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두 얼굴: 정심(淨心)과 망심(忘心)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같다
화엄경의 야마천궁보살설계품에는 부처, 중생, 그리고 마음 이 셋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일상인의 마음과 부처, 중생 사이엔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선 둘만 가지고 따져 보는 편이 이해하기 쉽다. 부처와 중생을 놓고서 부처라면 초월적이고 별난 존재라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부처와 중생은 같다. 부처가 미혹하면 중생이 되고 중생이 깨치면 부처일 수 있다. 동일한 것이 길을 잃으면 중생이고 깨달음 쪽으로 향하면 부처이다. 그런 차이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재동자처럼 부처가 무엇일까,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하고 찾아 나선다. 밖으로 뒤져서야 찾아질 리 없어서 곰곰 생각하니 내 속에 있구나 하고 깨닫는다. 하쿠인의 좌선화찬도 중생은 본래 부처이다. 마치 물과 얼음의 관계처럼 이라 말하고 있다. 물이 얼면 얼음이고 얼음이 풀리면 물이듯 중생과 부처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화엄경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 공통된 기본적 사고방식이다.
깨달으면 부처, 헷갈리면 중생이라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부처에도 있고 중생에게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중생이고 제대로 닦여 깨달으면 부처이다. 이래서 부처와 중생 그리고 마음은 하나이므로 다름이나 간극이 없다고 했다.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마음가짐에 따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된다. 마음을 든든히 다잡으면 부처이지만, 그러다가 흐트러지면 중생이 되었다가 심하면 야차(夜叉로)변한다.
요즈음 일본에서는 각종의 흉악한 범죄, 친족살해가 꼬리를 물고 있다. 범죄는 실행하면 죄를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은 누구라도 가짐 직하다.l 누군가를 죽여 버려야겠다는 마음이 일 때가 있지만 다만 실행하지 않을 뿐이다. 그걸 기어코 저지르고 마는 덜 떨어진 사람만이 애처로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불교의 무대에서 보면 저질렀다 해서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불교적 세계관은 악인은 없다고 말한다. 마가 씌었다는 말이 있듯 인간의 마음은 한 순간에 부처가 되고 한 순간에 미치광이가 된다. 멀찌감치서 바라보아서 그런다 할지 모르지만 범행을 거듭하는 사람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지는 않을 터인데....
우리가 흘려 버리기 쉬운데, 인간의 마음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지금 중생과 부처라는 매끄러운 표현을 쓰고 있지만 좀더 극적 대비를 하자면 신과 악마라 해도 좋다. 순식간에 신도 되고 악마도 된다. 그 관건이 마음에 달려 있으니 악마, 신,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평범한 마음은 모두 같다고 해야 할 마련이라고 화엄경은 생각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경우 화엄이 얘기하는 마음은 평상인의 마음이라고 보고 싶다. 철학적으로 현학을 섞어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 우연한 계기에 의해 신도 되고 악마도 되는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액면 그대로 읽는 쪽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삼계(三界)가 허망하다 : 유심게(唯心偈)
이제 마음의 심층을 더 깊이 파 들어가 보자. 십지품에 삼계가 헛것. 다만 이 마음의 조작(三界處妄 0是一心作)이라는 구절이 있다. 유심게라 일컫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삼계는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뭉뚱그린 것이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 색계는 욕망은 없지만 형체를 갖고 있는 세계,
무색계란 욕망도 형체도 없는 영적 세계이다.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지만 꼭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간단히 현실 세게 정도로 알아 둔다.
법화경<비유품(譬喩品)>은 삼계가 불난 집이라 표현했다. 집안에 아이들이 놀고 있다. 어른이 돌아와서 보니 집에 불이나서 기둥이 다 타고 있다. 큰일났다. 애들아 빨리 나오너라고 소리쳐도 애들은 꿈속인 듯 알아채지 못한다. 해서 앙징맞게 만든 수레를 갖고 와선 재미있는 장난감이 있으니 이걸 갖고 놀아라. 얼른 나와 그래도 애들은 불난 집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장자화택의 비유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불난 집은 인간의 삶의 모습을 상징한다. 발등에 불이 붙었는데도 모르고 태평한 인간.../
법화경은 인간의 번뇌를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갈라서 이 삼독을 불난 집에 비겨 설하고 있다. 법화경은 실제적 성격을 가지는 까닭에 못 배운 사람도 들으면 무엇인가 깨치는 바가 있지만, 화엄경은 꽤나 철학적인 어투로 말해서 난해해 보인다.
같은 이야기를 화엄경은 삼계가 허망하다고 읊었다. 허망이란 참 존재가 아니라는, 세간의 일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무상을 이해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그것을 몸으로 절실히 깨닫기가 어렵다. 깊은 병이 들거나 가족이 죽어 나가거나 그런 일들이 있어 점차 무상을 체득하게 해준다.
이 삼계는 무상하다. 거짓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자나 환영 같은 것이다. 실상을 잘 들여다 보면 이 모든 장난이 마음이 시키는 일임을 알 수 있다. 화엄경의 한마음은 본래 무슨 깊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그저 보통 평범한 범부의 마음을 가리킨다. 평범한 내 마음이 세계를 만들어 낸다. 마음이 현실을 거짓 모습으로 그려 낼 따름이라는 뜻이다.
후의 화엄교학은 이 유심게의 한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그래서 이걸 좀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종밀이 해설하는 네 가지 마음
불교에선 보통 마음을 네 종류로 파악한다. 당나라 중엽 화엄 제5조로 활약한 규봉종밀은 선교일치를 제창한 사람이다. 선원제전집도서에서 그는 네 종류의 마음을 이렇게 풀었다.
