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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광주정씨 효열 정려은전(孝烈 旌閭恩典)
족보기록에 게재된 효열의 정려은전을 살펴보았다. 수없이 많은 효자와 효부, 열부들의 행적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하고 조정에 천거하지 못하고 기록이 충실하지 못했을 뿐, 어찌 척장(丈尺 : 자)으로 길이를 재고 권형(權衡 : 저울)으로 무게를 달으리요! 그럼에도 정려는 효열을 조정에 상주하여 엄선되어 내린 것이니 그러한 명예를 귀히 평가하고 또한 자랑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구 분 | 성 명 |
정려(旌閭) 정포(旌褒) : 8명 | 8세 정엄(鄭淹), 11세 정의창(鄭儀昌) 배인천채씨(配 仁川蔡氏) 12세 정유(鄭維), 15세정홍규(鄭弘規), 16세 정운하(鄭運河) 17세 정관(鄭瓘) 배전주이씨(配全州李氏) 19세 정주현(鄭周鉉) 배능성구씨(配綾城具氏) 20세 정제구(鄭濟九) 배파평윤씨(配坡平尹氏) |
부사제(賻賜祭) : 1명 | 12세 정집(鄭䌖) |
은전(贈職,官職除授) : 10명 | 12세 정염(鄭焰), 13세 정시하(鄭時夏), 13세 정시원(鄭時元), 14세 정선(鄭敾), 14세 정치순(鄭致淳), 16세 정운호(鄭運昊), 17세 정이철(鄭履喆), 17세 정이용(鄭履溶), 19세 정방진(鄭邦鎭),20세 정제홍(鄭濟洪) |
은전(義烈) : 1명 | 정화익(鄭和翼) 配蔚山金氏 |
성 명 | 주 요 행 장 |
8세 양촌공파
정엄(鄭淹) 旌閭 (1528-1580)
父 : 만종(萬鍾) | 생원 장원, 진사, 명종13년(1558년) 명경(明經) 문과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한림호당(選 翰林湖堂), 검열(檢閱), 사인전랑(舍人銓郞), 삼사아장(三司亞長), 동부승지(同副承旨), 1570년 부수찬(副修撰), 수찬(俄陞修撰), 1571 여산부사(礪山府使), 1573 남원부사(南原府使), 1574년 나주목사(羅州牧使) 3읍 거사비(三邑去思碑) 증대사헌 양관제학(贈大司憲 兩館提學)
효성이 출중하여 정려를 명하였다. 「삼강록」에 실렸다 김평묵이 묘갈문을 쓰고, 성재 류중교가 묘지를 짓고, 회당 윤응선이 묘표를 썼다. 후종손 규종이 정려중수기를 지었다
以孝命旌閭 金平默撰碣銘 事見 「三綱錄」 省齋柳重敎撰墓誌 晦堂 尹應善撰墓表 後從孫圭宗撰旌閭重修記
* 정엄(鄭淹, 1528-1580) : 南道 인물(109) 한국매일
정엄(1528-1580)은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문중(文中), 호는 양촌(楊村), 본관은 광주(光州), 팔도관찰사 조계(棗溪) 만종(萬鍾)의 아들이다. 남구 양림동 출신으로 1552년(명종 7)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어, 호당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2년(명종 17)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동부승지 허엽을 파직케 하고, 이듬해에 예조정랑,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개성부 유생들이 음사를 소각한 일로 청금(靑衿)들이 죄 없이 구류되어 방면 하도록 주청하여 방면케 하였다.
