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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토지제도 田制
옛날 한漢나라의 조조鼂錯1)가 말했다.
“어진 임금이 위에 있어 백성이 춥지도 주리지도 않는 것은, 임금이 몸소 농사지어 먹이거
나 손수 옷감을 짜 입혀서가 아니라, 백성 스스로 재물을 마련할 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
다. 배를 곯아도 밥을 얻지 못하고 살이 얼어도 옷을 못 얻는다면, 아무리 자애로운 어머
니라도 자식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조와 쌀과 베와 비단은 땅에서 나서 때에 따라 자라고
힘을 써서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
로 총명한 군주가 오곡을 귀하게 여기고 금과 옥을 천하게 보는 까닭입니다.
지금 다섯 식구가 있는 농가이면 일손이 둘 이상이지만, 경작하는 땅은 100무畝를 넘지
않고, 수확하는 양도 100섬이 안 됩니다. 그래도 봄에 갈아서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거두
어 겨울에 쟁이며, 땔감 하고 관아 건물도 고치면서 부역도 해 대니, 연중 사철에 쉬는 날
이라고는 없습니다. 또 사사롭게는 가는 이를 보내고 오는 이를 맞으며, 죽은 이를 조문하
고 아픈 이를 문병하며, 혼자된 이를 보살피면서 어린아이도 키워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그 안에서 자기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반면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하는 자는 쌓아두고 묵혔다가 이익을 배로 남기고, 작
게 하는 자는 좌판을 벌려놓고 판매하여 속임수로 얻은 이문을 주무르며, 날마다 도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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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조(?~BC 154): 전한前漢의 중앙집권화에 업적을 세운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한 문제文帝가 “조조의 책략이 제일”이라며 의
견을 구했던 데에서 선비에게 책략을 묻는 제도가 비롯되었을 정도의 지략가이다. 흉노를 막는 정책으로 둔전책屯田策을, 그
재정정책으로 곡물 납부자에게 벼슬을 주는 매작령賣爵令을, 제후들의 통제 정책으로 그 영지의 삭감을 주장하여 차례로 받아
들여졌으나, 이에 대한 반발로 오초칠국의 난이 발생하자 그 책임을 물어 참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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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떠돌면서 상납이 급한 사정을 틈타 두 배로 팔아넘깁니다. 그러니 사내는 논밭을 갈지
도 않고 김을 매지도 않으며, 아낙은 누에를 치지도 않고 베를 짜지도 않지만, 옷은 언제
나 화려하게 광택이 나며 밥은 이밥에 고기반찬만을 먹습니다. 또 제왕 제후와 막힘없이
오가면서 세력으로 관리를 능가하고, 떡 벌어진 수레에 살진 말을 몰면서 비단 신에 비단
옷자락을 끌고 다닙니다.
상인이 토지 소유를 불리고, 농민이 떠돌이로 전락하는 까닭이 이것입니다. 신농씨神農
氏2)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돌로 쌓은 성이 열 길 높이이고, 거기에 둘러친 물 끓는 해자
가 백 걸음 너비이며, 그 안에 갑옷 입은 장졸 백만 명이 있어도, 식량이 없이는 지킬 수 없
다.’”3)
조조는 꾀가 있는 선비이지만 임금을 보좌할 재목은 못 되었다. 그러므로 말하는 바가 단
지 병사와 식량을 위한 계책을 언급할 뿐, 하·은·주 삼대의 세금 부과하는 방법[貢徹之
法]이나 토지의 경계를 바로 하는 어진 정치의 가르침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이다. 본디
나라가 있으면 땅이 있고, 땅이 있으면 농사가 있으며, 농사가 있으면 세금이 있는 법이
다. 그리하여 군자를 기르고 야인을 다스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바는 걸왕의 크게 걷음과
맥국의 작게 걷음을 구분해내는 일에 달려 있으니,4) 다스림의 길은 모두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하夏나라의 세제인 공법貢法과 은殷나라 세제인 조법助法에 대해서는 지금 살펴
볼 바가 남아 있지 않으니, 오직 주周나라의 철법徹法에만 의거하여 경전과 주석서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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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농씨: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말하고, 닷새 만에 걷고, 이레 만에 이가 났으며, 키가 3미터로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지녔다고
전해지는 중국 고대의 신화적인 제왕이다. 불을 쓰는 법과 익혀먹는 법을 가르쳤다는 수인씨燧人氏, 그물 짓는 법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는 복희씨伏犧氏와 함께 삼황三皇이라 불린다. 농본 사회의 맥락에서는 농기구 만드는 법과 농사짓는 법을 가르
친 농업의 신으로서의 위치가 강조되고 그만큼 떠받들어진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의약醫藥의 신이자 악사樂師의 신이며, 주조鑄
造의 신이자 양조釀造의 신이고, 교역을 가르친 상업의 신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신농씨는 동아시아의 생활 세계 전반을 장악
하는, 문명적 지배의 원점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영원한 숭배 대상이었다. 우리나라 두레패의 농기農旗에 흔히 ‘농자천하지대
본’과 함께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는 문구가 즐겨 사용되는 것도 그 한 예가 된다.
