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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일 7월4일(월), 상트페테르부르크-> 헬싱키 시내관광 ->투루크 ->Silja Line
* 헬싱키 관광 : 원로원 광장, 마켓광장, 우스펜스키 성당, 암석교회, 시벨리우스 공원
새벽 2시경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에 도착하니 극도로 피곤했다. 이동거리가 멀고,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이번에는 천둥소리와 세찬 비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4시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호텔 로비에서 빵과 우유, 과일로 가벼운 식사를 하고 5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정해진 시각에 공격개시선을 통과하기 위하여 부대를 기동 시키는 군사 작전을 행하는 듯 했다.
자정 무렵부터 내리던 비는 러시아-핀란드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았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차창 밖은 짙은 안개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국경에 도착하여 잠시 차에서 내려 보니 세찬 비바람과 낮은 기온 때문에 저절로 몸이 움추러 들었다. 출입국 심사가 시작되지 아니하여 우리는 다시 버스로 돌아와 버스 내에서 1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몸집이 뚱뚱하고 키가 작은 여자 관리 한 명이 버스에 올라왔다. 그녀는 우리 일행을 한 사람씩 훑어보며 여권 사진과 얼굴을 대조한 후 내려갔다. 다음은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출국 심사대로 나가 개별적으로 출국 심사를 받았다. 국경에서의 출국심사과정도 여전히 느리고 불편했지만, 그래도 모스크바 공항에서 보다는 쉽게 끝났다. 핀란드 쪽의 입국수속은 매우 간편했다.
핀란드 영내로 접어들면서부터 비는 그치고 날이 개이기 시작했다. 차창으로 울창한 자작나무 숲들과 넓은 초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별로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풍경이다. 버스는 계속하여 울창한 숲과 넓은 초원을 가로 질러 헬싱키를 향해 달렸다.
낮 12시경에 예정대로 헬싱키 원로원 광장에 도착 했다. 그곳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 여, 대학원 유학생, 그래픽 디자인 전공 )로부터 광장의 역사와 주변의 건물들과 마켓 광장, 그리고 자신이 현재 핀란드에서 살고 있으면서 느낀 점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로원 광장은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 황제의 명령으로 1818년부터 30여년이 걸려 완성되었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의 동상이 서 있다. 100여년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의 수도 중심에 러시아 황제의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는 핀란드를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하여 의회의 구성과 핀란드어 사용을 허용하는 등 관용정책을 베풀었기 때문에 핀란드 독립 이후에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광장을 중심으로 헬싱키 대학교, 정부청사와 의회 및 각종 관공서들이 모여 있다고 한다. 우리는 겉모습만 대충 둘러보고 광장에서 이곳에 왔었노라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광장의 북쪽 계단을 오르면 헬싱키대성당이다. 러시아 지배하에 있던 1852년 건립된 이 성당은 오늘날 헬싱키의 상징적 건물이며, 핀란드 루터교회의 총본산이다. 왕궁처럼 보이는 이 거대한 성당은 밝은 녹색의 돔 지붕과 흰색의 열주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주요 국가적 종교행사나 전시회, 연주회 등이 열린다고 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웅장한 외양과는 달리 장식이 거의 없고, 단순해 보인다. 투박한 나무의자와 강단, 파이프오르간 등 매우 간소하다.
성당을 나와 우리는 골목길을 걸어서 바다가 보이는 마켓 광장으로 이동했다. 체리와 산딸기, 블루베리 등 각종 과일과 생선 요리, 전통 장식품, 민속공예품, 털모자 등을 파는 포장 가게들이 줄지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게를 기웃거리는 손님들과 물건을 팔려는 상인들의 모습은 우리나라 어느 재래시장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우리는 산딸기와 체리를 사서 일행들과 나누어 먹으며 시장을 구경했다.
마켓 광장에서의 짧은 자유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까지 한참을 걸었다. 겨울이 길고 추운 이곳에서는 야채와 과일 등 식자재가 매우 부족하다고 한다. 헬싱키 사람들은 순록고기와 양고기, 검은 호밀 빵과 우유 등을 많이 먹는 편이라고 한다. 우리는 오늘 핀란드인의 장수비결이라는 검은 빵과 양고기, 생선 요리를 맛보았다. 나에게는 모든 음식이 맛있었다. 현지음식을 맛보는 것은 해외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러나 단체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처럼 큰 맘 먹고 나온 해외여행에서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점심 식사 후에 우리는 광장에 다시 모여 우스펜스키 성당으로 갔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던 1868년 건립된 성당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라고 한다.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 붉은 벽과 양파 모양의 돔, 그리고 십자가가 돋보였다. 조금 전 보았던 헬싱키 대성당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루터 교회인 헬싱키 대성당은 단순하고 실용적으로 보이는데 비해 러시아 정교회인 우스펜스키 성당은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다. 루터 교회의 내부 벽에는 성화가 없는 반면 정교회 내부의 벽들은 온갖 성화로 가득하여 빈 공간이 거의 없다. 대조적인 두 성당을 보고나니 오랜 역사를 통하여 분화해 온 교회의 변천사에 대하여 알아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우스펜스키 성당을 나와 우리는 암석교회를 가기 위하여 헬싱키의 가장 번화가인 만네르하임 거리를 지났다.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장군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거리라고 한다. 만네르하임 장군은 1918년 핀란드 혁명에 참가하여 임시정부의 집정을 지냈으며, 소련과의 국경에 견고한 요새선( 만네르하임라인 )을 구축하여 독립 후 두 번의 소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핀란드 대통령이 되었던 인물이다.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는 만네르하임 장군의 기마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스웨덴 귀족 출신이었으나 핀란드의 독립과정에서 보여준 핀란드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애국심 때문에 지금도 핀란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 서울이나 주요 도시에도 우리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독립투사나 애국지사, 대한민국 건국공로자, 근대화 및 민주화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한 거리를 많이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같이 북한으로부터의 심각한 안보위협과 우리 내부의 이념갈등 등으로 흔들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될 것 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만네르하임 거리를 지나 1969년에 만들어진 암석교회에 도착했다. 