1566년(명종 21)에 병조 정랑거처 사간원 헌납이 되어 "대간의 직은 책임이 가볍지 않아서 서정(庶政)의 잘잘못을 일에 따라 모두 말해야 하는 것인데, 신들은 모두 무상한 사람들로 중한 지위에 있으면서 자리만 지키고 녹만 먹을 뿐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옥당의 비난을 입고 있으니 하루도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1569년(선조 2)에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 수찬을 거쳐, 외직으로 여산군수에 임명되어 강직한 목민관으로 전라감사의 추천이 있었다. 1571년(선조 4)에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를 거쳐 종시부 첨정 지제교로 명종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뒤에 남원부사가 되어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있었고, 전라순무어사(全羅巡撫御史) 신응시(辛應時)의 서장(書狀)에, "남원(南原)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府使) 정엄(鄭淹)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합니다. 몇 해 동안 유임시키고 경관(京官)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바라니, 어리석고 천한 백성이 사체(事體)를 모르는 것이기는 하나 그 성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574년(선조 7)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배 풀면서 어머님의 병을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며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돌아가시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를 치른 뒤 죽었다는 갸륵한 효성에 나라에서 모두의 귀감으로 삼고자 1611년(광해 3)에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하고, 효자정려를 명하여 양림동에 정려를 세웠다. 이 정려는 퇴락 되어 1975년 후손들이 석조(石造)로 다시 세웠다.
이 정려비각에는 주인의 심부름을 사람 이상 잘하였던 충견상(忠犬像)이 있다. 양촌 공이 개의 목에 문서와 전대를 걸어 주며 말하면 밥을 사 먹고, 만약 밥값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떠나지 않는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영리한 개였다. 어느 해 급한 일이 있어 임신 2개월로 산기가 있는 이 개를 한양으로 심부름 보냈다.
한양을 갔다오다가 전주 근교에 새끼 9마리를 낳고 한 마리씩 물어 나르다 마지막 새끼를 물고 오다 지쳐 죽고 말았다. 양촌이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견상(犬像)을 조각해 집뜰에 두고 추모했다 한다. 양촌 공이 죽자 그의 후손들은 양촌 공의 정려각을 세우고, 그 견상을 정려각 앞에 세워 양촌 공과 그 개를 기렸다는 것이다.
「사람 몹쓸 것은 개만도 못하다」는 비유도 있는 것처럼 여기에 실린 전설은 어쩌면 인간보다 더 나은 개의 충성심과 의리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11세 성재공파
정의창(鄭儀昌) (1633 ~ 1708)
배 인천채씨 (配 仁川蔡氏) 孝婦 旌閭
父 : 성원(星源)
| 배 인천채씨(配 仁川蔡氏)
시어머니가 늙어 젖을 짜드려 봉양함이 당부인 고사와 같았다. 이러한 효도에 호남유림들이 공론하여 이준백 등 20여인이 글을 보내고 진사 변희적 등 3백여 인이 조정에 천거하니 영조 기유년(1729년)에 정려를 내렸다. 기해년에 8세손 화용이 중수하고 외손 도사 송병대가 묘갈문을 짓고 9세손 장환이 행록을 편집했다.
姑老乳養 如唐夫人故事* 以孝湖儒公儀 齊發 李俊白等 二十餘人 發文 卞進士熙績等 三百餘人 薦于朝 英祖己酉(1729년) 命旌閭後 己亥 八世孫 和用重修 外孫 宋都事秉大撰記 九世孫 章煥 編行錄
* 이십사효 : 원(元)나라 곽거경(郭居敬)이 쓴 중국의 유명한 효자 24인이 있는데 이중 당부인(唐夫人) 이야기가 있다(붙임 참조)
< 인천채씨 정려 중수기 중 발췌 : 외예 은진 송병대 지음>
~~ 나이 16세에 아버지는 일로서 교남에 가셨는데, 마을에 마침 염병이 돌아 어머니 소씨가 병에 걸려 위급하므로 유인이 약을 달여 구양을 다하였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하였다. 집에는 남정이 없어 한 여종과 같이 염을 하고 주야 호곡하니 이를 듣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친정 아버지가 일찍이 자기에 대한 효를 칭찬하였는데 열아홉에 정씨집안에 시집오게 되었다. 정씨는 대성(大姓)이라! 시아버지 말하길 “성원은 병정난후 과거에 나가지 않고 말하기를 이러한 시국에 한자리 꿰차면 어찌 마음이 부끄럽지 않겠는가?”한다고 하였다.