3) 어진……없다: 조조鼂錯가 지은 상소문인 「조를 귀히 여김을 논하는 소(論貴粟疏)」를 발췌하여 실은 것이다. 조조의 상소문 원
본은 흉노의 침입과 약탈로 인한 북방 변경 지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권농 및 재정 강화 방안을 제안하는 내용인데, 여
기에 실린 발췌문은 이 중 농업의 영락과 상업의 폐단을 대비시키는 내용을 중심으로 추리고 있다.
4) 걸왕의……달려 있으니: 하夏나라의 임금 걸왕은 생산량의 1/10이 넘는 많은 양을 조세로 걷어 학정虐政을 하였고, 맥국은 오
곡五穀이 없이 기장만이 생산되는데다가 제사의 예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생산량의 1/20만을 받아 세금을 적게 걷었다.
그 사이에서 1/10을 세로 걷는 것이, 곧 정전제井田制가 택하고 있던 중도라는 것이 이 서술의 배경이다. 『맹자』 「고자告子」 하
편에는 “요순의 도道보다 경감하려는 자는 큰 맥국에 작은 맥국이요, 요순의 도보다 무겁게 하려는 자는 큰 걸왕에 작은 걸왕이
니라. 십분의 일 세법이 요순의 도이며, 이보다 많으면 걸왕이고 적으면 맥국이니, 이제 이보다 줄이거나 무겁게 하려면 이는 작
은 맥국과 작은 걸왕일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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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서 이미 많이 다루어진 것들이나마 간략히 살피기로 한다. 그러나 산천과 풍속에는
각기 차이가 있기에, 기자께서 동쪽으로 오셨을 때도 단지 정전井田의 옛 제도를 평양에
만 남기고 나라 전체에서 행하지는 않았던 것이니,5) 지금 옛일을 이리저리 평하기는 어렵
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풍속이 이미 좋은 법규와 훌륭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므
로, 간략하게만 자료를 모으고 내 어리석은 생각을 붙이니, 이로써 식자들이 필요에 따라
참고하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3.1. 주나라 제도 정전 周制井田
사방 1리의 땅을 정井이라 하니, 정은 900무畝의 크기이다. 9부夫로 정을 이루니6), 정의
사이에는 너비 4척[尺], 깊이 4척의 도랑인 구溝를 둔다. 사방 10리의 땅을 성成이라 하
니, 성의 사이에는 너비 8척, 깊이 8척의 도랑인 혁洫을 둔다. 사방 100리의 땅을 동同이라
하니, 동의 사이에는 너비 2심尋 깊이 2심의 도랑인 회澮를 둔다.
경卿 이하 벼슬아치에게는 규전圭田 50무를, 여부餘夫7)에게는 25무를 준다. 그러면 죽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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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자께서……것이니: 기자동래설에 근거하여, 기자가 평양에 정전井田을 만들었다는 것이 이러한 설명의 기본적인 배경이다.
