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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편(Catholic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인류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도덕과 종교가 강세를 가진 이유가 무엇일까? 죽음과 구원일까? 아니면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간의 고민일까? 소크라테스와 사키야무니는 후자일 것인데, 권력자들이 죽음을 구실로 신성의 체계를 세우고자 하고 그에 편승한 몇 몇 성직자가 그와 부화뇌동했으나,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이뭣꼬” 였다. 은둔의 수사이든 서원하는 수도사이든 후자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은 숙명적인 문제이다. 죽음은 다음 차원이다. 결국 종교성을 통한 조직과 권력이라는 정태적 종교가 있고, 다른 한편 삶의 진솔한 고민을 다양하게 문제삼은 동태적 종교가 있다. 전자에는 교황권에 집중하고, 후자에는 진솔한 질문에 대해 답하려 노력한다.
외곽은 수도 방식의 정립은 서방이든 동방이든 비슷하다. 보디다르마/달마(達磨, Bodhidharma, ?-528 ?)와 베네틱토(Benedict, Benedictus de Nursia, 480경-543/547). - 인간이 이쯤에서 제도적 정태적 방식에 대해 정립하는 중이라는 점이다. 동태적은? 아직도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것인데, 수도원들과 형제원(프란체스코)도 있었고, 결사체(société)들도, 프랑마송(franc-maçon)도, 전선(인민전선)도, 고원도 있다. (50OMB)
* 러셀의 중세편을 읽고 난 뒤에 권할 책이 있다. 이병창, 자주성의 공동체(2017)(먼빛으로). 이 책에서는 ‘마르키온’을 주목할 수 있다. 러셀에서는 앞에서 나온 이사야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50OMB)
제5장 제5-6세기(철학) 550
5세기는 야만인이 침입하고, 서로마제국이 몰락한 세기이다. 403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죽은 후로는 철학다운 철학이 나오지 않았다. (550)
성 패트릭(Saint Patrick)이 아일랜드인들을 개종시키고, 기독교를 믿게 한 것도 이 세기 중엽의 일이다. 유럽세계 전반에 걸쳐 게르만의 왕국이 계승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역마(驛馬)는 폐지되고, 여러 대로(大路)는 모두 황폐화되었으며, 전쟁은 대규모의 상업을 중단시키고, 삶의 무대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다시 지방분권화되었다. 중앙집권화된 권위는 단지 교회에만 보존되어 있을 분이었는데, 그나마 여기서도 여러 가지 난점을 안고 있었다. (550) [교회의 지방권력 조직화의 정비는 프랑스에서 루이 13세의 리슐리에 추기경에 의해서 였다. 위계의 권력은 전국적 연결망위에 성립한다. (50OLE)]
410년 고트족 추장 알라릭(Alaric)은 로마에 침입하였다가 그해에 죽었다. 그러나 동고트의 추장 오도아케르(Odoavker, Odoacre, roi des Hérules)는 476년에 서로마 제국을 멸하고 493년까지 지배하다가, 또 한사람의 동고트인의 배반으로 학살되었는데, 이 모반자가 526년까지 이탈리아 왕이 된 테오도리쿠스(Theodoric le Grand, Theodoricus, 451/3경-526)이었다. ... 전설로도 중요한 인물 .. 니벨룽겐의 노래 속에 그는 “디트리히 폰 베른”으로 등장한다. (550-551)
한편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자리를 잡고, 비시고트족은 프랑스 남방에, 프랑크 족은 프랑스 북방에, 각각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게르만 민족이 본격적으로 침략해 들어올 무렵에 흉노가 아틸라(Attila) 영도아래 쳐들어 왔다. .. 흉노가 451년 골 지방에 침입 ... 아틸라는 로마로 침입을 위해 이탈리라 침공 .. 그런데 그 다음해 죽었다. (551)
이 혼란기에 교회는 도성인신(체화 Incarnation)에 대한 복잡한 논쟁으로 ... 이 논쟁의 중심인물은 두 사람의 성직자 치릴(Cyril)과 네스토리우스(Nestorius)였다. 전자는 성자로 후자는 이단으로 단정되었다. (551) [플라톤에 의하면 체화(개체화, 사물화)는 이야기(mythos)이며, 플로티노스에 의하면 변증법이다. 벩송과 들뢰즈에서 실재성의 현실화(양태, 양상이 아니라)이다. - 내가 보기에 네스토리우스는 플라톤주의에 시릴은 바울에 가깝다. (50OLE)]