시어머니 신씨는 백록공 응시(부제학)의 증손녀이시다. 서사(書史)에 능통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성품 또한 효성스러워 아버지 병환에 눈물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었다. 나의 선인 문정공께서 모두 이를 높게 칭송했다.
유인이 시어머니를 근신하며 섬기고 동서들과도 우애롭게 잘 지내 유인를 따랐으며 시어머니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임술년 시어머니가 71세로 몸이 쇠약해져 병이 중하여 식음을 전폐하니 유인이 바로 벼갯 머리에서 젖을 짜내어 드리니 3일간 연명하였다.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를 넘었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친정아버지가 홀아비로 살다가 의탁하러 오셨는데 병이 나 위중하시므로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에도 옆에 시중하며 십여 일,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니 순간 소생하였으나 돌아가심에 발 구르며 대성통곡하고 혼절하였다. 칠 일간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사람으로서 행하기 어려움을 행함이 이러하니 어찌 천성의 성효가 아니면 이러하겠는가?
유인 사후에 사림들이 이를 칭송해 조정에 아뢰니, 영조 기유년(1729년)에 정려를 내리므로 나라가 유인에게 베품에 서운함이 없다. 그 아들 위상(渭相) 또한 효도로 이름나 돌아간 지 몇 해 후에 좌랑에 추증되었으니 시경에서 이르는바 “군자 효도하니 그 아들도 효도한다.” 라 했으니 나는 유인 집안에서 이를 보게 된다. ~~~~
< 仁川蔡氏 旌閭 重修記 中 : 外裔 恩津 宋秉大 記>
~~ 年十六 父以事往嶠南 而村中適熾瘟疫 母蘇氏遭疾危急孺人盡藥餌救養之道 至不求則隣里畏避 家無男丁獨與一婢殮殯如禮晝夜擗踊聞者莫不感歎 其父嘗稱其孝於己 十九歸於鄭氏光州大姓也 舅曰 星源丙丁虜難後 不赴擧曰 此時得一官 寧不自愧於心乎 姑辛氏白麓公應時曾孫女也 通書史善翰黙性又孝 侍親疾必涕泣不離側 吾先子文正府君皆表章之 孺人事姑尤謹 友于姨 姨皆化之 姑稱之不容口 壬戌姑 年七十一衰病寢深 粥飮全廢 孺人就枕上而乳之賴延三日 及喪哀毁踰禮 祭祀盡盛 孺人之父鰥居來依 得疾危重盡不離側 夜不交睫至十日 斷指進血交甦一餉之頃 及喪又過哀哭踊必氣絶 水醬不入口者 七日 行人之所難行者 如是 豈非誠孝之根於天性者歟 ~~孺人沒後 士林稱之而聞于朝 英廟己酉命旌其閭 國家所以施於孺人者 殆無遺憾矣 其子 渭相亦以孝聞 沒未幾年 褒贈佐郞 時所謂君子卽孝 嗣子又孝 余於孺人家 ~ |
12세 응교공파
정집(鄭䌖) (歸來亭) (1588 ~ 1573) 孝 名倅 善政 賻賜祭
부 : 흥문(興門) | 이조판서 정경세, 예조판서 서성이 천거하여 동몽교관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했다. 합천군수 안악군수를 거쳐 동지로 수승하고 특명으로 가의대부에 올랐 다. 부음을 듣고 조정에서 부의를 보내고 제사를 내렸다
光海時 斥絶主廢母論者盡室歸鄕斷跡城闉 仁祖戊寅 吏判 鄭經世 禮判 徐渻 薦授 童蒙敎官 不就 庚辰 氷庫別坐 辛巳 司憲府監察 癸未 山陰縣監 以異政再蒙 表裏之錫 陞 通政大夫 孝宗 庚寅 陜川郡守 有 去思碑 癸巳五月 平山府使 六月 拜漢山郡守 皆不赴 八月拜安岳郡守 顯宗 丁未 壽陞同樞 庚戌特命嘉義大夫 顯宗癸丑 卒 訃聞致賻賜祭
천성으로 효가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에 다리를 베어 진혈하고 상을 당하여 3년간 죽으로 끼니하고, 아버지 상을 당하여 나이가 연로하여 쇠약함에도 여묘하며 조석으로 곡을 하니 향당에서 그 효에 감복하였다
天性至孝侍母夫人疾刺股進血及丁憂啜粥三年 遭外艱年已衰邁而居廬墓側朝夕上哭鄕黨服其孝 |
12세 응교공파
정유(鄭維) (1593 ~ 1654) 忠孝義 旌閭
부 : 보문(保門) | 광해군 무오년(1618년) 사마시험 치룰 때 적신 이이첨이 사마급제자를 부추겨 장차 폐모의 소를 올리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불의한 자와 영화를 누리느니 바름을 지키고 죽는 것이 낫다. 또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는 사람과 사대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며 대과를 보지 않고 나주의 고향에 내려왔다.
