 이 때가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이다.
그러나 맹수의 피해가 많아서 동문 안으로 옮겼고, 다시 이 지역이 낮아서 물로 인한 피해가 심해지자 148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불에 탄 것을 선조 33년인 1600년에 현재와 같이 지은 것이다. 광주향교의 부지는 원래 광주 공원 일대에 걸친 넓은 땅으로 모두 항교 재산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일제가 이곳에 광주 신사를 지으면서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현 시 지정 지방문화재 제9호로 지정(1986년 10월 24일)보호되고 있다.
5. 어린이들의 놀이터, 시민 축제의 장, 광주천과 천변
물이 있는 곳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물이 깨끗하고 물가 식물들이 무성하며 둔치와 물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광주천 원지교 부근에서는 지금도 물에 손과 발을 담그고, 물속을 첨벙거리며 헤집고 다닌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재첩도 잡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피라미를 만져보고, 돌에 붙은 신기한 물속생물들도 들여다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심하천에서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어렵다. 뿐만아니라 농촌의 하천가도 마찬가지의 처지이다.
1960년~70년대까지만 해도 물만 있으면 하루해가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어릴 적 광주천을 보며 자랐던 어른들은 그리움 듬뿍 담긴 눈으로 그 시절을 이야기를 전한다.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옆에서 어머니들은 빨래를 한 아름 갖고와 방망이로 통통 두드리며 하얀 옷을 만들어내고, 형들은 투망질로 저녁거리를 준비하였다. 너무도 많이 오염되어 버린 지금이야 손사래를 칠 일이지만 그 시절 광주천의 풍경은 그랬다. 어찌 보면 예전의 광주천은 단지 어린이들의 놀이터 그 이상으로 시민들의 생활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 같다.
정월 대보름이며 다리 밟기와 어린이들의 쥐불놀이 장소로 안성맞춤이었고, 천변 높은 언덕에서는 줄다리기가 벌어졌었다고 하니 광주천은 남녀노소 시민들이 한판 어우러지는 축제의 장소였다고 할 것이다. 천변 백사장에 대한 추억은 ‘곡마단’과 ‘나이롱극장’에까지 이어진다.
6.광주천 물을 담아 고을 적시던 경양지는 어디 갔을까?
서방천 물길을 찾아 걸어가다 보면 신안교 가기전 신운교와 철길 사이에 커다란 2개의 하수관이 있다. 이 하수관은 일직선으로 광주역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옛 경양지의 물이 광주천으로 흘러나오던 물길이다.
물론 경양지의 수원은 광주천이다. 광주천 물이 경양지천에 담겼다가 서방천으로 합류, 다시 광주천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경양지는 조선조 세종 22년 1440년 金倣이 세종의 중농정책을 받들어 만 2년여의 공사 끝에 완공한 인공 호수였다.
면적은 4만 6천여평으로 광주역이 있는 광주시가지에서 담양으로 가는 길 서쪽 일대까지 뻗쳐 현재의 광주고등학교, 계림초등학교, 전 광주상업고등학교의 정문 앞으로 통하는 담양가도를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부채꼴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이 경양지의 수원은 광주천이었는데, 불로동과 금동의 경계지점에 취수구를 만들어 불로동, 황금동, 대인동, 계림동을 거쳐서 경양방죽까지 물길을 내어 광주천 물을 끌어들여 1,150마지기의 광주 서북부 광야에 물을 댔다.
경양지는 여름철에는 수영장과 보트장으로 또 겨울철에는 광활한 스케이트장으로 변하여 광주천과 함께 시민들에게 낭만과 추억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1Km가 넘는 방죽의 둑 양쪽에는 팽나무, 귀목나무, 왕버드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나무들은 둘레가 평균 150Cm가 넘고 수령도 200~300년이 된 거목들로 커다란 숲을 이루어서 여름이면 많은 시민들이 시원한 숲 그늘을 찾아 쉬어갔다고 한다. 이러한 경양지는 두 번의 대대적인 매립공사에 의하여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1차 매립은 일제가 1940년 일본 건국 기원 2600년 기념사업으로 광주상고와 계림초등학교 뒷산인 경호대 일대를 헐어내어 그 토사로 방죽을 매립하여 저렴한 값으로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조성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당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2/3만 매립하였다. 일본의 경양지 매립 계획에 반대하여 결성되었던 ‘경양방죽 매립 반대 투쟁위원회’는 매립 반대 이유로 다음을 들고 있다.