동일성을 주장하던 성 치릴로는 광적인 열의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대주교로서 .. 알렉산드리아의 거대한 식민지에서 유대인들을 학살할 것을 선동하였다. 그가 명성을 얻게 된 주요한 동기는 히파티아(Hypatie, Ὑπατία, 370-415)에게 사형을 가한 일이었다. ... 그녀는 “마차에서 끌어내려 발가벗겨진 몸으로 교회에 끌려가 독경사(讀經士) 피터와 그 밖의 사납고도 무자비한 광신도들의 손에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그녀의 살을 예리한 굴껍질(Oystershells)로 도려내고, 경련을 일으키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지를 불꽃 속에 던졌다. 이와 같은 심문과 형벌이 의롭게 진행되어 때에 알맞게 일을 끝냈다” (기본, 로마제국의 흥망사) (552) - [철학사에서 최초의 여성 철학사로 꼽히고, 수학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히파티아는 순교자이다. - 독단(무지)의 사악함은 권력의 폭행으로 표시된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두 위(位)가 있으나 하나는 인간의위요 또 하나는 신의 위라고 주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네스토리우스는 성모를 신의 어머니라고 부르기를 거절하였다. .. 431년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서방 주교들이 먼저 모여, 나중에 오는 자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그고 공의회를 진행시켰다. (553)
이 공의회 결과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 네스토리우스파는 몇 세기 지나서 중국에서 그 세력이 매우 강력하게 되어, 확고부동한 종파로 형성될 듯한 기세를 보였다. 그리고 16세기에 와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에 의해 인도에도 전파되었다.(553)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리는 이 파는, 깐수 정일수에 의하면 신라에도 전파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에베소에서는 아르테미스(Arthemis) 여신 대신에 성모를 대치하는 일이 생겼으나, 대치된 이 여신에 대해서도 성 바울 때와 마찬가지의 열띤 숭상을 받고 있었다. 성모가 거기(에베소)에 매장되었다고 주장되었다. 성 치릴로가 죽은 후에 449년 에베소에서 공의회를 열어 이 승리를 굳히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네스토리우스 이단과 상반되는 입방을 가진 또하나의 이단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곧 단성론(Monophysite) 이단이다.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의 성품만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황제[발렌티니엔 3세(Valentinien III, 419-455, 재위425-455)]는 이 공의회를 옹호.. 교황[레오 1세(Léon Ier)]은 반대하였다. 교황 레오는 .. 451년에 칼케돈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단성론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도성인신(道成人身, Incarnation)에 대한 정통적인 교리를 확립하였다. 에베소 공의회는 그리스도는 한 위 뿐이라는 것을 결정했으나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두 성품(nature)으로 인성과 신성이 있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553-554) [신의 위격 결정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서 결정한 합의물이다. 이 속에 존재론의 문제가 들어있다. 이데아의 동일성이 개체에 어떻게 들어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플라톤은 분유(나누어가짐)하고 있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동일성)이 질료 속에 있다고 했으며, 플로티노스는 연결성은 있다고 한다. 벩송은 이데아의 동일성은 없고 개체성의 생성의 다양성이 있다고 한다. 벩송의 논법은 동일성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지만 이질성 자체가 신성이 된다. (50OLE)]
6세기에 문화사상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보에티우스(Boèce, Boethius, 470경-524),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Justinien Ier, Iustinianus, Ἰουστινιανός, 483-565)[재위 527-565], 베네딕토(Benedict), [제64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Grégoire Ier, 540경-604, 재위 590-604) 네 사람이다.