인조반정으로 상산 신흠이 재상이 되어 최우선으로 공을 천거하였다. 1634년 전의현감, 1636년 병자란을 당하여 안무사 박횡의 종사관으로 근왕병을 통솔하였다. 1641년 구례현감, 1648년 백천군수
光海 戊午 司馬時 賊臣李爾瞻 嗾新榜 將上廢母疏 公曰 與其不義而榮寧守正而死 且無父無君之人 士大夫不可同席而立遂不應榜遯歸羅州故庄 仁廟改玉申象村欽以冢宰首薦公 甲戌(1634년)全義縣監 當丙子亂 爲按撫使朴橫從事 領兵勤王 辛巳(1641년) 求禮縣監 戊子(1648년) 白川郡守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상을 당하여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한데도 죽을 먹으며, 항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돌아가신 날(1652년)과 같았다. 3년 탈상을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순조 임오년에 대신 김재찬과 한용구가 충효를 아뢰니 정려를 내렸다. 8대손 제인이 묘 앞에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天性篤孝及丁外艱年己衰而啜粥呼泣常如袒括之日隔終祥五月而孝宗甲午(1654년)卒 純祖 壬午(1822년) 大臣 金載瓚 韓用龜 以忠孝筵奏命旌閭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
12세 승지공파
정염(鄭焰) 海叔(慕庵) (1609 ~ 1669) 孝 恩典 부 : 민식(敏軾) | 부모를 효성으로 지극히 섬겼고 자식을 교육함에 도의가 있었다. 효성으로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었다
事親至孝 敎子有方 以孝 贈司憲府持平 |
13세 응교공파
정시원(鄭時元) 1613 ~ 1666 孝 恩典
부 :유(維) | 백주 이명한* 문하에서 배웠으며 문장이 뛰어났고 향리에서 효와 우애를 칭송했다.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受業于李白洲明漢*門 文詞擅譽 場屋孝友著稱鄕里 贈司僕寺正
* 이명한(1595∼1645)
좌승지,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홍문관, 이조판서, 예조판서. 1643년 이경여(李敬輿)·신익성(申翊聖)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이듬 해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아버지 정구, 아들 일상(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13세 진사공파
정시하(鄭時夏) (自休堂) (1731 ~ 1802) 孝 恩典
부 :영(糹永 )) | 초야에 은둔하여 책을 벗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고 도내 신료들이 계를 올렸다. 병인 년(1806년)에 효로서 사헌부 지평에 증직하였다
遯跡湖海琴書自娛 士林累薦 道臣上啓 丙寅 以孝 贈 司憲府持平 |
14세 응교공파
정선(鄭敾) (謙齋) (1676 ~ 1759) 孝 恩典
부 : 시익(時翊) | 화성(畵聖)
하양현감(河陽縣監), 청하현감(靑河縣監), 양천현령(陽川縣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영조48년(1772년) 1.25 상께서 승지에게 효열단자를 읽으라 했다. (중략) 고 동지정선에 대하여 단지 그 필법만 알았을 뿐인데, 어찌 이러한 효행이 있음을 알았겠는가? 하였다. 1772.1.27.일 증좌참찬 한성판윤에 증직했는데 효행이 뛰어남에 따른 것 이었다