암석교회( 암템펠리아우키 교회)는 겉모습 보다는 내부 예배당의 구조가 너무 아름답다. 언덕배기에 있는 거대한 암반을 폭약으로 폭파하여 공간을 만들고 조각난 바위들이 떨어져 나간 암벽을 그대로 벽으로 둔 채로 바닥을 다듬어 좌석을 만들고, 그 공간 위로 거대한 원형 유리 천정을 덮어 자연광이 잘 들어 올 수 있게 만들었다. 실내의 의자도 최대한 단순하게 제작했고, 불규칙한 돌 표면의 아름다움이 더욱 돋보이도록 장식도 모두 생략했다. 유리 천장의 가운데에는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둥근 구리판을 붙여 파이프 오르간의 음향이 가장 잘 반사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본 예배당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포근한 예배당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기독교 교회도 이렇게 아름답고 아늑한 예배당을 짓는다면 나부터 그 교회를 자주 찾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를 나와 우리는 시벨리우스 공원에 갔다.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인 장 시벨리우스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1865년에 태어나 헬싱키 음악원과 베를린, 비엔나 등지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헬싱키로 다시 돌아 온 그는 당시 처절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음악으로 러시아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는 조국 핀란드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여러 곡의 음악에 담아 표현했고,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34세가 되던 1899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핀란디아”는 조국 핀란드의 신비스러운 자연과 가혹한 운명을 깊이 공감하는 민족의 소리로서, 민중으로 하여금 강렬한 조국애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생전에 이미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였고, 핀란드 정부는 그의 작품 활동을 장려하기 위하여 평생 연금과 저택을 제공하는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배려 속에 한적한 전원생활을 누리며 자연을 노래하는 수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작곡했다고 한다.
시벨리우스의 사망 10주년인 1867년 그를 기리기 위해 공원을 만들고 기념 조각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푸른 공원 숲 속에 있는 거대한 기념 조각과 이 조각의 바로 옆 바위 언덕위에 놓인 시벨리우스의 두상을 감상했다. 기념 조각은 24톤이나 되는 600여개의 은빛 강철 파이프로 만들어졌다고 하며 파이프는 모양에 따라 핀란드의 산과 나무, 호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이 강철 파이프들은 생전의 시벨리우스가 만들었던 음악처럼 자연의 소리를 음악으로 만들어 낼 것만 같다.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안익태가 일제하의 조국을 생각하며 해외 망명지에서 작곡한 “코리아판타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예술가에도 조국이 있고, 조국을 향한 지극한 사랑은 예술로 승화되어 명작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오후 3시경에 헬싱키를 떠나 북쪽의 투루크로 떠났다. 다시 날씨가 맑게 개었다. 백야 때문에 오후 늦게까지 대낮처럼 밝았다. 투루크에서 크루즈 Silja Line을 타면 밤사이에 발트 해를 건너 다음 날 아침 스웨덴의 스톡홀름 항에 도착한다. 크루즈에는 수 천 명이나 탄 모양으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우리는 6층 캐빈(선실)을 배정 받았다. 우리 캐빈에서는 작은 둥근 창으로 바다가 보였다. 창 밖에 비친 발트 해는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저녁노을 속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핀란드를 바라보며 어쩌면 핀란드는 우리와 닮은 점이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강대국 사이에 놓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과거 특정 시기에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치욕의 역사도 그렇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전개했던 점도 그렇다. 각각 독립 후 지금까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공업화에 성공한 점이나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세계 상위권에 오른 점도 그렇다. 두 나라 모두 치열한 무한 경쟁의 국제사회에서의 생존전략으로 강소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도 닮은 점인 것 같다.
그러나 경제규모나 복지 수준 등 여러 분야에서 우리와 다른 점도 많다. 핀란드의 영토는 한반도의 1.5배나 크지만 삼림지대가 국토의 70%, 호수가 10%를 차지한다. 전체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한 서울의 절반 수준이고 수도 헬싱키의 인구가 60 만 명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정도다. 심각한 경제 불황을 겪었던 1994년 이후 저물가, 고성장 정책으로 침체를 극복하고, 과감한 연구개발투자( OECD 국가 중 스웨덴 일본에 이어 3위)로 과학기술 연구의 선두적인 국가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일찍이 북유럽의 사회복지 모델을 기초로 1937년에 국민연금법을 제정하고, 모성 급여보험, 근로자산재보상보험 제도를 만들어 모범적인 사회보장 제도를 유지 운영하고 있는 점도 큰 차이점 중의 하나다. 인구 500만,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 수준의 핀란드와 인구 4천만,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수준의 우리와를 동등하게 비교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잘 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핀란드는 대외적으로도 1992년 러시아와의 군사동맹관계를 폐기하고 1995년 EU에 가입하여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안정된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점도 남북한의 대치와 주변 4강의 이해상충으로 인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사정과는 다른 점인 것 같다.
IT강국, 디자인 강국, 세계최고 수준의 복지국가, 노키아의 성공과 실패, 핀란드 사우나 등 오늘날 핀란드를 상징하는 여러 수식어들을 떠 올리며 핀란드를 떠났다.
첨부 동영상 :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