테오도리쿠스(Theodoric le Grand, Theodoricus, 451/3경-526)[오스트로고트 왕, 동고트 왕 재위 471-526])은 아리우스파에 속해 있었지만, 끝까지 교회와 화목을 유지해 나갔다. [동로마 황제]인 유스티아누스(Justinien Ier, Ἰουστινιανός, 483-565)[재위 527?-565]는 523년에 아리우스파를 배척하였는데, 이것은 테오도릭에게 두통거리였다. .. 그는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각료이며 원로인 보에티우스를 감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했다. (554)
보에티우스는 특이한 인물이다. ... 사람들은 그를 헌신적인 기독교인으로 간주하였으며, 교부(敎父)의 한 사람처럼 인정해 왔던 것이다. 524년 그가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쓴 철학의 위안(Consolation of Philosophy)은 순전히 플라톤적이었지만,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555)
이 작품은 운문과 산문을 섞어서 쓰고 있다. 보에티우스가 독백을 할 때는 산문으로, 철학이 답할 경우에는 운문으로 쓰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와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Vita Nuova.. (555)
이 책[철학의 위안]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참철학자로 ... 스토아학자들이나 에피쿠로스 철학자들들을 주제넘는 자들로 쓰고 있다. .. 우정은 “가장 고귀한 것” 등등 스토아학파의 것과 일치되는 도덕관이 많다. .. 티마이오스편도 설명.. (555)
다음에 그는 범신론(汎神論)을 다루고 있다. .. “신성을 얻은 사람은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한 사람은 신이다. 그러나 신은 본질상 하나이다. 다만 이 신을 분유함으로써 많은 신이 있을 수 있다.” .. “신의 본체는 선(善)으로 되어 있다.” (556) [플라톤의 분유(나누어가짐)을 신학에 연결하면 범신론이 된다. 또는 선 이데아는 사물들과 별개라는 점을 받아들이면 신의 절대성과 완전성이 나오기도 한다.]
거기에는 철학적인 냉철함이 지배하고 있으며, 그 정도가 지나쳐 만일 이 책이 좋은 환경 속에서 써진 것이라면, 그 태도를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책은 사형 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기다리는 감옥 안에서 쓴 것임을 감안할 때 그 태도는 플라톤의 글에 나타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취한 태도처럼 놀라운 것이다... 이 시의 표현된 철학은 포프(Pope)의 인간론(Essay on Man)과 비슷한 점이 있다. (556)
그대가 만일 깨뜻한 마음으로,
시인의 법도를 찾으려고 하면,
저 항공에 눈을 놀리고
별들이 평화롭게 자기 궤도(軌道)
위에 있는 것을 보라
...
꽃피는 시절은 봄 향기를 뿜고
타는 듯한 무더운 여름은 곡식을 익히고
가을엔 과일이 열린 나뭇가지가 축늘어지며
내리는 비는 한겨울의 습기를 마련한다.
...
이 큰 사랑을
만물이 다 나눠 갖고 있나니
갈급한 마음으로 선(善)을 찾아가리라.
처음에 떨어져 나온 근원으로
돌아가라 사랑이 이끌어
실재의 처음 원인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세상 만물 중에
지탱해 나갈 것이 없으리라. (557-559) [불승(佛僧)의 게송과 같은 시인데, 결기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시적 아름다움에 몰두한 것 같다.] / [보디다르마, 달마(達磨, Bodhidharma, ?-528 ?) - 팔을 끊어 바친 혜가(慧可, 487-593) 달마 찾아가다. 이후 육조 혜능(慧能, 636-713)에 이른다]
보에티우스는 끝까지 테오도릭의 친구였다. 그의 아버지는 통령(統領)었으며, 그도 통령이었다. 그리고 그의 두 아들들로 통령이었다. 그의 장인인 심마쿠스(아리우스파이며 암브로시우스와 논쟁했던 심마쿠스(Quintus Aurelius Symmachus, 345경–402)의 손자)도 고트왕의 궁전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테오노릭은 보에티우스로 하여금 화폐 개혁을 하게 하였으며, 해시계나 물시계 등의 장치를 만들어 순박한 야만인 추장들을 깜짝 놀래켰다. 그 이전의 2세기 동안이나 그 이후의 10세기 동안에, 지식층에 있는 유럽인들 가운데, 그처럼 미신과 광신주의에서 떠나 있던 사람은 없다고 하겠다. .. 그의 견해는 고결하고, 사심(私心)이 없었으며, 숭고하였다. (559)
중세기에 보에티우스가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그가 아리우스파의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는 사실상 성자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치릴로는 성자였지만 보에티우스는 성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559)
유스티아누스는 황제가 되어[527년] 565년까지 통치하였다. 이 오랜 기간 동안 그는 선정(善政)도 다소 베풀었지만, 악한 일을 많이 하였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로마 법전 때문 ...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이것은 그가 즉위한 지 2년 후에 아테네의 아카데미 학원을 폐쇄한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529]. (559-560) [철학이 중세 암흑기로 들어간다고 할 때, 이해를 기점으로 삼고 다시 복원되는 것은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서 인데, 이 학자들도 동로마 멸망 후에 이주한 학자들에 의해 부흥된 것이다. (50OLI)]
유스티아누스[황제]는 532년에 다른 사업을 착수하였는데, .. 성 소피아 사원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 거기에는 유스티나누스와 그의 왕후 테오도라(Theodora, ?-548)의 초상화도 있었다. ... 테오도라는 단성론파에 기울어진 경향이 있었다.(560) [단성론 ... ]