英祖48年(1772년)1.25. 上命承旨讀奏孝烈單子。~~故同知鄭敾, 予只知其筆法, 豈知有此孝行? 영조48년(1772년)1.27吏曹口傳政事 贈左參贊 贈判尹例兼, 以上孝行卓異贈職事承傳 |
14세 능파정공파
정치순(鄭致淳) 燦甫(慕堂) (1760 ~ 1829) 孝 恩典 부 : 현우(顯佑) | 부친병환에 대변 맛보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입에 넣어 드리고 상을 당함에 죽 먹으며 여묘할 때 호랑이가 묘를 지키니 기이하였다. 향도가 여러 번 천거하여 영조 신미년(1751년)에 효행으로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었다
親癠嘗糞斫指 丁艱啜粥廬墓有虎衛之異 鄕道累薦 英祖辛未(1751년) 以孝贈童蒙敎官 朝奉大夫 |
15세 지평공파
정홍규(鄭弘規) (雲窩) (1753 ~ 1836) 孝 旌閭
부 : 광훈(光勳) | 학문이 넓고 행실이 부지런하고 친절하며 지조가 높고 진실하였다. 저서로 「경필삼육조」가 있고, 효성이 남달라 어버이 상에 여묘하였다. 향도가 여러 번 추천하고 고종 경오년(1870년)에 승지 이장렬과 유생 조철호가 조정에 아뢰니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고 정려를 내렸다. 「나주군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博學篤行操履純眞 著「警筆三六條」 誠孝根天 丁憂廬墓鄕道累遷 高宗更午 承旨 李章烈 儒生 趙喆浩擧實行聞于朝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命旌閭 事載「羅州誌」及「三綱錄」 有遺稿
< 幸州 奇正鎭 찬 운와 정홍규 정려기 중 >
~~~ 고 효자 증동몽교관 정홍규의 정려표창을 청함에 예조에서 복계하여 작설(旌門의 양옆에 세워 효열을 표창하던 나무기둥)을 윤허하시니 성명이 비로소 내린 것이라 삼가 상언의 말뜻을 살피니, 그 하나는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어 어머니께서 따라 죽기로 결심한대 울부짖으며 밥을 먹지 않고 어머니 먼저 죽으려는 성의가 지극히 정성스러워 마침내 어머니의 마음을 돌린 것이요. 그 하나는 조금 자라서 어머니 명으로 백리 밖 스승을 좇아 부지런히 힘씀을 멈추지 않아 큰 선비가 된 것이오 글을 읽는 겨를에 문득 고기 잡고 나무하여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니 일직 반찬이 떨어진 일 없었던 것이다. 그 하나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시묘 살이 하면서 슬픔을 다했고 예제 한결같이 주문공가례 대로 따라 하였으며 성묘도 추위나 더위로 게을리 하지 않고 기제 때 애통해함도 초상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 하나는 「운와경필삼십육편」을 지어서 세상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故孝子贈童蒙敎官 鄭弘規 加獎閭事 禮曹覆啓允下綽稧 成命始下 謹按上言辭意 其一曰 七歲失怙其母決意下從卽號泣絶粒欲先母致命誠意懇到卒回母心 其一曰 梢長以母命從師百里外謹苦不輟 遂成巨儒 讀書之暇輒以樵魚 供養甘旨 未嘗乏絶 其一曰 祖上廬墓盡哀 喪中禮制一遵文公家禮 省所寒暑不解 忌辰哀慟無異袒括 其一曰 著「雲窩警筆三十六編」爲一世矜式 |
16세 지평공파
정운호(鄭運昊) (1780 ~ 1852) (松坡) 孝 恩典
配 光山金氏 (1778 ~ 1832) 孝婦