기자동래설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은 멸망 후 동쪽으로 와서 나라를 세우고 정전제를 시행했으며, 주나라 무왕에게 홍
범을 가르치고 주 무왕으로부터 조선 왕에 봉해졌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기』 이래 여러 버전의 전승이 기록되
어 왔으며, 특히 주자 성리학이 한반도에 전래된 고려 후기 이래 꾸준히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이성계가 국호를 ‘조선’으로 정
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고도 전해진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백겸은 최초로 평양에 가서 실측 조사를 하고 기자정전의 실재
를 확언한 바 있으며, 이후 조선 시기 내내 이는 하나의 정설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훗날 월북한 경제사가 박시형은 한백겸이 정
전이라고 파악했던 유구가 실은 고구려 시대 도시 계획의 흔적이라고 반박하였고, 그 이래 기자정전론은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
게 되었다. 현재로서는 기본적으로 기자동래설 자체가 부정되는 가운데, 이를 당대의 역사적 실재라기보다는 후대에 나타난 일
종의 사회 현상으로 파악하는 이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6) 9부로 정을 이루니: 원문의 “구부위정九夫爲井”에서 부夫가 사람을 뜻하는지, 토지의 단위를 뜻하는지는 혼돈이 생기는데, 이
와 관련해서는 『한수재집寒水齋集』에 실린 권상하(1641~1721)의 글 「민성유에 답함答閔聖猷」을 참조할 수 있다. 이에 따르
면, 민성유가 “맹자 말씀에 ‘정井 자 모양의 전답은 모두 900무畝인데, 중앙의 100무는 국가의 공전公田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여덟 가구가 각기 100무씩 개인적으로 소유하며, 여덟 가구가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여덟 농
부가 1정井을 운영하는데 두 씨는 어찌하여 아홉 농부가 1정을 운영한다 하였습니까? 혹시 ‘부夫’ 자는 농부의 ‘부’ 자 아니고
100무를 1부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산子産이,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하는 선왕先王의 법을 폐지하고 아홉 농부로 하여금
각기 100무씩 사적으로 소유하게 하고서 매 무마다 다 세를 징수한 것입니까?”라고 묻자, 권상하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구
부위정’은 『주례周禮』의 지관地官 및 『고공기考工記』에 있는 글이며, 식화지食貨志에는 그와는 달리 무畝가 100개가 되는 것
을 부夫라고 하였네. 대체로 공전은 비록 여덟 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는 것이긴 하나, 그 수효는 본디 한 농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까지 합산하여 구부라고 말하는 것이네.” 이 설명을 따른다면, 본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정전제
가 정착한 이후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 면적을 가리키는 단위로 의미가 변화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7) 여부: 원문 ‘여부餘夫’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불명확한 점이 있다. 그 연령 범위에 대해 조기趙岐는 노소老
少를 모두 말한다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16세부터 결혼 전까지라고 하였다. 박기수, 이경룡, 하원수, 김경호 역주(2005), 『사
료로 읽는 중국 고대 사회경제사』, 청어람미디어, 296쪽.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이나 안정복의 「정전설井田說」에서는
맹자 주석을 인용하여 ‘자기 가정을 이루지 않고 부夫의 집에 살지만 16세가 넘은 동생이나 차남 등 뭇 남자[衆男]가 여부’라는
관점을 취하며, 박지원의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도 “아들과 동생 중 장성하지 않은 자가 여부子弟未壯則爲餘夫”라거나, “몸
은 [1부의 한계 인원인] 여덟 식구 안에 있지만 경지는 [1부의 한계 경지인] 100무 바깥에 있는[身居八口之內 而田在百畝之
外]” 것이 여부라는 설명을 한다. 대개 주자의 설명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정약용은 『맹자요의孟子要義』(1814)에
서 “여부의 법은 상세히 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이에 대해 설명한 맹자의 구절과 주석들을 검토하였고, 미완성
저작인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는 “남편과 아내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부부가 여부[餘夫者 夫婦二人也]”라고 여러 곳에서 설
명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죽거나 이사해도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 뒤따르는 문맥 상 우하영이 후자의 의미에 가깝게 이
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경우 ‘여부’는 ‘결혼해 세간나는 아우’ 정도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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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사해도 자기 고장을 벗어나지 않고 고향의 정전을 함께 하면서, 나고 들 때 서로 벗
하며, 지키고 망서는 일에도 서로 돕고 의지한다. 백성이 나이 스물이면 밭을 받고, 예순
이면 도로 내놓는다. 일흔 살 이상이면 나라에서 부양하고, 열 살 이하면 나라가 길러주
며, 열한 살 이상이면 나라에서 힘쓰게 한다【힘. 써 일하고 힘써 일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곡식을 심을 때는 반드시 오곡을 섞어서 재해에 대비한다. 밭 가운데에 나무가 있을 수 없
으니, 나무를 심어 오곡에 방해가 되므로 오두막 주위에만 뽕나무를 심는다.