하나는 홀리다야, 육단심이라 부른다. 내 몸의 오장가운데 있는 심장이 이것이다.
둘은 연려심, 팔식을 말한다. 각각이 능히 대상을 연려하는 까닭이다.
셋은 질다야, 집기심이라 부른다. 제 8식만 가리킨다.
종자를 집적하여 의식과 행동을 일으키는 까닭이다.
넷은 건율다야, 견실심 또는 진실심이라 부른다. 이것이 참마음이다.
여기에서 홀리다야는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육단심 즉 십장을 말한다. 연려심은 의식현상이다. 보통의 마음을 가리킨다. 질다야 역시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법상봉의 제 8아라야식이 여기에 해당하며 집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건율다야도 마찬가지로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이다. 절대불변의 진실심을 일컫는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심장인 육단심을 제외하면 마음이 세 종류가 된다. 셋 가운데 연려심과 집기심은 생멸심이라서 사심이라 하고, 마지막 진실심은 절대불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심이라 부른다. 이심은 불생불멸하는 마음을 뜻하면 사심은 생멸하는 마음이란 뜻이다.
종밀이 설하는 네 종류의 마음을 이렇게 보면 현상하고 생멸하는 마음인 사심과 불생불멸을 보이는 이심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망심(妄心)의 움직임과 정심(淨心)의 활동
타쿠안소오호오는 본심과 망심, 유심과 무심으로 갈라서 본다. 우선 본심과 망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심이란 둘로 분열됨이 없이 전신전체로 펴 나가는 마음을 말한다. 망심은 생각이 어딘가에 붙들려 한 곳에 고착된 상태를 가리킨다. 본심이 굳어져 엉기면 망심이 되어 버린다.
한 군데 붙박힘이 없이 온전하게 발휘되는 마음이 본심인 데 비해, 붙박혀 집착된 마음은 망심이라 했다. 비유로 말하면, 본심은 물이고 망심은 얼음이다. 본심은 물처럼 고착되지 않고 유동하는데 망심은 물이 얼어 굳어진 얼음처럼 딱딱하다. 얼음으로는 세수를 할 수 없듯 마음이 굳어지면 딱하게도 어찌 해볼 수 없고, 쓸데도 없는, 미혹한 망심이고 만다.
타쿠안은 본심을 무심, 망심을 유심으로 갈라 붙여 설명하고 있다.
유심은 망심과 같다. 글자 그대로 있는 마음 즉 어디엔가 한 곳에 생각이 묶여 있는 곳이 있음을 나타낸다. 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분별사안이 잇따르게 되므로 유심이라 한다. 무심은 앞에서 말한 본심처럼 굳어지고 고정되는 일이 없어 분별도 사안도 없는 마음이다. 온전히 전체로 뻗어 나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한다.
유심=망심, 무심=본심임이 분명히 드러났다.
유심은 생각이 한 곳에 붙박혀 분별·사안을 일삼는 마음이나, 무심은 분별도 없고 사안도 없는 마음, 곧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둘 데 없는 마음, 거처가 없어서 무심 또는 무념이라고도 한다. 한 곳에 붙잡히면 자유가 없다. 마음속에 생각이 또아리 틀고 있으면, 무얼 들어도 바로 들리지 않는다. 마음에 걸리거나 맺힌 일이 있으면 보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니다.
타쿠스이 카나 법어는 이렇게 말한다.
두 종류의 마음이란 소위 정심과 망심이다. 망심이라 하면 분별망상의 십념이고, 정심이라 일컫는 것은 분별망상이 나오는 기원이다. 해서 정심은 불성에 다름아니다. 정심과 망상이 본래 같은 것이나 둘로 나뉘었다. 말하자면 등과 빛의 관계라고나 할까. 등이라는 본체가 있는 까닭에 빛이 있듯 정심불성의 본체가 있어서 불별망상의 망심이 있다. 정심은 체이고 망심은 용이다.
여기서는 정심과 망심으로 나누었다. 정심은 타쿠안이 말하는 본심,무심에 해당하고 망심은 유심에 대응한다. 정심이야말로 망상의 근원인 불성이라 했다. 정심이니 망심이니 하지만 본래는 같은 것이었다. 등불의 비유를 빌면, 정심은 등, 망심은 빛이며 정심은 체, 망심은 용(작용)이라는 것이다. 정심은 천지가 아직 열리기 이전부터 변함없이 옛적 석가에게나 지금의 범부에게나 초목금수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갖추어져 있는 물건이다. 반야심경이 말하는 불생불멸 부증불감도 바로 이 정심을 곧바로 가리키고 있다.
마음에 두 종류가 있음을 이제까지 살펴보았다. 이 가운데 망심의 구조를 주로 밝히려는 것이 법상종이고 정심의 활동을 설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 화엄종이다. 법상종은 인간을 현실태에서, 화엄종은 이상태에서 파악한다. 법상종은 인간의 마음이 번뇌에 뒤덮여 있다고 보는데 화엄종은 그것이 본래 청정하다고 생각한다. 법상종의 가르침이 유식설이다. 마음을 여덟 종류로 쪼갠 다음 특히 생명의 근원이자 번뇌의 뿌리를 제8아라야식으로 설정해 마음의 구조를 밝혀 나간다.
-카마다 시케오- 화엄의 사상 한영조 역 / 고려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