부 : 홍규(弘規) | 어버이 병환에 의원이 말하기를 살아 있는 잉어가 가장 좋다고 하므로 사방으로 구했으나 매우 추운 때인지라 얻을 방법이 없었다. 물가에서 울면서 빌고 있었더니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데 잉어를 구하여 올려 드렸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상을 당하여 모든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성묘하는 자리가 패이니 사람들이 아버지 효자에 아들 효자라 했다. 도내에서 많은 선비가 효성을 조정에 아뢰어 사헌부 지평에 증직하였다. 행적은 「금성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親疾醫云生鯉最利時太寒四求不得 泣禱于間畔 天忽翠雨得鯉封進見效 遭內外艱 送終踰禮 省掃坎瑎人稱父孝而子孝 更午 道內多士孝累聞于朝 贈司憲府持平 事載 錦城誌及三綱錄
배 광산김씨(配光山金氏)
어버이 섬김에 온 정성을 다하니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事親盡職 鄕黨欽歎 |
16세 지평공파
정운하(鄭運河) (1766 ~ 1831) 孝 命旌 부 : 오동(五東) | 어버이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고 학문에 힘쓰고 실천하였다.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효행를 여러 차례 추천하여 조정에서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事親至孝力學篤行 道內多士 以孝累遷于朝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命旌 |
17세 승지공파 정이철(鄭履喆) (正齋) (1797 ~ 1836) 孝 恩典 부 : 기주(起周)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덕행과 학문도 높아 많은 선비들이 여러번 조정에 천거하여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 행적이 「기성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孝友德學 爲世師表 多士累薦 贈司憲府持平 事載「箕城誌」 及 「三綱錄」 |
17세 진사공파> 정이용(鄭履溶) (農齋) (1846 ~ 1913) 孝 恩典 *부 운련(運蓮) | 어버이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진혈하고 상을 당하여 6년 여묘하며 삭망에 성묘하니 무릎 닿는 자리가 패였다. 또한 후학을 이끄니 여러 번 조정에 천거 하여 계사년(1893년)에 동몽교관 조봉대부를 제수되었다
親疾斫指 丁艱居廬朔望展省 當膝處成坎 啓迪後學 累入永薦 癸巳(1893년) 除童蒙敎官 朝奉大夫 |
18세 응교공파
정관(鄭瓘) (1741 ~ ?)
配 全州李氏 (1770 ~ ?) 烈婦 生旌閭
부 : 이후(履垕) | 배 전주이씨(配全州李氏)
영조 경인년(1770년)에 남편이 중병에 들어 아무리해도 구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볼기 살을 베니 그 크기가 접시와 같은데, 입에 피를 물고 고기로 구워 세 번 먹이니 마침내 회생하였다. 정조 무신년(1788년) 특명을 내려 생전에 정려를 내릴 때 부인께서 해로하시어 집에 계시니 원근인사들이 그 아름다운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제학 예조판서인 홍양호가 정려기를 썼으며, 족제 근이 정려시를 썼다
英祖庚寅(1770년)夫患重痼幾至不求 自割其臀大如楪子以血灌其口因煎其肉三進啗之竟得回甦 正祖戊申(1788년)特命生旌其閭時 夫人偕老在堂遠近人士莫不欽歎 大提學 禮判 洪良浩 旌閭記 族弟垠撰旌閭詩序 |
19세 응교공파
정주현(鄭周鉉) (1801 ~ 1835)
配 綾城具氏 (1801 ~ 1863) 烈婦 旌褒恩典