1) 경양방죽은 광주지방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농업경영의 원천으로서 많은
몽이답(논)을 관할하고 있다.
2) 홍수 때 수량을 조절하여 그 피해를 줄일 수 있다.
3)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수도 사정이 나쁜 광주의 소화용수를 공급할 수 있다.
4) 이 방죽을 매우지 않더라도 광주시내 주택지를 조성할 만한 적지가 많다.
5) 대대로 어어온 농경문화의 역사적 문화유산을 말살시키는 것은 문화인의 수치
6) 장차 광주시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보전
그러나 이렇게 지켜낸 경양지의 나머지도 해방 후 우리 손에 의해 완전히 매립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1966년 광주시는 농업용수로서의 기능이 약화되고 방죽 안에 부근 주택지에서 버린 쓰레기와 오물로 악취와 수질오염이 심각하다는 점을 들어 호수를 매립하여 택지를 조성, 시가지를 확장할 계획 아래 태봉산을 헐어 공사를 시작, 1968년에 완공하였던 것이다.
이 공사로 인해 광주는 경양지천과 태봉산의 두 아름다운 경관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었다. 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안목이 한탄스럽기만 하다. 다시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살기조차 각박하던 일제시대에 장차 광주가 발전할 때를 대비하여 자연 경관을 잘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샘골에서 시작한 자연하천
도시의 허파, 광주천 본류
무등산 샘골 - 증심사천 합류지점
Ⅰ. 지리, 문화적 특징
이 구간은 무등산 장불재 샘골에서 증심사천이 만나는 원지교까지 이다.
이 광주천의 전체 길이 24.2Km 중 샘골에서 원지교 사이의 거리는 12km 정도로
광주천 절반을 차지하는 구간이며 상류 쪽에 속해 자연속의 하천 모습을 비교적 유지하고 있다. 제2수원지에서 원지교까지는 7.5km 지방 2급 하천이다.
광주천 상류는 무등산과 장불재, 용추계곡, 마집봉, 매봉, 바랑산과 수레바위산, 황소골, 지장산이 있고 너릿재 터널과 갈미봉, 내남동에는 계치, 칠구재, 분적산, 남동에는 안산, 노적봉, 화산 등의 산과 봉우리가 있어 맑은 물이 계곡에서 흘러나와 광주천으로 유입된다.
발원지인 무등산 샘골은 장불재를 오르는 등산객과 야생동물들이 잠시 쉬면서 갈증을 해소하는 곳이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고경명의, 유서석록‘에는 이곳에 냉천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샘골에서 시작한 물은 중머리재아래 넓은 치마바위를 거쳐 용추폭포를 만들고 제 2수원지에 담겼다가 방죽 밑골을 지나 용연마을을 거쳐 광주 도심으로 흘러 나오기까지 크고 작은 물줄기를 만난다. 먼저 용연마을의 황소골에서 새로운 물줄기를 만나고, 교동교를 지나 화순으로 넘어가는 너릿재터널 부근의 섭지교 물과 만나서 주남마을의 주남제와 태암교 부근의 한투재 물이 합쳐진다.
이 구간의 비교적 더 큰 지천으로는 내지천, 옹산천, 소태천이 있다.
내지천의 시작은 내남도의 내지제이고, 내남동의 남계교 아래에서 광주천과 합류한다. 용산천은 분적산에서 화산마을로 들러오는 계곡수와 골뫼저수지, 제석산 부근 아리랑고개쪽의 물이 만나 용강마을로 들러오는 계곡수와 골뫼저수지, 제석산부근 아리랑고개쪽의 물이 만나 용강마을을 지나 용산교 아래서 광주천과 만난다.
그리고 소태천은 소태동의 소태제에서 시작하여 소태역 부근에서 광주천과 만난다. 현재 용산천과 소태천은 광주천과의 합류부에서 광주천으로 흘러들지 못하고 차집관로를 통해 광주하수처리장으로 보내지고 있다.
소태천과 용산천이 흐르는 지원동은 수원지가 있는 곳이란 뜻으로 옛 지한면의 이름을 따서 1957년 지원동으로 변경하였고 2002. 03. 25일 지원동을 지원1동과 지원2동으로 분동하였다. 광주의 4대 관문의 하나인 남문로를 중심으로 제2순환도로 개설과 소태역, 녹동역, 용산차량기지, 도시철도공사 용산기지사업소가 들어서 교통의 요충지로 되어있다.