황제 자신은 오직 「세 개의 이단 문서」의 문제를 제외하면 흠이 없는 정통파였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 칼케돈 공의회에서는[451년] 네스토리아스파의 혐의를 받고 있던 교부 세 사람을 정통파로 정하였다. 서방교회[교황]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공의회에 의거하였다. 그런데 황후는 자기 감정에 따라서 교황을 박해하였다. .. (560)
유스티아누스[황제]는 힘이 닿는 대로 서로마 제국을 다시 정복하려고 하였다. 그는 535년에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서 처음에는 고트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 이 전쟁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 로마는 다섯 번이나 점령되었다. 비잔티움 인들에게 세 번, 고트 족에게 두 번 .. 로마는 조그마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61) [현재에도 앙글로 색슨의 흑해지역보다 지중해는 자연적 조건상 먹거리와 부(富)가 많다. 북부의 공업이 남부의 농업을 지배하에 두려고 하는지 생각해보아야 신자유주의와 그리스 경제 파탄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만의 논리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50OLI)]
그러나 .. 그는 골 지방을 되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거리 관계도 있었지만, 프랑크인들이 [로만 카톨릭 아래 있는]정통파라는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561) [프랑스 사에서는 황제권이 미치지 않은 이유로, 또한 교황권의 세속권의 강압 없었던 이유로, 귀족들의 장원경제 즉 중세 봉건이라는 분권화 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전통은 현재 프랑스의 89개 도(les departments)의 지위에도 영향이 있다. 중국이 봉건이 아닌 이유로는 중앙의 천자권이 엄연히 실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황제권이 아니라도 왕권 중심의 중앙정부가 있고 지방 자치권이 없어서 분권화 봉건제도라고 하기는 부족하지만, 노예제와 노비가 있다는 경제적 측면에서 봉건제일 수 있다. ]
유스티아누스가 죽고 나서 3년 후인 568년에, 이탈리아는 기세가 등등한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았다. 랑고바르드(Langobard)족의 침략이 바로 그것이다. 랑고바르드와 비잔티움 사이의 전쟁은 거의 샤를마뉴 대왕 때까지, 간간히 200여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로마는 이름만 비잔티움에 속해 있을 뿐이었으나, 교황들도 동로라 제국의 황제들을 존경하였다. (561)
제6장 성베네딕토와 그레고리오 대교황 562
6세기와 그 후 몇 세기 동안에 걸쳐 끊임없이 계속된 전쟁으로 파생된 문명의 엄청난 쇠퇴 중에서도 고대 로마문명을 불완전하게나마 보존할 수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교회 때문이었다. (562)
교회의 역할 중에 세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 수도원 제도의 발달, 둘째로 교황권의 증대, 특히 그레고리오 대교황 밑에서의 영향력 증대이며, 셋째 선교를 통해 이루어진 이교도인 야만인들의 개종이다. (562)
수도원 제도는 4세기경에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수도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쓸쓸한 은둔자의 것이요, 하나는 승원(僧院, 수도원)이다. ..첫째 행태로서, 이집트 태생인 성 안토니우스(St Antoine, 250경-356)는 270년경에 세상을 등지고 15년 동안이나 자기 집 근처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냈으며, 그후 20년 동안 멀리 사막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 305년경에 가르치기 위해 사막에서 나와 은둔생활을 찬양하였다. (562)
다른 한 이집트인 파코미우스(Pachomius)가 처음으로 수도원을 세웠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공동생활을 하여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식사와 종교적인 행위를 같이 하였다. .. 파코미우스가 창시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시간을 육신의 유혹과 싸우는데 소비하지 않고, 주로 농사를 짓는 일에 많이 사용하였다. (563)
이 무렵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도 수도원 제도가 생겼다. 여기서는 이집트에서보다 고행이 더욱 심하였다. [시리아에서] 성 시메온 스타일라이테(St Simeon Stylites) ... 그리스 세계에 들어가게 된 것은 .. 성바실리우스(saint Basile, en gr. Basileios, 330-379)를 통하여(360년경)이루어 졌다. 그의 수도원은 금욕적인 경향이 덜하였다. 그들은 고아원이나 소년들을 위해 학교도 세웠다. (563)
수도원 제도는 처음에 완전히 교회 조직 밖에서 자발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 제도와 처음으로 정통교회를 융합시킨 것은 성 아타나시우스(St Athanasius)였다. 수도사들은 성직자라야 한다는 규례가 생긴 것도 그의 영향이 일부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방에 도입된 것은 그가 339년에 로마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성 제롬((Jérôme de Stridon, saint Jérôme, 347-420)은 이 제도를 크게 발전시키고,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 354-430)는 이 제도를 아프리카에 도입하였다. 투르의 성 마르땅(Saint Martin de Tours, 316-397)은 이 수도원을 골 지방에서, 성 패트릭(St Patrick, 385경-†461)은 아일랜드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오나의 수도원은 566년에 성 콜롬바(Columba, 521-597)가 세웠다.