부 : 규(珪) | 무과(武科)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오위장(五衛將)
배 능성구씨(配 綾城具氏)
시어머니 병에 손가락을 베어 입에 피를 넣어드려서 3일 연명하게 하였고, 지아비 병에 넓적다리 살을 베어 간호에 진력을 다했으나 임종을 당하매 따라 죽기로 결심하였으나, 지아비가 유언으로 부탁하니 마음을 바꾸어 고통을 참고 스스로 달래어 예로서 장례를 치루었다. 일가의 자식을 양자로 들여 종사를 잇도록 하였으며, 생이 다하도록 소식 고괴하여 미망의 예를 다하였다. 철종 계해 년(1863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였다. 향리에서 누차 추천하여 예조에서 임금께 아뢰니 특별히 정려포상의 은전을 입었다
姑癠斫指延甦指三日 夫病刲股殫誠療護 及當屬纊 志結下從而旋念臨終遺託忍痛自寬 終喪如禮 取族子爲嗣以 存宗祀 小食苦塊而終年伸未亡之義 哲宗 癸亥(1863년) 卒 享年六十三 鄕道累薦禮闈上奏 特蒙旌褒恩典
* 부 병사 구석명, 증조 남병사 구정환 父 兵使 具錫明, 曾祖 南兵使 具鼎煥 |
19세 자의공파 정방진(鄭邦鎭) (南隱) (1869 ~ 1903) 孝 恩典 부 : 낭(琅) | 효를 행한 공로로 강원도 동몽교관을 제수 받았다
以孝行薦 除 江原敎官 |
19세 참봉공파
정화익(鄭和翼) (1840 ~ 1865) (國圃) 忠孝
配 蔚山金氏 (1835 ~ 1885) 烈婦 賢婦 恩典
부 : 문수(文洙) | 품성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모습과 거동이 뛰어났다. 학문과 기예가 높고 독실이 실행하였다. 어려서 상을 당하였으므로 늦게 상복을 입고 정성을 다하였다. 재산을 나누어 종친을 도우고 굶주린 사람을 구휼하므로 여러 번 공적을 천거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뜨니 선비들이 모두 아쉬워하였다. 유고가 남아있다
天賦純厚風儀魁偉造詣深高踐履篤實早喪所恃追服盡情傾財敦族出儲救飢累登採察公薦 不幸早世 士論惜之 有遺稿
배 울산김씨(配 蔚山金氏)
일찍 남편을 여의었으나 매사 여일하니 사별한 사람 같지 않았다. 병정 년간*의 기근과 질병이 창궐했을 때, 백성의 구제와 구휼에 힘쓰니 고을 원인 심대영이 조정에 아뢰어 은전을 입었다.
早哭城崩凡事一如 所天所爲 丙丁歲飢癘疫大熾 救活甚衆 本倅 成大永 聞于朝 有給復恩典
* 병자, 정축년(1876~1877년) : 성대영 무장현감(茂長縣監) |
20세 응교창문 정제홍(鄭濟洪) (1843 ~ 1916) 孝義 恩典 부 : 인석(仁錫) | 효도하고 친족 간 돈독하여 마을의 칭송을 받았다. 기근이 들었을 때 구휼에 앞장서 생계를 의지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병신년에 태릉참봉을 제수 받았다
孝親敦族 鄕里稱頌 饑歲施恤 賴活甚多 丙申(1896년)拜 泰陵參奉 |
20세 지평공파
정제구(鄭濟九) (1842 ~ 1859)
配 坡平尹氏 (1841 ~ ?) 烈婦 褒典
부 : 재석(在錫) | 배 파평윤씨 (配 坡平尹氏)
시집오기 전 아버지 병환에 넓적다리를 베어 연명케 하시니 규방명예의 성정이 있었고, 지아비 병에 손가락 물어 입에 진혈하니 3일 회생하였으나 끝내 임종하시므로 곡기를 끊고 목을 매어 남편을 따랐다. 철종 기미년(1869년) 나이 19세였다. 향도가 서로 조정에 계를 올리니 오래지 않아 포상의 은전이 내렸다. 1956년에 손자 상렬(尙烈)이 효열비각을 세웠다
在家父病刲股延縷有閨閤譽 所天病革 斫指注血 回三日天 竟遭城崩 絶粒一望結項下從卽伸 哲宗 己未(1859년) 春秋十九 鄕道交薦有司防啓 未久蒙褒典 見箕城誌 三綱錄 丙申(1956년) 孫尙烈建立孝烈碑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