다섯 집[家]을 린隣으로 삼고, 다섯 린을 리里로 삼는다. 봄이면 백성들은 반드시 들판
에 나가도록 하고, 겨울이면 반드시 고을[邑]에 들어오도록 한다.
봄에 백성이 들에 나갈 때면, 마을 직임들은 이른 아침 마을 입구 우측 마루에 앉아8) 서둘
러 나가도록 권하고 독려하며, 그 이르고 늦음을 살피면서 게으른 자들도 반드시 내보내
고, 그런 다음 저녁에 돌아올 때도 그와 같이 한다. 마을에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땔감을
가져오게 하고, 그 가볍고 무거운 정도를 나누어 따지되, 머리가 희끗한 어른들은 가져오
지 않게 한다.
겨울에 백성들이 들어오면 아녀자들은 여덟 집마다 한 집에 모여9) 서로 어울려 밤새며 길
쌈하니, 여자들의 한 달 작업으로 45일치의 일을 할 수 있다. 반드시 서로 어울리도록 하
는 것은, 불 밝히고 장작 때는 비용을 아끼면서, 솜씨의 좋고 나쁨이 고르게 하고, 습속도
서로 맞아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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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을……앉아: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원문에는 마을 직임[里胥]이 우측 마루에 앉고, 마을 책임자인 인장鄰長이 좌측 마
루에 앉아 이 일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9) 아녀자들은……모여: 원문 “婦人同巷”의 항巷은 여덟 집을 하나로 묶어 인식하는 단위이다. 『춘추공양전주소春秋公羊傳注疏』에 “一里八十戶 八家共一巷”이라는 하휴何休의 주가 있다. 박기수, 이경룡, 하원수, 김경호 역주(2005), 앞의 책,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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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역대의 제도 歷代制置
《주례》에서는 여섯 개의 중앙행정기관 중 지관地官의 책임자인 사도司徒가 전제田制와
농정農政을 관장하였다. 한나라는 육조 중 민조民曹에 상서尙書와 대농승大農丞을 두었
다. 진晉으로부터 수隋에 이르기까지는 때에 따라 이를 둔전조屯田曹로 고치기도 하고
좌민조左民曹로 바꿔서도 두었다. 당唐의 태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이를 호부戶部라고 부
르기 시작했는데, 고종은 이를 다시 사원司元으로 바꿨다. 송宋과 원元은 당나라 초기의
제도와 같이 하였고, 황국 명나라는 호부에 상서를 세워 그 직임으로 재정과 부세 업무를
전관토록 하였다.
대개 땅은 만물을 생산하는 근본이다. 지관이라는 관청명이 그 글자를 취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땅에서 나는 바가 바로 부세이다. 따라서 그 직을 만들고 그 일을 맡
겼던 것이다. 삼대 이전에는 천하에 천자의 소득이 아닌 것이 바로 사私였다. 진秦에 이르
러 봉건을 폐지하고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기 시작했을 때, 삼대 이상의 전토田土로 서민
의 소득이 아닌 것이 바로 사였다. 진나라가 정전을 폐지하고 전토를 백성에게 맡김으로
써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게 된 후, 비로소 세의 가볍고 무거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
다. 검전檢田, 둔전屯田, 균전均田과 같은 말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나타났으며, 탐욕스러
운 자는 세금을 늘리고 은혜로운 자는 세금을 덜어주었다.