참된 수도사와 안락한 수도원을 찾아드는 사람들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후자의 사람들은 ... 교회회의 또는 공의회까지도 이단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에베소 회의(공의회가 아니다)는 수도사들의 위협으로 단성론의 교리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이 교리는 교황의 반대가 없었던들 영구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546)
성 제롬이 그의 도서실을 사막에 설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죄로 생각하게 되었다. (546) [여기도 불립문자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
서방 수도원 제도를 설립한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 베네틱토(St Benedict, 480경-543경)이다. 그는 “베네딕토 교단”의 창시자로서 ... 20세 때 로마의 사치와 안락을 피하여, 어떤 고적한 동굴을 찾아서 3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520년경에 유명한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창설하고 “베네닉토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였다. (564)
수도원장은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신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수도사들에 대하여 거의 독재권을 행사하였다. .. 베네딕토 교단은 나중에 학문의 전당으로서 알려지게 되었지만 ... (565)
조직체란 그 자체의 생리를 갖고 있어, 창시자의 의도와는 독립된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가톨릭교회이다. 가톨릭교회는 예수나 바울까지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베네딕토 교단도 하나의 작은 보기이다. 수도사들은 가난과 순종과 순결의 서약을 하였다. 기본(Gibbon)은 이에 대해 “나는 어디선가 어떤 베네딕토 수도원장의 솔직한 고백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가난을 서약함으로써 1년에 1만 크라운의 돈을 받게 되었으며, 순종을 서약하여 최고 군주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순결하겠다고 서약한 결과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앞의 책, 37장 57) .. 몬테 카시노의 도서관은 유명하며, 후세에 와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 베네딕토 교단의 학문적인 연구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이득을 얻게 되었다. (565)
593년에 쓰여진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대화편(Dialogues)에 의하면, 성베네딕토는 “로마에서 인문학의 교육을 받았다. ... 그는 책과 부친의 집과 재산을 버리고, 오직 신만을 섬기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이 거룩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갔다. ..”(565-566)
베네딕토도 다른 은둔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유혹과 싸웠다. (566)
수도사들이 그를 독을 먹여 죽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 독이 든 잔위에 십자가의 표시를 그었을 때 그 잔은 산산히 깨어져 버렸다. (567)
성 베네딕토가 행한 유용한 기적은 체를 고치는 것뿐만 아니었다. 하루는 어떤 유덕한 고트인이 낫을 휘두르며 찔레를 베고 있었다. 그 때 그 낫자루에서 낫이 빠져 달아나 깊은 물속에 떨어졌다. 이 성자가 그 말을 듣고 그 자루를 물에 대었더니 그 낫이 물 속에서 떠올라 다시 그 자류에 꽂혔던 것이다. (567) [우리나라 선승,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懶翁 1320-1376): 천렵하는 아이들에게 고깃국을 한 사발 들이키고 다시 강가에서 가서 뱉어내니 물고기들이 되살아서 헤엄쳐 가더라.. 이정도 뻥을 쳐야지... (50OLJ)]
그레고리오는 [대화편을 통하여] 이러한 기적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 개종에 [관하여] ... 사탄과 싸움에 대하여 .. (568)
나는(러셀) .. 이 대화편의 3중 중요성 .. 첫째 이 대화편은 성베네딕토의 생애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 둘째 이 대화편은 6세기 말에 생존한 사람들 중에 가장 개화된 사람들의 정신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셋째로 이 대화편을 쓴 사람이 교황인 그레고리오 대교황이었다는 사실이다. (569)