광주천이 지나가는 지원2동은 동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태동과 용산동의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90%가 산림과 농지로, 도시 안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정원 풍경과 시골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
법정 동명은 소태동, 용산동, 월남동, 내남동, 선교동, 용연동이다.
무등중학교 사거리를 중심으로 분동한 지원1동은 학교 밀집지역으로 광주남초, 무등중, 지원중이 있다. 남쪽으로는 광주천이 북동쪽으로는 무등산자락이 이어지는데, 주거환경개선사업 및 지하철계통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아지고 모아미래도 A가 들어서는 등 주거 밀집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Ⅱ. 하천환경
1) 수질과 수량
이구간의 수질은 1~3급수. 샘골, 용추계곡, 제2수원지의 물은 1급 수질이지만 수원지 몇 개의 식당과 마을을 지나면서 2~3급수로 변한다. 제 2수원지에 갇힌 1~2급수의 맑은 물은 더 이상 광주천으로 흐르지 않아 용연마을 아래로 내려오면 수량이 거의 없다. 용연정수장과 교동부근의 수질은 육안으로 보기에 깨끗하나 아래 침전물에서는 생활하수의 흔적이 보인다. 황소골과 선교지에서 내려오는 물은 비록 1~2급수지만 그 양이 너무 적어 하천은 늘 말라 있다. 내지천이 만나기전 내지교 주변에도 여전히 수량이 없다.
물이 말라붙은 하천은 쓰레기장으로 변해 소각한 흔적이 어지럽고 악취가 진동한다. 온갖 쓰레기가 가득하며 원지교를 중심으로 위, 아래 수질상태가 차이가 나는데, 원지교에서 상류 방향인 잠수교, 용산교로 갈수록 물은 맑아져서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인다. 하천바닥에는 자갈이 많고 물가부터 넓게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장소에 따라 유속이 다르다. 물속은 맑게 들여다보이며 하천바닥에는 자갈이 많다. 바람에 잔물결이 일렁이며 물 냄새도 거의 없다.
30cm이내의 낮은 물 수위를 유지하고 용산교와 달리 아래쪽은 1m이상의 깊은 웅덩이가 있으며 바닥이 들쑥날쑥하여 깊고 낮은 폭이 생긴다.
2)하천 공간(둔치, 호안, 보, 이용실태)
샘골에서 제2수원지에 이르는 길은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나무와 우거진, 숲으로 뒤덮인 자연그대로이다. 하류와 도심쪽 하천구간에 비해 폭이 좁고 물억새와 갈대가, 메말라 드러난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다. 하천 곳곳에는 쓸려온 쓰레기와 마을에서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쓰레기가 많이 버려져 있었다. 용연마을 정수장 교동교 아래 주변엔 농경지가 많은데 주민들이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 비닐수로를 설치해 바닥이 다 드러난 광주천의 물을 끌어다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안은 콘크리트 벽과 돌로 정비되어있다.
자갈 둔치에서는 소꿉놀이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여름이면 수영하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소태실골에서 내려오는 실개천, 설월여고 뒷산 치마봉 너머 한투재쪽에서 내려오는 실개천의 물이 바로 하수관을 거쳐 하수처리장으로 유입된다.
도심속 생태 문화벨트, 광주천
Ⅰ.지리적, 문화적 특성
이 구간의 마을 중 양림동, 학동, 방림동은 무등산과 하천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이곳은 자연하천 복원사업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하천 생태계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구간이다. 방학교에서 방림교까지의 구간은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억새와 갈대를 비롯하여 수생식물들이 넓게 자리를 잡아 하천의 운치를 더해 준다. 학동 백화아파트 뒤편 설월교 아래로는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정화 처리하여
영산강으로 방류하는 물을 끌어 올려 광주천으로 다시 흘려보내는 복류수를 볼 수 있다. 광주교 일대는 훌륭한 도심 속 생태 공간이라 할 만하다.
나라와 광주 지역의 근, 현대사를 반영하는 역사와 문화, 뛰어난 생태 환경적인 측면이 어우러져 있는 광주공원과 사직공원, 향교가 있고, 그 공간 곳곳에 광주서오층석탑 , 의병장 남일심공순절비, 현충탑 , 419의거희생영령추모비, 박용철과 김영랑 시비, 사직단 등의 문화적 자원이 많다.