전토를 백성들에 맡기게 되자 토지 소유를 불려가며 사고파는 풍습이 생겨났고, 남의 농
토를 빼앗거나 함부로 경작하는 일로 요란스럽게 소송이 이어졌다. 부자의 농토는 논밭
두렁[阡陌]이 서로 이어져 도로가 될 정도로 광활하나, 가난한 이는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었다.10) 농토에 근거해서 거기에서 사는 사람에게 세를 매기되 그 많고 적음을 묻지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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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자의 농토는……땅도 없었다: 원문은 “富者田連阡陌 貧者地無立錐”이다.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의 동중서董仲舒
(BC179~BC104)가 황제에게 올린 건의문 중에 “부유한 자의 농토는 천맥이 서로 이어지고,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 찌를 땅
마저 잃었다.[富者田連阡陌 貧者亡立錐之地]”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 달린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따르면, 천阡은 농토 사이에
남북으로 난 밭둑길이며, 맥[陌. 또는 백伯]은 동서로 난 밭둑길이다. [이경룡, 하원수, 김경호 역주(2005), 앞의 책,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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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상앙商鞅11)에서 시작하였고, 사람에 근거하여 그들이 지닌 농토에 세를 매기되
그것이 적은지 아니면 적절한지를 묻지 않는 것은 양염楊炎12)에서 시작되었으니, 두 사람
은 모두 천하 만세의 소인배들이다. 군자는 이를 부끄러이 여겼으나, 후세 사람들은 그 법
을 하나같이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정전제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게 되고 만 것이
다. 즉, 농토에 근거하여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세를 매기는 것과 부족한지 적절한지를 묻
지 않고 세를 매기는 것13) 사이에는 당연히 낫고 못함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조세를 부과
하는 방법은 결국 토지에 근거하거나 사람에 근거하거나 진실로 이 두 가지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3.3. 해동의 토지제도 海東田制
백제 다루왕多婁王14)이 볏논[稻田] 만드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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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천맥阡陌은 논밭 사이의 길을 이르는 말로, 천맥이 서로 연한다는 것은 곧 전지가 아주 광활함을 의미하니, 우리식 표현으
로는 ‘사방 수십 리에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길을 다녔다’는 말과 비슷할 것이다.
11) 상앙: 상앙은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본래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공손앙公孫鞅이라고 불
렸는데, 진에서 성공한 후에 상商의 땅을 봉토로 받았으므로 상앙 혹은 상군商君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그를 상군으로 봉
했던 효공이 죽은 뒤 중신들에게 원한을 사서 극형에 처해졌다. 그는 여러 변법을 추진하여 진의 부국강병을 이루었고, 전국
을 통일하는 기틀을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여러 정책 중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조세 및 징병
의 단위로 삼는 것이었다.
12) 양염: 양염은 중국 당나라 덕종 때의 재상으로 양세법兩稅法을 시행하였다. 양세법은 토착/전입 여부나 연령 등을 따지지 않
고 현 거주지의 자산에 따라 과세한다는 특징이 있다. 토지의 사유를 국가가 허용한다는 의의가 있으며, 명대 일조편법이 시
행되기 전까지, 혹은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도 중국 조세 제도의 근간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13) 부족한지……매기는 것: 곧, 사람에 근거해 그들이 지닌 농토에 세를 매기는 양염의 방식을 말한다.
14) 다루왕: 백제 2대왕인 다루왕은 본래 온조왕의 둘째 아들로, AD10년(온조왕 28)에 태자가 되어, 28년(온조왕 46)에 사망한
온조왕을 이어 즉위하고, 77년(다루왕 50)에 사망하였다. 인품이 너그럽고 도타우며[寬厚] 위세와 명망[威望]이 있었던 것
으로 평가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3년(다루왕 6)에 남쪽의 주군州郡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볏논을 만들도록 하였다. 우
하영이 몇몇 중요한 대목에서 한성 백제 시기(BC18~AD475)의 기원을 언급하는 점은 『천일록』에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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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고려의 제도 麗制
고려 태조太祖는 신라 말에 농지 분배가 고르지 않고 부세가 무거우며 백성들이 생계를
잇기 어려웠던 것을 바로잡아, 즉위하자마자 십일什一의 세법을 써서 농지 1부負15) 당 나
락[租]을 3되[升]씩 내게 하였다.
경종景宗은 각품직전전시과各品職田田柴科를 처음 정하였다.16) 자삼紫衫, 단삼丹衫,
비삼裶衫, 녹삼綠衫 등 문무반文武班의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려오면서 주는 농토와 땔감
에 차등을 두었다.
목종穆宗은 전시18과로 고쳐 정했다.