노샘프턴의 부주교, 허튼(W. H. Hutton) 존사(尊士)는 ... 주장한다. 유스티아누스는 법률로, 베네딕토는 수도원 교단으로, 그레고리오는 그가 이루어 놓은 확고한 교황권(敎皇權)으로 각각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569)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 540년 경에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 .. 573년에 로마의 도지사(prefect)가 되었다. ... 579년부터 585년까지 콘스탄티노플에 살면서 황제의 궁정 안에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일했으며, 이단으로 기울어지기 쉬운 동방의 성직자들과의 논쟁에서 언제나 교황의 신학을 대변하였다. ... 585년에서 590년까지 5년 동안 수도원 원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교황[펠라기우스2세(Pélage II, Pelagius II, 재위579 – 590]이 죽자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다. (569-570)
그의 저서인 목회규칙서[사목 규범(Liber regulae pastoralis (Book of Pastoral Rule/The Rule for Pastors)(591년 완성)]는 주교들에게 권고하는 것으로 ... 그 책을 제일 먼저 라벤나(Ravenna) 주교를 위하여 그리고 세빌(Seville)의 주교에게도 보냈다. [다른 곳곳에도] (571)
그레고리오의 편지는 매우 흥미있다. 왜냐하면 그의 편지는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황제나 비잔티움 궁중의 부인들에게 편지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주인과 같은 어조로 쓰고 있다. (571)
599년 1년 동안 그의 편지를 예로 ... 먼저 사르디니아의 카글리아리(Caglian, it Cagliari)의 주교에게 보낸 편지 ... / 다음에는 이탈리아 총독인 칼린쿠스에게 보낸 편지 ... (572) [후자 중에서 성 제임스(St James): St. James/Jacobus, 성 야고보(St. James)사도는 12사도 중 한 명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 사도의 형이다. ]
프랑크 족의 여왕인 브루니차일드(Brunichild)에게.. / 랑고바르드 족 왕인 애질럴프(Agilulph)에게 .. (573)
비지고트인의 임금인 리처드에게 보낸 편지. 그는 본래 아리우스파 사람인데 587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573-574)
프랑스 비엔느 주교인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에게 보낸 편지 .. (574)
이교 학문에 대한 적대 감정은 약 4세기 동안이나 교회 내에 존속되어 게르베트(Gerbert) 시대까지 이르렀다. 교회가 다시금 학문에 대해 가까이 하게 된 것은 11세기 이후의 일이다. (575)
모리스 황제(Emperor Maurice)[동로마황제 재위 582-602)]가 한 폭도에게 폐위 당하고 그 폭도의 두목인 포카스(Phocas)라는 어떤 백부장이 왕위를 차지하였으며... 가장 놀라운 것은 로마는 비교적 안전한 지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리오는 이 왕위를 빼앗은 자와 그의 아내에게 아첨하는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575)
고트족은 9세기가 끝나기 전에 울필라스(Ulphilas 또는 Ulfila)의 노력으로 개종되었다. (576) [울필라스가 4세기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동명이인도 없는 것 같고 ...]
프랑크 족은 클로비스(Clovis) 때부터 가톨릭화 하였다. 아일랜드 인들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 성 패트릭(St Patrick)의 노력으로 개종하였다. .. 그 후에는 아일랜드 인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방을 복음화 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그 당시 가장 위대한 선교사는 성 콜롬바(St Columba)였으며, 또 한 사람은 성 콜롬반(St Columban, 543–615)이었다. (576)
그[그레고리오]는 교황이 되자[590]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를 렌트 지방으로 보내어 ... (577) [이 문장의 번역에는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이 선교 사업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나 앵글로 색슨 족의 왕인 에딜베트(Edilbert, 560경–616), 그밖의 여러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가 많이 있다. (577)
6세기 사람들은 그들의 선배보다 개화되지 못하였지만, 다음에 오는 4세기 동안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개화되었다고 하겠다. 그들은 교회제도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으므로 끝내는 이것으로 야만인들을 길들일 수 있었다. (577)
그레고리오는 로마인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의 명령적인 어조는 직책상 허용될 수 있겠지만, 그의 냉정한 태도는 로마 귀족의 긍지가 엿보인다. 그레고리오 이후 여러 시대에 걸쳐 로마에서는 위인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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