특히 문화의 전당이 구도청 자리에 건립되게 되면서 문화의 전당 - 광주천 - 광주공원 - 사직공원 일대를 생태 문화 벨트로 구축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구간은 또한 경전선 철도의 흔적과 역사가 오래된 남광주시장이 있어 사람 냄새 물씬 나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함.
경전선 도심 철도가 외곽으로 이전되면서 쇠퇴일로에 있던 남광주시장은 수산물
전문 특화시장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남광교에서 봉선동 방향으로 난 대남로를 따라 도심철도 폐선부지가 푸른길로 가꿔져 광주천과 연결되는 도심 생태축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일부구간은 주차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서석교에서 양유교 사이의 천변주차장이 그것이다.
1988년에 조성된 이 천변 주차장은 도시공사가 위탁관리하고 있었는데 위탁 기한이 끝나고, 2005년 광주천 자연형 하천정화사업이 진행되면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고 있다.
Ⅱ.하천환경
1) 수질과 수량
중심사천과 합류하는 원지교 일대를 지나 백화아파트 뒷편 펌핑수가 방류되는 시점부터 수질이 눈에 띠게 악화되며 2급수이던 물이 3급수로 떨어진다.
영산강에서 끌어올려진 펌핑복류수가 3급수인데, 방류되는 지점에 특별한 정화기능을 갖추고 있지 않으니 3급이하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설월교 아래 펌핑수가 흘러나오는 지점을 지나면서 수질이 악화되기는 한 양림교까지는 물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만 이후로는 물에 발이 빠질 것을 염려해야 할 정도로 수질 상태가 심각하다. 2004년 여름 태풍 매미의 피해로 인해 학강교 아래 호안이 무너지고 자전거도로가 유실되었던 곳이 호안이 메워지고 바닥도 반듯하게 정비되어 있다. 사행의 물길을 일부러 직강화하려는 시도가 과연 다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좀 더 긴 시간이 에 걸쳐 물길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피고,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남광교 밑 하수관을 비롯해서 남광교, 학강교 등의 하수관에는 비가 오지 않아도 흐르고 있는 물을 볼 수 있는데, 우수관과 하수관이 합류식으로 되어 있는 지금의 체계에서는 오염된 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광주천 수질을 오염시키는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이다. 더구나 유입지점에 오염원을 정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광주천은 항상 수질악화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다.
광주천 수질 개선을 위해서는 하수관 정비와 함께 정화시설이 구비되어야 한다,
2)하천 공간(둔치, 호안 등)
원지교에서 방림교 부근까지 하천변에는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터를 잡아 자연스러운 하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원지교 부근으로는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호안은 자연석으로 되어 있고, 징검다리 보와 낙차공, 여울, 소, 하중도 등 변화있는 다양한 경관을 연출한다. 화단이 조성되어 있던 흔적이 둔치의 곳곳에 남아 있다.
2003년 모니터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벌개미취를 간간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듯한 낮은 둔덕으로 그것을 가늠할 수 있다.
하천 환경에 걸맞지 않은 식물식재는 결국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태할 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설월교를 넘어서면 나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천변주차장이 있는 곳은 시멘트로 되어 있는 둔치와 호안은 물론 물속까지 식물의 모습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어 삭막한 곳이다.
그러나 남광교 주변 호안에는 1990년부터 시작된 자연형 하천복원 사업 과정에서 식재해 놓은 갯버들이 무성하게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중앙대교에서 양유교에 이르는 구간은 2003년부터 재개된 자연형 하천 정화사업의 시범구간으로 다른 구간보다 먼저 변모하기 시작하였는데. 과도한 인공적인 시설 위주의 공사로 치우치면서 환경단체와 전문가, 시민들로부터 많은 지적을 있음.
★ 광주도심 안팎의 저수지 5곳이 물과 숲이 어우러진 생태공원으로 바뀐다.
광주시는 2011년까지 178억5천만원을 들여 도심 5대 저수지의 수질을 5급수에서 2급수로 끌어올리는 등 생태공원으로 만드는 사업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1. 북구 본촌동 양산저수지(5만4893㎡) - 2009년
2. 북구 용봉동 용봉저수지(1만9548㎡) - 2010년
3. 서구 쌍촌동 운천저수지(7만4020㎡) - 2009년
4. 북구 운암동 운암저수지(2만3917㎡) - 2011년
5. 서구 풍암동 풍암저수지(24만4587㎡)- 20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