문종文宗은 그 제도를 다시 고쳐 손실과 이익을 덜거나 더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또 개정하였다.17)
고려의 제도는 대체로 당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개간된 농지의 수량을 총괄하고 비옥
도에 따라 나누어, 문무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부병府兵과 한인閑人18)에 이르기까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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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부: 부는 삼국 시대 때 정해진 것으로 추정되는, 수확량을 기준으로 농지 면적을 세는 단위이다. 본래는 나락 한 줌인 파把를
기준으로 하여, 10파가 한 단에 해당하는 1속束이 되고, 10속이 한 짐에 해당하는 1부負가 되며, 100부가 1결結이 되었다.
성인 남성의 손가락 한 마디, 또는 중지의 가장 긴 마디의 평균 길이를 지指로 하여, 사방 64지인 정사각형의 면적을 1파라고
하므로, 1부는 그 100배의 면적이 된다. 그 실제 값을 어림하기 위해서는, 고려 문종 대 이래의 하전척下田尺을 세종대의 주
척으로 환산한 결과 1지척指尺이 1.941㎝였다는 계산 결과와, 현대 성인 남성 50명의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의 손바닥에
서 가까운 두 마디씩 여덟 마디의 평균치를 계산한 결과 한 마디의 길이가 1.95㎝였다는 계산치를 참조할 수 있다. 이러한 값
들을 토대로 제정 초기 사방 640지가 되는 1부의 면적은 154.3㎡로 계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토지 제도가 발전하면
서 토지 등급에 따라 1부의 면적에 차등을 두게 되었는데, 대한제국 때인1 902년 100㎡에 해당하는 1a를 1부로 일괄 계산
하도록 고쳐 제정되었다.
16) 경종은……정하였다: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는 관료와 국역부담자에 대해 과科, 즉 등급을 정해 식량을 마련할 농토인 전
지田地와 땔감을 마련할 임야인 시지柴地를 나누어주는 제도이다. 큰 흐름만을 보면, 976년(경종 1) 마련되어 998년(목종
1)에 일차로 개편되었고, 1076년(문종 30)에 마지막으로 크게 개편되었으니, 이 세 단계를 각기 시정전시과, 개정전시과, 경
정전시과라고 부른다. 『천일록』의 아래의 서술에서 목종과 문종이 제도를 고쳤다 함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17) 공양왕이 또 개정하였다: 고려의 전시과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조를 받을 권리[수조권收租權]를 갖고 있는 공전公田의 일부
에 대해, 그 권리를 관료들에게 나누어 주는 제도이다. 수조권이 분급된 토지[즉, 사전私田]는 직이나 역에 봉공하는 대가로
주어지므로, 이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국가에 반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습되는 사전들이 많
아졌고, 아예 공전으로도, 사전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토지도 늘어갔다. 이는 결국 수조지에 대한 불법적인 침탈과 사유지 확
대·농장화로 인해 전시과의 토지 제도로서의 기능이 쇠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문종 이후 전시과 제도에 대한 정비가 없
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한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은 과전법을 세워 이를 개혁하려 하였으니, 본문에서 ‘또 개정하였다’
함은 이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과전법은 전시과의 본래 취지로 돌아가려는 정신 아래 제정되었지만, 땔감을 마련하는 시지는
지급하지 않았다. 또 개인이나 지방 관아가 수조권을 지닌 사전은 경기 지역에만 두었고, 나머지 지역의 토지는 공전으로서
국가가 수조권을 지니고 있었다.
18) 부병과 한인: 부병府兵이란 부병제 하의 병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병제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념 아래 중국 서위西魏에
서 550년부터 실시되어, 북주北周와 수隋, 당唐으로 이어지며 제도로서 발전하였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도입되었다. 건
강한 성인 장정이 농사철에는 각자 일을 하다가 겨울철에 소집되어 군사 훈련을 받고, 1, 2년에 한 번 한두 달 간 수도 방위에
나서며, 평생에 한 번은 변방으로 나가 국경 방위를 맡아야 했다. 한인閑人은 관인官人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관
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지급되는 전시과는 직무 수행에 따른 대가가 아니라, 신분 지위에 따른 우
대 조치로서 일종의 품위 유지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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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를 받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죽으면 모두 아울러 반납하였다. 오직 부병만은 20살에 처
음 받아서 60살에 돌려주며,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는 구분전口分田을 주었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이래 권세 있는 간신들이 나라를 멋대로 주무르고, 날로 심하게 소
유지를 불려가니, 전시과田柴科는 그 폐해로 사전私田이 되어갔다. 조준趙浚(1346·
1405)19) 무리가 누차 건의하여 이를 혁파하고자 하였으나, 이색李穡은 적극 유지하려 하
였다. 조준과 의논을 같이했던 것은 정도전鄭道傳, 윤소종尹紹宗의 무리였고, 이색과 의
견을 같이 하던 것은 권근權近, 류백유柳伯濡의 무리였다.
공양왕恭讓王 원년에 도평의사都評議使 조준趙浚이 상소하기를, “경기의 땅은 서울
에 살며 임금을 모시고 지키는 사람들의 농토로 주십시오. 이는 사족을 우대하려는 것이
니, 곧 벼슬하는 사람에게 대대로 녹을 주었던 문왕의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 외 각 도는
군전軍田을 지급하는 것으로 그치십시오. 이는 군사를 보살피려는 것이니, 곧 군사를 뽑
으며 밭을 내렸던 선대 임금들의 좋은 법입니다. 지금 6도에서 개간된 농지의 수량은 50
만 결도 되지 않지만, 위로 바치는 것은 풍족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10만 결을
우창右倉에 속하게 하고, 3만 결은 사고四庫에 속하게 하십시오.20) 관리의 봉급 역시 후하
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10만 결을 좌창左倉21)에 속하게 하십시오. 조정에서 벼
슬하는 신하는 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로 경기 지역의 농토 10만 결을 이들에게 떼
어주십시오[折給]. 그 나머지는 겨우 17만 결에 그칠 따름입니다. 6도의 군사들과 진津·
원院·역·사寺 등 국가 기간 시설의 향리鄕吏들이 공무 여행 중인 사객使客을 접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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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조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명중明仲이며 호는 우재吁齋, 송당松堂이다. 이성계를 추대한 공으로 부원군에 봉
해졌다. 과전법을 실시하여 토지 제도를 정비했으며, 하륜 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했고, 저서에 『송당집松堂
集』이 있다.
20) 우창은……하십시오: 우창右倉이란 신라 시대에는 미곡과 병기를 보관하는 창고의 이름이었는데, 고려 시대에는 국가 제사
나 사신 접대, 흉년 진휼 등 국용國用으로 쓸 곡물을 맡아 관리하는 관아의 이름이 되었다. 문종 때 처음 생겨서, 1308년(충렬
왕 34)에 풍저창豊儲倉으로 이름을 고쳤다. 사고四庫는 왕실의 내부 재정(현재의 개념으로 보자면 왕실의 사적 소용)을 담당
하기 위해 설치된 관아로, 4개의 창고를 가리킨다.
21) 좌창左倉: 좌창 역시 신라 시대에는 우창과 마찬가지로 미곡과 병기를 보관하는 창고의 이름이었는데, 고려 시대에 들어 관
료의 녹봉 지급을 담당하는 관아의 이름이 되었다. 역시 문종 때인 1076년의 일이다. 이후 우창이 풍저창으로 이름을 바꾸던
1308년, 좌창도 광흥창廣興倉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에 좌우창은 백성 구휼 목적의 제민창濟民倉으로 되어, 좌창
은 순천에, 우창은 나주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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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의 녹봉을 지급하는 용도로 하되, 이조차 오히려 부족하니 군수에 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양왕 2년에 시가지市街地의 불로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의 토지대장田籍이 소실되었
다. 수일 동안 불이 꺼지지 않자 왕은 눈물을 흘리며, “선대 임금께서 전한 공사전公私田
의 법이 과인에 이르러 근거를 잃는구나. 안타깝도다”!라고 하였다.
늠전廩田은 성종成宗 때에 정한 것으로, 주州·부府·군郡·현縣의 관館과 역驛에 딸
린 공수전公須田·저전低田·장전長田·공수시전公須柴田인데, 이 화재 때에 그 대장
이 모두 불타 없어졌다.
우하영의 천일록 --토지제도 田制 중에서....
노력